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1) 김지은

아래의 글은 2004년 7월 제6회 탈북동포돕기 대학(원)생 수련회에서 증언한 내용입니다.

북에서 한국으로의 길 1

김 지 은
탈북여성 2002년 3월 한국 입국

안녕하세요. 김지은입니다.
이곳에 모이신 여러분들 탈북자들을 위해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라고 하니까. 편한마음으로 제가 이 자리에 와서 한 2년 동안 생활하면서 겪었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혹시 궁금한 사항에 질문을 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통일교육원이라는 곳 오늘 처음 와봤습니다. 참 아담하고 아늑하네요. 이런데 많이 서보지는 못했지만, 한번씩 앞에 나설 때마다 상당히 많이 긴장되고 떨립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떨리지가 않네요. 아마 자원 봉사하는 분들하고 함께 있어 긴장을 늦추게 하는 것 같아요. 아! 편하구나 이분들은 뭔가 남을 위해서 나를 던지는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구나. 내가 어쩌면 이야기하는 과정에 조금 실수가 있든가 좀 부족한 부분이 있더라도 많이 양해를 해줄만한 그런 마음들을 갖고 계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많이 긴장되지는 않습니다.

 

북한에서 살 때는 남한에는 자원봉사라는 게 없는 줄 알았어요, 그쪽에서 생활하면서 남한은 자본주의다. 어떤 분들은 자본주의는 아니다, 진정한 자본주의는 아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어쨌든 사회주의 사회에서 살던 사람한테는 그래도 이쪽이 많은 자본주의적인 이런 풍습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고요, 그쪽에서 교육 받을 때는 그랬어요. 약육강식이 판을 치는 사회. 이론적이지요? 그렇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냥 남한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누른다는 식으로 생각했었어요.

 

처음으로 제가 남한사회에 ‘아~ 남한에도 저러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라고 느꼈을 때가 아마 93년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혹시 잘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노인이 그해 3월 15일에 휴전선 넘어서 북한으로 들어오셨어요. 그때 그분에 대한 텔레비전 방영을 하면서 김상원이란분 제가 이름도 잊지 않았어요. 그 부부 두 분이서 뇌종양 수술 하는 희한한 상황에서도 자식처럼 돌봐 주셨더라고요, 그 텔레비젼를 보면서 ‘오! 저걸 믿어야 되나 믿지 말아야 되나? 실제 남한 사람들이 저럴까? 자본주의도 저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나?’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국 와서도 가끔 그분 생각을 해요. 상당히 뵙고 싶어요. 그런데 이번에 6․15에 인천에서 행사할 때 오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부산에서 살고 계시나봐요. 언제 기회가 있으면 제가 꼭 한번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다하는 그런 부분들이 저희들한테 참 큰 부분으로 부각되어요. 상당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고, 남한사회의 전반은 아니지만 가끔씩 보게 되는 이러저러한 모습들 때문에 힘든 남한사회의 모습들이 가려지고, 희망이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고, 이래서 우리가 더욱더 ‘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탈북 동기

저는 북한에서 한의사 생활을 8년을 했어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오! 한의사 생활 좀 했으면 굳이 탈북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제가 탈북을 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첫째로 제가 94, 95년 북한이 엄청 힘들 때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소아과 입원실을 맡아보았습니다. 그때 내 손으로 분명히 살려내야 될 어린 환자들(3살, 5살, 15살까지), 제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아이들을 살리지 못할 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름 한철은 5살 까지 되는 아이들 중에서 소화불량이 많아요. 소화불량이 오면 영양실조가 따르게 되고, 영양실조가 오게 되면 또한 소화불량이 따르게 됩니다. 사실 이전에는 영양실조 같은걸 병이라면 병이고 병이 아니라면 병이 아니거든요. 현재 북한사회에서는 영양실조가 상당히 심각해요. 일단 영양실조 진단을 받으면 체계적으로 1호 식사, 2호 식사, 3호 식사 환자에 맞춰서 식사를 시키면 어쩌면 능히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아이를 살릴 수 없고, 피가 없어 수혈을 할 수 없고, 약이 없어 아이한테 투여할 수 없고, 살릴 수 있음에도 환자가 내 눈앞에서 사망할 때. 사실 영양실조는 사망하는 순간까지도 의식이 크게 가지 않아요. 아이가 기력이 없어져가며 죽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는 순간까지 의식이 똘망똘망해서 선생님 쳐다보는 그 모습이요, 그 모습이 아직 내 마음에 맺혀있어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로 취임할 때 의료인으로써 최선을 다해서 환자들한테 봉사를 하겠다는 선서를 다졌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그렇게 되지 않으니 막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고, 어떻게 해결할 수 없으니까 아! 이 모든 것을 보지 말자, 도피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의사였음에도 생활이 많이 힘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잘 알고계시겠지만,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입니다. 거기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그런 부분들이 없어요. 병원도 국가에서 운영하고 의사도 하루 8시간 일한만큼 국가에서 월급과 배급타고서 생활합니다. 국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월급과 배급을 못주면 생활이 힘듭니다. 이것은 의사나 변호사나 판사나 다 똑 같아요. 노동자나... 거의 비슷합니다. 다르다면 당일꾼이나 군대가족, 안전부 가족 들은 다르겠지만, 그 외의 일반 사람들은 거의 비슷한 생활을 합니다. 저의 경우도 부모가 큰 직위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국가에서 주는 배급으로 먹고 생활하고 했었는데, 그것이 딱 떨어지면서 굶기 시작했어요. 제가 처음으로 굶었을 때가 아마 93년도 9월 9일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북한에서 9월 9일하면 북한에서는 그래도 큰 명절 중 하납니다. 북한 인민민주주의 공화국 창건 기념일이거든요. 그런데 그때 제가 먹을 거 없어서 굶었습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생활하는 분들은 3일 금식, 20일 금식, 또 40일 금식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굶을 수는 있어요. 우리도 가끔 먹기 싫으면 ‘나 한끼 굶을 꺼야‘ 그러는데 없어서 굶을 때 그때는 참 마음이 참 처량하고 처참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언니하고 둘이 시골에 배 주우러 갔었어요. 그런데 9월 달이면 북한은 상당히 날씨가 춥기 때문에 배가 안 익어요. 익지 않아 떨어지고, 벌레 먹어 떨어지고 한 배들이 많았어요. 배 주우려는 사람들이 새까맣게 바글바글하는데 저희도 거기 가서 얼마를 주워 가져와서 먹자니까 익지 않아 딴딴하잖아요. 그냥 못 먹고 삶었어요. 삶아서 어머니 몇 알, 아버지 몇 알, 형부도 일해야 되니까 몇 알, 애기도 먹어야 되니까 몇 알주고 나니 언니하고 저는 굶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굶었어요. 밤 12시, 1시쯤 되니까 잠이 안 오는 거예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