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납북, 그리고 30년 -1

납북, 그리고 30년 ①

(편집자) ‘납북귀환자의 이야기’는 1975년 8월 동해 공해 상에서 어업을 마치고 귀항하던 중 납북되었던 어선 ‘천왕호’와 배에 탔던 선원 33명 중 한 사람인 최욱일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한의 가족과 납북자가족모임의 도움으로 극적인 탈북에 성공하여 2007년 1월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 납북된 33명중 22명은 모두 굶어 죽었다. 지난 3월 15일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제네바에서 열린 제99차 유엔 강제적·비자발적 실종에 관한 실무그룹 미팅에서 최욱일 아버님이 북한에서 자신을 포함한 납북자들의 생활을 증언할 수 있도록 하였다.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를 가로지르며, 경기도 안산에 살고 계시는 최욱일 아버님 댁을 방문했다. 납북된 지 32년 만에 황혼의 나이가 돼서야 재회하여 새로 시작한 신혼 부부 마냥 행복에 젖어있는 이들 노부부에게 아팠던 두 인생의 지난날들을 기억하게 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아프지만 행복한 오늘이 있어 즐겁게 추억할 수 있고, 힘들게 버티고 이겨낸 세월이 있어 최욱일 씨 부인이 구수하게 부쳐낸 메밀김치 지짐과 한 잔 술이 더 맛나게 느껴지는 듯 했다. 아픈 그들의 지난날들은 오늘의 행복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았다.


꿈과 함께 만든 기계배

내 고향은 강원도 주문진읍 교향리이다. 이 고장 토박이로 시집간 누나도 같은 동네에 모여 살았고 온 가족이 그렇게 같이 살았다. 원래 바닷가에서 나서 자란 나는 일찍이 나무배를 타고 고기잡이 일을 해왔었다. 자연스럽게 어깨너머로 배 위에서 하는 일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배우게 되었다.

21살에 일찍 결혼하고 계속 뱃일을 했다. 그러던 중 큰 배를 하나 장만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기계 배로 고기잡이를 하면 속도도 빠르고 힘도 더 세고 해서 더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드디어 1974년 거금 3천 7백만 원(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0억 원 정도는 더 될 것임) 돈을 들여 39톤급 기계 배를 마련했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모두가 희망과 꿈을 담아 아끼고 아껴서 장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배는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렇게 우리의 꿈이 담긴 “천왕호”가 만들어졌다.

나 또한 이 배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삼 남매와 네 번째로 태어난 8개월 된 막내아들의 장래도 이 한 척의 배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소중했고 가족 모두의 기대가 담긴 배였다. 결혼 14년 만에 장만한 배를 보면서 이제 잘살게 될 내일만을 꿈꾸면서 기대도 컸다.

이제 큰 배도 마련했으니 먼바다로 출항할 준비가 되었다. 사실 이렇게 큰 배를 만들게 된 것은 당시에 가까운 바다에서는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작은 배로는 고기를 잡아 봤자 적은 량 밖에는 잡을 수 없었고 여섯 식구 생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보탬이 안됐다. 그래서 한번 크게 배 사업을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1975년 8월 9일 섭씨 30도가 넘는 찜통더위에도 우리는 출항준비를 마치고 출항했다. 한번 먼 바다에 나가면 며칠씩 바다 위에서 있어야 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준비해야 했다. 어구 손질, 디젤유 4드럼, 냉동 오징어, 얼음 5톤, 25Kw용 전구 15개, 배의 기관용 부속품, 생필품 등을 준비했다. 그리고 33명이 “천왕호”에 탑승했다. 당시에 어획 목표량은 오징어 3만 6천 마리 정도였는데 당시 시가로는 3,4백만 원이 목표 수익이었다.

한번 항해를 떠나면 뭍에 있는 가족들은 초조한 마음으로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험난한 바다에 나가 혹시라도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집에 있는 쌀을 다 털어서 배에 실었고 주머니에 돈을 두둑이 채워주었다. 배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셋째 딸애가 부둣가로 달려나왔다. “아버지 알사탕 사줘” 하면서 애원하며 울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때 내 윗옷 안주머니에는 돈이 얼마간 있었다. 항해 도중에 혹시나 경비대원들을 만나면 찔러줄 돈이었다. 형님은 배의 사무장이었던 나에게 요긴하게 쓸 비상금을 항상 챙기고 다니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도 딸애의 울음도 뒤로하고 무작정 배에 올랐다. 북에 있는 30년 동안 그때 딸애의 울음소리가 귓전에 들려와 늘 내 가슴을 후비며 괴롭힐 줄은 미처 알 수 없었고 예상도 못 했다.


북한군에 묶여 버린 ‘희망’

당시에 우리 배 규모는 제법 되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갖추지 못했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전기, 방향탐지기, 독도해역 지도와 컴퍼스 등이 전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장 김익두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멀리 공해 상까지 나가 고기잡이를 하곤 했었다. 공해 상에는 중국 배, 일본 배들도 많이 어로작업을 하였는데 우리는 종종 일본 배를 따라다니곤 했었다. 왜냐하면 일본 배들은 기계 장비를 잘 갖추고 있어 고기떼를 잘 탐지했었기 때문에 우리도 쫒아 다니면서 눈치껏 고기를 잡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끔은 일본 해역 부근까지 나가서 고기를 잡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5년 8월 16일 조업 7일째 되는 날 우리는 그동안 잡아들인 오징어를 보며 돌아가서 좋아 할 처자식과 식솔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밤 11시 강릉 문화 방송에서 태풍경보가 있다는 것을 라디오로 듣고 서둘러 어구를 거두고 주문진항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1975년 8월 17일 조업 8일째 되던 날 새벽 4시쯤 되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북한 경비정이 우리 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며 추격해 오고 있었다. 우리배가 멈추면 위협 사격이 멈추고 움직이면 다시 사격하고 그렇게 가다 멈추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총 한 자루 없었던 우리는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권총과 기관총을 소지한 북한군 군관 1명과 병사 1명이 우리 배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에게 “꼼짝 말아 움직이면 쏜다” 하고 엄포를 놓더니 우리 배를 북한경비정에 로프로 연결하여 북한해역으로 끌고 갔다. (계속)

편집: 오세혁 <조사연구팀 간사>

※ 『북한인권』 176. 2013년 5월. pp.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