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은이야기 – 2


성은이야기 ②

편집자 주: ‘성은이야기’는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은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학창시절

학교에서는 늘 내라는 것이 많았다. 고철 파지 등 할당량을 모두 돈으로 내어야 했다. 어디서 훔칠만한 곳도 없고 주변의 어느 곳에서 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돈을 못낸 사람 일어나라고 하면 나는 끝까지 안 일어나다가 선생님이 직접 이름을 불러야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애들도 있고, 학급 친구들에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자존심이 상했다. 집에와서 엄마의 등껍질까지 다 벗겨서라도 학교에 바칠 돈을 마련하고서 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집에서는 ‘너는 집안 사정은 안 보이느냐’ ‘너는 너만 생각하느냐’고 하셨다. 동생들은 그저 창피를 당하고 고초를 당하고 돈은 끝까지 안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정말이지 나는 학교에 바치는 세외부담을 꼭 내려고 애썼다.

나의 부모님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대로 학교는 꼭 보내주셨다. 그래서 나는 고등학교의 정규과정까지 모두 다 마칠 수 있었다. 주위에는 부모님들이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안일이나 장사를 돕도록 시키는 친구들도 있었다. 다행히 우리 집은 이정도로 어려운 사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그나마 행복한 상황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더 행복해지려고 학교에다 갖다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서 모범생이었다. 늘 선생님께 ‘성은이 정도만 하라’는 말을 듣고 지냈다. 노래면 노래, 체육이면 체육. 학교에서 하라는 것은 뭐든지 다 잘하려고 하였다. 남들이 하는 것은 웬만큼은 나도 다하려고 하였다. 공부도 반에서 1등은 아니었지만 2~3등은 하였다. 그래서 다방면(팔방미인)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더 잘하려고 노력하였다. 학교에서 너무나 모범생이고 싶은 마음에 (내 기준에 모범생이 돈을 안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엄마가 돈이 없다고 하셔도 나는 안방에서 쫓으면 바깥문에 서있고 거기서 더 쫓으면 대문 앞에 서있고, 어떻게 해서든 집을 쥐어짜서도 내야할 돈을 다 내었다. 그래서 학급이 올라가면서 나는 간부표시를 달고 다녔다.

내 기억에 선생님들은 좋으셨다. 다만 그 때 당시 교원들에게 배급이 안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돕는 것이 필요했다. 선생님들에 대한 배급이 없고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선생님들은 바로 그만두고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많았다. 남아있는 교사들은 교편을 잡고 있다는 것만으로 존경을 받기도 하였다. 학급에는 모자위원장(학부형대표-학급장 엄마가 주로 맡음)이 주축이 되어 ‘선생님 돕기’란 것이 있었다. 돈을 모아서 선생님들께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들이 교육자적 양심이 없이 도움 받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잘사는 집 아이들은 편애하고 돈을 못내는 아이들은 구박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급에서 ‘선생님 돕기’ 돈을 못낸 아이가 두 명 이었는데, 둘 다 군인가정의 아이들이었다. 2대대장 딸인 나와 5대대장 딸인 다른 친구였다. 그 선생님의 남편은 군인이셔서 우리 가족과 같은 곳에서 살고 있어 우리 집 사정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셨다. 그런데 돈을 안낸다고 우리를 아이들 앞에서 욕하면서 큰 망신을 주었다. 같은 군인가족끼리 너무 심하게 하였다. 엄마도 아시고 하니, 엄마와 따로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나는 돈을 주지 않았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아마 선생님들도 살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러신 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아직도 나에게는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런 일 이외에는 나는 대체적으로 학창시절과 선생님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28명 정도의 학급친구들 중 고정적으로 출석하지 않는 아이들이 10명 정도 있었고 18명 정도만 출석하였다. 의무교육제이기 때문에 학교에 나오지 않더라도 등록만 되어있으면 졸업은 할 수 있다. 먹고 살기 바빠서 학교에 못나오는 아이들 말고도 학교에 나올 수 있는 사정은 되는데 결석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아이들이 학교 교육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선생님이 직접 집안 형편을 확인하시는데, 극도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제외하고 결석을 하면 집으로 찾아가서 학교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나는 출석하지 못하는 아이들보다는 경제적으로 그나마 나은 수준이었지만 출석하는 아이들치고는 형편이 가장 어려운 축에 속했다. 우리 집은 겨우겨우 허덕이며 따라갈 정도로 어려웠다. 나는 기왕이면 우리 집이 물질적으로 풍족하기를 바랐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내내 싫었다.

수학시간은 기억이 안 난다. 선생님이 혼자 칠판에 풀이과정을 써놓으셨던 것 같다. 수학은 어느 순간 기초를 놓쳐서 잘 못하게 되었다. 학급에서는 오히려 너무 가난해서 옷도 못 입고 학교에도 이따금씩 잘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 중에 공부를 비상하게 잘하는 수재는 아니었다. 반에서는 그룹을 지어 다녔는데 공부는 못해도 파워가 있는 그룹이 있었다. 주로 돈이 있는 집 아이들로 된 그룹이었다. 나는 돈은 없었지만 공부도 좀 잘하고, 아버지가 사회와는 별개인 군인 집단에 있다는 것으로 이 파워 있는 그룹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수학 숙제를 이런 수재들에게 빌려서, 가난하고 파워도 없는 아이들에게 공책 두 권을 더 넘겨주면서 베끼는 것까지 시켰다. 수학 숙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하였다.

소학교 역사는 재미없었다. 그저 김일성 혁명사를 외우는 것이 일이었다. 한국사, 세계사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거의 배우지 않았고 중요하지 않았고 시험에도 나오지 않았다.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 자체는 알지만 역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대강 가르치고 대강 배우는 과목이었다. 내가 모범생인데도 이 정도인 것을 보면 역사 교육의 질이 낮았던 것 같다. 영어는 교과서가 없이 선생님이 칠판에 쓰는 단어나 문장을 다 베껴 쓰는 것이 전부였다. 늘 네 번째 문장과 다선 번째 문장을 외우는 것이 숙제였다. 내가 무엇을 배우는지 잘 모르는 채 쉬는 시간에 매번 그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숙제를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2년을 배우는 동안 참 배운 것이 없었단 생각이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순화 지역에서 다니다가 중3때 포항 구역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이 지역은 워낙에 시내인데다가 생활수준도 높은 지역이었다. 아이들도 공부를 잘하였고 특히 우리 학급 친구들은 영어를 너무 잘하였다. 모두 본문을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고, 중학교 3년간 배운 단어를 처음부터 시험을 보기도 하였다. 나는 전학을 가서는 영어시간에 입 뻥긋도 못하게 되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 반에서 2 ~ 3등 이었다가 전학 온 학교에서는 중간 정도로 성적이 떨어졌다. 우리 학급도 여학생들이 46명이나 되어서 경쟁도 치열했던 것 같다. 우리 학급에는 부모들이 외화벌이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트여서 돈벌이를 잘하고 회사 같은 것도 세우고 하는 부자들이 많았다.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들을 입고 먹고 하였다. 학급 내 권력을 잡고 있는 그룹이 있었는데 나는 순수한 내 능력으로는 빠지는 것이 없었지만 경제적인 배경이 그 아이들과 어울리기가 힘에 부쳤다. 잘사는 파워그룹에 속하게 된 나는 친구들과 영화 보러 가기로 약속한 날이면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빠져나오는 등 꾀를 부려 돈이 없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부모님들도 너무 힘들었던지 우리는 다시 전에 다니던 학교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나는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 갑자기 전교 1등으로 되어있었다. 두 학교의 교육수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그곳에서 조금 공부하고 되돌아오니 난 특별히 따로 공부하지 않았는데도 실력이 쌓여 시험에서 전교1등을 한 것이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전 시간과 다음시간의 숙제를 차근차근하는 스타일이다. 집에서는 공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고 물 긷고 마당 청소하고 심부름 다녀오고 동생들 밥해주는 등 엄마대신 가사를 돌보았다. 엄마는 외출하시면서 내게 할 일을 조목조목 적은 쪽지를 남겨놓으셨다. ‘전기가 들어오면 국수 삶아놓고, 짐승먹이 해놓고, 동생 옷들 빨고 다림질 해놓아라.’ 이렇게 집에서 일만 하고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전교 1등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우리 학교의 수준이 너무 한심했던 것 같다.(계속)

편집: 박진수 (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159. 2011년 11월. pp.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