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자유 – 3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자유③

(편집자) 우리는 삶을 살면서 선택을 한다. 그것에 따라서 무언가를 포기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한 동포분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분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충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행동하셨고 그 결과 그것을 쟁취하였다. 이는 전형 적인 희극의 구성을 보는 것 같지만, 정작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오히려 비장감과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남한의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신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동포분의 이야기는 자유의 소중함과 더불어 북한인권의 심각성을 일깨워준다.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

 

네 번째 도강

벌써 네 번째 붙잡혔기에 이름이고 주소지고 몽땅 친구 것을 댔다. 네 번째 도강이라는 것을 알면 총살감이었기 때문에 친구 이름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원에게 돈을 주며 빼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나는 감옥 중 가장 힘들다는 ‘오로’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오로 교화소의 정식이름은 ‘사회안전성 55호 노동 단련대’이다.

그곳에서 노동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지만 보위부에서처럼 일 년 반 동안 앉아만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밖에서 일하면 그나마 풀이라도 뜯어먹고, 바깥공기도 느끼고, 태양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보위부에서는 하루 종일 앉아만 있어야 했고, 행여나 허리를 피면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는 몽둥이에 구타를 당해야 했다. 내가 노동단련대에 있을 때는 700명이 3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50%정도가 나와 같은 도강자였다. 오로에서는 매일 반별로 앉혀놓고 상대방을 무조건 비판하는 것을 시켰다. 그러니 서로 물고 뜯고 잡아먹으려 했다. 그러다 마지막에 상대방 말이 맞지 않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때렸다.

맞아죽은 사람, 굶어죽은 사람, 허약해진 사람, 열병에 걸린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곳은 의지가 약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다 볼 수 있는 옥수수 상자 밑에다 이삼일씩 방치했다. 보통 남자들은 일주일에 4-5명이 죽고 여자들은 1-2명 허약해지다 죽는데 아무래도 여자들이 생활력이 강해 덜 죽는 것 같다. 남자 감옥에서는 특히 시체가 생기면 소 달구지에 올려 매몰장으로 보냈다. 그 곳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은 존재하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까딱 잘못하면 저 신세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버텨낼 수 있었다. 그렇게 노동 단련대에서 2년을 보내고 퇴소할 수 있었다.

자유를 향해...

붙잡혀 갈 때 입었던 옷까지 밥 덩어리 세 개와 바꿔가면서 함경북도 온성까지 왔다. 그리고 다시 두만강을 넘어 연길로 갔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아들은 못 만났지만 부모가 죽은 걸로 되어 있으니까 고아원처럼 부모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주는 그런 곳에서 아버지처럼 군대를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탈북 후, 한국행 있으면 가려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2008년 중국에서 올림픽을 하던 때라 기회가 생겨 선교사를 소개 받았다. 선교사는 한국 기독교에서 세운 학교의 한국 과학기술대학원 교수님으로 내게 일자리를 주셔서 돈도 받으며 일할 수 있었다. 잡힌 경험 때문에 무서워서 고민도 많이 했지만 선교사께서 마지막 기회라 하시며 원래는 말해주지 않는 비밀 루트까지 알려주셨기에 마음을 굳히고 한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거기에 20대 간첩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온 선이 마지막 선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땅

드디어 2012년에 1월 27일 한국 땅에 들어왔다. 그리고 7월 10일 하나원을 퇴소했다. 중국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온 우리 기수 애가 내 아들과 나이가 같아 양딸로 삼았다. 양딸은 자식이 둘인데 아직까지 둘 데리고 먹여 살리기 힘들어 내가 돌 지난 지 얼마 안 된 딸아이를 봐주고 있다. 애기가 있어서 정부에서 생활비와 수급은 받고 있는데 월마다 나가는 임대료도 다른 곳보다 비싸고 보험도 들어 놓은 것이 있어서 나가는 돈이 더 많다. 빨리 몸이 좋아져서 돈도 벌고 그래야 하는데 말이다... 국립의료원에서 진료도 하고, 약도 타고, 검사도 받는데 정확하게 몸에는 이상이 없다 하는 상황에 아직 유방암 검사만 못했다. 아기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었는데 이번에 애기 엄마가 데려가서 한 달 동안 봐준다고 하니 그때 시간 내서 검사 할 생각이다. 요즘에는 신정동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데, 그곳에 가면 북한 사람들도 더러 있어서 예배 끝나고 모임도 가지고 그런 재미로 멀어도 매주 유모차 끌고 그 교회로 간다.

아직도 몽둥이로 너무 많이 맞아서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여전히 약에 의존해 살고 잠도 깊이 자지 못하고 뒤척인다. 하루라도 푹 자는 것이 소원이다. 북녘에 있는 아들을 데리고 오고 싶은데, 몸이 이래서 일을 할 수 없으니 돈이 없어 북한에 가족들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언니랑 중국에 있었을 때는 연락이 됐는데 지금은 연락도 안 된다. 아아... 내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아니 하구나. 북에 두고 왔구나...(계속)

※ 『북한인권』186호. 2014년 4. pp. 2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