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내가 겪은 북한 생활

내가 겪은 북한 생활

김윤희

2007년 탈북

2008년 한국 입국

북한의 시장

북한의 시장규모는 크지 않고 약 150평 정도입니다. 물건을 파는 한사람 앞에 60cm 정도의 규격을 정해서 자리를 내줍니다. 그 자리에 한해서 농산품, 생선, 중국 수입산 재료를 파는데, 무엇을 파느냐에 따라서 장세가 있습니다. 장세를 지불해야 합니다. 장세는 매일 시장관리원들이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가서 장표를 주고 돈을 받습니다. 그 작은 공간에서 자본주의가 싹트고 있습니다. 삶이냐 죽음이냐의 기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팔고 사는 물자가 어떻게 나오냐 하면, 본인이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 하면 중국 상인들이 중국과 북한을 쉽게 왕래하고 있으니까 그 물건의 가격을 정하여 이들과 계약을 합니다. 본인이 아이템을 선정해서 물건을 사겠다하면 중국 상인들과 계약을 해서 나름대로의 가격을 합의합니다. 경쟁력 있는 물건은 본인이 가격을 정하고 마진을 남깁니다.

중국 상인이 남보다 더 좋은 상품을 가지고 오는가에 따라 마진이 많이 남습니다.중국 상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농민시장이 생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북한주민들이 ‘돈을 벌어야겠다’는 의식을 가진 때가 중국 사람들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때 당시 국가가 배급을 주니까 사람들이 배급에 매달려 살고 있었고 식료품 카드가 있었습니다. 식료품 카드에 치약 칫솔, 양말, 된장 등이 적혀 있습니다. 식료품 카드를 가지고 가면 양말 하나 50전에 삽니다. 월급을 받으면 60원, 70원을 가지고 가서 된장, 간장, 양말, 칫솔 등을 삽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니는 것은 로동법에 의해 출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한 달 월급 60원 정도이면 상점에 식료품을 살 수 있었지만, 때때로 옷이라는 것도 사는데, 그 때는 어떻게 입고 살았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드나들면서부터 남보다 멋도 부리고 새로운 스타일을 입어야겠다는 시점입니다. 농민시장의 규모가 이제는 중국 상품에 이르기까지 많이 확대되어서 생선코너, 농산물, 중국의류, 신발코너, 수입상품 등으로 나뉩니다. 그 때 당시 돈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돈이 필요하지 않았고 저축할만한 돈도 없었습니다.

인기 있는 한국산 물건

지금 북한에서는 한국산 물건에 대한 수요가 높습니다. 80년대 초반부터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상품에 대해 어디 제품인가, 한국산인가, 일본산인가, 중국산인가 등으로 따집니다. 1순위가 한국산입니다. 사회안전원들이 주민들을 모아놓고 특별강연을 할 때가 있는데 안전원들이 구멍 난 양말을 손가락으로 끼워 들면서‘ 이것이 한국산이다’라고 합니다. 한국 상품에 대한 인식을 지워보려고 애쓰지만, 이는 눈감고 아웅 하는 격입니다.지금 한국에 와서 살다보니 북에서 쓰던 화장품이나 옷과는 비교가 안 되게 좋은 것을 느낍니다. 이러한 것을 알려주려고 중국 상인들을 통해 한국옷들을 북한으로 보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도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많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땡처리되는 물건이 있으면 가격 수요를 맞추어서 중국 상인과 거래합니다. 한국 상품에 대한 인기가 높지만, 마음대로 구입할 수 없기도 해서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산 물건은 구입할 때, 한국과 직접 수출하거나 한국 사람하고 직접거래하지는 못합니다. 중국 상인들을 통해서 땡처리 하는 물건들을 보냅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앙고라가 대세입니다. 한국에서 앙고라를 1,000원에서 1,500원 사이에 사서 만원 넘는 가격으로 북한에 팔 수 있습니다. 만장이 넘게 팔립니다. 앙고라는 초가을부터 늦은 봄까지 팔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의식 수준이 예전에는 ‘식의주’였다면 지금은 ‘의식주’로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이 ‘이제는 좀 입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사람들 의식이 조금 발전하였습니다. 지금 북에서 선호하는 물건이 여성의류로는 앙고라이고, 20대, 30대 초반 청소년들은 후드형 옷들입니다. 30세가 넘으면 의식이‘ 의식주’가 아닌‘ 식의주’로 변합니다.

한국산 물품의 라벨은 중국을 통관할 때 잘라서 북한에 들어옵니다.‘Made in Korea’라고 쓰여 있으면 안 됩니다. 라벨이 없는 것이 통관이 안된다면‘ Made in China’로 바꾸어서 보냅니다. 10년 가까이 지나면서 북한 주민들이 물건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습니다. 보면 바로 한국산이라는 표시가 납니다. 차라리 입던 옷이라도 한국산을 입지 새 옷이라도 중국옷은 안 입겠다는 의식이 확산되어 있습니다.

폐개혁

1992년 7월에 화폐개혁 했을 때 파장이 컸습니다. 저도 타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때보다 지금이 더 타격이 큽니다. 그 때는 잘 사는 사람하고 못사는 사람하고 차이가 나 1% 미만이 대상이었지만, 작년의 경우는 북한주민이 아무리 돈이 없다고 해도 10만원을 못가지고 있는 사람이 함경남도이건 강원도이건 없다고 생각됩니다. 북한주민의 99%는 화폐개혁에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내가 죽을 먹으면서라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화폐개혁을 하고 나서는 장사가 너무 대중화되었고, 2년이 지나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내 힘으로 내가 벌어먹지 않으면 죽겠구나’ 하는 의식이 싹트면서 자본주의 의식이 생겼습니다.

작년 북한에서 화폐 교환할 때도 북한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아비규환이다. 목을 매단다. 죽는다는 말이 많다. 이제부터 달러, 중국 돈을 쓰는 사람들은 역적으로 몰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생활하면서 느낀 부분은 당국이 공식 성명을 하면 그대로 집행되거나 지속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일단 선포를 했고 엄하게 했지만,지속성이 없는 것입니다. 10일에서 15일 정도 지나면 그 이후에는 말이 쏙 들어갑니다. 이제 북한 사람들 생각에는 ‘무슨 성명이다’ 하고 요란하게 해도 믿지 않습니다. 은행과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때가 돈을 벌 기회가 됩니다.

신폐가 나오면 구폐는 못쓰게 될 것 같지만, 쓸 수 있습니다.“ 앞으로 5년까지 저금해라. 5년 후면 준다.”하고 규정합니다. 그런 규정이 나중에는 흔들리고 은행들이 뒤에서 서류상으로 빼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은행원 들은 이때 돈을 챙길 수 있습니다. 화폐개혁 때‘ 매 세대당 10만원에 한해서 천원을 준다‘하고 2,000세대가 있으면 2,000만원이 은행에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10배 정도 되는 돈이 들어옵니다. 다른 예산 등이 있으니까. 북한의 은행은 지배인제입니다. 지배인, 과장까지는 돈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은행이 한국처럼 투명하지 않습니다.

은행 거래

은행은 중앙은행이 평양에 하나 있고, 무산지점, 청진지점하는 식으로 지점이 구역마다 하나씩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돈 관리만 해주는 작은 코너, 한국처럼 365코너 같은 저금소가 있습니다. 저금소는 지점의 분점입니다.

한국에서 은행에 돈을 맡기면 이자가 나오고, 필요할 때 찾아 쓸 수 있고, 사업을 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지만 북한에서는 그런 것은 전혀 되지 않고, 그런 시스템이 없습니다. 즉 은행에 돈을 저금하는 것은 남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는 것과 같아 사람들이 달러로 바꾸어서 보관하던가 중국 돈 등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달러나 위안을 가지고 있으면 역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정부가 이를 알면서도 달러나 중국 돈을 못 쓰게 했지만, 한 달도 안 되어서 달러나 중국 돈을 다 은행에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행대출은 서로 의견이 맞아서 ‘너랑 나 사이에 이러면 어떻겠느냐, 어떤 상품인지 구체적으로 안 알려줘도 10만원 빌려 달라’ 하면 2만원 이자가 붙습니다. 내가 그동안 신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지금까지 나를 봐온 그 사람에게 달려있습니다.

은행 이자는 한 달 기준 평균 20%입니다. 그러면 두 달이면 40%가 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 돈 2,000원을 빌려주면 1달 계약해서 1달에 600원을 이자로 물어야 합니다. 그 돈으로 중국에 나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에 가서 있다 보면 돈도 떨어지고 물자도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면 이자를 1,800원을 갚아야 합니다. 3개월이면 60%인데, 그렇게 엄청난 고리대금이 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의 식당

북한이 경제개혁을 하면서 월급이 100원에서 1,000원으로, 그리고 2,000원 가까이 되면서부터 시장이 조성되고 사람들이 돈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회 급양 기업소란 곳이 있었는데, 양표 한 장과 북한 돈 1원으로 쌀 200 그램과 반찬들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당배급이 안 나오면서 양표 또한 사라지게 되었고, 성천식당, 단고기 식당, 국밥 식당 등이 폐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싹트고 식당들이 합의제 식당으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평양의 옥류관, 청류관 등은 일반사람들도 가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옥류관 국수 한 그릇이 1,700원인데, 그 값을 지불하거나 그와 맞먹는 표를 내야지만 식당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사람들이 한 끼를 지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입니다. 이렇게 큰 식당들은 주로 국가가 운영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에서의 통행

90년대 식량이 부족해지고 국가가 통제력을 상실하다 보니 많은 주민들은 허가증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식량을 구하러 다닐 수 있었습니다. 현재도 북에서는 여행증 없이는 다른 지역을 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뇌물을 주면 어느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여행증에는 반복이라는 도장이 있는데, 이 도장이 여행증에 찍혀있으면 계속해서 여행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여행증이 1,000원이면 500원을 더 주고 반복이라는 도장을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줍니다.

북한의 가족 증명

북한에서의 가족관계 증명은 북한에는 주민등록기록부란 것이 있습니다.이것은 북한 보안소 주민등록과란 곳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 주민등록기록부에는 가족관계 뿐만 아니라 가족의 사상동향, 담당지도원의 실시간 감시 동향 등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수 혈족관계만이 아니라 예를 들어‘ 아버지는 입당을 못했다’라든지의 사사로운 내용도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가족관계 확인서 발급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국처럼 어디 취직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없어, 사용할 때도 없고 그냥 아버지 어머니가 누구이고 직장이 무엇이냐는 구술에 따라 증명이 됩니다.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나 기록부를 보지만 일반 경우에는 전혀 필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