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생각하기 싫은 북한 보위부, 교화소에서의 생활

[증언] 생각하기 싫은 북한 보위부, 교화소에서의 생활

김미란

탈북여성, 2008년 3월 한국입국

 

나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7살에 군대에 입대했는데 군대는 가고 싶다고 가는 것이 아니고, 집안내력, 당성을 보기 때문에 우리 학년에서 3명만 갔다. 군대에서는 호위병, 군수물자를 호위했고 중사로 제대했다. 제대 후 당원이 되었고, 상업학교에서 이발을 배워 처음에는 미용하다가 이발을 했다. 24살 때 당원으로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북창으로 시집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고 잘 살았다. 북한에서는 임신하면 검진도 안 받고 그냥 날 달에 병원에서 낳기도 하고 집에서도 낳는다. 나는 첫애는 병원에서 낳았고, 둘은 집에서 낳았다. 중국에 나오기 전까진 남한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첫 번째 탈북
94년 김일성 서거 이후부터 많은 고통을 받았다. 96,97년에는 먹지 못해 죽는 사람이 많아 시체처리반이 따로 있었다. 배급은 없어도 식량 배급표는 남편과 같이 나왔는데 97년부터는 아예 배급을 받지 못했다. 너무 살기가 바빠 중국에 있는 언니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98년 12월 온성과 남양을 거쳐 탈북하였다. 막상 탈북하여 보니 언니에게서 도움을 받는 것도 여의치 않아 연길의 어느 집사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집사님이 하나님 믿으라 해서 하나님이 어딨나 했다. 다음날 다시 가니 캐나다, 미국, 한국, 이탈리아 목사 4명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내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를 했다. 이 사람들이 날 미치게 만드나 했는데 방원기도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은 심양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이어서 서탑까지 나와 콩나물 장사를 하다가 어떤 때는 차를 못타고 걸어서 가기도 했다. 하루는 콩나물 세근을 못 팔아서 그 근처 동네에 팔러 가다가 마음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나 내가 북에서 미용사로 일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동네에 이발소를 꾸려줬다. 그래서 거기서 이발소를 하다가 2001년 10월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당했다. 그때는 김정일 장군 방침으로 중국 들어갔다 나온 사람은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말고 웬만하면 그냥 보내라 해서 한 달 동안 조사받고 나왔다. 보위부 조사에서 때렸지만 그다지 많이 맞지는 않았다. 내가 있을 당시에 중국에서 임신한 여성들이 많이 송환되었는데 본인 생각과는 관계없이 강제로 유산시켰다.

한 달 만에 풀려나가 2001년 11월 다시 온성을 통해 탈북하여 원래 있던 심양으로 가서 살다 2003년 7월 북한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러 북으로 들어가 온성을 통해 중국으로 다시 들어왔다. 아이들을 신학 공부하는 곳으로 보냈는데 한 달 만에 그곳에서 체포되어서 아이들 셋이 다 북송되었다. 나는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서 아이들을 만났는데, 큰 아들은 너무 많이 맞아서 앞니가 빠졌고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였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 아이들에게 다시 중국으로 가자고 하니 아들 둘은 너무 혼나서 다신 중국에 가지 않겠다고 하여 딸만 데리고 나왔다.

공안에 체포와 북송
2004년 1월 1일, 오랫동안 한 곳에서 살다보니 중국에 아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교회 분들도 나를 많이 도와줬다. 그동안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하는데 한 어머니가 혼자 있으니까 집으로 오라고 하여 그 집에 가서 놀다 저녁에 집으로 들어가는데 집 앞에 까만 차 하나가 있었다. 경찰차가 아니라 까만 승용차였다. 경찰차였으면 그길로 도망을 쳤을 텐데 누가 앞에 있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문 열고 들어가 불을 켰는데 중국 공안 3명이 들어와서 신분증을 보자 했다. 내가 신분증이 없다 했더니 한 조선족이 들어와 ‘북한 사람이죠?’ 하더니 쇠고랑을 채웠다. 옷을 벗은 상태에서 체포됐기 때문에 내의바람으로 그냥 끌려갔다.

그곳 경찰서 외사과에서 사진 찍고 3일간 조사를 받았다. 조선말 하는 사람들이 번역했는데 중국 어디에 있었는지, 북한에서는 어디에 살았는지, 누가 도와줬는지, 누가 돈을 주었는지 인신매매였는지 등을 물어보았지만, 그런 건 없다고 했다. 거기서 조사는 길게 안하고 간단하게 했다. 이곳에서 단동으로 갈 때는 기차로 갔는데, 나 이외에도 탈북여성 2명이 함께 가게 되었다. 우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족쇄를 이어서 채워 끌고 갔다. 호송하는 사람들은 외사과 2명이었다. 심양역전에서 내가 약하니까 족쇄에서 손을 뽑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기로 했는데 나만 도망가고 다른 두 명은 가만히 서 있는 바람에 나는 다시 공안에 잡혀 구둣발로 많이 맞았다. 그때부터는 소변도 못 보게 하더라. 다시 도망치려고 해도 기차 창문이 두 겹이라 깨고 도망칠 수 없는 상태여서 도망하는 것을 포기한 채로 단동 변방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집이 어딘지 등을 묻고 일주일 만에 신의주로 넘겼다.

북한으로 송환될 때 탈북자는 11명이었고, 봉고차로 운전수와 호송인 두 명이 함께 갔는데 한사람은 문건을 처리하는 사람이다. 다리 중간에 북한에서 데리러 나와 인원확인하고 문건과 함께 북한보위부로 넘긴다. 북에 도착하면 중국 족쇄를 풀고 몽땅 끈으로 연달아서 묶고는 걸어서 신의주 보위부까지 갔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도착하자마자 몸 검사를 하고는 주사기로 피를 뽐아 무슨 병검사를 한다고 했다. 여자, 남자 갈라서 여자쪽은 여자 군의가 와서 고무장갑 끼고 임신한 여자건, 처녀건 상관없이 다 자궁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항문에도 손을 넣는다. 뽐뿌질을 100개씩 시키는데 그렇게 하면, 돈이 빠져나오기도 하니까. 벗어 놓은 옷은 솔기마다 숨긴 돈이 없는지 살펴보고는 감방으로 보내진다. 같이 간 사람 중에는 임신한 사람들이 없었지만 다른 무리에는 임신한 사람이 있었는데, 보위부 밖으로 나가서 낙태시킨다.

한 감방에 11명이 들어가는데 그 곳은 앞에 화장실이 있고 문에 밥 들어오는 곳이 있고 쇠창살은 없다. 밖으로 쇠창살이 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르게 양팔을 뒤로 묶고 1층에 있는 독감방으로 보내졌다. 독감방의 크기는 한사람 누울 수 있는 정도이고, 아주 작은 창문이 하나 있다. 낮에는 앉아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놔야 한다. 주먹을 펴서도 안 된다.

나를 왜 독감방에 가뒀는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다음날 보위부에서 하느님을 믿어서 그런 것이라 말해 나는 하느님 안 믿는다고 했다.

나는 중국에서 청진 아이와 같이 체포되었는데 그 아이는 심양에서 술을 팔았다. 바로 그 청진 아이가 나를 중국에서 교회에 다녔다고 꼬장했고, 그 아이 중국 남편이 손쓰는 바람에 그 여자는 풀려났고, 나는 독감방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3일간 조사를 받았는데 아침밥 먹고 8시부터 12시까지 한다. 중국에 언제 갔으며 어떻게 갔는가? 중국 가서 뭘 했는가? 한국 사람들 만났나? 외국 사람을 만났나? 안기부사람 만났는가를 묻는데, 한국 사람들 안 봤다 하면 거짓말이라 할 것 같아, 캐나다 미국 목사 다 만났지만 말은 못했다고 했다. 한국 목사들은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을 만나 밥을 얻어먹었다고 했다. 조사가 끝나면 다시 가만히 앉아있어야 한다.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때리지는 않았다. 식사는 강냉이 갈아서 쌀겨가루 조금 주기도 하고 통강냉이를 납작한 사라에 까일 정도로 준다. 국은 시레기가 들어간 멀건 국인데, 세끼가 몽땅 그렇다. 난 밥 먹을 생각이 없어 먹지 않고 내보냈다. 물은 시멘트 콘크리트를 파서 그 안에 물을 받아 시간별로 주었고. 이를 잡는 시간을 주었지만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이가 없었다.


고문의 연속인 보위부 감옥에서

나는 신의주 보위부에서 일주일 만에 평성 보위부에서(내가 평남 북창 출신) 남자 두 명이 데리러 왔다. 내가 뛸까봐 자기들과 같이 족쇄로 묶어 기차로 이틀 걸려서 평성으로 갔는데,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같이 족쇄로 묶은 것이다. 평성 보위부를 가는 중 하룻밤은 여관에서 자야했는데, 나를 데리고 가는 남자직원하고 한 방에서 자게 되어 기가 막혔다.

다음날 평성 도보위부로 낮 1시쯤에 들어갔다. 평성보위부에서 밥 주는 것을 안 먹었다. 기차역에서 내리니 평성 역전에서 보위부까지 거리가 있어서 전투차가 마중 나왔다. 차로 평성보위부에 도착하니 역시 독감방으로 보내져 2005년 2월까지 1년간을 그 곳에 갇혀 있었다. 방의 크기는 정말 작은데 거기에 세수하는 곳과 화장실도 있고, 항상 신의주 보위부에서와 같은 정좌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우선 옷을 다 벗고 자궁검사와 옷 검사를 또 한다. 모든 물건(칫솔, 옷)을 확인하고, 머리가 길면 다 머리끈도 빼앗는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밥을 주었는데, 강냉이밥과 오이 꽁지, 가지 꽁지를 삶은 시레기국을 조금 준다. 신의주보다 평성에서 주는 밥이 더 나았지만, 나는 이틀 동안은 거의 안 먹었다. 아침 5시에 기상해서 세수하고 정좌 자세로 있어야 하고, 아침식사는 7시, 점심 12시, 저녁 6시이고, 밥은 세끼 똑같은 것을 준다. 바닥은 그냥 시멘트로 되어있고, 2장의 군용 담요를 주는데, 온전한 건 덮고 얇은 건 깔고 자는데 엄청 춥다. 밤 10시가 취침인데, 자살할까봐 손을 담요 밖으로 꺼내어 배위에 올려놓고 자야한다. 평성 감옥은 지상 1층에 있고, 조사받는 곳은 3층이다.

보위부에 들어가면 이름은 없어지고 번호가 붙여진다. 나는 42번이었다. 아침 8시부터 불러내어 조사하는데, 사람들이 안보여도 목소리는 들리니까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몇 명 있었는지 기억은 못한다. 내가 나가면 새로 들어온 사람이 42번이 된다. 문 열고 ‘42번 나오라’ 하면 선생을 못 쳐다보고 머리를 숙이고 걸어 나가 손을 뒤로 하고 쭈그려 앉는다. 누구를 볼라 치면 뺨을 맞는다. 3층 예심실로 가 처음에는 간단하게 물어본다. 예심실은 크고 김정일, 김일성 초상화와 책상과 의자가 있다. 나는 수갑을 뒤로 찬 상태로 구석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 옆에 길이가 긴 몽둥이가 있다. 그 사람은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신의주 보위부에서 넘어온 문건을 보며 ‘중국에 왜 갔나’, ‘하나님 믿었나?’라고 묻길래 ‘안 믿었다’하니 ‘너 맛 좀 봐야겠구나’ 하면서 서너 시간 심문하고 12시에 끝났다. 첫날은 묻기만하고 때리지 않고 감방으로 보내졌다. 그 다음날부터 일주일 정도는 낮에 심문했고, 일주일 지나서부터는 밤 9시 반에서 10시 사이, 11시 반, 12시에 불러내어 새벽 3시까지 잠도 재우지 않고 심문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거기서의 1년이 10년 같았다. 첫날 이후부터는 조사받을 때마다 맞았다. 맞을 때는 차라리 괜찮다. 불려서 조사실로 갈 때는 정말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다가왔다. 말할 때는 의자에 앉아서 말하지만, 앞으로 나와 꿇어앉으라 한다. 뒤로 팔이 묶인 상태에서 구둣발로 옆구리와 가슴을 차고 몽둥이로 맞았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아픈 것도 몰랐다. 계속 때리는 것은 아니고 심문하다가 내가 부인하면 아무데나 때린다. 귀는 손으로 때려서 윙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저녁에 귀가 붓기 시작했다. 지금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짝짝이다. 머리도 맞으면 번쩍 하고 눈에서 별이 보였다. 그렇게 맞고 감방에 들어오면 창문도 없는 깜깜한 방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나는 끝까지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면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 하니까.

1년 동안 나를 조사하고 때린 사람은 김창남이다. 그 당시 50이 넘었으니 지금은 60이 넘었을 것이다. 조사받은지 5달이 지나가며 내가 살아서는 여기서 못나가겠구나 생각하고, 차라리 죽으려고 먹지를 않았다. 처음에 맹물 안 먹었는데 3일은 견디기 힘들다. 1주일 지나니까 밥이 들어오는지, 먹어야겠는지 아무 생각도 없다. 보름이 되고 20일 되니까 쇼크 상태까지 갔다. 쇼크 상태였다가 눈을 뜨니 병원 침대에 손을 족쇄로 묶인 채로 포도당을 주사를 맞고 있었다. 그 안에서도 뛸 생각을 했지만, 어디 달아날 방도가 없었다. 계호(간수)들이 밖에 둘이 있었다. 창문으로라도 뛰어볼 생각이었지만 족쇄를 채워 그럴 수 없었다.

병원에서 눈뜨고 나니 바로 보위부로 호송했다. 몸이 붓고 귀, 머리 상처는 전혀 치료 안 해줬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에 어디 아프다는 것도 몰랐는데, 귀 통증은 알겠더라. 그 이후로는 죽을 주더라. 옥수수죽인데, 미음식으로 들여왔는데 그때는 먹었다.

날마다 매 맞고, 족쇄 채우고 나가서 비판서 쓸 때는 풀어준다. 비판서는 예전에 쓴 것을 거의 복사하듯 똑같이 써야 하지 말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다시 쓰라 한다. (신의주에서는 물어보고 대답하고 비판서 쓴다) 다르면 때리는 것을 반복했다. 보위부에서 자백서를 본인들이 쓰는 경우는 없고, 다 써놓고 지문을 찍으라고 한다. 이렇게 날마다 맞고 밤에 심문받는 것이 제일 힘들었는데, 그 때 속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노래했는데, 이 글은 교화소 가서는 글로 쓸 수 있었다.

철창가에서 아버지를 그리는 마음

- 진리로 가는 길은 좁고 험난하여도

변치 않고 가고가면 광명을 보리라

믿음 없이 가는 길에 환란 많은 이 길에

포대만 향하여 곧바로 가게 하소서

-인생에 슬픔과 우여곡절 많아도

우리주님 가신 길에 어찌이기랴

철창가에 눈물로 우리주님 그리는 마음

아버지여 죄 많은 이 딸을 받아주소서

- 산성과 방패로 나를 보호하소서

평안의 날개아래 나를 품어주소서

하늘에서 부르시는 아버지의 그 음성

날마다 은혜로 나를 인도하소서

 

보위부에서 안전부로

안전부는 면회 오는데 보위부는 정치권이기 때문에 절대 면회를 못 온다. 우리 가족은 내가 잡혀왔는지도 몰랐다. 1년 있다가 그래도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은 적이 없다고 하니 2005년 2월 10일에 나를 꼬장한 사람과 대면시키고 나서 보안성으로 넘어갔다. 인민보안성에서는 이미 보위부에서 조사 받아 간단하게 조사 받았다. 조사하는 사람은 남자 한명이고, 몸 검사는 안한다. 거기서는 독감방은 아니고 집체로 15명이 있었다. 중국에서 온 여자 한명, 나머지 경제권으로 (훔쳐먹고...) 들어온 사람이었다. 지금 내 집 방 하나만한 곳에 창살이 있고. 15명 중 아이에게 밥을 안 먹이는 벌을 주었다. 거기도 cctv가 다 있었는데 난 그걸 모르고 내 밥을 국에다 말아서 아이에게 주었다. 먹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먹으라 했다. 다 먹고 났더니 계호원이 날 찾더라. 앞으로 나가서 손을 뒤로 하고 있었다. 창문턱이 있고 창살이 있다. 거기 턱에 무릎을 꿇고 올라서라 하더라. 그리고는 자그마한 몽둥이로 손을 때렸다. 턱 밑에 또 작은 턱이 있는데 거기 서라 했다. 거기 서기 힘들어서 창살을 잡았더니 그것을 잡았다고 손을 몽둥이로 때렸다. 다시 뒷짐 지라 하고 올라서게 하곤 한 시간 동안 벌을 섰다. 그 안 모든 사람들이 다 울었다. 잘 때는 포개고 누워서 잔다. 이곳에는 19살, 20살짜리도 있었는데 개 잡아 먹고 채소를 훔치고 온 아이들이다. 그리곤 계호원들이 젊은 애들을 나오라 해서 몸을 만지곤 한다. 어두운 때 뒷문으로 불러내는데 애들이 갔다 오면 말을 못하지만 눈치로는 알 수 있다. 이곳에서는 면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가끔 계호원들이 옷을 다 벗으라 하면, 옷을 다 벗어 한 곳에 모아두고, 담요로 무리가 덮고 있으면 남자 계호들이 들어와 방과 옷을 뒤진다.

화장실 갈 때는 손들고 ‘42번 한 가지 제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본다. ‘뭐야‘ 하면 ‘소변/대변 볼 수 있습니까?’ 한다. 안된다고 하면 못한다. 벌주는 상태에서는 보지 못하게 한다. 보안성 넘어왔을 때는 대변을 볼 때는 냄새가 난다. 보는 시간이 있다. 설사하는 애들도 자주 가야 하는데 그 아이들이 바쁘다. 보안성에서도 같은 자세로 앉아있었다. 보안성에서는 면회가 가능하다. 나는 아이들이 몰라서 안 왔다. 조사는 안 받고 그냥 앉아 있었다. 오자마자 조사는 3일 정도 한다. 또 비판서를 그대로 쓴다. 보안성, 보위부 문건이 따로 있다.

보안성 넘어왔을 때 공개처형 하더라. 구리선(동선)잘라서 중국에 팔아먹는 사람들이었다. 20,21,22살짜리 남자들인데 다 총살했다. 우리가 봐야 한다고 몽땅 데리고 나가서 맨 앞에 세워 놓는다. 재판이 있는데, 죄과에 대해 말을 쭉 하는데,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재갈을 물린다. 계호들이 강낭밭에 말뚝 세워놓고 그 사람들을 묶어 놓고는 세 번 총을 쏜다. 그 때 마지막으로 봤는데, 2005년 2월이었다.

재판을 받다

보안성으로 넘어간 지 20일 만에 재판을 받았다. 재판 날 가족을 부르는데 내가 재판을 받던 날 그 때 남편이 왔다. 앉아 있을 때는 앞으로 족쇄로 내 손을 묶었지만 재판하는 장소에서는 풀어줬다. 재판은 약 20분정도 했는데 공개재판도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는데 나는 공개재판은 아니었다. 심사원들 6명 앉아있고, 기록원 1명, 변호사 1명 판사 1명 재판검사 1명, 심사위원 2명. 남편은 뒤 방청객에 있었다.

재판에서는 중국에 언제 넘어갔나...등등 심문하고 그냥 판결 때리고 만다. 본인의사, 변호사가 말하긴 하지만 성립이 안 된다. 변호사는 비판서 쓴 것으로 봐서는 그 죄를 감수하라 한다. 난 보위부에 1년 있었으니 3년 교화형에 처한다고 했고, 재판검사가 읽으면 판사가 마지막으로 변호사에게 말하게 하고 판사가 ‘탈북한 죄’로 3년 교화형에 처한다’고 말했다. 판사가 몇조 몇항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정신이 없어서 기억할 수 없다.

재판할 때 판사가 남편에게 이혼할 건가 물어보는데 남편이 이혼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하지 않으면 남은 가족이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물어보나마나 한 것을... 재판이 끝나도 남편과는 대화를 할 수 없었고, 남편이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눈물을 흘리더라. 그 길로 보안성으로 돌아와서 3일 있다가 증산 교화소로 후송되었다.

짐승처럼 산 증산교화소에서의 생활

평성에서 5명이 증산교화소로 호송차로 갔는데, 호송하는 사람은 운전수까지 3명이었고, 하루 만에 도착했다. 같이 간 사람들은 중국에 갔다 온 아이 등이었고 모두 3년형을 받았다. 죄가 약하면 노동단련대 1-2년을 보낸다. 증산교화소는 바다 옆이다.

차에서 내려서 (수갑을 풀어준다) 방으로 들어간다. 몽땅 벗고 뽐뿌질 50개 하고 자궁 집어넣고 검사한다. 면회자들이 뭐 줄 수 있으니까....감방에 오래 앉아있던 사람들이라 그렇게 못한다. 나는 보위부에서 1년 가만히 있던 사람이라 그냥 쓰러졌다. 그리고는 ‘너희들은 사람이 아니다’ 말한다. 거기서도 선생 지나가면 머리 숙이고 있어야 한다. 같이 지나가면 맞는다.

머리를 다 깎이고 옷은 내가 입은 옷 그대로이다. 옷이 없어서 얻어 입고했다. 면회자들이 갈아입을 옷을 준다. 신입생들 교육하는데 들어가서 한 달 동안 교육받는다. 교화소의 규칙에 대해 공부하는데, 도주하지 말라, 당일유상체계 등에 대해 공부한다.

5시부터 일어나서 대청소한다. 밥시간까지 가만히 앉아서 규칙을 외워야 한다. 저녁에는 한사람씩 일어나서 외워서 통과되어야 한다. 어린 애들은 잘 외우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이 못 외우면 맞는다. 밤 9시부터 10시까지 생활총화하고 학습하고 재운다. 한 달 동안 그렇게 하고 반으로 배치한다.

교화소는 1층으로 되어 있고,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감방이 있다. 11개의 감방과 의사방, 경비방, 재봉방 등 14개 정도 있고 식당은 따로 있다. 교화소에는 농사반, 축산반, 재봉반 식당반 등 5개 반이 있고 한반에 45명이 배치되는데, 축산반은 35명일 때도 있다. 축산반과 식당은 경범죄이거나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배치된다.

식사는 강냉이밥 찍어서 하나 내준다. 멀건국이 전부다. 콩 몇 알씩 넣어준다. 밥 먹을 때는 반별로 쫙 앉아서 먹는다. 어떤 때는 한꺼번에 모이는데 약 200-300명 정도 될 것이다. 그렇게 큰데 등잔불 하나이다. 구석에서 누가 내 밥을 채어가서 먹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다른데 있다. 내가 있던 곳은 여자만 있던 곳이다. 한 교화소 안에 남자 여자 따로 있다. 옷을 바꿔 입으려면 찍은밥 5개를 줘야 한다. 밥을 하루 굶고는 일을 못한다. 저녁밥을 안 먹고 주고 다음날 주고 하면서 옷을 바꿔 입는다. 수건과 칫솔은 전혀 없고, 자살할까봐 묶지 못하게 수건을 작게 잘라 준다.

교화소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데 내 옆에 있던 26살짜리가 죽어서 내가 눈 감겨 줬다.  그 곳에는 꽃동산이라고 하는 시체 묻는 산 하나가 있다. 교화소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면 겨울에는 땅을 크게 파지 못해 작은 사람은 일 없지만, 큰 사람은 다리 꺾고 팔 꺾어서 묻고 아무 표시도 않는다. 교화소 안에서 죽으면 공민이 박탈당하기 때문에 그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교화소에서 도주를 시도하면 집체로 벌을 세운다. 반장은 형기를 더 먹이고, 그 반 자체가 대사배려를 받지 못한다. 도주하다 잡히면 총살이라 했는데 그렇게 못하고 기간을 연장한다. 도주하는 것은 두 건을 봤다. 담장이 높게 시멘트로 벽을 쌓고 위에는 쇳줄에 전선이 흐른다고 한다. 꼭대기에는 보초를 세운다.

교화소에서의 하루는 5시에 기상해서, 5시 반에 밥을 먹는다. 아침 먹고 줄서서 나가서 일한다. 9시쯤에 중채를 준다. 바다풀을 준다. 풀이랑 같이 가마에 가루를 넣어서 한 움큼씩 준다. 12시에 다시 교화소로 들어가서 점심 먹고 1시에 나온다. 저녁 8시까지 논밭에서 일한다. 저녁은 또 들어와서 먹고 생활중치학습 10시까지 앉아서 한다.

감방 안은 시멘트 바닥이다. 동복 있으면 동복 덮고 잔다. 담요가 없다. 자기가 가지고 간 것 이외에는 없다. 베개도 없다. 화장실은 교화소 아낙에 있다. 복도 한쪽에 있다. 복도 가운데 보초가 있는데, 도주할까봐 그 보초한테 몇 명 변소 가야 한다고 보고를 한다. 누가 따라가지는 않는다. 아무 때나 갈 수 있었다. 목욕탕은 따로 있어서 목욕 대야 하나씩 주고 일주일에 한번 목욕한다. 볏짚 있으면 따뜻한 물 한 바가지를 섞어서 준다. 면회하는 애들은 비누를 쓰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이발도 하고 농사도 했는데, 농사할 때는 조별로 밖으로 나간다. 조를 나눌 때 반장이 있고 한 조가 6-7명이다. 반장, 조장이 있다. 한꺼번에 줄서서 간다. 김정일 노래 부르면서 간다. 총을 맨 경비 21, 22살짜리인 담임선생 2명이 따라간다. 감시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다. 너무 못 먹으니 먹는 것만 보면 환장하고 달려든다. 개구리나 쥐도 지나가면 덮쳐서 먹기도 한다. 가을철에 가지나 오이도 따러 나가는데 계호원 몰래 먹고 나면 입을 검사해서 걸리면 맞고 한 끼 굶긴다.

의사방은 침대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다른 감방과 같이 시멘트바닥이다. 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죄인 중에 간호원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한다. 주사 놓을 줄 아는 사람이면 된다. 상처 입으면 약 발라주거나 한다. 두 명이 있다. 그래도 정말 아프면 죽어야 한다. 주사기랑 다 준다. 약은 임시대책용이다. 소화제, 설사약이지만 낫지도 않는다. 교화소 안에서 파라티푸스가 퍼져 격리시켰다. 나도 걸렸었는데 밥도 못 먹고 고열 나고 오줌이 저절로 나오고, 그때 죽은 사람 정말 많다. 매일 죽어나갔다. 그 때가 2006년 8월이었고, 나는 한 달간 앓았다. 치료는 코로 호스를 넣어서 목구멍으로 넣어서 물을 넣더라. 밖에서 물약을 받아서 죄인 의사들한테 주고, 밖에 있는 의사들이 직접 와서 치료한 적은 없다.

2007년 2월 5일 교화소 앞뜰에 다들 모아놓고 1445번을 불렀다. 내 번호가 1445번이다. 나를 불러서 다른 말없이 그냥 ‘석방’ 이라고 말하고 2월 8일에 대사면으로 출감증을 받고 증산교화소를 출감했다. 이때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출감했다. 출감증은 살던 곳으로 가서 신고하고 공민증과 바꾸어야 되는데, 나는 그 길로 한 달을 걸어 해산을 통해 탈북했다.

 

자유를 찾고

탈북 후 중국에서 몸을 추스른 다음 다시 북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2008년 3월 미얀마, 태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곳이고 행복하다. 그렇지만 한국에 도착한 지금까지 잠을 못 잔다. 자다가도 보위부 생활에 놀라서 깨곤 한다. 교화소는 사람들하고 말도 하고 햇빛도 보고 했지만...보위부 감방에서 1년은 10년 같았다. 그 때 매 맞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지금 여기 나와 있는 것이 기적이다.

보위부와 교화소에서의 후유증으로 가슴과 귀가 아프다. 가슴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지를 못한다. 맞은 데는 (등) 조금 불편하지만 괜찮다. 못 먹어서 소화가 안 되어서 기름기 있는 음식을 못 먹는다. 먹고 나면 설사를 한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밥, 김치, 생선(기름으로 한 것 안 되고)....원래는 잘 먹었는데 지금은 못 먹는다.

아무리 행복한 곳이지만 북에 남아있는 아이들 생각만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아들 둘은 북한에 남아 있고, 딸은 2008년 8월에 미국에 가 있다고 했지만 아직 딸과 연락이 닿지 않아 답답하다. 아이들과 만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증산교화소에 이인모씨가 와서 이 교화소에서는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말을 한 다음부터 이인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은 한국 교도소이다. 좋다는 말을 했는데 믿겨지지 않는다. 한번 가서 보고 싶다. 북에는 미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