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자유 – 2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자유②

 

(편집자) 우리는 삶을 살면서 선택을 한다. 그것에 따라서 무언가를 포기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한 동포분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분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충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행동하셨고 그 결과 그것을 쟁취하였다. 이는 전형 적인 희극의 구성을 보는 것 같지만, 정작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오히려 비장감과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 남한의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하신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동포분의 이야기는 자유의 소중함과 더불어 북한인권의 심각성을 일깨워준다.

 

고난의 시간들

함경북도 보위부 건물의 감옥은 산 밑,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에 있다. 철문으로 만들어진 두 개의 문을 들어가면 그곳에는 내 고통의 기억이 있다. 아주 작은 감방 안에 몽땅 28명이 들어가 조사를 받고, 조사 받는 내내 쇠창살에 묶어두어 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얻어맞았던 기억들이다.  무려 일 년 반 동안 이곳에서 계속 조사를 받았다. 그들은 주먹으로 한 대 내리치고 머리채를 잡아 벽에다 들이 꽂았다. 피가 났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아냈다. 처음엔 잠을 재우지도 않았고 그 다음에는 지겨울 정도로 비판서를 쓰게 하여 한시도 감방에 그냥 앉혀 놓는 법이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저렸다. 따뜻한 옷이나 이불 없이 엄동설한에 찬 나무 바닥에서 생활했다. 차라리 일이라도 시키면 운동이라도 되고 좋을 텐데 햇볕도 멀었던 그 곳에서는 일조차 시키지 않았다.

어느 날 지하교회에서 활동하는 19명이 붙잡혀 왔었다. 수송교화소로 끌려가는 길에 하룻밤을 재우려 19명 전부 내가 있던 감방에 밀어 넣었다. 그날은 모두 앉아서 잤다. 나는 머리 푹 숙이고 어떻게 왔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웃으며 무섭지 않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감옥가도 지켜준다고 했다. 그 19명 중에 애기 엄마도 있었고 가족들도 있었다. 다 죽어가는 할머니만 아이들을 돌보게 하고 79살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전부 감옥으로 끌려온 집도 있었다. 심지어 붙잡혀 온 아이들 중 15살짜리를 19살 공민증으로 만들어서 감옥으로 같이 보냈다. 기독교에 관련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지하교회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 하긴 김일성이 죽은 다음에 그 침대 밑에 몽땅 하나님에 관한 책만 있더라 하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

아침 5시부터 앉아서 밤 10시까지 자지 않고 꼼짝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변소에 갈 때도 허락을 맡아야 하고 하루 종일 움직이지도 못하며, 잠깐이라도 머리를 숙이면 ‘야 이 간나 머리 들어라’ 했다. 이때가 가장 힘들었는데 아무 대꾸를 안 한다고 해서 입이 딱 찢어진 돼지처럼 주먹으로 맞았었다. 약도 못 먹고 곪아서 피고름이 나게 되었다. 그게 또 번졌는데 맞은 곳을 또 맞아서... 피고름을 쏟으며 너무 아파 울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고마웠다. 피고름이 터져 그 다음에 곪지 않고 아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짜 통일이 되면 제일 먼저 뛰어가서 그 자식들 다 죽이고 싶다. 지금은 너무나 힘든 시간이었던 그때를 정말 떠올리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을 그렇게 증오하면서도 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다시 찾아온 기회

정상적인 재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길고 긴 조사가 끝난 다음 국장이 우리를 묶어 세워놓고 아무개 몇 년, 아무개 몇 년. 이런 식으로 형기를 정했다. 처음에는 수송교화소로 15년을 판결 받아 이젠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20일 있다 다시 판결을 했는데, 우리를 한국으로 데려가려던 남자를 조사 했는데 그 사람이 하는 진술과 내 진술이 딱 맞아 떨어져서 가까스로 두 번째 판결에서 무죄를 받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운이 좋게 석방이 되어 감옥을 떠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리 운이 좋지 못해 한명은 맞아서 죽고 둘이 석방되었고, 26명이 수송교화소로 25년을 판결 받았다.

부령으로 보내져 보위부에서 인수인계를 절차를 밟는데 탈북 했던 전력 때문에 그쪽 보위부 관할에서 받겠다는 기별이 없었다. 받았다가 또 도망치면 감독을 소홀히 한 자신들의 책임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요행수가 되었다. 받아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나를 언니에게 인수인계 해줬던 것이다. 언니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탈북! 감옥에서 난 다짐했었다. ‘풀을 뜯어 먹던지 뭐를 먹던지.  벌거지(벌레)를 잡아먹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겠다. 어떻게든 살아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 이렇게 다짐하면서 더 억척스럽게 살았다. 감옥에 갔다 온 사람들은 다 내 생각과 같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도강

부령에서 한 달간 무릎 치료를 받으면서 일 년을 쉬었다. 그러다 몸이 괜찮아져서 언니가 주는 밑천 천원을 가지고 장사를 했는데 몸이 성하지 못하니 본전을 날리고 달랑 이백 원만 남았다. 할 수없이 다시 중국에 가야겠다고 하니 언니가 난리가 났다. 자매간에 쌍말이 오갔다. 마음이 아팠다. 언니는 그렇게 붉은 기를 지키고 있어라. 나는 흰 기를 들고 세계일주 하겠다면서 밤중에 두만강을 건넜다.(인공기와 태극기를 일컫는 것 같습니다. 편집자) 일 년쯤 있다가 온성으로 넘어와 중국에서 친척들이 모아준 650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연길 쪽에서 또 붙들렸다. 갔던 곳에 또 가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딸을 찾고 싶은 욕심에 또 가서 붙잡히게 되었다. 탈북한지 이십일만의 일이였다. 누가 밀고를 했는지 공안에서 붙잡혀 간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붙잡혀 왔다. 군대는 아무리 돈이 있어도 풀려나올 수가 없었기에 끌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계속)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