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끔찍했던 북한의 감옥생활 끔찍했던 북한의 감옥생활

끔찍했던 북한의 감옥생활

 

                  이명숙

2003년 12월 탈북

2008년 12월 한국 입국

 

나는 1967 양강도 백암에서 태어나 백암에서 고등중학교 나왔다. 엄마는 6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내가 군대 간 후 1년 만에 돌아가셨다. 17살에 군대 가서 12년 있었다. 결혼은 군대에 있으면서 했는데, 같이 군대 있는 사람과 24살 때 불법으로 했다.(원래 군대에서는 결혼하지 못한다.)

고등중학교 졸업한 1984년도 군 입대를 했는데, 그때는 여자가 군대 가기 힘들었고 우리 학년 중 나 혼자 만 군대 나갔다. 우리 집안은 토대가 좋았다. 오빠도 비행사였고, 작은오빠도 군대 있었고. 작은 아버지도, 고모부도 비행사였고 외삼촌이 해군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해군으로 갔고 통신원으로 배치 받았다. 19살에 1년제 군관학교에 가서 20살에 졸업했다. 졸업 후 별 하나 받고 나왔다. 87년도에 표창장을 받아 별 하나 더 받았다. 두 개 받고 있다가 제대 2년 전에 별 하나 더 받아서 상위였다. 중대장이다. 백령도 부근에서 근무했다. 군대 내에서 성폭행은 많고, 남자들이 여자들 많이 때린다.

96년도에 제대 후 혜산시 도전신전화국 교환대로 배치 받았는데, 출근하지 않고 장사했다. 장사해서 번 돈 중 직장에 돈 내고 출근하지 않았다. 함흥에서 동(구리) 사와서 팔았다. 직장에 다니는 것보다 장사하는 게 훨씬 나았다. 장사하다 다 몰수당해서 돈이 없어서 중국 가면 부자 된다 해서 중국으로 나가게 되었다.

장사할 때 기차를 타고 다니는데 기차 빵통에서 성희롱이 많다. 남자들이 지나가다가 여자 가슴 치고 가도 어디다 말도 못한다. 말하면 맞거나, 안전원에게 이야기하면 안전원들이 그 짓을 하는데 말이 안된다. 자전거는 일반 가정에서 타기도 힘들다. 가정이 다 좋은 집이다. 바지 못 입게 하고, 머리는 풀어헤치면 안 되고, 짧게 자르거나 묶어야 한다. 애들도 학교 안간다. 지금은 더한다. 학교에서 내는 부담금이 힘들어서 안 간다. 식량원조는 군부에 다 들어갔다가 장마당으로 들어간다. 비료는 많이 봤다. 대한민국으로 쓴 것도 봤다. 다 개인돈 주고 사야 한다.

 

첫 번째 탈북과 북송

2003년 12월에 중국으로 나갔다. 같이 장사하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중국이야기를 하면서 중국에 가면 부자가 된다고 하여 그 여자가 길을 놔주고 8명이 함께 혜산을 통해 장백으로 넘어갔다. 장백에 나갔더니 남자 댓 명이 차를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팔려간 것이다. 나는 8천원에 팔렸다고 했다. 팔 차타고 다시 기차타고 갔더니 길림이었다. 반석으로 팔려가서 조선말을 하지 못하는 40대 중반의 조선족 장애인 하고 쭉 살았는데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그냥 때리는데 정말 많이 맞고 살았다. 같이 간 8명이 한동네에서 다 살았다. 내 남편이 장애인인데 정말 많이 맞았다. 참고 살다 3년 만에 그곳에서 달아나 심양으로 가서 장사하며 살았는데, 그곳에서 좋은 남자 만났다. 그 사람도 조선족인데 때리지도 않고 외식도 시켜주고, 내 마음대로 돈도 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심양에서 살다 통화로 돈 벌러 갔는데 북한애가 신고해서 통화 집에서 2005년 8월 3일 공안 두 사람이 와서는 신분증보자고 하여 신분증이 없자 나를 족쇄 채워서 잡아갔다. 이때 임신 7개월째였다. 통화 공안국 구치장에 넣었다. 거기서는 조사 대충 하다가 그날로 군대쪽으로 넘긴다. 중국 군대애들은 조사하면서 때렸다. 사진찍고 손도장 찍고 3일 동안 조사받는데, 앉았다 일어났다 죄인취급 한다. 누워있지도 못하게 한다. 맘에 드는 애들은 데리고 나가 논다. 조사는 어디에 있었냐, 언제 넘어왔냐, 누가 도와줬냐 등을 물어보는데, 같이 잡힌 북한애가 내가 한국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내 문건에 한국사람 만났다고 적혔다. 8월 8일에 북한으로 갔다. 자강도 만포로 넘어갔다. 죄인들 싣는 차에 2명이 호송해서 북한사람 6명을 족쇄를 채우고 넘어갔다. 남자도 있었다. 문건도 다 가지고 간다.

 

북한 쪽 만포 역전까지 중국에서 호송해가면 만포 보위부에서 차가지고 나와 인수인계한다음 만포 보위부로 데리고 간다. 몸수색을 하는데, 옷을 벗기고 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어났다 앉았다 뽐뿌질을 시킨다. 그런 다음 식당 아줌마를 불러서 자궁 검사하라고 시킨다. 장갑도 안 끼고, 씻지도 않고 다 검색한다. 임신한 사람들도 다 넣는다. 아이들도 다 본다. 몸수색 끝나고 다 한방에 넣는다. 앉아 있을 때는 무릎 꿇고 엉치를 들고 손은 앞무릎에 올려놓고 앉아 있게 한다. 다음날부터 조사한다. 아무 때나 나오라 하면 나간다. 조사받는 방은 조그마한 데 책상과 몽둥이가 있다. 돈 있는지 부터 물어본다. 돈 없다 하면 나라 배반하고 돈도 없다고 막 때린다. 어째 중국갔냐 물어본다. 모른다 하면 때리고...대답하면 또 때리고...울면서 잘못했다 다시 중국에 안 간다 한다. 냄새 난다고 들어가라 한다.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번씩 불러내어 조사한다. 조사 끝나면 앉아 놀지 못하고 일하러 나가는데 배추심기 등 밭일이다. 보위부에서도 일을 시킨다. 이렇게 조사를 받다 양강도 보위부에서 호송원이 데리러 와 만포에서 8월 17일에 혜산으로 갔다.

 

도 보위부로

혜산보위부에서 차를 가지고 와 8명이 양강도 도보위부로 끌려갔다. 도착해서 옷을 벗긴 다음 봄뿌질시키고, 옷과 머리, 자궁 검사하고 조그맣고 철문이 있는 방에 세 명씩 들어간다. 이곳에는 한국에 전화해서 들어온 사람, 한국기도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다. 난 한국사람 만난 죄였다. 중국에서부터 문건이 들어갔다. 내 집이 백암이라 넘기라 했는데 3년 동안 당비를 안내고, 군대 제대했다 해서 관리소로 간 것이다. 우리 집에 기념사진이 많았다. 완전한 반역자로 되었다. 간단히 받아서 그래도 6년이었다. 양강도 보위부에서 8월 17일부터 11월 2일까지 보위부에 있었다.

조사받는 동안 비판서를 쓰게 하고, 틀리면 때린다. 머리를 많이 때린다. 막대기나 구둣발로 때린다. 밤에도 부른다. 심심하면 부른다. 나 한국사람 못 만났다 했다. 무조건 돈 내놔라 한다. 애기는 죽일 애니 관심도 없다.

그냥 하루 종일 앉혀놓는다. 책상다리하고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움직여도 안 된다. 잠도 안 재운다. 고문이 너무 힘들어 닷 세 만에 손도장 열 개 다 찍었다. 식사시간이 5분인데 이때 못 먹으면 그냥 가지고 나간다. 보위부에서는 염장국도 안준다. 예심 때 너무 힘들게 고문해서 자살해 죽는 사람이 많다더라.

 

정치범관리소로

관리소는 재판 없이 바로 갔다. 개천에서 차가 와 관리소에서 나온 사람이 ‘야 이 간나 너 6년이다’ 하고 말해줘서 내가 6년이란 것을 알았다. 변호사는 본적도 없다. 북한에서 변호사라는 말도 못 들어 봤다. 개천에 들어가면 죄수복으로 갈아입는다.(우리는 개천으로 이야기하는데, 밖에서는 23호 관리소라고 한다.) 18호 북창과 14호 개천 수용소 합쳐졌다. 내가 있던 곳은 상원군과 온천군 사이에 수용소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상원군 쪽이라 들었다.

나는 여자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수용소는 1층짜리 건물인데 안전원이 있는 건물만 2층짜리 집이다. 조그만 방이 19개 반이 있고, 한 반에 18명에서 20명씩 있다. 수용소 안에 200명은 더 됐다. 나는 3반이었다. 19개 반 중 한 반은 일하지 못하는 다 죽게 된 환자들 반이다. 부업반에 배치될 때  나는 농사짓고 돼지 기르는 데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있는 방에 월경자 8명이 있었고, 이불장 하나와 오줌통 하나가 있다.

수용소에 들어가면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양강도에서 왔습니다. 하면 발로 차서 넘어지기도 한다. 땅을 판 웅덩이에 우리를 들어가서 죄수복으로 갈아입히는데 병 걸렸을까봐 불을 지피고 연기를 쏘인다. 입고 간 옷은 사물함에 넣어둔다. 머리는 짧은 단발로 자른다. 9시 점검시간에 줄 선다. 번호 부른다. 아파도 아픈데 없다 한다. 아침 5시에 기상. 밤 10시에 취침한다. ‘기상’ 하면 다들 일어나서 마당 앞에 나가서 서야 한다. 오늘 죽더라고 나가서야 한다. 인원점검 하고는 화장실을 가는데 5분을 준다. 이때 아무데나 가서 볼일을 본다. 청소하고 세수 간단히 하고 양치는 못한다. 모여서 ‘사회주의 지킬세’ ‘사상, 단련’ 노래를 부른다. 마당 앞에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통강냉이에 염장무, 소금국을 준다. 통강냉이라 먹기 힘들면 가만히 숨겼다가 들키지 않게 먹는다. 이후 또 일하고...나는 밭일 했다. 너무 배고파서 채(훔쳐)먹으면 구둣발로 손등을 짓밟는다.

아픈 사람이 생겨도 돌보는 사람이 없다. 의사도 없다. 약도 없다. 반이 19개로 나누어졌는데 19반은 병에 걸린 사람들만 있는 곳이다. 약도 주는 일도 없고 그냥 그곳에서 죽으면 우리들(수감자) 중 몇 명 불러서 들것에 담요 씌워서 밖으로 나가 아무데나 묻게 한다. 구덩이도 얕게 판다. 나 있었을 때 못 먹어 죽고, 맞아서 죽고... 거의 매일 죽어나갔다.

사람이 죽으면 그때마다 묻는 것이 아니고 얼마큼 시체가 차야 묻으러 밖으로 간다. 일하는 도구를 넣어두는 창고가 있는데, 거기에 시체를 눕혀놓는다. 쥐가 사람을 다 뜯어먹는다.

남자들만 있는 수용소는 여자 수용소 건물 뒤에 있었다. 남자 수용소에서 명철이란 남자아이가 도망쳤다가 잡혀왔다. 너무 맞아서 3일 만에 죽었다. 도망치다 잡히면 총살도 시키지만 잡히는 순간 맞아대니 거의 다 맞아죽는다.

 

수감 중의 출산

11월 29일에 애를 낳았다. 아침에 그날 일하러 나가는데 만삭이어서 빨리 걸을 수 없어 천천히 가다가 보위원들이 천천히 간다고 엉덩이를 발로 맞아 넘어지면서 양수가 터졌다. 아프다 하니 수용소 밖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가면서 오늘 안 낳으면 죽인다 했다. 같이 간 죄인이 병원 문 앞에서 ‘머리 나온다’ 했다. 챙피하다 하고 병원 복도로 갔다. 낳았더니 그 언니가 ‘딸이다’ 했다. 언니가 이빨로 탯줄을 잘랐다. 아이를 엎어놓은 다음에 아이 죽이겠냐 살리겠냐 물어본다. 보위부원이 애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묻는데, 내가 못 죽인다 하니 구두발로 아무 곳이나 막 때려 어금니도 나가고 얼굴이 상처투성이다. 애는 살려야 된다 했는데...애를 엎어놓았는데도 애가 몇 시간을 울었다. 그때 내가 정신을 잃었다. 내 속옷이라도 싸주고 싶었지만 말았다. 밤 12시 되기 전에 아이를 낳았고, 새벽 3시에 들어와서 5시부터 일어나 다시 일했다. 아래로 피가 흐르는데 댈 것이 없어서 양말로 댔다. 같이 있던 애들이 몰래 담요를 잘라서 대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6년도 4월 15일날 대사령 준다고 (김정일, 김일성 생일) (관리소에는 대사령이 없지만 너희도 그렇게 준다고 교양한다) 교양 할 때 탈출했다. 사리원에서 온 여자가 대못을 가지고 와 3명이 탈출하기로 하고 밤마다 못으로 벽을 뚫기 시작했다. 하루는 자는데 누가 툭툭 쳐서 일어나보니 그 여자가 4일 만에 못으로 벽을 뚫었다. 뚫린 구멍에 머리가 빠져나오니 몸은 간단히 빠질 수 있었고, 밖의 담은 하수구멍을 통해서 빠져나오는데 3명 중 마지막으로 나온 애가 식당 아줌마한테 걸려 탈출한다는 소리가 나고 사이렌 소리가 나 셋이서 손을 잡고 정신없이 뛰었다. 어떤 개울도 넘었다. 맨발로 뛰었으니 발이 다 피바다였다. 한참 오고 나니 방향을 몰라 기찻길을 찾아갔다. 죄수옷을 입고 있었으니 (내가 407번) 산 밑에 있다가 밤에 남의 집에 빨아 널어놓은 마르지도 않은 옷을 훔쳐 입었다. 역전에 가서 있다가 우리가 개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원에서 개천까지 뛴 것이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있다간 걸릴 것 같아 화물차 빵통에 타자고 했다. 하루종일 4정거장을 가서 내렸다. 나와서 남의 집에서 비누를 훔쳐 석탄투성이가 된 옷과 몸을 씻었다. 자강도 성간까지 왔다. 강냉이, 신발 등을 훔쳐다가 장마당에다 팔아 당시 북한돈 삼천원을 벌었다. 배고파서 속도전가루떡을 먹고 탈이났다. 만포시에서는 감시가 심해 길로 걷지 못하고 산길을 탔다. 건하라는 역에서 화물차를 다시 잡아탔다. 양강도 후주(후추)로 해서 혜산까지 왔다. 이모네 집도 감시가 붙은 상태라 못가고 이모네 동생 시누이 집에 갔는데 고맙게도 그 여자가 숨겨줬다. 4월 15일에 탈출해서 20일 정도 걸려 혜산으로 넘어 온 것이 5월 4일이다. 그때 우리반에 있던 사람중 뛸 수 없는 3명만 남기고 다 도망을 쳤는데, 몇 명은 다시 잡혔다고 했다. 관리소에 수감된지 6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두 번째 탈북

혜산에서 가만히 다시 중국으로 가려고 알아보았는데, 아직 얼음이 있었는데, 살얼음이어서 얼음에 빠지기도 하면서 중국으로 넘었다.  2006년 5월 18일 3명이 탈북에 성공하여 중국에서 각자 흩어져서 살 길을 찾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심양에서 함께 살았던 분의 도움으로 그 남자네 집에서 살다 한국으로 가기 위해 2008년 10월 18일에 심양을 떠났다. 중국으로 먼저 온 아이들 중 하나가 상해로 가서 한국사람 만나서 비행기로 들어오고, 브로커를 통해서 배로 들어오고 그랬다. 나는 중국 남쪽 곤명을 통해 쪽배타고 태국으로 들어가 2개월간 수용소에 있다. 2008년 12월 18일 한국에 입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