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성은이야기 – 1

 

성은이야기 ①

편집자 주: ‘성은이야기’는 ‘은화이야기’ 후속으로 2010년 한국으로 들어온 한 탈북소녀의 이야기를 편집한 것으로 성은의 북한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담아 시리즈로 연재된다.


강원도에서의 어린 시절

나는 1987년 3월 강원도에서 태어나 9세까지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의 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 우리가족은 강원도 산골에 위치한 아버지 부대의 사택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어렸을 적 만난 사람들은 군인과 군인가족들뿐이었다. 6살에는 군부대 유치원에 다녔다. 북한에서 유치원 1년은 11년제 의무교육에 포함된다. 7살에 소학교에 가게 되자 학교가 멀어서 도시락을 싸서 10리길을 걸어 다녔다. 등교할 때는 늦지 않으려 급하게 갔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친구들과 이리저리 살길에서 뛰어 노느라 두세 시간이 넘게 걸리곤 하였다. 산에서 꽃도 따고 산나물도 뜯고 이런저런 놀이를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은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것 같다.

산길에는 남한에서 날아온 삐라가 많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삐라를 발견하면 읽거나 하지말고 학교로 가져오라고 했지만, 나와 동무들은 그것들을 주워 내가 귀찮아 모른척하고 그냥 지나다녔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삐라의 종이 질이 너무 좋았고, 북에서는 보기 힘든 칼라 사진이 많았다는 점이다. 잘 찢어지지도 않고 강기슭에 떨어져 있어도 물에 불지도, 불에 잘 타지도 않는 종이라 신기했다. 이제 겨우 소학교 1-2학년 이었었던 나는 학교에서 시킨대로 웬만해서는 글은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기억에 남는 만화 한컷이 있다. 배가 튀어나온 못생긴 남자 그림 옆에 ‘당신도 지도자인가?’ 라는 글이 적혀 있었는데, 북에서 ‘지도자’는 김정일을 의미하므로, ‘김정일 지도자님을 이렇게 욕하는 것인가?’ 학교에서 교육 받은 대로 나쁜 남한 놈들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려고 한다고만 생각했다. 삐라는 지천이었지만 나의 성장과정에 미친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북한에서 군인이 좀 잘사는 줄 알겠지만 사실 북에서 군인이 제일 못사는 축에 속한다. 왜냐하면 민간인들은 자신의 직분 외에도 장사를 하다던가, 다른 일을 하면서 살 궁리를 할 수 있지만 군인은 사회에서 다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군인은 배급받은 대로만 살고 배급이 없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 엄마는 당신이 처녀 적에 잘 모르고 그저 별이 멋있어 보여서(별은 군인을 의미한다) 시집오셨지만, 내 자식은 절대로 군인에게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군인가족은 부대소속으로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엄마는 가족소대원으로 그때그때 부대에서 일이 있을 때마다 맡겨진 일을 하셨다. 나는 삼남매 중 맏딸로 아래로 세 살 터울 여동생이 하나, 여섯 살 밑으로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강원도에서 소학교 2학년을 다니던 중 우리가족은 청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함경북도 청진에 9군단이 있었는데 거기에 사건이 있었던 거 같다. 군단장이 잘못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강원도에 있는 아버지 부대였던 5군단과 청진의 9군단이 통째로 교체가 되면서 우리는 모두 아버지를 따라 청진으로 가게되었다.

늘 배가 고팠던 9살 시절

강원도는 시골이고 주위에 이웃들이 오래도록 함께 지낸 사람들이어서 우리들은 이웃사촌이란 말처럼 오가는 정이 있었다. 하지만 청진으로 옮겼을 때는 아버지 연대가 아예 해산되어버려서 다들 어디로 갈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 뿔뿔이 흩어질 임시의 관계들이어서 서로 간에 인색하고 각박했다. 청진은 강원도와는 달리 도시였고 또 당시는 배급이 원활하지 않을 때여서 사람들이 더욱 이기적이었던 것 같다. 이웃 간에 서로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고 나는 시골에 비해 도시 인심이 이렇듯 인색함에 놀랐다. 그나마 강원도에 있을 때는 그런대로 배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95년 이전) 그 이후 청진에서는 배급이 없어서 살기가 무척 힘들었다.

식량 배급이 갑자기 끊기면서 비상으로 미숫가루를 주기는 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인 나와 동생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1년 정도 군인들에게 배급이 나오지 않아서 우리는 너무 당황하고 힘들었다. 나는 학교에 갈 때 일부러 가방에 책은 딱 한 권만 넣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남의 밭에서 무, 배추, 파 등을 훔쳐 가방에 넣어오기 위해서였다. 길가에 있는 무, 배추 등을 닥치는 대로 뜯어서 훔쳐왔었다. 그렇게 일 년 정도는 훔친 것들과 산에 가서 뜯어온 산나물을 쌀, 강냉이 등과 섞어 죽을 쑤어 먹었던 것 같다. 산나물을 뜯으러 가느라 학교를 못 갔던 적도 있다. 그것이 95, 96연도니까 내가 9-10살 때 일이다. 나도 어린 나이 이었지만 내가 그나마 철이 들어서 먹을 것을 구해올 궁리를 했다.

앙상한 밭에 무, 배추가 몇 개 밖에 없기 때문에 훔치다 걸리는 일이 많았다. 주인이 따라오면 도망가다가 배춧잎을 한 장씩 떼어내 이리저리 떨어뜨리면서 도망갔다. 어차피 잡히면 다 빼앗기니까 양이 적어지더라도 농장원의 추격을 따돌리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두고 가면 뒷사람이 가져갈 것이므로 주인은 따라오면서도 떨어진 배춧잎 낱장들을 주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동안 나는 잡히지 않고 도망갈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라도 먹을 것을 마련해서 가져가야 6살, 3살 동생들과 내가 먹고 산다는 생각으로 도둑질을 했다. 아버지가 대대장이셨는데 대대장 딸이 농작물을 훔쳤다고 소란이 나면 아버지 이름에 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도망을 가더라도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농장원을 따돌리고서도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을 강기슭의 버드나무 밑에 숨어 있다가 집에 들어가곤 하였다. 당시 어머니는 위궤양에 자궁까지 들어내셔서 몸이 많이 쇠약하셨고, 대대장의 아내라는 사회적 지위상 어머니가 직접 먹을 것을 훔치러 다니실 수는 없었다. 나는 장녀로서 생계에 책임감도 있었다. 엄마도 당신이 아프신 상황에 우리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세상이 너무나 힘든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지 다른 때에는 절대 남의 것을 훔쳐서는 안 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나도 엄마에게 ‘나는 남의 것이 예쁘고 보기 좋아서 훔치는 사람 아니다. 학교에서 절대로 친구 물건을 훔치거나 그러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자 애썼다. 나는 학교에서는 모범생이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때의 그런 행동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함일 뿐이었다. 낮에는 같이 훔치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밤이 가장 안전하고 목표한 먹을거리를 구하기에도 가장 쉬웠기 때문에 주로 밤에 혼자서 많이 했다. 아버지가 한번은 “9살짜리 여자애가 겁이 없다”고 하시면서 ‘넌 커서 뭐가 되도 되겠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청진 내 송평구역에서 포항구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96년) 원래 포항에 있던 전임 대대장이 집을 내어 주어야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집을 비워주지 않아 우리는 집을 짓는 동안 임시로 다른 대대의 빈집에서 살게 되었다. 거기는 완전 도심한가운데라 주위에 농장이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고 건물들뿐이라 먹을거리를 훔칠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살길이 막막했지만, 다행히 96년부터 끊겼던 배급이 한 달에 보름정도씩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대에서 어느 정도의 땅을 주어서 거기서 나오는 농작물은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상황이 훨씬 나아져서 그때부터는 나도 도둑질을 하러 다니지 않고 학교에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군에도 사회에도 배급이 끊기었던 일 년 동안 군인 가족이었던 우리는 훔쳐 먹으며 연명했지만, 호항으로 나오니 주변의 사회인들은 이미 천장사, 떡장사 등으로 자신들이 살길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인들은 군인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나았고 군인들이 제일 못 먹고, 못 입고, 군인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내라는 돈도 다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속)

편집: 박진수 (국제협력캠페인팀 인턴)

※ 『북한인권』158. 2011년 (9월 10월). pp. 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