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납북, 그리고 30년 -2

납북, 그리고 30

 

(편집자) ‘납북, 그리고 301975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758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우리 배 엔진 동력과 북한해군 배 엔진 동력을 포함하여 2척의 배가 함께 가동했는데도 6시간이나 걸려서 북한수역에 있는 어느 한 항구에 도착했다. 6시간의 거리는 우리배가 북한해군에 발견되던 당시 북한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도 북한군은 우리배가 북한해역에 있었다고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는 배위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동안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이 다 들었다. 그동안 남한에서 들었던 소문들이 기억났다. 들었던 바대로 정말로 북한에 도착하면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 마음은 너무 착잡하고, 막막하고 억울했다. 왜 끌려가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사랑하는 가족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저 북한으로 가야한단 말인가? 배위에서 저항해 보고 싶었지만 북한군의 겨누고 있는 총부리를 보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북한의 원산항에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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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위에 상황은 한 마디 말만 했다가는 당장 무슨 피해가 날아올지 몰라 조마조마했고 그 속에서 우리는 더 애간장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디선가 북한 강원도 원산항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어느새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지만 항구에는 환영인파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북한군이 우리가 북한으로 월북했다고 허위로 미리 상부에 보고를 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있더니 군인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다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초대소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건물 외형이나 시설들이 꽤 괸찮은 편이었던 것 같았다. 대우도 그만하면 괸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무엇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배를 만들어서 1년도 타보지 못하고 잡은 고기와 배를 모두 빼앗길 것을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잠도 오지 않았다. 밥을 먹어도 모래알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시간만 보냈다. 한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사상교육이 시작되었다. 초대소에서 하루 일과는 아침 6시에 기상, 아침체조 하고, 그리고 다시 숙소로 들어와 세수하고 7시에 아침식사하고, 8시 반부터 집중 강습을 받고 12시까지 계속됐다. 이렇게 아침일과가 끝났다. 강습은 한 번에 90분 동안 들었고 10분 동안 잠깐 쉬고 다시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점심을 먹고 약 한 시간동안 오침을 하고 오후 강습이 시작 되었고 3시간 동안 두 강습을 듣고 오후 강습 일정이 끝났다. 강습이 끝난 후 체육운동도 하고 저녘 식사를 하고 북한체제 선전용 영화를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보통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누워도 두고 온 처자식들이 눈앞에 얼른얼른 거리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도 잠도 않고 긴 한숨만 나왔다

그러니 김일성의 주체사상이니, 혁명역사니, 사회주의체제의 우월성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듣고 있어도 귀에 들어올 리가 만무했다. 우리가 가장 기다리는 소식은 우리를 과연 언제 돌려보낼까 이었다. 3개월이 지나고 6개월 지나도 돌려보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는 대답은 하지 않고 대신 계속 기다리라는 말뿐이고 수령님의 교시가 있어야한다고 하니 어떤 동료들은 무의식적으로 불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회는 거짓말도 안한다고 하는데 왜 보내준다고 하고 보내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결국 원산초대소에서 10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초대소에서는 구타나 고문 같은 행위는 없었으나 불평을 하면 요주 인물로 찍히고 나쁜 놈으로 취급을 하여 이런 말도 자주 할 수 없었다. 단지 하도 억울하고 답답하여 늘어놓은 푸념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지다

 

원산 초대소에서 생활한지 9개월쯤 되니 사회에 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직감했다. 우리는 어쩌면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집에 돌려보낼 거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바보 같았다. 우리는 큰 버스에 타고 기차역까지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가기 전에 우리를 인솔하는 5과 지도원 이라는 사람이 각 사람에게 북한 돈 200원과 가방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겉옷을 챙겨주었다. 보내달라는 고향에는 안 보내주면 크게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우리를 위로한답시고 안심시키려는 수작이었다. 그렇게 어찌할 방법 없이 30년 세월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다

배치 받은 곳은 함경북도 김책시의 어느 한 시골 농장이었다. 이제 아는 친구 하나 없이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으로는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다. 의지할 사람도 말 친구를 해줄 사람도 없이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이었다
 

처음 도착하자마자 나를 인솔해 간 5과 지도원과 함께 내가 일하게 될 농장 관리워원장과 초급당 비서를 비롯한 간부들과 만났다. 해당 협동농장에 배치 받은 것을 환영하며 앞으로 일도 열심히 하고 당과 수령을 위해 성실히 생활하면 좋은 일들이 있을 거라고 위로해 주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는 처음에 환영인사를 할 때와 전혀 달랐다. 처음 거처할 집이 없어 늙은 노부부가 사는 윗방에 곁방살이로 들어갔다. 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했고 정 붙이기가 너무 힘들어 잠이나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잠만 그곳에 자고 밥은 합숙 식당에서 먹었다. 남쪽에서 왔다고 특별히 심한 노동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다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말을 조심해야 했다. 둘이서만 말한 얘기가 다른 사람을 통해 여러 번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나는 둘이 있을 때는 절대 속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고 얘기 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다고 해도 나를 보호 할 수 있었다. 세 명이서 모여 이야기 할 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어떻게 보고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이 북한 보다 좋은 점에 관하여 말을 하면 큰일이었다. 혹시나 주변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북한보다는 힘들고 어렵게 산다고 말을 해야 했다 

사실 내가 납북 되던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의 경제 형편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한국이 항상 그렇게만 살고 있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고향 한국이 언젠가는 더 발전하고 있을 거라고 근거도 없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북한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는 것은 남한의 대학생들이 시위하고, 깡패들이 나오는 것만 보여주었다.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소식과 8·28 도끼 사건도 한국이 도발을 했다고 북한주민들에게 역설하는 것도 들었다. 북한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보여주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었지만 점점 고향 한국이 더 발전할거라고 굳게 믿고 싶었다.

 

 

편집: 오세혁 조사연구팀 간사

북한인권』 177, 2013년 6월, pp.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