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일이야기 – 1


성일이야기 ①

편집자 주 : ‘성일이야기’는 2011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동포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일 씨의 북한에서의 삶과 경험, 탈북동기 등을 중점적으로 담아 2회에 걸쳐 연재된다.

 

북한에서 탈출하다

나는 북한에서 40년을 살았다. 11년 동안 기본 교육을 받고, 전문적으로 군사를 배우는 학교에서 2년간 공부를 했다. 그리고 1988년부터 2007년까지 군 복무를 했다. 2011년 3월 한국에 입국하였고, 하나원 생활을 모두 마친 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대한민국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북한에 있을 때 누리던 직위와 사회적 배경은 나쁘지 않았다. 북한에서 충분히 잘살 수 있었음에도 탈북하게 된 이유는 바로 ‘자유’와 ‘권리’ 때문이다. 북한 정권은 주민을 너무 무지렁이처럼 생각했다. 김정일 정권이 국방에 투자하는 돈의 단 1%만 주민에게 투자했어도 그렇게 많은 이들이 굶어 죽진 않았을 것이다. 북한의 정치상황만 괜찮았다면,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누리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에서 살았을 것 같다. 그래도 내 고향이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역전, 길가에 시체들이 널려 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시체를 처리할 관도 만들 수 없었을 정도이다. 그래서 보통 땅을 파고 묻는데, 특히 고난의 행군이라고 일컫는 때에 이런 기근이 가장 극심했다. 그때 죽은 사람 중 많은 이들이 노약자와 어린이들이었고, 특히 국가가 하라는 대로 모든 것을 협조한 고지식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북한정권이 주민을 너무 무지렁이처럼 생각하는데 반발심이 일었던 것이 탈북의 첫 번째 동기였다.

두 번째 동기는 북한의 화폐개혁이다. 북한이 화폐개혁을 했을 때 북한인민들이 피땀 흘려가며 한 푼 두 푼 모아온 재산들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 버렸다. 그 당시 각 군대, 보안기관, 보위부, 사법기관이 다 비상경계 체제에 들어갔는데, 주민은 바로 직전까지 화폐개혁을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돈을 휴짓조각으로 날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책임자들 몇 명이 모의해서 진행할 일이라며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려 총살 한 후, 자신은 입을 닦았다. 한 국가에서 화폐가 지니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는 김정일의 거짓말을 북한 주민이 모를 리 없었다. 이렇게 화폐개혁에 대한 분통함이 내가 탈북을 하게 된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탈북을 결심한 후, 3년 동안 기도하면서 철저히 준비했다. 덕분에 나는 부모님과 누이, 매부, 조카, 우리 식구들까지, 직계 가족을 모두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탈북할 때는 두 달을 기한으로 두고 6조로 나누어 제각기 강을 넘었다. 연길에서 아버지와 아이를 데리고 8일을 달려서 곤명에 도착했고, 브로커 집에서 1박 2일 있다가 또다시 강을 넘어 산속에서 17시간을 내리 걸었다. 매콩강에서 쪽배를 타고 태국으로 들어갔고, 그곳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탈북은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사는 것이고 실패하면 죽는 것이다. 그 과정 중에 탈북자들은 정말 많은 상처를 안고 한국에 입국하게 된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탈북했는데, ‘괜히 한국에 온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일을 하기 위해 겨레얼 주식회사를 통해 수익을 마련해 보려고 했는데, 일하면서 너무나 억울하고 분한 일을 많이 당했다. 석연찮은 이유로 소송까지 당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사회에 취약계층인 탈북자들을 속이고 이용해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큰 좌절감을 느꼈다. 차라리 미국 같은 곳에 가는 것이 모멸감이 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북한의 경제상황

북한에서는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다 빠지면서 갓난아기 때 나는 머리가 다시 나온다. 목은 닭 모가지 같아서 한 손에 잡힐 정도인데, 뼈에 가죽만 입혀놓은 모양이다. 비듬도 많이 있다. 비듬이란 것은 세포가 죽어서 떨어지는 것인데 세포가 그만큼 계속 죽는다는 이야기다. 항문은 다 열린 상태가 되어 뭐든지 먹기만 하면 바로 밑으로 쏟아내게 된다. 특히 여자들은 영양실조에 걸리면 머리가 다 서고, 가슴이 없어지고, 생리를 못하게 된다. 북한군에선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많이 죽었는데, 영양실조 걸린 여자를 보면 정말 무서울 정도다.

북한에서 사람이 영양회복 하는 데는, 여자의 젖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졌다. 하도 영양실조가 많이 걸려서 죽어가니까 여자가 젖을 먹여서 군인을 살리고, 그 젖을 못 먹은 갓난아이는 그냥 죽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남한에서 들여온 쌀은 당연히 군대에서 다 먹고 주민은 하나도 받지 못한다. 나도 먹어보지 못했고, 남한에서 들여보낸 의약품들 또한 군대에서 다 쓰이게 된다. 이렇게 북한에 쌀을 보내고 물자를 보내는 것은 모두 북한의 권력유지에 사용되는데, 식량과 의약품 외에 남한에서 보내준 TV 또한 북한군의 정신교육에 이용된다.

하지만 정권으로 지원이 들어간 물건들을 이제 시장에서 다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거의 무너졌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연결해 이해하면 쉽다. 2005년쯤부터는 땅의 등급에 따라 토지세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는 개인이 땅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즉 소유는 국가 소유지만 사용권은 주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모습을 보이는 것이 물론 잘살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북한 장사꾼들은 ‘작년이 다르고 올해가 다르다, 90년대 고난의 행군보다 지금이 더 어렵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요즘 북한의 시장 상황도 많이 어렵다. 그전에는 장사가 꽤 잘 되어서 장마당 나가서 하루 열심히 벌면 한 이틀은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에 1,000원도 못 버는 경우가 많다. 일단 풍족해야 장사가 잘되는 것인데, 뭐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니 팔 수도 없고, 이렇게 유통이 잘 안 되니 장사가 잘될 리 없다.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서로 자리싸움할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듬성듬성 자리가 많이 비었다고 한다. 장사는 이제 전망이 없고, 농사를 지으면 몇 달은 먹고 살 수 있으니 농사짓는 것이 더 낫겠다는 얘기가 돌고 있을 정도다.

열악한 군대 상황

대한민국에 온 이후 안보교육을 다니면서 군부대를 가보니, 대한민국 군인들이 먹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정말 부러웠던 것은 남한 군인들이 정말 좋은 것을 먹고 지낸다는 점이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하루에 먹는 것이 감자 6개 정도이고, 반찬이라는 것은 염장무, 염장배추 등 평균 2~3개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름도 못 먹는다. 기름은 명절 공급이기 때문이다. 고기도 일상적으로 못 먹는데, 1년 동안 고기 먹는 날은 열 손가락 밑으로 꼽을 정도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 비해 잘 먹고 훨씬 좋은 환경에서 군 복무를 하는 남한 군인들을 보니 참 부러웠다. 심지어 북한의 간부들보다 남한의 일반사병들이 더 나은 조건에서 근무한다. 그렇게 행복한 조건 속에서 군 복무를 하고 고작 1년 9개월을 하는데도 불평하는 모습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편집 : 박진수 (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9. 2012년 10월 pp.1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