[증언] 어느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이야기 – 1

어느 평범한 사람의 비범한 이야기①

 

(편집자)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일까? 주어지는 것일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말을 할 수 있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북한에서 평범하게 태어난 지성호씨. 그가 사회적,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며 운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역경을 딛고 이 사회에서 자리매김을 하는 지성호씨의 북한에서, 그리고 탈북해서 한국까지의 긴 여정을 이번호부터 담는다.

저는 북한 회령에 있는 학포 탄광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주민들도 1500명 이상이 되는 큰 탄광 마을이었습니다. 탄광이라고 하면 북한에서도 제일 험한 일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광 마을 사람들은 계층으로 봐도 제일 낮은 층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탄광 일은 험했기 때문에 탄광에서 일을 하다 장애를 얻는 일들은 비일비재 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그런 환경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근로자들 대부분은 국군포로병이거나 그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났을 때는 탄광에서 일하는 국군포로병들은 60세가 훨씬 넘었기 때문에 대부분 은퇴한 시기였고, 주로 그 자손들이 계속 탄광 일을 이어서 하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는 국군포로병들이 대놓고 남한으로 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자랑은 많이 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말이 자기가 살던 전라도 어느 지역에 가면 쌀이 굉장히 좋은데, 거기서 밥을 해 먹으면 물에다 숟가락을 저어야지 밥풀이 떨어질 정도로 풀기가 많다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그 밥을 먹는 부유한 미래를 상상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옥수수밥도 먹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항상 고향 자랑을 하던 국군포로병이 탈북을 했다 중국에서 북송당해 왔습니다. 탈북하기 전에 집에다 편지를 써두고 갔는데, 아들이 그것을 보고 신고를 한 것입니다. 편지에는 ‘나는 남조선으로 간다. 내가 먼저 넘어가서 너희들을 데리러 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라.’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들이 보고 바로 보위부에 일러바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얼마 가지도 못하고, 거의 두만강을 넘어가자마자 잡혔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중국에서 그냥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때가 200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한창 많은 북한 사람들이 탈북을 할 때 였고, 저도 2-3년 후 탈북했습니다.

탄광 마을이다 보니 팔이나 손가락이 절단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는 장애인이라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런 대우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심했던 것 같습니다. 중노동을 할 수 없는 장애 급수가 높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분들도 장애를 인정받지 못하고 중노동을 해야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일하시던 공장에도 장애인이 있었지만 철을 다루는 중노동을 똑같이 다 했습니다. 북한은 분명 장애인에 대한 시스템을 갖추어져 있습니다. 8시간 일 할 수 있는 사람, 6시간 일 할 수 있는 사람, 4시간 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져있기는 했지만,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에도 육손이가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엄지손가락이 두 개였습니다. 이런 친구가 반에 어쩌다 한 명 있으면, 친구들이 많이 놀렸습니다. 돌을 던지기도 했고, 부끄럽지만 저도 함께 놀리곤 했습니다. 제가 나중에 장애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는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정말 먹고 살기 어려웠습니다. 무엇이든지 죽도록 노력했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주로 석탄을 팔아서 먹고 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 거의 석탄을 팔아서 먹고 살았습니다. 석탄은 북한에서 절대 없어서 안 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석탄으로 불을 지펴서 가마를 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 당국에서는 석탄을 따로 배급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같은 탄광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가지고 나와서 시내 장마당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것이 저희들의 유일한 소득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집 근처가 큰 탄광임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석탄이 매장되어 있음에도 석탄을 얻기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석탄을 캐기 위해서는 전기가 있어야 되는데, 전기 공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석탄이 모두 물에 잠겨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22호 관리소에서 나오는 석탄을 훔쳐서 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이런 일을 했습니다. 달리는 열차가 시내까지 가는 도중 몰래 열차에 매달려 갈탄이나 석탄 덩어리를 골라 훔쳤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13살부터 학교를 제대로 나가지 않고 석탄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친구들도 굶어 죽고, 일하러 가버리고, 탈북하고 등등 제대로 학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역시 잘 먹지 못하니 힘이 없고, 가르쳐줄 의욕도 없었습니다. 학교에 나간 친구들도 배고프니 그냥 누워있곤 했습니다. 학교에 나가도 배우지 못하고 할 일 없이 있다 오는 것이 었지요. 그래서 저처럼 대부분 학교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탄광에서 일하지 않고, 탄광에서 사용되는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주로 철을 다루는 일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는 부품을 깎거나 쇠를 녹이는 일 등이 었습니다. 정말 힘들게 일하셨지만, 그렇게 일해서 받은 임금은 보잘 것 없었습니다. 그 임금으로는 빵 하나도 사먹기 힘들 만큼 가치가 없었습니다. 식량배급도 안 주는 상황이 었습니다. 게다가 아버지는 말단 가부 역할을 맡고 계시다 보니 다른 사람들처럼 옥수수를 훔친다거나, 회사를 나가지 않고 석탄을 구하러 다니는 일도 하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계속)

※ 『북한인권』 196호. 2015년 2. pp. 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