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새 삶을 찾아서 (1)

[탈북자 증언]


내용요약 ; 탈북동기, 한국으로 오는 길, 남한 생활

양 ㅇ ㅇ(탈 북 여 성)

안녕하세요. 양○○입니다. 이름이 남자 같더라도 웃지 마세요. 저에게 기대를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대답을 해드려야 할지 걱정이 됩니다. 제가 살아왔던 과정과 탈북하게 된 동기라던가, 지금 살아가는 과정, 그런 것들을 말씀을 드릴 테니까요, 질문 많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79년 생으로 지금 25세입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함북도 회령시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지도 맨 윗부분 쪽에 회령이라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태어났고 20세 때까지 회령에서 계속 살아왔어요. 그러다가 20세 때, 98년도 4월에 탈북을 했어요. 20세 때까지 살면서, 95년까지는 생활난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아도 저희 집은 잘 몰랐어요. 95년은 제가 17세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쯤이었거든요. 그때부터 생활이 각박해지면서, 식량이 부족하고 사람들이 굶어죽는 그런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보니까 그때부터 내가 배워온 것하고 지금 내가 보는 것하고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됐어요. 왜냐하면 제가 사는 곳이 회령인데, 저희 집에서 20분 내려가면 두만강이 있어요. 그곳으로 중국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우리나라가 제일 잘사는 나라고, 다른 나라는 전부 문제가 있는 나라라는 교육을 받았거든요. 자본주의 세상은 무지하게 혼란스럽고 강도도 많고 질서가 없는 나라로 배웠어요. 마찬가지로 한국도 깡통차고 다닌다고 했어요.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데 두만강에 드나드는 중국 상인들을 보면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들어와서 물건을 파는 중국 사람들의 행동이나 외모를 보니까, 북한 사람들과 다른 것이 정말 많은 거예요. 지금까지 한번도 만져보지 못한 물건들도 가지고 들어오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저게 왜 다를까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어요.

탈북동기

제가 탈북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리자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여러 가지예요. 첫째는 정말 배가 고파서,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두 번째는 돈을 벌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요. 그중에서 제일 큰 동기는 제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을 때예요. 여기서는 여러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을 하면, 앞으로 내가 어떤 학과를 택해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것을 생각을 하잖아요. 저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런 것들은 걱정하지 않았어요. 보통 학교를 졸업하면, 국가에서 일자리는 다 정해줬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됐어요.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학교를 졸업하면 집단 진출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해에 졸업한 졸업생 한 기수들이 모두 농장으로 배치 받아서 가게 돼요. 그래서 원하지 않지만 농장으로 가서 일을 하게 됩니다. 저희 언니도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지만, 청진 군수품 공장으로 발령이 나서 일을 하게 됐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이 굉장히 많이 아프세요. 여기서는 어떤 병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북한에서는 아직까지 진단이 안나와 있는, 전신마비 같은 병이 있으세요. 그래서 옆에 사람이 없으면 굉장히 많이 힘들어 하세요. 제 밑으로는 남동생이 한명 있고, 부모님은 많이 아프신 상황이었어요. 제가 10일에 한번씩 휴일이 있는데, 휴일이 있을 때마다 내려와서 보면, 부모님이 동생 한사람만 바라보고 계시는데, 부모님의 상황이 더 말이 아니었어요. 몸이 많이 쇠약해지셔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누워 계시는데, 저는 그것이 정말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농장을 갈 것이다. 가는데 나는 집 가까운 곳으로 보내달라. 나는 부모님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다.”라고 요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안되었어요. 누구는 간부집 딸이라서 나가고, 누구는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가고, 그런 힘 있는 사람들은 다 나가는데 저같은 것은 신경도 안써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도망을 쳤어요. 북한은 6개월 동안 일을 안하면 강제 노동하는 곳이 있어요. 그곳으로 데려가서 아무 보수도 없이 일을 시켜요.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무작정 내려오긴 했지만 정작에 뭘해야 할지도 망막하고 도무지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식량구입 하는 것 외에는 도울 것이 별로 없을 만큼 심각한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서 더이상 뾰족한 방법은 없고 할 수 없이 산으로 약초를 캐러 다녔었어요. 그때만 해도 중국 사람들이 북한에 있는 약초를 수매 받았었거든요. 수매를 시키면은 그것으로 쌀도 바꾸어 주고 그랬어요. 그래서 중국 상인을 통해서 약초와 쌀을 교환해서 먹고 살고 했었는데, 그것이 화근이 돼서 정말 강제수용소로 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황까지 왔었어요, 솔직히 제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제가 탈북을 결심한 제일 큰 동기는 그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처음부터 탈북해서 한국에 오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정말 못사는 나라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한국으로 온다는 것은 꿈도 안꿨었어요. 물론 못사는 나라라고 들었던 것도 이유지만 한국을 완전히 적대국가로 생각하고 있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던 저로서는 한국이란 생각은 상상도 못하죠. 하지만 나와서 보니까 내가 배워온 것 하고 많이 틀리고 한국이 굉장히 잘산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한국으로 온 것이 잘사는 나라만을 찾아서 온 것은 아니에요. 저는 중국에 와서 돈을 벌어서 다시 고향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북한에서 도망쳐 나오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중국에서 다시 고향으로 가려다 북한으로 잡혀가면 어떻게 될것인지가 뻔했고, 또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다시’라는 말은 어울리지도 않는 상황이었죠. 여러분들도 대충 아시겠지만 잡혀가면, 감옥소에 가서 죽거나 아니면 병신이 되거나 그러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두려웠어요.

한국으로 오는 길

그래서 저는 중국에서 2년 4개월을 숨어서 살았어요. 조선족 집에 들어가서 보수 없이 매일 일해 주고, 밥만 얻어먹은 거죠. 물론 그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지만 돈을 안준다고 어디다가 상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나, 도망을 치면 당장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있나, 어디 갈 곳이 있나, 그런 것이 없잖아요. 그래서 2년 4개월을 정말 죽지 못해서 조선족 집에서 살았었어요. 정말 도망치고 싶었어요, 제가 한국으로 가야 되겠다고 결정을 내렸을 때가 아직도 꿈에서 나타나곤 해요. ‘내가 어떻게 하면 그곳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정말 하루하루 살고 싶었던 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중에서도 제일 슬펐던 것은 도망을 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을 치다가 정말 힘이 없어서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죽었을 때, 나를 위해서 눈물 흩려주고 안타까워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제일 슬펐어요. 아무 것도 없잖아요. 국적도 없는 곳에서, 앞날에 대한 보장도 없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건 내 몸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 중에서 조금씩 조금씩 귀동냥 해서 들은 한국에 대한 환상이 생기더라구요. 한국으로 가면 한국 사람들이 나를 따뜻하게 받아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에는 정말 어려운 길을 택해서 여기까지 왔어요. 한국으로 오면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정말 많았어요. 그때의 어려움을 지금도 잊지 못해요, 책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될 만큼 생생하게 기억이 나요.

제일 암담했던 것은 라오스 국경을 넘어야 태국으로 가서 난민 신청을 하는데 라오스 국경을 넘어야 하는 그때에 저희를 도와주기로 했던 조선족과 연락이 끊겼을 때예요. 그 위치가 어디냐면요, 중국은 이미 지나왔고 라오스와 태국을 이어주는 메콩강이 있는 곳이예요. 이제 메콩강을 건너야 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연락이 끊긴거죠. 일행이 4명이었는데, 돈도 없고 어디 갈 곳도 없고, 메콩강에서 과자와 물만 마시면서 강 옆에서 아무 것도 없이 비닐 방막을 덮고 잤어요. 너무 너무 안타까웠죠. 정말 신이 있다면 ‘도와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었죠. 이게 차라리 중국이면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 라는 생각이라도 들텐데 이미 국경을 어렵게 하나 건너왔고 지금 중간에 갇혀버린 거니까요. 다들 정말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잡혀갈 바에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 돌아가서 맞아죽거나 인간취급을 못받느니 차라리 메콩강에 몸을 던지고 죽자”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거기서 기다렸어요.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괜히 그러지 않아도 걱정이 태산인데 그런 말을 하면은 그게 무슨 화근이라도 될까봐 조용히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죠. 그후에 정말로 어렵게 연락이 닿아서 결국에는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남한 생활

지금 생각에는 북한이 제가 태어난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지금 제게 남은 미련이 있다면 저희 부모님들이 거기 계시고, 그곳이 제가 태어난 고향이라는 것이예요. 이곳에서 제가 행복하다고 해서 고향을 잃어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한번은 가보고 싶고, 부모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정말 하나도 없어요. 지금 제가 대전에 살면서 주민등록증을 받고 한국인이 됐잖아요, 정말 어렵게 왔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받고도 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도 하구요. ‘이제야 내가 정말 인간이 됐구나!’ 그런 생각 때문에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대전에 내려와서 집 받고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보시기에는 제가 여러분들 보다 돈이 많은 큰 부자인 것도 아니고,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어떻게 보면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저는 항상 제가 정말 큰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너무나 크고 정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보석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제가 지금까지 이 모든 어려운 과정을 흔들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참고 왔는데 그 과정을 돌아보면 제가 생각해도 대단해요. 같은 탈북자라도 서로 느끼는 점은 틀리겠지만 저한테는 너무나도 어려운 선택이었기 때문이죠. 앞으로는 어떤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요. ‘하면 된다’ 이런 자신감을 가지게 됐어요. 제 주변 사람들에게 저는 항상 이렇게 얘기를 해요.‘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한번쯤은 넘어보시라고……’ 제가 너무 주제 넘게 이런 얘기를 하나요? 솔직히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꾸 피하다 보면, 자꾸 자신감도 없어지니까 한번쯤은 힘들더라도 넘어보시라고. 그러면 다음에는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생겨도 그 때는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말씀을 드려요. 저는 정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재산을 얻었어요. 지금 가족들과 떨어져 있다보니까 많이 외롭고 힘들어요. 그래도 자신감 하나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대해서는 후에 여러분들의 질문을 통해서 말씀드릴 겁니다.

한국에 온 후, 대전으로 내려가서 1개월을 집에서 놀고 바로 회사에 들어갔어요. 삼성카드 대전지점으로 들어갔는데요, 면접을 보러갔을 때, 저희 지점장님이 면접을 보시면서 카드에 대해서 아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어요. 제가 모른다고 대답하면 정말 모르는 거잖아요. 지금도 정말 고마운 것이, 그때 면접 보러 갔던 사람이 6명 정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카드도 모른다는 사람인 저를 우리가 이 사람을 받아줘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가 안받아주면 또 다른 곳을 가야 되는데, 양보하시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러니까 다른 분들이 다같이 “예”하고 대답을 하셨어요. 그분들한테 정말 감사를 드려요. 제가 중국에서 살면서 조선족들도 많이 만났고, 중국 사람들도 많이 만났는데, 한국에 오길 참 잘한 것 같아요. 저를 받아줄 수 있는 품이 있다는 것이 너무너무 행복하고, 지금도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제가 이제 기본적인 말은 안하고 다른 말을 많이 한 것 같은데요, 질문을 많이 해주세요. 그럼 제가 얘기를 많이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