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4

아래의 글은 2004년 7월 제6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수련회에서 증언한 내용입니다.

 

[증언]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4

 

김 지 은
(탈북여성 2002. 3 한국입국)

한국사회에서 놀라고 충격 받은 일들

세 번째로 놀랐던 것은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문제인데요. 한국에 막 도착해 한국 여자들 보면서 한국의 여성들은 한 아이의 엄마로써, 한 남편의 아내로써, 한 부모의 며느리로써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아주 좋게 얘기한다면 당당하고 자기를 찾으려고 하고 모습이 좋게 보였고, 좀 나쁘게 얘기한다면 건방지고, 오만하고 이렇게도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30대, 40대 후반, 50대 남자들은참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다는생각을 했었어요.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상당히 처량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번 국회의원 중 14%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속해있는 사회에서 여성들이 차지해야할 권위, 권한, 지위, 몫을 찾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여성으로써 지켜야 될 다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가정에서는 아내이고, 엄마고, 며느리입니다. 그러한 부분과 사회적인 권한을 찾는 부분들 구분해서 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국은 월급타면 자동으로 통장으로 들어간다는데...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지켜야 될 도덕이나 예절 같은 부분들은 숨겨져 있어야 되는데, 가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실례를 들어보면요. 제가 옆집 아줌마와 상당히 가깝게 지냈었어요. 하루는 저 보고 ‘오늘 우리 아줌마들 모임 있는데 가지 않을래?’ 무슨 모임인데요? 가보면 안다는 것이었어요. 저녁 6시부터 모인다고 했는데 3시 반부터 미리 가 있었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이었는데요, 일단 시장, 백화점, 무슨 마트 이런데 쭈~욱 들려가지고, 사지도 않는 온갖 옷을 다 입어봐요. 그런 후에 5시나 5시 반쯤 그 때 식당에 들어갔어요. 식당에 들어가도 금방 밥을 안 시키더라고요. 일단 시아버지부터 시작해서 시어머니 시동생 등 쭉 얘기하고 친정일 얘기하고 또는 자기 집 얘기 다 한 다음에 ‘누구는 돈 많은 집에 시집갔는데 엄청 구박 받는다더라. 역시 똑같은 애들끼리 만나야 되’ 이런 얘기 한 다음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 다음에 ‘여기서 뭐 좀 먹자’ 그래서 4,5천 원짜리 먹고, 다음달 이때쯤에 또 모이자고 하면서 헤어졌어요. 돌아오면서 아줌마들한테 물어봤어요. “야 오늘 목적이 무엇인가” 그랬더니 그게 다래요. 제가 그 때 ‘아! 그렇게 해서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이런 방법으로도 사는구나. 이런 생활들이 누가 좋다 나쁘다 논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북한 사람의 눈으로 봤을 때 충격적이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문화적 차이가 많기 때문에 놀라운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생각이 상당히 타산적이고, 우회적이고 치밀하게 생각하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아무리 웃으면서 얘기해도 속으로 웃고 있는지에 대해선 지금도 알 수 가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나쁘게 말하자면 상당히 직선적이고, 우둔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좋게 말하면 소박하고 순진하다고할 수 있겠죠. 사실 여러분들이 던지는 말 한 마디에 탈북자들이 상처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이 가끔 북한이 그렇게 못사는가? 라면이라도 먹지. 북한에 라면이 있으면 먹지요. 여러분들은 북한의 식량난이 정말 그렇게 심각할까? 이런 질문을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거든요. 한번은 식당에 초대 받아 식사하러 갔어요. 초대한 사람이 북한 사람이랑 같이 갔다고 맛난 것 먹일려고 고기도 차려 놓고는 “북한에서는 이런 거 못 먹어봤지? 많이 먹어라.” 어디 개들한테 음식 주는 것처럼 들리더라구요. 그 분들은 그런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닌데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리더라구요. 조그마한 부분에서 탈북자들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으니까 여러분들 봉사활동때 그런 부분들을 생각하셨으면 합니다.

또 이런 일도 있었어요. 한국에서는 서로 만나면 명함을 주고받으면서 “다음에 한 번 만납시다. 밥 한번 살게요.” 또는 “차 한 잔 같이 하죠.” 라는 말씀들을 나누죠. 저는 엄청 기다렸어요. 누가 전화해서 밥 사준다는 말 할까봐. 도저히 밥 사준다는 전화 안와요. 차 마시자는 전화도 안 오고, 그래서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역시 너무 약았어. 탈북자들을 완전히 가지고 놀고 있구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게 아니고 한국 문화로 오래전부터 자리 잡은 것이란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 남북은 500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이란 세월을 헤어져서 살았지요. 그 반세기 떨어진 틈이 너무 넓다고 느껴집니다. 서로가 그 사회를 있는 사실 그대로 인정해주었으면 합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 현수막이 빗물에 젖는다고 울면서 뜯어 갔었잖아요. 그때 저한테 북한사람은 머리가 어떻게 되먹었기에 저것을 울면서 뜯어가냐는 항의 전화를 하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 모습이 유치해 보였어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제가 그 장소에 있었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왜! 북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남한도 그런 모습을 비웃고, 욕하고, 유치하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9일정도 광주에서 살았을 때의 일입니다. 서울대학에서 세미나가 있어 광주에서 새마을호 열차를 타고 영등포역에서 내렸어요. 그날 밤 어디서 자야 되겠는데... 그런데 하나원에서 교육 받을 때 호텔은 어떻고, 모텔은 어떻고, 여인숙은 어떻고 쭉 교육을 해줘요. ‘모텔이란 곳은 호텔보다는 급수가 낮지만, 호텔만큼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배웠기 때문에 상당히 비쌀 것으로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여관이나 여인숙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찾아보았지만 영등포에는 여관을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어요. 몽땅 모텔이에요. 두개의 건물 건너 1개가 모텔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한국에서는 모텔을 살림집처럼 이용하지 않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너무 많아서. 여관을 찾다 찾다 못 찾아서 결국 모텔에 들어갔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까 아저씨가 TV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오늘 영업 안하나 보다.’ 생각하고 나왔어요. 그랬더니 아저씨가 왜 그러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숙박할려고..’.이렇게 말하니까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요. 들어가니까 아저씨가 처음 묻는 말이 “혼자 오셨어요?”. 당연히 혼자 들어갔으니까 혼자지.......그때까지 질문의 의미를 몰랐어요. 두 번째 질문이 “자고 갈 꺼예요?” 여관에 들어온 사람이 자지 않고, 잠깐 들어왔다 가는 사람도 있나? ‘잠깐 들어와서 뭐 하지? 왜 여기 와서 1~2시간 보내다 가지?’ 라고 생각하면서 ‘잠깐 들어오는 사람도 있어요?’ 라고 물어봤더니 저를 외계인 보는 눈빛으로 보는 것이예요. 그것이 한국에서 9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아저씨, 나 여기 처음인데요, 무서우니까 안내 칸 옆 방 주세요.” 거기서 자고 다음날 세미나 끝나고 또 자야 되니까 2일 묵을 수 있는 돈 35,000원 내고 “아저씨 나 오늘 또 올께요.”하고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세미나 마치고 뒤풀이까지 하고 나니까 밤11시쯤 됐는데, 교수님들이 어젯밤 어디서 자고, 오늘 어떻게 하겠냐고 물어보셨어요.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저 어제 영등포 모텔에서 잤고, 오늘도 거기서 자려고 35,000원 지불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에게 한 10분 동안 모텔 사용용도에 대해서 강의를 들었던 것 같아요. 교수님들이 저를 오늘은 절대 그곳에서 재울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돈을 찾아야 된다면서 혼자서는 안 되고 여럿이 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양대, 서울대 교수님 2분하고 저하고 가서 35,000원 찾아와서 이화여대 교수님 댁에서 잤습니다.

작년(2003년)에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제가 이런 단편적인 모습들 하나 가지고 남한 사람들은 몽땅 바람둥이라고 한다면 여러분들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하시겠지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상황은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탈북자 모임에서 남한에서 살면서 힘든 부분들을 서로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남한 분들이 탈북자들을 보고 자기들만 살자고, 가족들을 버리고 온 사람들, 뭐 인간성이 있겠어! 이런 말들 앞에서 탈북남자들도 울더라고요.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가족을 버리고 싶어서 버린 게 아니거든요. 서로 헤어지지 않고 북한 사회에서 그 고통을 겪으면서, 이겨내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거기를 떠나온 사람이지만 정말 우리만 잘 살겠다고 니네 될 데로 되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온 것은 아니거든요. 어찌 하다 보니까 상황이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여기에서도 밥 한 알 땅 바닥에 떨어뜨려도 주워먹어요. 저는 과자를 먹다 떨어뜨려도 툭툭 털어서 주워먹어요. 왜! 하나라도 버리면 아까운 거예요.

저도 남한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자살까지 준비했었어요.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유서에 ‘정착금 나오는 것을 누구에게 다 주십시오’ 이런 것을 써놓고는 통일부에 전화해서 자살한다고 대 소동을 벌였었어요. 진짜 죽지도 못하면서 대단히 유치한 해 소동을 벌였지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북한에 있는 사람들, 아직도 중국에서 남한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서 나를 포기하면 그 사람들한테 너무 죄송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여러분들 조선일보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자강도 사람들이라는 일본 영화를 볼 수도 있을지 몰라요. 거기서 강냉이를 40명이서 나눠먹는 장면, 동료가 굶어서 죽는 장면. 제가 북에 있을 때 사실 그대로를 볼 수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내가 죽으면 저 사람들한테 너무 미안하다. 절대 이 상태에서 포기해서는 안된다’ 고 생각하고 많은 분들과 대화를 하면서 힘든 상황은 힘든 대로, 기쁜 상황은 함께 나누고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한 사회가 살기 힘든 사회이기는 하지만 살기 쉽다고 생각하면 엄청 쉽게 살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런데도 제가 남한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기회와 선택권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는 의과대학 가고 싶은데 못 가면 재수, 삼수해서 노력하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요. 북한에는 선택권이 없어요. 국가에서 선택을 해줘요. 북한에서는 의과대학 가기 싫었는데 의과대학 가야만 합니다.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탈북자들도 문화적 충돌을 겪으면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얘기가 좀 길어진 것 같은데요, 궁금하신 부분들 있으시면 질문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질문 : 한동대학교 경영 경제학부 김광욱입니다. 저는 북한에 여성 권리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선생님께서 처음에 들어오셨을 때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에 대해서 적잖이 놀랐었거든요. 현재 우리나라 여권이 많이 성장해서 이 정도 이겠지만 90년데 중반에는 그렇게 여권이 성장하지 못했다고 보고 있거든요. 그 예로 선생님 연령대에 여성 의사분들을 만나기 힘들다는 것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선생님께서 계셨다는 90년대의 여권은 어땠는지, 그리고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해서 우리나라에 기회의 평등이 있다고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제약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북한에서는 여성의 직장을 정할 때 어떤 편견이 있지는 않은가 궁금하고요. 첫 번째 질문이었던 교육 부분에 대해서 우리나라 교육 부분에 대한 추가질문으로 선생님은 북한에서 교육을 많이 받으셨고, 남한에 있는 교육 시스템을 많이 보셨을 텐데요. 그렇다면 탈북자 청소년들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교육 과정을 밟는 게 좋은가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대답 : 북한은 공식적으로 남녀평등권 법령이라는 것이 46년 7월 30일에 발표 됐어요. 여자는 남자하고 똑같은 권리를 갖고 있고, 여자는 역사의 한 쪽 수레바퀴이다. 남자가 오른쪽 바퀴를 굴리면 여자는 왼쪽 바퀴를 굴리고, 같이 굴려서 나라를 번영해 나간다. 그런걸 내세우고 있어요. 그런데 실제 생활을 에서는 원래 우리나라가 가부장적인부분 있잖아요. 지금 북한에 가보면 많이 열려 있다고 생각되지만, 여성이란 부분은 제약된 부분이 물론 많습니다. 북한이 더 많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 많은 모습들이 북한 여성들의 경우에서는 닫힌 사회에서 제약을 받으면 살아가야 한다는 인식이 박혀있는 것 같아요. 뚫고 일어나야지 개척해야지 이런 부분은 없고요, 사회적인 부분에 대해서 본다면 여자라 그래서 대학, 직장에서 제한하는 것은 없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그렇게도 물어보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여자들이 무조건 일해야 하는가?“ 무조건이라는 것은 없고 결혼하기 전에는 무조건 일 해야 돼요.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달라요. 결혼을 하게 되면 여성에 대해서는 직장에서 나갔으면 해요. 싫어해요. 국가에 큰 이익을 못줘요. 여성들도 저처럼 의사나 교사나 유치원교양원이나 이런 직업이 아니면 결혼한 후에 하기 싫잖아요. 결혼을 한 상태에서는 자기의 요구에 따라서 직장을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이혼하고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북한에도 이혼이 있나? 이렇게 물어보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그런데 북한도 이혼이 있고요. 이혼에 있어서 여자의 편을 더 많이 들어주는 편이에요. 남자하고 여자하고 이혼을 하려고 왔는데, 남자는 이혼하려고 하는데 여자가 절대 이혼 못한다고 하면 이혼 안 해줘요. 이혼 사유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데 이혼 사유는 그답지 못해도 여자가 나 이 남자랑 절대 못산다 하면 어느 정도 여자의 편에서 만들어 집니다.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북한사회가 여성에 의해 가정이 이끌어 지는 이런 시스템으로 가고 있어요. 여성들의 지위가 높다 낮다 이렇게 말씀드리지는 못할 것 같구요.

교육 부분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요. 저는 사실 자식을 데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탈북한 어린 학생들을 가깝게 지내보지 않아서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명확하게 해 드리기가 힘이 듭니다.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질문 : 저는 한동대학교 국제어문학부 안유진이라고 합니다. 국내 탈북동포의 모습을 알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국내에 거주하고 계시는 탈북 동포들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시는지 궁금하고요. 어떻게 활동하시고 어떤 공부를 하고 싶으신지?

대답 : 현재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탈북자들의 모습은 제가 겪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것에 대해선 제가 대답을 충분히 할 수는 없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북한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교육부에서 한국 한의대에 6년을 졸업한 사람과 동등한 자격을 교육부 장관의 명의로 받았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한국 한의대 6년을 졸업하면 당연히 의사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도 주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 사람의 경우에는 주어지지 않더라고요. 그러면서 북한에서 의사생활을 할 때 당시에 소지하던 증명서류를 첨부하라는 그런 벼락같은 소리가 떨어졌습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자살을 하려고 생각했었건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의사만 해야 한다는 집착때문에 저는 자살을 생각을 한 거에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언제가 되던 최선을 다해 의사면허를 따 남한 사회에서 의료 활동을 하고 싶은 만큼 펼치는 것이 제 목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