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은이야기 – 3


성은이야기 ③

편집자 주: ‘성은이야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은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학교 졸업 후 군대에 가게 된 사연

고등학교 졸업 전 진로 문제를 두고 갈등이 많았다. 엄마는 결혼을 제안하기도 하고, 나는 의사나 교사는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정치계로 나서고 싶었다. 당시 우리 집안사정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허황된 꿈이었다. 일반 중·고등학교를 나왔던 나는 일반대학에는 갈수 없었고 전문대학교만 갈 수 있었다. 일반대학은 제1고등학교에 다닌 사람들만 갈 수 있으며 이런 특수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수재들만을 대상으로 따로 있다. 일반 고등학교를 나와 전문대학에 가는 것도 교장선생님 추천을 받아 대입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갈 수 있다.

아버지는 내게 대학 갈 궁리는 절대 하지 못하게 미리 못 박아 두셨다. 내가 수재도 아니고, 과학자가 될 것이 아닌 이상 대학을 나와도 소용없다고 말씀하셨다. “돈 안들이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군대에 가라”고 하시면서 “그동안 엄마 아빠는 너 시집갈 준비를 해두마”라고 하셨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여자가 군대 6년 후 사회에 나오면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게 된다며 평생 군대에 있을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다. 전문대학을 가던지, 그도 아닐 바엔 빨리 시장에 나가서 장사를 배우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라고 하셨다. 나는 진로를 두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북에서는 대학입학시험인 ‘정무원 시험’이 끝난 후에는 바로 부모들이 ‘뒷공작’에 들어간다. 학생들이 일단 응시를 하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부모들의 수완으로 대학을 갈지 말지가 결정된다. 우리 반에서는 단 3명만 대학진학 시험에 응시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시험을 안보겠다고 하였지만 담임선생님이 권하셔서 그저 시험장에 가서 문제만이라도 보기로 하고 시험을 치르러 갔다.

시험 중이었는데 중간에 어느 학생이 들어왔다. 지각했는데도 시험장에 들어온 것이며, 차림새로 보아 왠지 잘사는 집 아이 같았다. 바로 내 옆자리였기 때문에 그 학생이 백지에 가까운 시험지를 내는 것을 보았고 시험지를 낼 때 그 여학생의 이름을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 근데 결국 그 아이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북에서 학생은 대입시험에 응시만 했으면 된 것이고, 그 응시 이후에는 부모들의 ‘경주’가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교육청에 손쓰는 작업을 의미한다. 우리 아버지는 장교였기 때문에 예비역들 중에 교육청에 계시는 분들을 아는 분도 많아서 아버지는 나의 뒤를 봐줄 능력이 있었지만 나의 요청을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셨다. “네가 대단한 수재도 아니고 머리가 비상한 애라면 이 집을 팔아서라도 대학을 보내겠지만, 그런 것이 아닌 바에야 차라리 군대를 가라”고 계속 주장하셨다. 그래도 시험인지라 아무리 뒷거래가 많더라도 1등부터 10등까지 상위권에 드는 학생들의 당락 여부는 건들이지 못하는 면도 있다. 결국 실력이 뛰어나지도 수를 쓰지도 않은 나는 낙방을 하였다. 눈물이 핑 돌았다.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를 군대에 보내려고 하였던 이유는 나의 고모부님께서 함경북도 징집부 고위직에 계셔서 나를 좋은 곳으로 배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함경북도에서 징집되어 군대에 가는 모든 아이들은 고모부의 손을 거쳐 배치된다고 보면 된다. 나는 모두의 선망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갈 수 있었다. 보통 군대 가는 여자들은 해안포, 고사포로 많이 배치되고 포격을 하고 기계를 다루는 부대로 많이 배치되지만, 나는 일반 무력부의 군인이 아니라 멋진 제복을 입고 잘 먹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나는 복무 기간 중 기술을 배워 제대 후에도 자격증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간호부대로 가는 것은 어떨까 싶었지만, 장교이셨던 아버지는 자랑을 하고 싶으셨던지 선망의 대상인 보위사령부로 가라고 하셨다. 2004년 4월 19일 나는 18살의 나이에 군대에 입대하였다.

북한군대는 누구나 다 가는 것이지만 배치를 받을 때 역시 누구나 청탁을 한다. 고모부는 함경북도에서 군대 가는 아이들 90%가 다 청탁을 하여 친척이 있는 곳, 편안한 곳 등등으로 여기저기 보내달라고 요청한다고 하셨다. 군대에 배치되면 그 곳에서 10년은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아주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은 이상 부모들은 집안 살림을 팔아서라도 뇌물 공작을 한다. 영양실조에 걸려서 제대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가산을 팔아서라도 뇌물을 준비한다. 배치를 운명에 맡기는 집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남자는 무조건 징집 후 10년을, 여자는 키가 157센티미터 이상이면 6년을 의무적으로 군대에 보내야 했다. 하지만 키가 157이 넘지 않는 여자아이들이 대부분이었고, 157이 넘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군대징집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은 평양에서 3개월간 이루어진다. 징집된 모든 사람들은 시간표대로 훈련을 받는다. 이 신병훈련기간이 가장 힘들었다. 북한 내에서도 가장 힘든 신병교육이 보위사령부 신병교육이라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일단 배치되고 나면 힘들지 않으면 군인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절대 봐주지 않았고, 여자애들은 이 기간 중 생리도 멈출 정도로 힘들어하고 행군하면서도 반수면 상태로 걷게 된다. 일반 무력부의 신병교육기간은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다고 했다.

배식은 아침과 점심에 백미를 주고 저녁은 국수를 먹었다. 보위사령부에는 보통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와서 ‘온실 속 화초’ 같은 아이들이 많아 조금만 힘들어도 울었다. 북에서도 함경북도 출신인 나는 ‘저런 것으로 왜 우나’ 생각 하면서 씩씩하게 지내려고 애썼다.

여자 250명 정도가 함께 신병훈련을 받았고, 훈련 마지막 즈음에 여성장교 2명이 신병을 뽑으로 왔다. 인물과 체격을 보고 20명 정도를 뽑는 듯하였다. 그리고는 면접에서 자기 장기를 말하라고 하였다. 그 중 4~5명만 평양의 중앙본부 내의 통신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국가 보위사령부 본부 교환수가 되었다. 여기는 여자들만의 부대였다. 뽑혀 들어온 애들이 4-5명 이외에 나머지 15명 정도는 전부 고위직 부잣집 평양출신 아이들이었다. 교환 근무일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6개월은 근무하는 방법을 배우기만 하였다.

아이들은 모두 외출할 때 외제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돈이 많았다. 나는 사정이 어려웠기 때문에 엄마에게 사정사정해서 일 년에 만 오천원만 보내달라고 부탁드려 지냈었다. 하지만 이곳 애들은 한 달에 4-5만원을 쓰고 다녔기 때문에 경제 수준에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부대원들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고 사랑받고 지냈지만, 집이 평양인 특권층의 자제만이 배치되어 온 이 곳에서 나는 돈이 부족하여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아이들은 기가 세고 교양이 없어서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서슴없이 하기도 하였다. 내가 단독 근무 1차 시험에서 6명을 뽑을 때 합격하고 심부름도 자주 나가게 되자 질투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빚을 많이 지게 되고 그래서 발언권이 별로 없었다. 또래 친구에게 심부름 나갈 외출복을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너의 아버지는 딸이 추운 겨울에 밖에 나갈 외투도 없는데 머하고 자빠져있냐?”고 하였다.

이날 그 친구를 지하실에 데리고 가서 흠씬 두들겨 패주었다. “나의 아버지가 당과 수령에 충성하는 덕분에 너의 아버지가 무역해서 벌어먹고 살 수 있었던 거다”라고 하면서. 이날 윗사람들에게 가서 이럴 바에 다른 곳으로 전근을 시켜주던가, 차라리 제대를 시켜 달라고 하였다. 윗분들은 오히려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이렇게 어려운줄 몰랐다면서 어려운 애가 여기는 왜 왔냐고 물으셨다. 나는 아버지에게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계속 말씀드려왔었고 그곳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군 복무를 이곳에서 했다고 해서 제대 후 우대 받는 일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돈 없는 내가 힘들게 그곳에서 지낼 이유는 없었다. 부잣집 고위 간부 아이들이 돈으로 편하게 군대생활을 하는 곳이지 나 같은 애가 있을 곳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게 1년을 보낸 후 나는 함경남도 이원의 보위사령부로 옭겨가게 되었다. 보위사령부이면서도 지방까지 내려온 아이들은 좀 못사는 축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경제적 수준의 큰 차이 없이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계속)

편집: 박진수(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160. 2011년 12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