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납북, 그리고 30년 – 3

납북, 그리고 30년

(편집자) '납북, 그리고 30년'은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결혼과 계속되는 감시

시간이 지나면서 배치 받은 곳에서의 생활에 잘 적응해 가고 있었다. 주변으로부터 내가 일을 잘하고 있다는 호평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곳으로 배치 받은 후에도 종종 나를 이곳까지 이송해 왔던 연락소 지도원이 가끔 찾아오곤 했다. 이 연락소 지도원이 나를 결혼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얘기를 내가 일하는 단위의 관리책임자들에게 귀띔을 해주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입당(북한의 조선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함을 의미, 입당은 북한에서 성인남자라면 가정 이력에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가입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입당 여부는 배후자를 만날 때도 중요한 문제이다.)도 하게 되었다.

당원이 되고 나서는 분조장(북한의 농촌에서 7~8명으로 구성된 조의 팀장을 이르는 말)과 기술지도원 일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은 올라갈 수 없었다. 나는 남보다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주간에는 일을 하고 야간에 공부하는 야간기술학교에도 다녔다. 당시에 북한에서는 농촌을 선진화 한다고 하여 농업전문학교가 생겼는데 강사들이 일주일에 세 번 직접 농촌 마을회관 같은 곳에 찾아와서 강의를 해주곤 했다. 그렇게 2년간을 열심히 다녀 농업 준기사 자격증을 받았다

일을 잘 한다는 좋은 평가도 받았고 일정한 관리자로 그리고 기술자로 일 하게 되었지만 차별과 감시를 받는다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직접적으로 당한 것은 없었지만 뒤에서 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일도 잘하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노력한다고들 겉으로는 얘기하지만, 안전부나 보위부 같은 사람들은 항상 내 속내를 알아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 일군이라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고 그들이 내 마음을 다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놈들한테 속을 다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북에 있는 자식들은 아예 대학에 가는 꿈조차 꿀 수 없었다.

북한에 있으면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사시사철 손에서 일을 놓기가 힘들었고 열흘에 한 번씩 쉬는 날이 있다고 해도 쉬는 날에는 텃밭 가꾸고, 김매고 하느라 너무 힘들었다. 여자들은 열흘 내내 흙 묻은 옷을 손빨래 하느라 온 하루를 보냈다

가족들에게까지 감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가족들에게도 내 마음 속 깊은 얘기를 솔직히 다 말할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게 남한에 있는 가족들과 부모님 생각이 나 눈물을 흘리면 가족들은 고향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자식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내 뼈라도 내 고향에 묻어 다오라고 말하곤 했다.

고역과 아픔의 기억들

북한의 농촌에서는 아침 5시에 출근해서 해가 져야 일이 끝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이 시간동안 내내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농촌이긴 했지만 식량이 없어서 쥐꼬리만큼 먹기 때문에 서너시간만 삽질하고, , 김을 매고 나면 금방 허기가 졌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도중에 중참이나 간식 같은 것은 꿈도 꿀 수가 없었다.

우리집 형편도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너무 힘들었다. 기차역마다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렸었고, 꽃제비(노숙자)들로 가득했다. 한 번은 회령이라는 곳에 가봤는데 열대여섯 살로 보이는 누나가 힘없이 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홉 살 쯤으로 보이는 남동생위에 앉은 파리를 쫓아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 오고가는 중국 상인들이 먹을 것을 주길 바라고 앉아 있는 듯 했다. 정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렇게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우리 납북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정원이라고 기관장 했던 사람도 굶어 죽었다. 장례식에 갔더니 동네 사람들이 부인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식량난이 지속되면서 여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그런대로 묵인했지만 남성들이 장사를 하는 것은 정부가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하여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활동에 많이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친척과의 연락

우리 집도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노동연한이 다 되어 정년퇴임을 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집 주변에 텃밭을 가꾸고 거기서 나오는 채소를 팔아 쌀을 사오면서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중 94년도에 처음으로 부인이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였다.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중고 옷이며 신발, 밀가루, 외화 등을 가져와서 중국 친척집 방문은 마른땅에 단비가 내린 것처럼 우리 집 경제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98년에 부인이 다시 중국에 들어갔다가 중국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한국에 가족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중국친척들이 한국 가족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내가 편지를 쓰면 한국 가족에게 전달해 줄 것이라고 했다. 편지를 보내는 것도 매우 조심스럽고 나름의 작전이 필요했다. 나는 생각 끝에 부인 편에 편지를 보내지 않고 중국친척들을 만나는 대로 조카를 세관으로 내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세관 앞에서 3일간 조카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2일 만에 세관에 나온 중국친척에게 담배 대 모양으로 된 편지가 들어 있는 담배 곽을 주며 한국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편지에는 처남한테 편지 받아 봐라, 간단히 내 소식을 전한다. 주문진 누나에게 소식을 알려주라. 소문은 내지 말아다오라고 적었다. 중국의 조카가 한국과 연락을 한지 이틀 만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고 한국에 있는 우리 형님의 전화를 부인이 중국조카 집에서 받았다. 부인은 한국 가족들의 집주소와 전화번호 그리고 현금 200달러를 받아 돌아왔다.

한국 가족과의 연락, 그리고 탈북

그렇게 한국가족들과 연락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만에 하나 한국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이웃들이나 보위부원들이 알게 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가족과 연락을 다시 주고받은 이후로 한국에서 보낸 편지도 받았다. 편지를 받자마자 읽어 볼 새도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러나 한국에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때가 2000년 이었다. 한국 가족은 그때부터 납북자 가족회와 함께 나를 한국으로 데려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나를 한국으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겁이 나고 무서워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기야는 북한의 보위부원이 쌀을 가지고 아예 우리 집에 살림을 차리고 우리 가족과 함께 먹고 자기에 이르렀다. 

나는 당 일군을 찾아 갔다. “나를 왜 감시하나? 탈북 안할 거다. 감시 시키지 말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 이후로는 보위부 감시원이 집을 떠났고 한동안 감시망도 주춤해 지는 듯 했다. 이때 한국에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이 왔다. 나는 그 사람과 내가 미리 생각해두었던 장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떠나면 분명 동네에 감시하는 눈이 많아 금방 보위부에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가족들에게 누가 물어 보면 내가 시장에 갔다고 해라. 만약에 내일에도 물어 보면 마찬가지로 시장에 갔다고 해라라고 입단속을 시켰다.

나를 인도하러 온 사람은 국경경비대에 돈을 주면서 중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까지 약속 하고 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 처음 도착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능한 빨리 한국영사관으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에서 몇 일간 숨어 지내다가 연길로 가던 중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다. 나는 급한 응급처치만 받고 병원을 나와 선양에 있는 한국총영사관으로 들어갔다. 2007116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가족들과 재회하였다.

편집: 오세혁 전 조사연구팀 간사

※ 『북한인권』 178, 2013년  7〜8, pp.2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