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은이야기- 5


성은이야기⑤

편집자 주: ‘성은이야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은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아빠는 제대를 하셨고 그 후 아무런 수입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평양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매일 술을 드시며 돈을 벌지 않으시는 무능력한 아빠와 자주 다투며 늘 속상해하셨다. 가정불화는 점점 심해졌고 엄마는 중국 친척집으로 돈을 벌러 가셨다가 그 길로 바로 한국행을 결정하셨다. 여동생은 엄마가 태국에 있을 당시 바로 돈으로 빼내어서 동생도 곧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다른 탈북자들에 비하면 우리 가족은 큰 고생 없이 탈북과 한국행에 성공한 것이다.

엄마와 여동생의 탈북을 이유로 군에서 강제제대를 당한 후, 아빠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왔다. 이제 사회에서는 성분을 문제 삼아 나를 받아주려는 직장이 없었다. 북한에서는 보통 17, 18세의 나이에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신입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군에서 만기제대도 못하고 사회 경험도 없는, 나이만 먹은 25살의 처자가 되어 있었다. '장사를 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가난한 우리 집 사정에 밑천도 노하우도 없었고, 사무직은 사회에서도 경쟁이 치열한 곳이어서 내가 탐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었다. 그 사이 아버지는 재혼을 하셔서 새엄마와 새 여동생이 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내가 한순간에 이렇게 되자, 나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기피하게 되었고 북한에서의 삶에 무기력함을 느끼게 되었다.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나는 고립되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나는, 제일 천하고 험한 일로 치부되었던 배 위에서의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나는 뱃사람들에게 배 안에서 밥을 해주는 일을 하기로 하고 배에 올랐다. 배에서는 한 번 시동을 걸고 바다에 나가면 기름이 아까워서라도 한동안은 바다 위에 머무르며 쉽게 뭍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생전 처음 타보는 배 위에서 나는 격심한 뱃멀미를 하게 되었는데, 무려 열흘 동안이나 배 위에서 멀미를 하였다.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주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해주는 밥도 먹지 못한 채 열흘 동안 토하고 굶으며 반은 죽다 살아났다. 미안한 마음에 고기 잡는 일이라도 도와보려 했지만, 처음해보는 일이라 날카로운 바늘에 살이 찢기고 짠물이 들어가 더욱 고통스러웠다.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기에게 잡혀갈 것만 같았다. 뱃일이 고된 일임을 깨달았고, 이런 내 신세가 너무도 서러웠다.

한국에 도착한 엄마는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돈을 모아 어렵게 소식을 넣으셨다. 나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대로 한국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가 있었고, 내가 보위부 직원이었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나를 해코지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엄마와 여동생은 나의 걱정을 듣고는 '아무것도 아닌 너를 뭐라고 해코지 하겠냐. 네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마라'며 나를 설득했다. 그리하여 나는 엄마를 믿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엄마와 여동생이 이미 한국에 가서 살고 있는데, 엄마가 설마 나를 사지(死地)로 인도하겠나 싶었다.

엄마는 한국에서 식당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버신 돈으로, 나를 빼오는 모든 길목의 사람들을 사두었다.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 그리고 나의 라오스를 거치는 태국으로의 후송길, 그리고 태국에서 한국으로의 비행기까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있는 상황이었지만 북한에서 중국으로 강을 건너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강에는 건널만한 곳이 많고, 보통 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은 북한 경비병이나 중국 쪽 사람들과 이미 다 짜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강을 건너다가 경비병에게 걸리는 날에는 북으로 다시 잡혀가거나 그 자리에서 총에 맞아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리 되는 것은 누구도 손쓸 수 없는 노릇이기에 강을 건너는 것은 정녕 목숨을 건 사투였다. 나에게도 역시, 강을 건너는 일은 오롯이 내가 치루어 야 할 운명을 건 도전이었다. 강 건너편에는 엄마가 사주한 남자가 자꾸만 물살에 휩쓸려가는 나를 따라오며 안타까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물살이 너무 세어서 강 중간까지 왔는데 나는 벌써 기력을 다하였다. '이제 더 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겠다... 여기서 나는 죽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자 강을 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여 나에게 심하게 욕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 머저리야! 이것만 건너면 너는 살 수 있는데! 여기서 못 건너면 너는 죽는데! 요 앞까지만 오면 너는 사는데! 이걸 못하고 죽으려 하냐!' 내가 평소에 욕하던 사람이 아닌데도 그렇게 온갖 욕을 해가며 다시 힘을 내었다. 기적처럼 상류에서 흘러오는 통나무가 있어서 그것을 지지해 나는 겨우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건너편 남자가 기력을 다해 실신할 듯한 나를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갔고, 그 후에는 엄마가 보내주신 천사들이 나머지 나의 여정을 인도해주었다.

보통 탈북자들은 도강한 후, 국경지대 중국공안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야산으로 며칠씩 나무에 찔려가며 걸어가, 경비가 삼엄한 국경지대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는 중국 내 조선족 사람들에게 중국 사람에게 팔려가도록 부탁해서 팔려간 곳에서 일하면서 먹고 사는 경우가 많다. 팔려가서 사는 삶이 비참하기는 하지만, 북한에서 굶어죽는 것 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려가 지내더라도 중국공안에게 잡히면 바로 북송되어 교화소로, 혹은 한국행 중에 잡히면 정치범수용소로 가게 때문에 탈북자들은 매순간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나는 혹시라도 내가 잡히면 엄마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나를 빼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된 엄마는 나와 통화할 때마다 무사히 한국땅으로 인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며 권유하셨다. 교회에 가본적도 없었고, 기도하는 방법도 하나님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나는 엄마말대로 틈틈이 기도했다. 엄마는 나를 북한에서 빼내오기 위해 한국에서 몸을 돌보지 못한 채 식당 허드렛일을 하시며 너무 많은 일을 하셔서 건강이 많이 상하셨다. 몸이 아파도 병원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탓에 장이 썩어서 지금은 장 절제수술까지 받으신 상태다. 이렇게 내가 북한을 빠져나와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 중국에서 떠돌며 고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엄마의 희생으로 희망의 땅인 남한으로 온 나는, 고통 받는 수많은 북한 아이들 중 선택받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이 감사하고 숙연해질 따름이다.

북에서 교통수단을 많이 타보지 않았던 탓에 차를 아주 잠깐만 타도 멀미를 하는데, 한국행 비행기를 타서도 극심한 멀미를 하였다.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오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 비행기에서 내려 한국 땅을 밟을 때 그 감격이 크다던데, 나는 엄마가 이미 모든 길을 인도해준다는 믿음에 두려움과 고생이 덜했고 그래서인지 그러한 감개무량도 덜했던 것 같다. 나는 비행기에서 하도 심하게 멀미를 해서, 한국 땅을 밟았다는 안도감보다는 비행기에서 내려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일행은 바로 하나원으로 옮겨졌다. 나는 하나원을 감옥 같은 곳으로 상상했다가 시설이 너무 좋아 깜짝 놀랐다. 건물이 으리으리하고 삼시 세끼를 먹여주고, 옷도 주고 약도 주고 보살펴주니 세상에 이런 데가 있나 싶었다. 내가 여태껏 지내온 어느 곳보다 좋았다. 그때부터 차츰 대한민국에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악한 상황에 있다가 갑자기 좋은 데로 오니 황홀하다 못해 꿈만 같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구나 돈이 소중할 텐데, 탈북자들을 위해 세금으로 운영되는 이런 하나원을 마련해준 한국 정부에 감사의 마음이 샘솟았다. 앞으로 내가 이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교회에서 북한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학업을 위한 과외교육도 해주고 물심양면으로 많은 것을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대학을 어느 곳으로 지원할까 고민하던 중 탈북자 전형이 있는 대학교를 세군데 정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뿌연 물체가 고려대학교 입학지원서를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 싶어 하루 종일 기도를 했다. 혼자서 횡설수설하면서 내가 대학에 가야하는 이유를 기도했다. 고려대학교에 너무나 합격하고 싶었으나, 이곳의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게 느껴졌고, 주위 탈북자 선배나 친구들도 올해는 원서나 한번 넣어보란 식으로 말했다. 합격자 발표 날, 팝업창에 주민등록번호를 치고 합격소식을 알게 되자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엄마를 큰소리로 불렀다. 엄마는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집에 불이 나거나 내가 감전이라도 당한 줄 알았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안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렇게 부족한 내가 수백 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합격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에서는 단 한 명만 뽑았는데, 내가 바로 그 한 명이었던 것이다.

주위 탈북자 친구, 선후배들이 선발기준이 뭐냐며 반발과 의심이 많았다. 북한에서 대학입학 전형이 비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 같다. 고려대학교 탈북자 전형은 학력시험이 아니었고, 단지 에세이 한편으로만 당락이 결정되는 전형이었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도 입학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왜 대학에 가야하는지,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교회 선생님께 글을 첨삭받아 다듬어가면서 자기소개서를 두 달 동안이나 준비하였다. 그리고 북한인권시민연합 김영자 국장님께 추천서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다. 추천서를 너무 잘 써주셔서 이것 역시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이제 나는 고대에서 4년 내내 탈북학생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만하면 된다. 너무나 감사하고 이런 조건에 내가 열심히 하지 않으면 큰 죄악이란 생각이다. 여동생도 열심히 해서 이화여대 탈북자 전형에 합격했다. 이화여대는 탈북자 전형에서도 공부실력도 입학전형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에, 동생은 나보다 먼저 남한에 와서 2년 동안이나 코피 쏟아가며 독하게 공부해 합격한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이 도우신 것 같다. 두 딸을 한국으로 무사히 데려온 것만으로도 행복해 하시던 엄마는 우리가 고대, 이대에 합격하여서 너무나 좋아하신다.

이제 나는 곧 있을 나의 대학생활의 단 꿈에 부풀어 있다. 희망의 땅인 대한민국에서 나는 나와 탈북후배들, 그리고 통일을 위한 정책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그 꿈을 위한 공부를 차곡차곡 해나가고 싶다.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며, 나의 경황없는 이 수기를 마친다.

편집: 박진수 (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북한인권』162. 2012년 3월 pp. 24 -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