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삶을 향한 몸부림 – 김화영

[증언] 삶을 향한 몸부림*

 

김화영 (탈북여성)

 

나는 1983년 5월 20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학을 졸업하시고 직장장으로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유치원 교사를 하시다 양정소 선전대에서 손풍금을 연주하셨다. 위로는 오빠와 언니가 함께 살았다. 오빠와 언니는 공부도 잘했고, 오빠는 특히 수영을 잘해서 대회에 나가 일등상도 타오곤 했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탄탄한 직장덕분에 그다지 어렵게 살지 않았지만, 내가 11살 되던 해 아버지의 급작스런 심장병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그때부터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위궤양으로 고생했고, 오빠는 군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면서 폐결핵이라는 병을 앓게 되었다. 공부를 잘하던 언니는 돌격대로 나가게 되었다. 내가 15세되던 1998년 극도로 집안이 어려워지자 식량이 없어 온 가족이 일주일을 굶게되었고, 모든 가족이 병마에 시달리며 희망을 잃게되자 더 이상 북한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첫 번째 탈북

1998년 5월 23일 북한에서 탈북을 도와주는 어떤 아주머니에게 찾아가 중국으로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길로 북한을 떠나게 되었다. 무산에서 만난 함흥언니(25세), 회령언니(22세)두 언니와 함께 저녁에 강을 넘어 탈북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데리고 가는 분(여성)이 연락하는 분인 중국사람과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우리는 무척 초조하였다. 그 이유는 경비대의 눈치를 피하다 보니 중국 땅에 늦게 도착하게 되었고, 중국사람과 만나기로 한 남평 삼합(산속의 움막)을 찾지 못했다. 그 날은 물 속에서 신발도 잃어버리고, 온몸이 젖은 채 산 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앞으로 중국사람을 못 만나면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들을 하며 하루 밤을 보냈다. 다음날 다행히 중국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우리 3명에게 한족에게 시집가라고 권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것을 거부했고, 특히 나는 나이도 어린 내가 시집갈 생각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일을 열심히 하여 돈을 벌고 싶다고 했더니 화룡에 있는 탄광의 일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화룡 탄광에서 하루 8시간씩 돌 캐내는 일을 했다. 셋이 함께 일을 하게되니 조선말만 쓰고 중국말은 배우지 않는다고 세 명을 흩어져 놓았다. 삼교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1998년 10월 6일이 중국의 추석날이다. 나는 그날 무척 몸이 아파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마음이 무척 고운 탄광장이 월병을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했는데, 이것보다는 김치가 먹고싶다고 했더니 그분이 김치를 구해주었다. 몸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아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하는 데 빗이 떨어져 부러졌다. 이때 혹시 나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날 한밤중에 화룡 공안이 숙소에 들이닥쳐 우리 3명을 붙잡아 갔다. 심문을 마치고 우리는 공안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공안은 내가 특별히 도와줄 수 없으니 2층으로 가서 뛰어내리라고 했다. 2층으로 올라가 뛰어내릴 곳을 보니 아득하고, 뛰어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져 잡히기라도 한다면 조선에 가서 병신취급을 받으며 멸시받을 것을 생각하니 뛰어내리질 못했다. 그 다음날 족쇄를 채워 변방대로 이송되었다. 변방대에서 사진도 찍고 도장도 찍었다. 50쯤 되어 보이고. 내 몸의 3배는 되어 보이는 남자가 먼저 언니들을 차례로 불러냈다. 돌아온 언니들은 어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지 인상만 찌푸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불러냈다. 그 남자는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내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조선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테니 내 말 잘 들으라고 했다. 그 남자는 나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강간했고, 지금도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때의 생각만 하면 온몸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고, 가슴속에서 불덩어리가 올라와 내 자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들 3명은 북조선으로 보내졌다. 나는 나이가 어려 아직 공민증이 발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주일만에 청진에 계시는 어머니를 불러 나를 데려가게 했다. 어머니와 함께 무산으로 돌아갔지만 북의 생활은 나아진 것은 없고 예전과 다름없이 굶는 것을 밥먹듯이 했다. 더 이상 북에서 굶고있을 수 없어 11월에 다시 재탈북하게 되었다.

두 번째 탈북

한밤중에 안내해주는 사람 없이 나를 포함한 3명의 여성이 강을 넘었다. 너무 추워 견딜 수가 없었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온 몸을 비벼대며 서로를 부둥켜안고 추위를 견뎠다. 예전의 길을 더듬으며 한참을 걸으니 어슴프레 마을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추위도 잊은 채 뛰어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내가 큰소리로 살려달라고 한참을 소리쳤더니 안에서 문여는 기척소리가 났다. 안에서 아저씨가 나오며 우리를 보면서 “아이 소리가 나서 나왔는데……” 우리 세 명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는 눈치였다. “우리는 북조선에서 왔습니다. 먹을 것을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했더니 우리 집에 먹을 것이 없다면서 다른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방에다 불을 때주며 먹을 것을 가져다주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큼 시간이 지났을까. 밖에서 여러 명의 남자 목소리가 나며 시끄러웠다. 문을 벌컥 열며 “누가 안에 있는가”라는 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라 떨고 있었다. “이 집은 내 집인데 너희들은 누구냐, 누구의 허락으로 이 집에 있는 것이냐……” 우리는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 남자들을 서로 눈짓을 한 다음, 여러 명의 남자들이 우리에게 덤벼들었다. 몸부림을 치며 반항하자 그들은 어린 나를 무자비하게 때렸고, 그 다음은 기억하기조차 싫다.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들이다. 지금 얼굴에 난 흉터자국이 이때 맞아서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나는 인신매매에게 매인 몸이 되어 남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게되었다. 99년 9월경 어떤 외진 곳(동네이름을 기억할 수 없음)의 40세 가량의 중국 남자에게 팔려가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얼마에 팔린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외출할 때마다 내가 도망갈까봐 밖에서 문을 잠그고 외출했고, 밤마다 나를 끈으로 양팔을 벌리게 한 다음 양쪽 손목을 묶고, 몸부림치는 나를 강간했다. 이런 지옥 같은 생활이 6개월간 지속되었다. 어느 날 나의 배가 불러옴을 알게되었고 2000년 9월 사내 아기를 낳게되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 남자를 죽이고 싶은 생각뿐이고, 내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태어났고 2000년 10월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데 중국 공안이 집으로 들이닥쳐 도망할 틈도 없이 아이는 그 집에 버려 둔 채 재차 북으로 송환되었다. 이때는 집에 연락을 해도 집에는 남아있는 가족이 없어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되었다. 나는 노동단련대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6개월 동안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 곳에서 마음이 아주 고운 단련대장을 만났다. 이 단련대장은 자기 딸과 나의 이름이 같고, 나이도 같다며 식당에서 일을 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보다는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6개월동안 있다가는 죽을 것 같이 느껴졌다. 2개월을 견디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2001년 1월 23일 재차 탈북하게 되었다. 나를 어여쁘게 보아준 단련대장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세 번째 탈북

중국을 넘자마자 다시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혀 지난번과 같이 윤락행위를 강요당하고 살게 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쯤 20대의 중국 남자에게 팔려갔었다. 그 남자는 정신 이상자인 것 같았다. 밤마다 나를 괴롭혔고, 반항하는 나에게 말을 잘 듣지 않는다고 마구 때렸다.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자 이렇게 살 바에는 더 이상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북으로 잡혀간다면 3번째의 인데.. 그렇게 된다면 개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죽으려고 내 손으로 내 머리를 칼로 찔렀다. 얼마쯤 지나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머리에 흉터가 남아있다.) 죽기를 바랐는데 죽지 않았으니…… 다시 그러한 생활들 다시 해야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빨리 이곳에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링겔 주사를 뽑아버리고 그 길로 도망쳤다. 어디까지 왔는지…… 어떻게 된 것인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장춘역전 앞에 내가 서있었다. 이때가 2002년 1월 23일 무척 추운 겨울이었다.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울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내가 불쌍했던지 먹을 것을 주고, 친척이 살고 있는 곳의 기차표를 사주고, 용돈을 주며 전화 거는 법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너무도 고마워 어디 사시는지 나중에 건강을 회복한 다음 전화라도 드리겠다고 했더니 아주머니는 너만 잘 살면 된다며 어깨를 두드려주며 헤어졌다. 너무도 고마운 이 아주머니는 평생 잊지 못할 은인이다.

연길에 도착해 친척을 만났고, 친척집에서 거처하며 지내고 있다. 남의 눈이 있어 밖에는 거의 나가지 못하고 방에서만 살고 있다. 몸이 몹시도 쇠약해져서 약으로 하루 하루를 견디고 있다. 가족을 만나고 싶기도 하지만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국소식은 들은 바는 없고 탈북자들의 외국 대사관 진입사건을 보면서 나도 한국으로 가서 떳떳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 이 글은 2002년 6월이 이 여성이 중국에 은신하고 있을 때 본회 실태 조사단에 증언한 것을 녹취한 것이다. 이 여성은 2002년 10월 29일 남한에 입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