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세 번의 강을 넘어 자유의 품으로

[증언]

세 번의 강을 넘어 자유의 품으로

(편집자)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최진화(가명)씨는 부모님과 5남매 중 둘째로,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다. 북한에서 식량난으로 사는 것이 힘들어지자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된다는 생각에 중국에 가면 돈을 벌수 있다는 말을 듣고, 중국으로 떠났는데, 그것이 그녀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두 번 강제 북송당했고, 세 번 강을 넘었다. 두 번의 강제북송으로 보위부감옥과 증산교화소에서 모진 고초를 당해 아직도 몸이 성한 곳이 없다. 한국에 먼저 도착한 남동생을 통해 2012년 가을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으로 최진화씨와 아들, 그리고 여동생과 그녀의 딸, 모두 자유의 땅 한국에 올 수 있었고, 지금은 아들을 잘 키워 감사에 보답하고 싶다고 전했다. 그녀가 자유를 찾기까지의 삶을 뉴스레터 통권 200호(2015년 6월)~203호(2015년 9월)에 게재되었다.

생계를 위해 장사에 나서다

나는 함북에서 넉넉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가정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고등중학교를 마친 후 군대를 가고 싶었지만 집안이 뒷받침 해주지 못해 군대의 꿈을 접고 농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농사일만으로는 일곱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해 장사를 시작하였다. 주로 식량을 싸게 팔 때 많이 사 장마당에서 비싸게 파는 식으로 이윤을 남겨 가족을 부양하였다. 많이 팔 때는 달구지꾼에게 삯을 주고 일 톤에 가까운 양을 내다 팔기도 하였다.

장사를 하며 지내던 중 내가 22살 때 좋은 선자리가 많이 들어왔으나 동생들을 때문에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동생을 많이 낳은 부모님들께 심술을 부리기도 하였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셨고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시고 술주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였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형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해주겠다는 소식을 듣고 고마운 마음에 내 자신이 그 남자에게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동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결혼3일 만에 친정에 왔을 때 시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동네에서는 결혼을 했다가 돌아온 여자라며 소문이 났고, 장녀 혹은 장남이 잘 되어야 밑에 동생들도 잘 된다는 속설을 믿으셨던 부모님의 속은 날이 갈수록 상하셨다.

5년 후 27살이 되던 해, 중매로 두 번째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맞는 좋은 배우자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두 번째 남편은 본인의 기분대로 행동하고 술을 마시면 폭군으로 변하는 두 얼굴의 남자였다. 두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술을 마시며 돌변하는 남편을 보며 나와 아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첫 결혼에 실패했기 때문에 두 번째 결혼에서는 잘 사는 모습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싶었지만 이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생각 때문에 많이 망설였지만 이러다가는 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 6개월 된 아들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다. 친정으로 돌아간 후 얼마 되지 않아 300여명의 아사자를 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먹지 못해 젖이 돌지 않아 아이에게 젖을 물린다는 생각은 사치 그 자체였다. 젖 대신 통 옥수수를 갈아 미음처럼 만들어 아이를 먹였지만 소화불량이 심해져 아이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다행히 아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아무 탈 없이 회복하게 되었다.

식량난으로 중국으로 가다

식량난을 견디려고 장사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에 뛰어들었지만 가난은 계속되어 아이까지 있는 저는 식구들의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행을 선택하였다. 처음에는 막무가내로 중국행을 선택하였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니 불분명한 미래에 내 목숨을 거느니 좋은 남편감에게 팔려가게 되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도와줄 것 이라 생각하고 팔려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가족의 미래를 위하여 슬프지만 아이를 북한에 두고 2002년 10월 말 중국으로 건너가기 위해 강을 건넜다. 그러나 도강하는 북한여성들을 사기위해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을 보니 도저히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 사정사정을 해 일자리를 하나 얻게 되었다. 운 좋게도 마른 고사리를 한국으로 수출하는 기업 사장을 만나게 되어 공장에서 안전을 보장받고 한족 사이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행히 남들보다 손이 빨라 5원, 10원 씩 조금 더 벌게되어 석 달 후 중국 돈 천원을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중국에서 북으로 끌려가다

북의 집으로 돈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일을 했는데, 2003년 어느 날 방을 치우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에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자 몇 사람이 우르르 들어와 신분증을 보자고 하였다. 그제서야 중국에서 호구 검열이 시작된 것을 알게 되었다. 신분증이 없는 나는 그 사람들에 의해 용정파출소로 잡혀가고 그 후 북한의 회령교두를 지나 회령보위부로 끌려갔다.

회령보위부로 옮겨진 후 여자, 남자 각각 다섯 명 씩 타자수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 몸 검사를 하게 되었다. 타자수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반말을 하며 옷을 모두 벗게 하고는 가슴 밑에 반창고로 돈을 붙여놓은 사람이 있을까 두 손을 번쩍 들게 하였다. 두 손 뿐만 아니라 머리도 풀고, 발바닥도 들어 보이고,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려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켰다. 다른 수감자들은 급할 경우 돈을 비닐로 싸 자궁 안에 넣거나 먹기도 한다고 하였다. 자궁 안에 넣은 경우 앉았다 일어서기를 하며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사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틀 후, 또 이틀 후 다시 몸 검사를 반복하며 안전원들은 사람들이 숨겨놓은 모든 돈들을 깡그리 찾아내고야 말았다.

회령보위부는 사람들 사이 약 1m의 간격을 두고 앉혀 움직임을 감시하였다. 회령보위부에서 식사로는 술 찌꺼기가 나왔는데 중국에서 쌀밥을 먹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지 않으려 했지만 전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얼마 전 이곳에 들어왔던 여자들이 있는데 그 여자들이 식사로 나온 술 찌꺼기를 먹지 못해 그들이 지내던 방안 변기에 그것을 부었는데 그것이 보위부 보안원에게 적발되었다. 보안원은 누가 버렸는지 추궁하기 시작했고 5명의 여자들을 색출해내었다. 그 여자들에게 변기에 버려진 술 찌꺼기를 퍼낸 후 그것을 먹으라고 명령하였다. 겁이 난 나머지 세 명은 그것을 먹었고 그 중 한 할머니가 무릎을 꿇으며 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한 자기 탓이라며 변기에서 꺼낸 오물과도 다름없는 이것을 사람이 먹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냐며 한번만 용서 해달라고 빌어 다행히 다른 사람들은 먹지 않고 다시 변기로 버려졌다. 대신 오물을 먹지 않은 두 명은 매우 심한 구타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같은 방 안에 있던 사람은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한다고 충고해 주었다.

회령보위부 안에서는 양반다리로 앉은 후 팔을 다리에 45도 각도로 대고 머리도 45도 각도로 숙이고 있어야 했다. 이러한 자세로 새벽 5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이 자세로 지내다 보내 복숭아 뼈가 썩고 말았다. 그래도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긴 하였지만 한국기도가 아닌 중국 불법체류로 잡혀있었던 것이라 심한 문초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김정일의 명령 아래 중국 체류자들에게 큰 벌이 내려지지는 않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후 청진에 있는 집결소로 보내졌다. 중국 돈 300원 짜리 시계를 안전원에게 주면 편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시계를 주었고 통나무를 끄는 일 대신 출석을 부르는 일을 하게 되었다. 며칠 후 다행히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큰 고생 없이 집결소를 나오게 되었다.

다시 도강, 한국으로, 다시 중국공안에 잡히다

집결소를 나와 집으로 돌아가 보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앞으로 어떻게 가족을 부양할 것인가... 걱정 때문에 눈앞이 캄캄하였다. 다시 중국으로 나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한 두 달 몸을 추스른 후 2004년 다시 한 번 더 강을 건너게 되었다.

중국에서 지내던 중 우연치 않게 먼저 한국에서 정착한 동생과 연결이 되었다. 동생이 한국행을 권유했지만 북한에 남아있던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동생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들에게 까지 피해가 가니 누나가 먼저 들어오고 아들을 데려오는 방법을 권유했고 동생의 권유에 따라 내가 먼저 내몽골을 통해 한국으로 들어오기로 결정하였다.

중국 연길에서 브로커를 만나 먼저 모여 있던 탈북자들과 함께 장춘으로 이동하였다. 모두 8명이었다. 장춘에서 하루를 꼬박 달려 몽골 국경 근처에서 지도를 주며 다섯 칸으로 된 철조망은 중국철조망이니 세 칸으로 된 몽골철조망을 찾아 한 시간 동안 북두칠성의 우측으로 걸으라고 하였다. 브로커는 운동화, 물 그리고 꽈배기만을 챙기게 하고 저녁 8시에 우리 일행에게 중국 철조망을 넘어 몽골 철조망을 찾아 밤에만 이동하라고 알려주고는 떠났다. 낮에는 탐지기가 돌아 이동이 불가능하였고, 밤에만 이동을 할 수 있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었고, 며칠 동안 걸었지만, 같은 곳으로 계속 돌아오곤 하였다. 낮에는 50cm가 조금 넘는 풀숲으로 들어가 엎드려 지낼 수밖에 없었다.

3일을 헤맨 후 음식과 물이 떨어지고 비까지 내려 죽을 것 같아 중국에서 도움을 요청하기로 하고 다시 중국행을 결심하였다. 다행히 일행 중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받아 한 마을에 도착하였다. 어느 집으로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는데, 우리일행의 행색과 중국어를 못하는 것을 보고 공안에게 신고를 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중간에 기회가 되면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감옥에서 우리가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모든 일행이 단결해서 단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중국 공안은 일행에게 먹어야지 한국을 갈 수 있다고 구슬리려 했지만 나는 우리 일행에게 한국에 가기 위해서는 끝까지 단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행 중 8살과 10살 남자아이들도 있었는데 그 아이들까지 엄마 말을 듣고 단식에 참여했다. 단식 7일 째 벽에 연하게 ‘중국 떼놈들은 믿지 말라. 단식 11일 째 실패.’라고 적힌 글귀를 보며 단식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포기하였다. 밥은 먹고, 이동할 때 길에 누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호소해 보기로 방법을 바꾸기로 하였다. 

다음 날 공안들이 한국으로 보내주겠다고 하며 짐을 챙기라고 하였다. 오랜 시간 이동을 하며 양떼가 보이는 것을 보고 내몽골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 모두가 기뻐하였다. 한 시간 넘게 이동 후 기자회견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고 그 기회에 한국에서 온 기자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그들에게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조그마한 방에서 있는 도중 중국 공안이 한국 가기 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 물었는데 그 질문에 일행 중 한 명이 김일성과 김정일이 자기들 배 채우는데 만 급급해 우리 굶어죽는 것은 생각도 안 한다며 욕을 하였다. 모두가 한국으로 가는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이들을 모두 도문 변방으로 보내졌다. 중국 공안들은 도문 변방으로 탈북자들을 보내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편리를 위해 탈북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동안 죽지 않게 어르고 달래며 밥을 먹였던 것이었다. 도문 변방으로 이동한 후 그때서야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도문 변방 감옥에서 돈 검사 후 우리는 한국기도로 14호에 두 달 동안 수용되었다. 그 후 7호로 옮겨졌고 그 동안 자주 공안에게 불려 나갔다. 이런 모습을 본 일행들은 후에 북한으로 넘어갔을 때 안전원들에게 자신이 성매매/성폭력을 당한 것이라고 이야기가 와전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북한에서 살던 이야기들을 묻고 북한에서 김정일이 한국기도는 다 총살이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행을 조사하던 사람은 나를 불러내며 브로커를 잡을 때 까지 갇혀있어야 하는데 나와서 이야기를 하면 좋지 않으냐며 자주 불러내곤 하였다. 이 사실을 몰랐던 일행은 북한 안전원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로 인해 북한에서 중국사람들에게 몸이나 팔고 다닌 여자라며 많이 취조 받기도 하였다. 도문 변방에서는 북한처럼 고문은 없었다. 오히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을 때 대다수의 공안들이 춤과 노래가 끝날 때 까지 감옥 방 밖에서 기다려주곤 하였다.

다시 북한으로

도문 변방감옥에 수감 된 후 11월 24일 북한 온성보위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후 개인이 가지고 있던 귀중품들은 다 도난당하였고 7평 남짓한 방에 33여명이 한 달 동안 지냈다. 식사로는 퍼진 국수 3, 4올이나 되는지... 반달 모양 무 두 조각 들어있는 국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를 집합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미 일행 중 두 아들을 데리고 왔던 여자는 폭행을 당해 풀색 바지가 피로 물들어 있을 정도로 폭행을 당한 상태였다. 이 날 보위부 종합 지도원이 일행에게 묻는 말에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맞을 것이라고 겁을 주며 문초를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에게 누가 널 한국으로 끌려했냐고 물어보는데 다행히도 한국에 있는 동생이 끌려했다 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폭행을 당해도 돈을 벌기위해 중국에 갔다가 브로커가 자신을 한국으로 팔려했던 사실을 몰랐다고 잡아뗐다. 며칠 동안 구둣발로 밟히는 등 폭행을 당했지만 여기서 살아남아야지 가족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끝까지 버텼다. 며칠 동안 폭행들 당하면서도 사실이 나오지 않자 보위부에서 다시 조사를 시작하였다. 조사를 하며 아들이 갑상선 병이 있어 중국으로 약을 사러 나갔는데 환자를 보지 않으면 약을 지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이왕 힘들게 나온 김에 돈을 벌고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려 했다라고 말하였다. 일자리를 소개해 달라고 하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으로 팔려갔고 장춘에 도착하였을 때 한국으로 팔려간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였다. 장춘에서 북한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중간에 잡힐 것 같아 6개월 만에 한국 신분증이 나온다고 이야기를 들었으니 신분증을 받고 다시 북한으로 와 자수하려고 했었다고 이야기 하였다. 조사원들은 믿지 않고 재조사를 하겠다고 하였지만 나는 방심하지 않고 계속 시치미를 떼고 시종일관 같은 말만 되풀이 했다.

다음 날 새로운 조사원이 들어와 그만 고생하고 허심탄회하게 말하고 나가라고 하였다. 새로운 조사원에게 믿어 달라 호소를 하고 동 변방에서 어떤 음식을 주고, 중국에서는 무엇을 먹나, 성인비디오를 본 적이 있는가, 한국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가 등을 물어봤다. 조사원에게는 돈을 버느라 바빠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인 비디오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한국드라마라고 눈이 들어 왔겠는가 라며 제발 믿어달라고 호소를 하였다. 다행이 새로운 조사원은 나의 말을 믿었고 회령보위부에서 나와 구류장에서 7달 반 동안 예심을 받게 되었다.

7평에 사람이 꽉 차게 있었는데 몇 백 몇 천 마리의 벼룩과 이에게 물리며 생활하였다. 구류장에 들어간 다음에야 어머니가 알게 되셔서 매일같이 쌀밥에 찰떡, 계란지짐 등을 올려 면식을 날라다 주셔서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 예심 후 재판을 받고 문건이 검찰서로 넘어가서 처음에는 억울하게 모르고 한국행을 하였다 하여 노동단련대 2년 반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는 한국행임을 알고도 돌아서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 3년 형을 선고 받고 함남도 오로에 가야하는 것을 운이 나쁘게 평남도 개천 1교화소로 갔다가 평남도 증산으로 이동하였다. 개천 1교화소는 권총가죽지갑 등 공업품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고압전기로 가루를 내곤 하였다. 평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시체를 묻을 장소가 없어 주민들에게는 전기 공급을 막지만 시체를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 고압전기를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었다.

증산교화소로 가다

개천 1교화소에서 일주일 후 평남도 증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빨간 벽돌에 검은 글씨로 ‘도주를 하지 말라.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중산에서는 모든 죄수들이 삭발을 한 후 흰 수건을 써야 했었다.

1과 2반에 속한 나는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찍어주는 단지밥을 먹어야 했었다. 어머니와도 연락이 끊겨 오랜 시간동안 면식을 먹지 못하고 단지를 찍어주는 사람은 본인과 친한 사람에게는 꽉꽉 눌러 찍어주고 아닌 사람들에게는 대충 찍어 주었다. 이런 단지와 모래알이 어적거리는 국이 식사의 전부였다.

이런 힘들 나날이 지속되던 중, 발가락 마디마디에서 진물이 나는 까치 무좀이 걸려 발을 낫으로 찍으면 물속에 들어가 고통 받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낫으로 찍으려 했으나 그날 놀랍게도 어머니가 펑펑이 가루에 엿을 넣어 가지고 면회를 오셔서 그런 생각은 접게 되었다.

한 번은 단독(뼈가 곪는 것)이 걸려 뼈를 잘라야 한다고 했었다. 다행이 감방장이 페니실린이 있어 약을 맞고, 그 비용은 어머니가 면식을 들고 오면서 갚는 방법으로 해 상태는 호전되었다. 면회를 오시는데 드는 비용은 한 가정이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2~30만원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후 한 달에 두 번씩 보름이 걸려 면회를 오셨다. 내가 중국에 있으면서 번 돈을 아껴 인편으로 보낸 돈을 조금씩 모으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면식을 나르는데 모두 쓰셨다. 중국에서의 고생이 다시 나를 살리게 된 것이다.

개천1교화소와는 달리 증산 감옥에서는 산에 시체위에 시체를 쌓아 묻었다. 산지기는 시체를 묻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시체가 썩어 물을 오염시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물을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개천1교화소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해 담당이 싸온 도시락을 어디에 두는지 봐 뒀다가 훔쳐 먹기도 하였다. 만약 훔쳐 먹는 것이 적발이 되면 죽을 때 까지 발길질을 당하는 등 폭행을 당하였지만 폭행당하면서도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배가 고파 도둑질을 하다 들어온 아이들이 훔친 생강냉이를 같이 먹고 통 강냉이를 갈아 곽으로 퍼 찍은 단지밥을 먹으며 3년을 버텨내, 2004년도 보위부로 시작하여 악질로 알려진 증산 감옥을 마지막으로 2008년 1월 시체와도 같은 몰골로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아들과 함께 세 번째 강을 넘다

세월이 지났건만,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옛날 그대로 희망이 없어 북한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해 탈북하기로 결심하고 여동생과 아들을 데리고 2010년 겨울,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에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넌 후 아들 때문에 팔려가지 않고 여동생이 먼저 한족에게 팔려갔다. 내가 너무 팔리지 않자 브로커는 나와 아들을 따로 팔고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 만나게 하려고 하였으나 아들이 그 사실을 듣고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하여 나도 마음을 다시 잡고 아들과 계속 함께 있었다.

한참을 팔리지 않고 있다가 아들과 함께 사준다던 중국인에게 가게 되었으나 너무나도 한심한 상대에게 팔린 것 같아 서러움과 원망이 쌓였으나 아들도 받아주었으니 잘 살아보려 했다. 저녁이 되면 옷을 더 껴입고 아들 옆으로 가 밤을 지새우곤 하였다. 그러나 한족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와 싸우면 잠을 자던 아들이 깨어나 싸움을 말리거나 아들도 함께 가구를 부서트릴 정도로 격하게 싸우기도 하였다. 이를 보던 집식구들은 브로커에게 나와 아들을 되팔았고, 브로커는 나를 술집에 팔고, 아들은 어떤집 양아들로 입양시키겠다고 협박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한족 브로커 옆에서 통역을 해주던 여자는 내가 중국 브로커와 하룻밤을 보내야 다른 사람에게 팔릴 수 있다고 하며 잠자리를 독촉하였다. 처음에는 토하는 척 하며 넘어가고, 두 번째에는 화장실에서 찾은 다른 사람의 생리대를 가지고 생리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해 두 번째에도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다. 그 후 베이징 대학교를 졸업한 이혼남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이 사람과 살면서 좋은 집에서 안전하게 살았으나 같이 살던 한족 아이가 내 아들에게 아무리 잘 나봤자 내가 경찰에 신고하면 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야 된다며 놀렸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아들 때문이라도 빨리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였으나 항상 여동생의 행방을 모르는 것이 마음에 걸렸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동생의 행방을 알면 내가 도망 갈 것이라 생각해 여동생의 행방을 찾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여동생이 결혼한 한족사이 아이를 가져야지만 연락처를 알려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여동생도 나를 찾아 헤매었고, 시어머니가 근처에 살던 브로커를 장마당에서 만나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어 연결되었다. 여동생의 행방을 알기 전 한국에 먼저 정착한 남동생과 2011년에 연락이 되자, 동생은 나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먼저 한국으로 오라고 하였으나 다행히 팔려간 여동생과 다시 연결되어 함께 한국으로 가기로 하고, 모두가 이동할 수 있었다.

한국을 향해

우리 일행이 중국에서 출발하기 전 한국에 먼저 정착한 남동생이 북한인권시민연합과 연결이 되었다고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이를 믿고 중국을 떠나 라오스와 태국을 통해 자유의 땅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중국에서 라오스로 넘어갈 때 동생은 태어난 지 이제 6달이 된 아기를 업고, 나와 아들은 짐을 어깨에 메고 손에 들고 산길을 걸었다. 산을 넘던 중 내 다리가 마비가 되어 약을 먹고 또 먹었으나, 그 걷는 속도가 계속 느려져 아들이 부축하다 안되면 업고 걷기를 반복하여 6시간 걸리는 길을 12시간 걸려 라오스로 이동할 수 있었다. 중국을 벗어나 라오스에 왔을 때도 무사하다는 생각보다는 살아서 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 미소도 잊은 채 하루라도 빨리 라오스를 벋어나고 싶었다. 그 날로 태국에 도착했는데 하늘을 보며 공기를 마시며 무사히 살아 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이렇게 사선을 넘나드는 여정이 지난다음 2012년 겨울, 꿈에도 그리던 대한민국에 도착하였다. 처음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도착하니 깨끗하다는 것 보다는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이 모두 꿈만 같았다. 대한민국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국정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국정원에서 얼마나 있는지가 가장 큰 궁금증이었으나 하나원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하니 국정원에 있을 때가 좋았구나 싶을 때도 있다. 

한국에 와서 당당하게 살고 싶었으나 처음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잘 되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북과 한국은 너무도 많은 차이가 나고, 갖춘 능력도 없고, 문화도 잘 맞지 않았고, 취직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도 할 만한 일은 그저 식당뿐이었다. 갖춘 능력도 없고 북에서 교화소, 보위부 감옥에서 맞은 후유증으로 병원도 많이 매일 다녀야 해서 하루하루가 힘듬의 연속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일한만큼 대가가 지불되고 자신의 꿈을 키울 수도 있고, 좋은 분들도 많아서 한국에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제들이 함께 있고, 아들이 고등학교를 재미나게 다니고, 운동선수의 꿈을 갖고 잘 자라주기에 너무 감사하고 아들을 통해 그 감사에 보답하고자 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