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난이의 탈북일기

[증언]

 

 

난이의 탈북일기
 

변 난 이(탈북여성, 2002년 5월 입국)

나는 1980년 12월 15일 함경북도 온성군 풍인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운반중대 중대장으로, 엄마는 협동농장 농장원으로 일했습니다. 큰 오빠는 몸이 불편한 관계로 사회보장을 받았고 작은 오빠는 운반중대 승차공, 언니는 콘베아 운전공, 동생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피를 팔러 혜산으로

나는 인민학교를 거쳐 97년 3월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나름대로 가족들과 행복한 생활을 했습니다. 우리 가족의 행복도 1994년부터 배급이 끊기면서 행복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굶주림에 몰린 우리 가족은 소나무 껍질에 2차 가루(중국에서는 동물사료로 쓰임)를 섞어 떡을 만들어 먹고, 그것으로 하루 2끼를 때우곤 하였습니다. 또 도토리와 나물, 누릅나무 껍질을 가공한 가루와 술찌끼, 비지 등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이러한 것도 더이상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맏오빠는 우리 가족을 굶기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어디서 피 판다는(피 100g에 조선돈으로 5,000원) 소문을 듣고 와서 피 팔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맏오빠가 피를 팔아 집사람들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피 판돈 5,000원을 가지고 2,000원은 오빠 영양보충을 하고 3,000원은 집 식구들이 생활에 보탬을 주려고 계획하고 량강도 혜산으로 저와 함께 갔습니다. 저와 같이 간 원인은 사람이 피를 뽑으면 의식을 잃는데 그때 돈을 받을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한다고 하여 저와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1996년 11월 말에 집을 떠났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기도 하고 차가 서 있을 때는 산길을 따라 다음 역까지 걸어가면서 일주일 만에 무사히 혜산에 도착했습니다. 혜산역에 내리고 보니 역 앞에는 피 팔러 온 사람들이 그 곳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보고 물어보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네도 피 판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중국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집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어 가지 못하고 여기서 이렇게 생활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빠와 저는 국가 병원이라도 가서 피를 팔려고 했는데 피 100g에 100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피 팔 것을 포기하고 거기서 중국으로 넘으려고 했는데 경비가 너무 심하여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다음 기회에 두만강을 넘으려고 했습니다. 량강도 혜산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먹을 것이 없어 산길을 헤매며 걸을 때 개구리를 잡아 불에 구워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파라티푸스를 고치려 중국으로

저는 집으로 오자마자 먹을 것이 없어 아버지와 함께 부채마(약재) 캐러 산으로 갔다가 비를 맞고 병에 걸렸습니다. 온몸이 떨리고 열이 불덩이 같이 올랐습니다. 병원에 찾아갔더니 나의 병이 파라티프스 전염병이었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에 입원은 할 수 없었고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는 의사한테 가서 침을 맞았는데 침을 잘못 맞아서 병이 더 심해졌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의사들을 찾아 다니면서 중국에 오기 전까지 누워지냈습니다. 북한에서는 병을 고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오빠들이 저를 업고 1997년 5월 10일 새벽 3시(중국 시간)에 중국으로 넘어왔습니다. 나는 병이 심해 걸을 수가 없어 오빠 등에 업힌채 두만강올 건너 중국 도문시 양수천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정신을 잃은채 왔기 때문에 오빠들이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날은 비가 세게 오기도 했고, 나를 업고 강을 건너다보니 오빠들이 강물에 빠져 물을 많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오빠들이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습니다. 그때의 일들과 오빠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픔니다.

중국에 도착하여 아무 집이나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하자 집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나온 사람은 마음이 고운 한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우리를 집안으로 들이고 음식을 주었지만, 나는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친절하게도 의사까지 불러와 나를 진단하게 하였고, 이때부터 할머니 집에 머물면서 병치료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달이라는 기간에 매일 2병의 포도당 주사를 맞았습니다. 포도당 1병 맞는 시간은 제 짐작으로는 거의 1시간은 걸린 것 같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다

제가 치료를 받고 보름 만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오빠들은 저의 병 치료비 때문에 일하러 갔었습니다. 오빠도 없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어진 나는 마음이 불안하여 1997년 6월 20일(단오 날) 저녁시간에 그집에서 나와 다시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내 정신이 없기 때문에 무서운 줄도 모르고 강을 건너가다 북한 경비대에 붙잡혀 온성 감옥에서 6일동안 있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감옥에서의 질문은 무엇 때문에 중국에 갔는가하였습니다. 병 고치러 갔다고 했더니 내가 어렸고, 몸이 너무 허약해 보이니 그대로 믿었고, 신원이 확인되자 풍인 군 보위부 부장이 와서 집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이후로 집에서 놀기도 하고 산에 부채마(약재)도 캐고 세트리, 밥조개, 달래, 산나물 등을 뜯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1998년 2월 28일 새벽 1시에 중국에 있던 큰 오빠가 언니와 저를 데리러 북한으로 왔습니다.

두번째 탈북중국에서의 생활

때는 겨울이었고 두만강의 강물은 꽁꽁 얼어있었습니다. 얼음 위를 언니와 오빠, 나 이렇게 3명이 나란히 걸어서 무사히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강을 넘을 때 오빠의 의족소리가 심하게 나서 이 소리 때문에 잡힐까봐 무척이도 겁이 났었습니다.중국으로 넘어오자마자 오빠가 이미 알고 있던 집으로 갔습니다. 이집은 양을 기르는 곳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양도 몰고 치료도 해주고 새끼 낳는 것을 받아주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언니와 오빠 2명이 한달동안 함께 생활을 했습니다. 3월 언니와 오빠들은 한달 만에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났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지도 못한채 언니는 북경으로, 오빠들은 또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그후 중국 공안들이 어찌 알았는지 나를 붙잡으러 왔었습니다. 저는 그 집에서 도망쳐 산에 숨어 있다가 중국 공안이 간 다음 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중국 공안들은 주로 식사시간과 새벽에 붙잡으러 왔습니다. 한번은 새벽에 공안이 오자 숨을 곳이 없어 이불장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공안이 가도 그곳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공안대가 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졸이며 3년을 보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언니는 북경으로 갔다가 그집에서 중국 조선족에게 팔려졌고, 아이까지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언니와 헤어진 후 한번도 언니를 만난 적은 없습니다.

공개처 형 당한 맏오빠

맏오빠는 부모님이 북한에 계신 까닭에 중국과 북한을 오가다 1999년 북한에 들어갔다가 소문에 맏오빠가 중국을 드나든다는 것을 안전부에서 알고 있는 것 같아 본인 스스로 안전부에 가서 중국에 갔었다고 자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안전부에 붙잡힌 어떤 사람이 맏오빠가 중국을 넘나들며 인신매매를 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중앙당 검열이 시작되었고, 중국을 넘나드는 것에 대해 세게 단속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오빠는 2달동안 온갖 고문을 당했고, 청진도 감옥소까지 가게 되었다 그 감옥에서도 2달간 시련을 겪다가 함경북도 온성으로 옮겨져 풍인 구 버럭 산에서 다른 3명과 함께 총살을 당했습니다.
나는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잘 아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애매하게 시범에 걸려 총살당했다고 했습니다. 북한 안전원들도 애매한 사람을 죽였다고 말들을 했답니다. 중앙당 검열만 아니면 오빠는 총살당하지 않았다고 그 사람이 말을 했습니다. 오빠는 나 때문에 중국을 오가게 되었고 그 이유로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 오빠에게 항상 미안한 생각 뿐입니다.

짧은 행복, 헤어짐

나는 그동안 정들었던 양 키우는 집을 떠나게 됐습니다. 그 이유는 나로 인해 자매가 싸우고, 잘못하면 나도 팔려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의 집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양치는 할머니는 성당을 다녔고, 나는 그 집에서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성당에 맡겼고, 신부님은 나를 북한 사람들을 보살펴 주시는 한 조선족 할머니 집에 보내 주었습니다.

이집에서 지내면서 한국 분들의 도움으로 2001년 북한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을 중국으로 모시고 와서 중국에서 살았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중국 사람의 고발로 2001년 여름 부모님과 둘째 오빠, 동생은 중국 공안대에 잡혔고, 이틀 만에 북한으로 송환되었습니다. 북으로 송환된지 두달 후 아버지와 둘째 오빠가 중국으로 다시 넘어왔습니다. 아버지는 왔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셨고, 둘째 오빠만 중국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부모님들과 동생이 저를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는데 저의 소식을 몰라 다시 북한으로 넘어간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우리 가족의 소식은 알 수 없습니다.

한국을 향해

그 조선족 할머니 집에서 6개월을 지내다 다시 중국 공안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할머니 집을 나와 기독교회에 다니고 있는 조선족이 영업하는 다방에서 지냈습니다. 다방에서 일은 못하고 그 조선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숨어 지냈습니다. 매일매일 검열 나오는 공안대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창고에 숨고 때로는 도망도 치면서 한국에 들어올 때까지 힘들게 지냈습니다. 좋은 분들을 만나 한국으로 간다는 희망으로 중국을 떠났지만 동남아에서 잡혀 중국으로 넘겨졌고, 중국 변방에서 10일 이상 있었습니다. 그때는 다신 한국으로 갈 수 없는가 하는 절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곳에서 풀려나 다시 한국으로 향했고 좋은 분들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희망하던 자유의 땅 대한민국으로 2002년 5월 25일 입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