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자유 – 1

네 번의 도강 끝에 찾은 남한의 자유 ①
(편집자) 우리는 삶을 살면서 선택을 한다. 선택에 따라서 무언가를 포기해야지만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한 동포의 선택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분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를 충족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선택하고 행동했으며, 그 결과 그것을 쟁취했다. 동포의 끊임없는 선택이 희극적으로 보이지만, 정작 이 글을 읽는 우리는 오히려 비장함과 미안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남한의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너무나 많은 것을 포기한 후에야 얻을 수 있었던 한 동포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도강
나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부모 없이 힘들게 살았고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특히 더 어려웠다. 남편이 사망해 집을 강제로 내놓게 된 이후로는 아들, 딸과 함께 낮에는 장사하고 밤에는 역전에서 자면서 3년을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 96년에 힘들어서 더는 이렇게 살수 없다하여 아들은 운송에 두고 딸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간 남자는 인신매매였고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팔려갔다. 팔려 간지 3일 만에 장천에서 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곳에서 나는 몹쓸 일들을 당하면서 고난을 겪었다. 그 후에 딸을 찾기 위하여 연변으로 가서 개산촌에 한, 두 달 있었다. 딸을 팔아먹은 조선족 집에 가서 애도 먹이며 어떻게든 찾으려 했었다. 그러나 누가 밀고를 했는지 두 달 만에 붙잡혀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고, 6개월 동안 노동 단련대에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했다.
두 번째 도강
노동단련대에서 풀려나와 운송에 있는 아들을 만나러 갔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아들은 엄마가 돈에 환장을 해 누나를 팔아먹었다고 나를 몰아세웠다. 말문이 막혀 아들에게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누나를 반드시 찾겠다는 말을 남기고 석 달 있다가 다시 강을 건넜다. 그러나 딸을 찾기는커녕 한 달 보름 만에 또 잡혔다. 국경을 넘어 끌려갔더니 보위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는 숨긴 돈을 찾는다고 온 몸을 다 조사했다. 피도 뽑아서 임신여부, 매독이나 성병 여부도 조사했다. 2000년 8월에 함경북도 집결소에서 한 보름정도 조사를 받다가 온성 노동단련소로 보내졌다. 그렇게 도 집결소에서 시키는 일을 1년간 했었다.
도 집결소에서는 온 가족이 같이 생활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도 집결소에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노동단련대로 보내졌다. 노동단련대에서는 농장이나 집짓는 곳에서 일해야 했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맞았다. 나는 그 곳에서 일하며 너무나 끔찍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정말 혹독한 노동 강도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 아기를 죽이는 것, 약물을 통해 아이를 유산시키는 것, 열병으로 죽는 사람들 등을 목격했다. 일을 가혹하게 시키면서도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 논물이나 개구리, 벌레, 풀도 뜯어 먹었다. 이런 사정에 처하다 보니 반드시 살아남아 다음 도강에는 북한을 꼭 빠져나간다는 각오가 서게 되었다.
세 번째 도강
북한을 빠져 나가겠다는 집념으로, 풀려나온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강을 건넜다. 살 곳은 없고, 딸은 잃어버린 데다, 아들은 온성에 있어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지인의 소개로 연길 흥안에 살았는데 북한 사람들을 모아 한국으로 보낸다는 것을 들었다. 딸을 찾고 아들을 데려온 다음에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한국 브로커가 가기 싫다는 나를 강제로 데리고 갔다. 억지로 울며 연길역을 떠나 심양을 거쳐 단동에서 기차를 탔다. 한 조에 5명씩 조를 짰다. 그리고 아침에 도착해 한 그릇씩 국수를 먹었다. 그 후 동강으로 가는 소형 버스를 탔는데, 아아... 그 버스가 함정이었다. 우리를 데려간 브로커는 이미 심양에서 붙잡혔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서른 명 전원이 탄 버스에서 열심히 기도했다. 동강 쪽에서 배 만 타면 한국 가는 것이고, 그것이 성공이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안차가 우리를 포위하며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 되었다. 아직도 그 때가 생생히 떠오른다. 순간 말이 나오지 않고 얼굴이 마비되면서 꼬집어도 내 살 같이 않고, 정말 눈앞이 깜깜해 지면서 눈물도 안 났다. 공안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와 한쪽 발로 얼굴을 누르고 총을 들이대며 우리를 꼼짝 못하게 했다. 우리는 단동시  공안국에 버스채로 끌려갔다.
빼곡한 차 안에서 남자들은 수갑을 채우고 여자들은 안 채웠는데, 나는 내 머리핀을 빼서 옆에 앉아 있는 남자를 줬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수갑을 풀고 혼자 달아났다. 사실 나도 용기를 내어 조사받을 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너무 무섭다는 생각에 도망칠 기회를 놓쳤다. 우리는 한 달 이십일을 변방에서 매일 조사받은 다음, 신의주 보위부에 넉 달 정도 있었다. 넉 달 있으면서 정말 많이 맞았다. 작은 공간 안에 아기 둘, 여자 8명, 남자 22명이 다 들어가 있었고, 조사를 받던 중 끝내 남자 하나가 맞아 죽었다. 그가 죽은 날 마침 하늘이 우는 듯 비가 억수로 오고, 나도 많이 울었다. 세 번째 도강 전까지는 교회를 다녔으며 조그만 성경책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끌어안고 기도하며, 하나님이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그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절망스러웠다. 생을 포기하고 싶어 약 먹고 죽겠다고 약도 먹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이었을까? 독이 올라 배가 나오고 소화도 안 되고 대소변을 받을 정도가 됐지만 끝내 죽지는 않았다.(계속)
편집: 강지훈<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의학과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