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 강제송환 이후 요덕수용소에서의 3년

[증언]강제송환 이후 요덕수용소에서의 3년

김 은 철
2006년 3월 입국, 요덕 제15호 관리소 경험자
2000년 7인 탈북자 강제송환사건 생존자

1999년 11월 10일 나를 포함한 탈북자 7명이 중국에서 러시아 국경을 넘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붙잡혔다. 처음에는 우리를 체포한지 3일 만에 중국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중국은 “당신들이 직접 북한으로 넘기든지 하지 우리는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으로 보내지면 북한으로 다시 넘겨질게 뻔하기 때문에 유엔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러시아에서는 우리에게 유엔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한 사람마다 10분 정도씩 인터뷰를 했고, 우리는 계속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당신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하면서 사진을 찍고 돌아갔다. 기자회견을 한지 3일이 지나고 북한대사가 찾아왔다. 러시아 사람이 우리에게 만나겠냐고 물어보기에 거절했다. 그랬더니 종이에 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 대사를 만나면 우리는 잡혀가서 죽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고 썼다. 하지만 우리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북한 대사를 만날 수밖에 없었고, 그는 “동무들 장군님 배려에 왜 배신하고 조국을 반역했나?” 물었다. 직접 만나고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나쁘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리 유엔 사람들을 만나도 결국 북한으로 보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면 어떻게 되나?” 물어보았다. 그는 “장군님의 배려로 죄과에 따라 처벌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9년 12월 30일, 중국 변방 외사과(조사과)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러시아 군인들은 우리를 중국으로 넘겼다. 중국에서 온 사람들은 우리에게 러시아에 있을 때 제대로 대우 받았는지 묻기도 했다. 우리가 끌려간 곳은 중국 밀산이라는 곳이었다. 매는 맞지 않았지만 빵 조금과 감자죽을 주었고 고드름으로 세수하며 모두 20일 정도 지냈다. 그때 우리는 외사과 건물에서 조사를 받고 밤에는 공안국 건물로 호송되어 잠을 잤는데, 2000년 1월 2일, 보통 때처럼 공안국으로 호송될 때 차를 세우고 모두 내리라고 했을 때 모두 동시에 도망쳤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3~4시간 만에 다 잡혔고 나만 성공했다. 도망을 못 가게 신발을 다 빼앗겨 맨발이었기 때문에 한 발짝 뛸 때마다 계속 넘어지면서도 계속 도망쳤다. 도주를 계획하기 전에 모두 성공하면 중국 연길교회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다. 혼자 도망치면서 생각해보니 조선족 여관이나 교회를 찾아가면 검문을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맨발 바람에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서 2시간을 더 헤매다가 밀산 어느 마을에서 고기 파는 가게를 발견하고 무작정 들어갔다. 중국인 점원이 내 처지를 바로 알아보고 불쌍했던지 손을 잡고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뜨거운 물로 발을 녹여주고 먹을 것을 주었다. 좀 지나자 소식을 들었는지 가게 사장이 도착했다. 그래서 나는 조선 지도를 그리고 교회를 뜻하는 십자가 그려 넣었다. 그랬더니 사장은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십자가를 병원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도망칠 당시의 내 옷차림으로는 검문을 당할까봐 병원 옆 자리에 누워있던 중국 거지인 듯한 사람과 옷을 바꿔 입고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부터 기다려도 그 사장이 다시 찾아오지 않으니까 점점 불안해져서 병원에서도 도망쳤다. 다행히 길에서 조선말을 조금 이해하는 아주머니 두 명을 만났다. 그래도 내가 한족 말을 몰라 말이 잘 통하지 않자 중국돈 9원을 주었다. 버스를 타고 시외로 벗어났다. 농촌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걸어가고 있는데 멀리 큰 집이 보이기에 도움을 구해볼까 하고 찾아갔더니 절이었다. 중국인 할머니가 있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자 할머니는 조선족 한 사람을 데려다 주었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왔다고 말했더니 절 간부들이 회의하는 중인데 조금 있으면 내려와서 도와줄 것이라고 했다. 그 절에는 법륜공(파룬궁)을 하는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 같았다. 간부들이 내려와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조금씩 돈을 모아 중국돈 398원을 내게 주었다. 백 원은 내 양말에, 나머지는 또 다른 곳에 찔러 넣어주면서, “여기도 검사가 매우 심하니 어디 가더라도 절대 여기에 있었다는 말은 평생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택시를 타고 밀산 시내로 돌아왔다. 먼저 머리를 깎은 뒤, 100원 정도로 옷을 사 입고 먹을 것 사서 역전으로 갔더니 나를 잡으러 온 듯한 중국 공안들이 저 멀리 보였다. 다행히 시장에서 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30원 정도로 목단강으로 가는 기차표를 산 뒤 멀리서 숨어서 기다렸다. 출발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바깥에 있던 공안들이 역전 안으로 들어갈 듯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정말 출발시간이 되니 공안들이 역전 앞에 책상을 놓고 사람들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밀산부터 벗어나야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담을 넘어 열차 화장실 칸에 들어가 40분 정도 숨어 있었다. 출발한지 4시간 만에 목단강에 도착했고 기차를 갈아타서 연길로 들어갔다. 러시아로 넘어가기 전에 연길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던 장로를 찾아갔다. 장로는 우리가 러시아에서 기자회견 했던 것을 보면서 ‘잘 됐구나. 무사히 한국으로 보내지겠구나’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다시 도망쳐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망친 지 3일 동안 밀산 변방대에서 잡지 못하자 밀산 공안 30여명이 연길까지 잡으러 온 것을 알았다. 연길에 더 머무를 형편이 되지 않고 더 이상 도망갈 곳도 막막해서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용히 숨어 지내면 모르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화룡시 덕화진을 통해 살얼음을 기어 두만강 건넜다. 아는 집에 들러 하룻밤 보내고 무산으로 들어갔다. 바로 집으로 가지 않고, 아는 사람 집을 찾아갔다. 연길교회에서 도움 받은 500원으로 쌀을 좀 사다줬더니 숨겨주었다. 부탁해서 아버지께 연락드렸다. 찾아오신 아버지께 쌀을 좀 사드리고 며칠 더 그 집에 숨어 있었다. 2000년 1월 16일, 보름달이 환하게 떴다. 다시 중국 넘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나니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집에 들러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며칠 사이에서 중국에서 무산까지 내 소식이 알려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보이지 않았던 안전원들이 순식간에 덮쳤다. 언제 공문이 넘어왔는지 우리 집에 감시 매복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권총 총탁으로 머리를 후려치고, 내가 쓰러지자 30분 동안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두들겨팼다. 구두끈으로 다리 묶인 채 맨 땅에 질질 끌려갔다.

끌려간 곳은 무산군 안전부였다. 나는 보위부 취급 대상자였기 때문에 안전부에서는 크게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무산군 보위부로 옮겨졌을 때는 완전히 달랐다. 6개월 동안 굵은 나무 각자가 종아리 뒤쪽에 끼워진 채로 방열판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맞았다. 시도 때도 없이 매일 맞았지만 절대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버티면서 열흘 정도는 버텨냈다. 하지만 곧 중국 공안으로부터 내 사진과 문건 등 조사한 모든 자료들이 다 넘어왔다. 내 눈 앞에 모두 보여주는데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중국 가서 기독교 만났나?’ ‘무슨 말했나?’ ‘다 말해라!’ 나는 교회에 갔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았다. 러시아로 가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 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점점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었다. 팔다리 모두 사방으로 묶여 공중에 매달린 채로 맞다보니 나라는 인간에 대해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를 100장정도 주면서 무조건 채우라고 했다. 맞아가면서 무조건 쓰라고 하니 한 짓, 안한 짓 물어보는 대로, 이렇게 써라, 저렇게 써라 요구하는 대로 다 했다고 썼다. 2개월 동안 매일 맞으며 취급(조사)받은 뒤에는 구류장에서 4개월 더 앉아서 넘겨지기를 기다렸다. 구류장이라고 해서 편한 곳은 아니었다. 계호원들이 악착같아서 가만 두지 않고 계속 때렸다.

하루는 아버지가 면회 오셔서 떡을 넣어주셨는데 옆에서 다른 사람들이 조금만 달라고 아무리 통사정을 해도 계호원들은 못주게 했다. 그래서 잠깐 지켜보지 않을 때 건네주려다 그만 걸려버렸다. 계호원은 벌로 머리를 벽에 계속 박으라고 했다. 소리를 크게 받으라고 윽박지르는 통에 쿵쿵 소리가 울릴 정도로 머리를 벽에 찧었다. 이마에 피가 터지기 시작하자 모두 지켜보는 곳이라 그랬는지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화장실 변기에 계속 머리를 박으라고 했다. 하도 악이 나고 서러워서 이를 악물고 차라리 이렇게 죽자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머리를 찧었다. 피가 퍽퍽 터져 피범벅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뒤 담당지도원이 내려와 왜 그랬는지 물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뒷일이 겁이 나서 그냥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지만, 지도원이 계속 물어보자 나중에 결국 이야기했더니 청통편(중국약)을 으깨어 발라주었다.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부터는 더 힘든 벌을 주었다. 죄수들로 가득한 집결소에서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게 하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해야 하는 뽐쁘질을 500번씩 당하고 나면 사람이 그야말로 개가 된다. 제대로 말리지 못해 이가 득실득실하고 먼지가 가득 쌓인 담요를 쓰고 땀을 질질 흘려 범벅이 되고 나면 더 이상 인간다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2000년 6월 30일, 요덕수용소(제15호 관리소)로 보내졌다. 19살 때였다. 요덕이 어딘지도 전혀 몰랐고 영영 나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겠구나 하는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들은 내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길이 없었고, 동네에서는 내가 간첩혐의로 보위부에서 총살당해 가마니에 싸서 버려졌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요덕수용소 안에는 마침 구읍리 지역에 혁명화구역이 만들어져 중앙당 계통, 안전부, 보위부, 검찰 쪽 사람들도 혁명화교육을 받고 있었다. 첫날 들어간 곳은 외래자 수용소라는 곳이었다. 처음 온 사람들이 조사과정에서 몸 상태가 엉망이고 극심한 노동에 단련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밥은 해주고 일 강도는 일반 기본중대보다 좀 약한 편이었다. 보름쯤 지나서 관리소 정치부장이라는 사람이 방문하여 담화를 할 수 있었고, 그 때에서야 내가 반역죄로 3년형을 받았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건장한 사람들은 7~10일 정도 만에 중대로 보내졌지만, 나는 어리다고 봐 준 것인지 한 달쯤 그곳에 있다가 기본중대로 보내졌다.

배치된 곳은 건설소대 2중대 3소대였다. 그 때부터 밤낮없이 계속 일해야 했다. 여름에는 새벽 4시 30분 기상. 농산소대 지원, 거름 나르고 밭갈이하고, 7시에 막사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7시 30분에 기본건설을 하고, 기초를 파고, 시멘트를 손으로 직접 개어서 보안서를 새로 짓고 확장하는 일이 첫 과제였다. 내가 건설소대에 있는 3년 동안 이외에도 닭사, 염소사, 소사, 외래창고 등 6개의 시설을 지었다. 물자도 없는 상황에서 16명 정도밖에 안되는 소대인원으로 그 많은걸 다 지어야 했으니 얼마나 일을 많이 했겠는가. 점심식사는 오전에 식당에서 타간 것으로 밖에서 만들어 먹었다. 주변의 산나물을 뜯어 양푼에 넣어 먹는데 양을 불리기 위해서였다. 5시간 일하고 30분 쉬는 게 기본이고 작업 능률을 봐서 쉬게 했다. 정상적으로는 오후 6~7시까지 일하지만 능률이 나지 않는다고 자주 야간작업을 시켰다. 야간작업이 있는 기간에는 6명씩 3개조, 또는 8명씩 2개조로 나눠서 첫 조가 오후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다음조가 1시부터 다음날 오전 5~6시까지, 마지막조가 또 교대하는 방식으로 일하기 때문에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작업은 계속되는 것이다. 구타는 보위부나 구류장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없지는 않다. 눈이 돌고 주먹이 좀 세면 안 맞고, 일 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함께 일하는 다른 죄수들에게 맞기도 한다. 괜한 것을 보거나 알게되어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고, 죄수들 중에도 선생들의 스파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말실수 했다가 걸리면 요덕수용소 안에도 있는 별도의 구류장으로 끌려간다. 한 끼에 10그램 정도밖에 주지 않기 때문에 한달만 있어도 허약(영양실조)에 걸려 죽거나 살아도 엉금엉금 기어서 나오게 된다. 키가 170cm 되는 사람도 일단 이곳에 들어가면 완전 아이가 되어 기어 나오는데 보통 3일을 못 넘기고 죽는다.

사람이 죽으면 기본적으로 건설소대가 시체를 처리한다. 평토를 하기 때문에 그나마 나은 편이긴 하지만 판자로 대충 관을 짜서 시체를 제대로 넣으려하면 옆에서 빨리 하라고 닦달하는 통에 아무렇게나 막 집어넣고 못질한다. 소달구지에 실어서 나르는데 돌에 걸려 덜커덩 하면 관이 짜개지고 틈이 벌어지면서 시체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나는 주로 달구지를 끄는 쪽이었는데, 관 밖으로 튀어나온 시체에 한번 눈길이 가면 무조건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묻는 곳은 ‘묘지골’이라고 불렀는데, 주로 밤에 시체를 묻으러 가기 때문에 대충 파서 빨리 묻고 어둠을 틈타 강냉이라도 걷고 풀을 뜯어 구워먹고는 했다.

나를 포함하여 러시아로 함께 들어갔다가 요덕으로 끌려온 5명 중에 중에 방영실(본명 방영순)이라는 여자는 정말 불쌍하게 죽었다. 함께 잡혀온 방영실의 남편 허영일은 남자라는 게 어디 그런 남자가 또 있겠는지 싶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다. 다른 남자 같으면 아내고 뭐고 간에 자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선 모른 척 할 텐데, 명절에 고기 조금 나온 것까지도 안 먹고 숨겨뒀다가 가져다 먹이고, 작업 끝나고 돌아오면 바로 달려가서 한 시간씩 여자 곁에 가서 씻겨주곤 했다. 마지막엔 똥오줌 다 받아내며 지극정성으로 살피며 그렇게 살려보려고 했는데 방영실은 끝내 불쌍하게 죽었다. 함께 생사고락을 나눈 우리들이 그녀를 묻어주었는데 진짜 슬펐다.

2003년 7월 형기를 마치고 드디어 요덕수용소에서 나올 때 서약서를 쓰고 손도장을 찍게 했다. ‘밖에 나가서 이곳에서의 비밀을 유포할 때는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올 때는 길에서 먹을 수 있는 도중식사를 들고 나오는데, 해당구역 보위부로 데려갔다. 보위부에서 문건을 확인처리하고 군단 로동부로 가서 문건 수속시켜 새로운 일자리를 받는다. 나는 무산군 새골 농장으로 배치됐다. 일하는 동안에는 항상 감시당한다. 반장은 말은 안 해도 24시간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도 ‘중국 넘어가려는 조짐이 있거나 행동이 수상하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고 교육되어 있었다. 그래도 같은 마을 사람들이기 때문에 평상시에 나를 멀리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총살당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다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약서를 쓴 것 때문에 말할 수도 없으니 그냥 어디 가서 일하다 왔다고 둘러댔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입을 꿰메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우리 형과 누나는 지금까지도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나중에 중국으로 다시 탈출해서 쌍둥이 동생을 만났을 때에서야 처음 들려주었는데,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혹시 누가 듣고 잡으러 올까 겁이나 내내 불안해서 다시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2004년 8월쯤 생활이 너무 막막한데 가족들은 먹여 살려야 하고 해서 중국에서 돈을 조금만이라도 모아오려고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재수가 없으려니 또 걸려버렸다. 다시 걸렸으니 이제 15년형 감이다보니 친척어른들이 염소 한 마리를 통으로 주고 집에 깔고 있던 30만원을 뇌물로 바쳐 그 덕분에 풀려났다. 그런데 그 때 뇌물 받은 중앙당 비서 둘이 끝까지 말 안하고 비밀을 지켜주면 되는데 중앙당검열을 받을 때 뇌물 받고 넘겨준 일들이 걸리면서 나도 잡히고 말았다. 중국으로 가려고 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버텨서 일단 무산군 단련대로 보내졌다. 2004년 10월부터 6개월 정도 있다가 2005년 4월에 도망쳤다. 산으로 올라가 50일 동안 산 중에 움막을 집고 숨어 있었다. 한국에 먼저 와 있던 동생이 중국에 나와 있었는데 마침내 연락이 닿았다. 동생은 중국돈 2000원을 북한에 있는 우리 형에게 보내줬고, 형이 나를 찾아 다시 1000원을 보내줬다. 나는 염소와 30만원의 뇌물로 나를 구해주신 친척 어른들께 돈을 갚아 드리고, 중국에서 다시 돈을 벌어 조선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다시 오면 죽는다고 모두 말렸다. 중국에 와서 만난 동생이 한국으로 가자고 계속 설득했다. 어차피 살 수 있는 곳은 한국으로 오는 길 뿐이었다. 나는 2006년 3월 16일 한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