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은이야기 – 4

                            성은이야기 ④

편집자 주: ‘성은이야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은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평양에서는 보위부사령부 전화교환수를 하였다. 다른 동기들은 이런 저런 파티를 한다면서 돈을 많이 썼다. 부대 안에서는 군복을 입어도 외출복으로는 사복을 입어야 하는데 다 외제 옷을 입는 상황에서 나는 싸구려 옷도 못 입는 상황이었다. 샴푸라는 것이 있는지도 여기서 처음 알았다. 군에서 주는 돌 같은 비누를 쓰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아껴 쓰는 한이 있더라도 향내 나는 샴푸 하나 정도는 거의 모두가 사용하고 있었다. 나 혼자 비린내 나는 비누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에다 사정을 이야기해서 만 오천 원을 보내달라고 해서 일 년치 용돈으로 겨우 받았는데 동료들에게 진 빚을 갚고 나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곳에 배치된 동료들은 정말 부잣집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한 달에 평균 사오만원(당시 북한에서 쌀1Kg에 1400원 정도 하였다)을 쓰고 있었고 소대에 필요한 것들도 그 부모들이 다 대주었다. 이들의 부모들은 주로 보위부 고위직이었는데 권력으로 받은 뇌물로 그렇게 잘 사는 것이다.

북한은 뇌물 없이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사회다. 북한에서는 남한이 자본주의 사회라 이런 뇌물이나 부정부패가 훨씬 심할 것으로 상상했지만 이곳은 북한에 비하면 너무나 깨끗한 사회이다. 남한에 온 후 나는 TV 뉴스를 보면서 놀라곤 한다. 북에서는 당연한 비리와 부정부패가 남한에서는 큰 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부대 내 동료들은 대부분 돈이 많으면 안하무인이거나 교양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개중에는 돈이 있으면서도 인품이 괜찮은 친구들도 있었다. 내 어려운 사정을 알고는 돈을 빌려주면서도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나는 자연스럽게 발언권이 없어지고 비굴해질 수밖에 없었다.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평양의 보위사령부로 배치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나의 실상은 부잣집 고위직 아이들 사이에서 참으로 고달프게 사는 것이었다.

나는 시골로 재배치 받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부사령부로 가게 되었다. 내가 이원으로 올 즈음 아버지는 제대를 하시고 구청직원으로 일하고 계셨다. 북한은 군인이 제대하면 사회에서 다른 곳으로 배치가 되고 만 60세가 될 때 까지는 의무적으로 근무하여야 한다. 이때는 배급이나 월급은 전혀 없이 즉 노동에 대한 대가없이 일해야 한다. 우리 집은 아무런 수입이 없어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워졌다. 이원의 보위사령부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배치 받는 곳이었지만 그래도 우리 집만큼 어려운 집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평양에서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이 좋았다.

이제는 엄마가 장사를 하시던지 하여 두 동생들을 위해 생계를 꾸리셔야 하는데, 엄마는 그럴 재주가 없으셨다. 북한에서 여권을 받아 중국에 친척방문을 하여 돈을 벌어오는 등 친척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는다. 엄마도 중국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서 돈을 벌기 위해 친척방문을 계획하셨다. 여권을 발급받아 다녀오는 공식적인 여행을 위해서는 뇌물 등 돈이 많이 들었다. 여권 서류절차에서 이래저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엄마는 첫 중국 방문에서 벌어온 돈을 이런 사람들에게 주느라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번 중국을 다녀오신 후, 다음에는 그냥 비공식으로 강을 건너 다녀오겠노라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밖에서 드시고 들어오셔도 또 집에서 자시고자 하였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엄마와 점점 술만 드시는 아버지는 이제 매일 싸우셨다. 우리 집에도 가정불화가 생긴 것이다. 아버지와 다투시고 엄마는 홀로 중국으로 도강을 하셨다. 원래는 돈을 벌어 오시려던 것이었는데, 중국에 가셔서 친척들을 통해 한국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엄마도 북한에서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시다가 중국에 가셔서 한국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셨단다. 엄마가 한국에 도착한지 6개월 후에 엄마는 돈을 보내 여동생도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오셨다. 나는 군대에 있어서 이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원에서 부대의 꽃처럼 지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모두에게 인정받으며 당당하게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엄마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무리 연락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이 이상했는데 동생은 엄마가 강원도 회령에 갔다며 곧 돌아올 거라고 변명만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마저 사라진 것이었다. 동생은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한국행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북한에서 체제 순응적으로 고이고이 자라 군대까지 간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국행은 절대 상상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딸을 보위부사령부 교환수로 앉혀놓고 자식들의 장래를 망치고 우리가문을 망치면서 어떻게 혼자 저럴 수 있느냐, 저는 ’엄마는 엄마도 아니다‘라고 원망했다. 조선여자들이 다 같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 혼자 나약하게 이럴 수 있느냐’ 하며 엄마를 원망했다. 이 일이 조회되면 나의 사회생활은 끝나는 것이었다.

이원에서 나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평양에서 김책공업 종합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나보다 6살 위였다. 보위부사령부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이후 김정일 측근의 엘리트 라인으로 갈 수 있는 장래가 촉망받는 인재였다. 남한사회에 와서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연애라고 해봐야 너무나 수줍고 은근한 것이었다. 부대 내에서는 비밀연애였기 때문에 애정표현도 못하였다. 아침에 근무할 때 윙크를 날린다던가, 먹을 것을 따로 챙겨준다던가 하는 것뿐이었다. 연애하는 것이 눈에 띄면 안 된다고 생각했고 생활도 너무나 통제된 상황이기 때문에 한 부대에서 둘만 따로 만나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공부도 많이 하고 똑똑하고 인물 체격도 좋고 집안도 좋은 이 남자와 제대 후 결혼할 생각에 나는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었다.

엄마가 탈북한 상황을 알게 된 후, 나는 이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북한에서는 가족 중에 탈북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도록 조치가 취해진다. 나와의 결혼은 그에게 있어 인생의 출셋길을 망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자, 남자친구는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고 하다가 3일후에는 그러겠노라는 대답을 하더라. 나는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한 말이었던 것 같다. 엄마의 탈북으로 인해 나는 사랑도 망치게 되고 사회에서도 언제 매장될지 모르게 되었다. 슬프고 황망하였던 시간들이 지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보위사령부의 추천을 받아 청년동맹비서양성소 (청년동맹비서를 교육시키고 조직책임자를 양성하는 기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는데 우리 집은 돈이 전혀 없는 상황이라 갈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돈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곳을 나는 추천을 받아도 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너무나 슬펐다. 추천되었다는 자체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다행히 아버지가 큰아버지께 말씀을 드려 30만원을 받아와서 옷도 새로 장만하고 겨우 등록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나도 공부도 더하고 우선적으로 당원이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생겼다.

한편 금덕(광산으로 유명한 지역)의 보위부사령부에서 정치부장이 어디선가 내가 일을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금덕 지역으로 와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우리 부대로 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로 나에 대한 조회가 들어가게 되었나 보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같았다. 계속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 부대원들에게 정치부장님께 물어볼까 싶다고 했더니 평소 같으면 말릴 일인데 어서 올라가보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다. 정치부장님께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3일전에 강제제대명령서가 왔는데 나에게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대 사람들도 너무나 황당한 일이라 아무도 말을 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작스레 제대명령서를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의 청춘을 바쳐서 군에서 열심히 살았는데 내 잘못도 아닌 엄마의 잘못으로 이렇게 되다니 나의 충성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배신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김일성 동상 앞에 가서 군복에 진창을 묻히며 엉엉 울었다. ‘이것이 네가 말한 정치냐’ 이틀 동안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붓고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정치부장이 나를 병원에 데려가 안정을 시키고, ‘네가 전장에서 엄마를 만나면 엄마에게 총을 겨누고 쏠 수 있겠느냐’ ‘이곳이 무력부가 아니라 정보기관이어서 그렇다’며 나를 달랬다. 나 때문에 부대전체가 침울해졌다. 나는 이렇듯 황당하게 군 생활을 마무리하고 짐을 싸서 아버지가 계시는 청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계속)

편집: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 161. 2012년 1·2월. pp.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