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2)

아래의 글은 2004년 7월 제6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수련회에서 증언한 내용입니다.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2

 

김 지 은
탈북여성/2002. 3 한국입국

 

언니가 “야, 너 잠오냐?” “안와”. 처음으로 굶어서 잠 못 자본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굶는 것을 거의 밥 먹듯 했습니다. 그래도 가끔 저희는 공장을 끼고 있는 병원이었기 때문에 식량을 조금씩 받았어요. 그것으로 생활을 했었지만. 95년도 96년도 너무 힘들어서 연속 8일을 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95년도 봄이었어요.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 한 3~4일쯤 굶으면요 갓난아기 손에 있는 거라도 뺏어먹고 싶어요. 확 뺏어서 내입에다 넣고 싶은 그런 욕망이 막 일어납니다. 체면, 인격 다 없어요. 막 뺏어먹고 싶어요, 그렇게 5일, 6일, 7일 쯤 되니까요, 부엌에 물 떠먹으러 내려갈 힘도 없더라고요. 이불 푹 뒤집어쓰고 가만히 누워있었어요. 생각도 없어요, 식물인간이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 했었었요. 사람이 눈 딱 감고 누워있으니까 구름위에 내가 누워있는 것 같아요. 하늘을 둥~둥 떠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쩌면 땅바닥으로 살그머니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대로 숨이 딱 넘어가면 내일 아침에는 나한테 아무런 머릿속에 걱정이 떠오르지 않겠지 그런 생각을 한 때가 있었어요.

8년 동안 의사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그런 고통을 당하고 나니 북한을 ‘떠나야되겠다. 이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청진에 살았기 때문에 국경하고는 조금 멀었었어요. 근데 가끔 들려오는 소문이 국경 쪽에는 중국과 연계한다드라. 그쪽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차피 저는 혼자였으니까 상당히 자유로웠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대학 7년, 의사생활 8년. 15년동안 공부만 했던 사람이 그냥 맥이 없이 굶어 죽기는 너무 허무하고, 억울하더라고요. 그럼에도 국경을 넘어가기 너무 무서운거에요. 어떨까? 내가 넘어가야겠다는 선택이 잘한 것일까? 잘못한 것일까? 거기가서 못살면 어쩜 이것보다 더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엄청 많이 했었어요. 하지만 최종 결론은 여기서 이렇게 맥없이 죽을 수는 없다. 바깥 사회가 어떤지 한번 보기라도 하자. 내가 모르는 다른 사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알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몇 번씩 중국에 들락날락 하는 탈북자들이 많았어요. 그 사람들은 바깥세상은 여기하고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나가서 한번 보기라도 하자. 그래서 죽으면 죽고 말면 말고 최종 선택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99년 3월 아침 9시에 국경을 넘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물어봐요. “아침9시? 어떻게 아침 9시에 국경을 넘지?” 참 그때도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어차피 제 주변에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극단으로 죽으면 죽으리라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요. 아침 9시를 택했던 것도 그랬어요. 북학은 국경연선가면 한 50m 간격으로 잠복이 딱 서있어요. 모자 쓰고 눈만 딱 내놓고 서있는데, 밤새껏 그 사람들 잠복을 서거든요? 잠복서면 조는지 정말 경각심 높이고 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그쪽으로 해서 국경을 넘으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잠복이 상당히 위압감 있고,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 잠복 선 사람들이 아침 8시쯤 근무 교대를 해요. 그렇게 해서 밥먹고 9시쯤에는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고 힘들어서 쓰러지는 상황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아침 9시를 택하게 된 겁니다. 나는 북한에 있어도 굶어 죽을 것이고, 가다가 총 맞아 죽어도 죽을 것이고, 어차피 죽을 일이기 때문에 한 번 모험을 해보고 죽는다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국은 3월이 봄기운이 완연하잖아요. 북한의 3월은 은 아주 춥습니다. 특히 북한 국경 쪽은 벼랑이 졌고 그 아래 두만강이 흐르는데 꽁꽁 얼어 있었어요. 그때가 3월 28, 29일인데도 중국 쪽은 옥수수밭 야산입니다. 어차피 강물에 들어서야 되기 때문에 얼었을까 녹았을까 결정을 할 수 없는 긴가민가한 생각을 하며 돌덩이를 여럿을 주머니에 딱 들고 강에 들어섰었어요. 한번씩 발짝을 옮겨 들일 때마다 돌을 탁탁 던졌어요. 땅하고 소리 나면 아! 얼었구나. 한 발짝 딛고. 강폭은 한 15m 정도 되는데, 넓은 강폭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그 ·15m라는 넓이가 우리한테는 150리 정도 되는 거리로 생각됩니다. 강물이 얼었는가를 알아보기v위해 돌덩이를 하나씩 떨굴때마다 짱 하고 나는 소리, 심장 팍 터져나가는 소리처럼 들려요. 그래도 무서워서 뒤를 못 돌아보고 그냥 앞을 향해서 걸었어요. 중국 쪽 거의 다 가니까 다행히도 한 2m쯤 녹았더라고요. 얼음을 헤치면서 5발자국을 물이 녹은 채로 넘었어요 .허리까지 물이 오는데요. 딱 중국 쪽으로 넘어 서니까 있 바지와 신발이 모두 얼어 얼음바지 얼음신발이 되어있더라고요. 중국 쪽은 눈이 허옇게 쌓여있었어요. 앞에 보니까 마을이 있었습니다. 저 마을로 가야되겠는 데 바지를 걷자니까 바지가 꽁꽁 얼어가지고 다리가 옮겨지지 않아요. 그 마을에 한 16채의 집이 있었어요. 중국 조선족과 한족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마을에 가서 골목을 이리저리 다녔어요. 어느 집에 들어갈까? 어느 곳에 들어가야 나를 반갑게 맞아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그냥 골목길을 왔다 갔다 하는데 한 할머니가 나오셨어요. 내 형체를 딱 보니까 처참하고 남루하기 그지없죠. “조선소 왔소?‘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예“하고 얘기하는데 목이 꽉~ 매었어요. 조선말 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그런 마음 또는 이제는 살았다 그런 안도감과...하여튼 만감이 교차하며 눈물이 확 나더라고요. 집으로 들어오라 그랬어요. 할머니께서 목욕물 덥혀줘서 목욕하고, 한잠 푹 잤어요. 자고나니까 할머니가 밥을 했는데, 그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달걀을 아마 그 할머니가 8알인가 10알인가 삶았어요. 제 마음에는 몇 년 동안 달걀을 못 먹어 봤기 때문에 그걸 다 먹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밖에 못 먹었어요. 그때 하나 먹고 수저를 놓으면서 상당히 아쉬웠어요. 하나 더 먹고파. 그런데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못 먹는 곳에서 와서 저렇게 게걸스럽게 여자가 먹는구나!‘ 이런걸 보여주기가 너무 부끄러워서 못 먹고 외소했던 점 그것이 아직도 내 가슴에 박혀있습니다.

그 때 또 하나의 충격은 그 집에 들어갈 때 토방에 철 그릇에 밥덩이하고 고깃덩어리가 있었어요. 그때 그걸 보면서 ‘아! 얼마나 음식이 많이 남았으면’ 변할까봐 밖에 내놓은 줄 알았거든요. 하루, 이틀 그 집에서 자며 알아보니까 그것이 개밥이더라고요. 개를 줄려고 밖에 내놓은 것이었어요. 고깃덩어리 기름덩어리들이 뒤굴뒤굴 굴러다니는데 개가 안 먹더라고요. 그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런 밥을 북한에서는 누가 먹을까? 아마 당 비서나 먹겠지?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어쩌면 당 비서도 하루 세끼는 먹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 비서는 중국의 개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 때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후에 그 집 사람들이 얘기를 하는데 제가 한 열흘 동안 아무 말도 안하드레요. 하루세끼 먹고 자고 그 다음에 한국 라디오만 듣고 계속 그랬더래요. 그렇게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가, 제가 처음에 중국 갈때는 ‘중국이 어떤가 한번 보자’ 그렇게 생각하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열흘 거기서 바깥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책들도 있고, 라디오도 듣고, 한국에 대해서도 좀 더 알고, 이러면서 내가 뭔가 모르고 있었구나 하던 부분을 알게 되었어요. 북한에 도로 갈 수가 없구나, 가지 못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도로 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