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북한에서의 나의 생활

[증언]

 

이 글은 제4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2003.3.2~4)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북한에서의 나의 생활

 

강 혁 (북한이탈청소년)

저는 1986년 4월 4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태어나 살다가 1998년 3월 9일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탈북하여 온 강혁입니다.

 

여기 한국 땅에 오기 전 북한에서의 13년간 저의 생활은 오직 김일성 김정일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신한 신념과 규칙적인 조직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 북한사회보다 더 행복하고 잘사는 나라는 없는 것으로 매일같이 교육 받고 맹세하고 순종하여온 틀에 얽매인 생활이었습니다.

 

저의 인민학교 시절 같은 학급 또래의 친구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지쳐 학교에 못나오는 것도 응당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가 인민학교 3학년 때입니다. 저의 학급여자 동창생이었던 오은경은 먹을 것이 없어 개살구 씨를 까서 한 사발을 먹고 몇시간 동안 배가 아파 몸부림을 치었으나 병원도 갈 처지가 되지 못해 치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채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 학급 친구들은 이런 것도 그냥 묵묵히 울먹이는 것으로 표현할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인민학교 4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랑 친하게 지내던 리광진이라는 애의 아버지는 병이 들어 직업을 가지지 못했고, 어머니는 장사를 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배급도 끊기고, 어머니는 장사도 제대로 되지않아 온 가족이 너무 많이 굶게 되었습니다. 광진이 형제는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뼈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집을 뛰쳐나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들렸고, 어머니도 먹고 살길이 막막해 두 형제만 남겨놓은채 어디로 인가 나가버렸습니다. 결국 광진이는 형과 함께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꽃제비를 치다가 형은 메뚜기 시장에서 굶다가 죽었고 광진이 마저 먹을 것을 훔쳐먹으며 살다가 그해 겨울 강변에서 얼어죽었습니다.

 

그때 시절이 이제 와서 보면 그 모든 북한사회에 반항할 수 없게 만든 보이지 않은 쇠사슬에 우리를 묶어두고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가 하는 것을 이제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민학교시절 우리는 학교수업이 끝나면 농촌동원을 나갔었습니다. 농민들을 도와 밭에서 김도 메고 퇴비도 주고 수확도 하면서 매년 사계절을 넘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밭과 땅은 다 국가의 것이며 농민들과 인민들의 이익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곡식을 수확하여 한푼도 남김없이 나라에 다 바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농촌동원을 다니면서 집 살림도 어려워 친구들과 저녁이면 농장 밭에 들어가 곡식을 훔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농장 밭도 개인 밭도 도둑들이 너무 많아서 인민학교 4학년 때부턴가 군대들이 총을 지고 밭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군대들도 도둑놈들이었습니다. 군대들은 도둑들과 같이 손을 잡고 곡식을 훔쳐서 자기네가 가지고 가기도 하고, 그중 일부는 빵과 강냉이 한 배낭 이렇게 바꿔치기까지 하면서 농장 밭을 자기 밭으로 여기였습니다. 우리 집의 밭도 털리고, 집 텔레비전도 훔쳐가다가 우리 가족에게 들켜 달아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인민들은 군대에게 잡힐까봐 곡식을 훔치지도 못하고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습니다. 하루벌이 하자고 해도 바빴습니다.

 

봄부터 땅에 풀이 돋으면 사람들은 새싹까지 뜯어서 그걸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토끼풀을 해오라고 하면 “사람 먹을 풀도 없는데 뭐”하면서 애들이 투정질을 하면서 할 수 없이 산에나 들에 가서 토끼풀을 해오곤 합니다. 그러면서 토끼를 먹일 풀하고 사람 먹을 풀을 반씩 나누어서 반은 학교에 내고 반은 집에 가지고 가곤 하였습니다.

 

점차적으로 학교에 나오는 학생들은 처음 식량난 때에는 100%에서 40%도 안되었고, 점차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학교에 나오는 애들도 풀을 먹고 살아 온몸엔 풀독이 너무나 심했습니다. 얼굴도 심하게 부어 앞이 잘 안보일 정도였습니다. 정말 불쌍해서 못볼 정도였습니다. 애들은 학교에서 나와도 한시간만 때우고 집으로 가곤 하였습니다. 선생님들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 농촌으로 다 떠나시고 학교도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학교 친구들도 하나 둘씩 죽어갔고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막막했고 하늘은 까맣게 먹물 덮은 것 같이 당장 무너지는 듯한 심정이었습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기 전에는 그래도 강냉이 밥술이나 겨우 들던 것이 김일성이 사망 이후 북한 국민들은 급속히 기아와 빈궁 속에서 헤매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직장생활에서 월급과 배급제로 살아가던 주민들은 월급과 배급을 주지 않게 되자 점차 집안의 하찮은 가구와 이불 그릇 가지를 팔아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그것마저 없는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소나무껍질을 벗겨 우려먹으면 살았습니다.

 

우리들은 그때 탄광마을에서 살았는데 몇년째 되는 전기사정으로 인하여 탄광마다 물이 잠기여 탄마저 캐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땔 것마저 없어 산에 올라가 닥치는대로 나무를 베어 나르며 살다보니 산은 벌거숭이가 되고 풀은 너무도 캐고 또 캐서 풀마저 보기 드문 형편이었습니다. 풀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은 얼굴이 퉁퉁 부었고, 그나마 나다닐 힘도 없어 이불 밑에 드러누워 죽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96년, 1997년도에 우리 고향에 죽은 사람들만 하여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깨어나 보면 옆집 또는 옆 동네에서 죽음의 시체가 쓸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생활이 바빠지자 중국으로 탈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생활에서 저의 아버지도 할 수 없이 생각하다 못해 중국에 건너가 몇달만 벌어오면 얼마간은 살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구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버지가 안계신 동안 저의 어머니는 허리 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앓아 누워 계시어 저 혼자 가마에 죽을 쑤어먹고 학교로 그럭저럭 다니었습니다. 그때 북한에서는 숱한 주민들이 먹을 것이라도 좀 얻을 수 있을까 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건너가고 또 붙잡혀 나오는 등 수라장이었는데 저의 집도 아버지가 중국으로 건너가다 보니 보위부의 감시대상이 되었습니다.

 

때아닌 밤중에 보위부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아버지한테서 연락이 없는가 너회들도 같이 공모하였는가 하고 따지고 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중국돈 250원과 함께 당과류를 사들고 밤중에 두만강을 건너오다 국경 경비대에 붙잡혀 모진 매를 얻어맞고 구류장에 갇혀있었습니다.

 

군 안전부에서는 아버지를 내놓으면 또다시 중국으로 도망칠 수 있다고 집으로 보내지 않고 강제로동단련대에 보냈습니다.

 

강제로동단련대는 일명 꼬바크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중국에 갔다 돌아온 죄 아닌 죄로 숱한 주민들이 잡혀 들어와 강제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이고 먹을 것이 없어 국가 농장에서 채소나 강냉이를 도적질하다 붙잡혀 들어온 사람도 심지어 무 한포기 뽑아먹었다고 도둑으로 몰아 들어온 별의별 억울한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는 우리 아버지 말로는 거기에서는 아침 5시 반부터 일어나 강냉이 껍질을 가루낸 것을 삶아낸 것 한줌과 멀건 소금물에 시래기 두어 잎을 띄운 국이 전부인데 이것으로 배를 채우고 밤 10시까지 고된 노동을 하여야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여기에서 보름동안 일을 하다가 파라티프스라는 병에 걸려 겨우 가석방되었는데 그때 거기에서 대장일을 보는 책임자가 그것도 뒤에서 힘을 써준 덕분에 빨리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잠시이고 이제 병이 나으면 6개월을 채워야 함으로 다시 꼬바크로 들어가야만했는데 정말 짐숭만도 못한 생활을 하는 그곳에 저의 아버지는 두번 다시 들어가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저에게 자꾸 “중국에 들어가 살자”고 “중국에 가면 아무리 못사는 집도 이밥은 다 먹고 산다”고 “여기서 이렇게 살다가는 언제 다 죽을지 모른다”고 자주 설복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교양을 받아오던 어머니와 나는 우리 북한을 떠나서는 어디 가서 살 곳이 더 없는 곳으로 우리 북한만이 제일 사람을 위해주고 배려해주는 나라로 인식하고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먹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같이 말다툼하고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아버지가 저한테 물으면 나는 “죽어도 사회주의를 지키겠다”고까지 하면서 떠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너무도 아버지 성화에 견디다 못해 어머니는 할 수 없이 중국으로 간다고 하자 이모는 “너희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만나겠니”라고 하면서 매일 울기만 하였습니다.

 

1998년 3월 우리는 두만강이 녹아가고 있어 더는 미룰 수 없어 새벽 5시경에 온밤 잠못 이루고 뒤척이다 외할머님과 이모와 울면서 작별하고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산을 넘어 이른 아침 7시경에 국경경비대 초소를 지나 대담하게 두만강 얼음 강판으로 뛰어들어 달렸습니다. 이렇게 중국 땅에 도착한 우리들은 중국에 사는 조선족 동포 집에 찾아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얼마간 일을 하면서 살다가는 이동하고 또 이동하면서 숨어살아야만 했습니다. 중국에는 너무도 많은 북한 사람들이 건너와 북한측에서 송환령을 내려 공안 기관들에서 북한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잡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중국에 사는 동안 우리들은 이렇게 4년 동안에 여기저기 8번 넘게 자리를 옮겨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고 사는 매일매일 편안히 숨도 못 쉬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 저의 식구들은 한국라디오를 통해 수많은 북한 사람들이 자유의 땅 한국으로 귀순하고 살 길 찾아 자유를 찾아 하나 둘 넘어 오는 것을 듣고 하루빨리 한국으로 찾아가길 마음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북한에서 아버지와 제일 친하게 지내던 아버지 친구의 소식을 얻어듣고 마음씨 고운 중국조선족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의 도움에 의해 드디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젠 자유의 땅 한국으로 왔으니 제가 이루고 싶었던 꿈을 꼭 이룰 것이며 앞으로 통일이 되면 나의 고향 땅에 가서 다시 내 고향 친구들과 친지들을 만나서 지난날의 과거와 설움을 다 풀고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