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북한에서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

북한에서 예술인으로 산다는 것


김 훈

2010년 탈북
2010년 한국 입국


저는 2010년 남한에 입국하기 전까지 제1급 성악가이자, 선전선동부 예술부총장이었습니다. 16살의 나이에 전국 노래경연에서 1등으로 당선되고, 최연소의 나이로 함경남도 가무단에 입단함으로써, 예술에 첫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발전가능성을 인정받아 중앙당의 제창극장에 배치되어, 그 곳에서 예술과장을 거쳐 예술부총장까지 올라갑니다.

 

17살에 함경남도 가무단에 입단하다!

 

중학시절에 기관사를 주제로 한 <철길 위에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 속에 “노을 길 철길 위에 젊은 기관사, 기적소리 울리며 기차를 몰았네. 포연을 헤쳐 온 용감한 그 젊은이 준엄한 그 날에도 기차를 몰랐네”라는 가사의 주제가가 나옵니다. 그 노래를 제가 듣고 대단히 감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걸 아마 심심풀이로 자주 불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한번은 우리 동네에서 ‘노래경연대회’가 열렸는데 제가 거기에 나가게 된 거예요. 동네 사람들마다 “야 너 그 철길 위에서 그 노래를 경연대회에서 한 번 해봐라”고 하도 성화를 해서 나가게 된 거죠. 중앙에서 심사위원들이 나와서 전국을 돌면서 심사를 했는데요, 제가 1등으로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16살이었는데요, 그때 저한테는 성악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그저 순수하게 내가 느낀 그대로 감정을 실어서 불렀습니다. 심사위원들이 평가하기를 “감정 전달이 아주 뛰어나다. 가사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전달하려는 데 힘을 썼으며, 노래의 분위기와 의미가 잘 전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1선에서 당선 된 후에, 2, 3, 전국 경연까지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국경연에서 1등으로 당선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저는 ‘나이가 대단히 어리다는 것, 그래서 발전가능성이 크다’는 기대를 받으며, 당시 저의 나이가 17살밖에 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경남도 가무단에 “찬조출연”하게 되었습니다.

 

함경남도 가무단에서 제가 처음으로 출연한 작품은 북청을 배경으로 한, 4월의 햇빛아래”라는 제목의 가극이었습니다. 북청은 우리 남북조선 다 합해서도 과일로 가장 유명할 겁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 딸 때”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모든 것을 수령과 당과 연결시키니까, 이렇게 과일이 무성하고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도 다 수령님의 은덕 때문이라고 당에서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가극 제목을 ‘사과 딸 때’라고 하지 말고, 우리 수령님 생일이 4 15일이니까 ‘사월의 화창한 햇빛아래’ 혹은 ‘사월의 햇빛아래’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수령께서 여러 번 북청 과수원을 현지지도 하셨고, 비 오는 날에도 여러 번 방문하시고, 팔끼란 약도 몸소 바르시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함경남도 가무단에는 이미 저보다 우월한 아이들도 많이 있었겠지만, 아마 당에서 판단하기에 제가 발전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저를 ‘4월의 햇빛아래’의 소년단원 역으로 찬조 출연시켰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저는 예술부문에 발을 담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학창시절에는 고등중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면서, 전문적으로 가무단으로 활동하면서 거기서 산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때 가극뿐만 아니라 “노래이야기”라는 것도 했어요. 그때는 절가라는 것이 없었을 때였는데, 제가 ‘대화창’으로 노래를 부른 거죠. 제가 막 예술단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노래로 대화’를 하는 “대화창”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제창극장’에 배치되어 예술가로 쭉 크게 됐죠.

 


출신성분이 나쁘면 예술인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저는 17살라는 어린 나이에 함경남도 가무단을 시작으로 2010년에 북한을 나오기 전까지 40년 동안 문화예술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함경남도 가무단에서부터 저는 ‘발전가능성’을 인정받아 어린이 역에도 출연하고, 여러 가지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중앙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제창극장에 소환되면서 예술에 대한 꿈을 훨씬 더 키우게 되고, 예술과장을 거쳐 예술부총장이 되기까지 꾸준히 예술가로서 성장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는 꿈이 참 켰죠. 처음에는 훌륭한 가수가 돼가지고 주인공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인공이 되는 게 기본목적이고, 그 다음에는 훌륭한 독창가수가 돼서 방송에 나오는 거였어요. 이렇게 꿈을 키워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때는 정말 열심히 했죠. 그렇게 열심히 해서 점차 단역에서부터 주역으로, 아역에서 주역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주역으로서 여러 개의 작품을 하면서 과장 노릇도 했고, 예술부총장으로 까지 일을 하면서 참으로 오랜 시간을, 40년 남짓 노래를 했어요.

 

북한에서 예술인들에 대한 대우는 아주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예술인들은 당의 뜻을 인민들에게 가장 먼저 전달하고, 인민들을 교육하고 추동 하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예술인들에게는 백미를, 다른 사람들은 다 600g, 700g 할 때, 백미를 900g이나 줬어요. 비행사와 똑같은 대우를 해줬으니까요. 왜냐면 나팔을 불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한다는 그 자체가 얼마나 에너지가 소비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집에서 밥을 아무리 많이 먹고 나와도, 피아노 앞에서 한 사십 분만 발성을 하면 금세 배고파집니다. 호흡하고 계속 힘을 집중적으로 주면서 해야 하니까 그래서 예술인들은 육류, 기름, 당과류, 담배, 술 등을 다 내줬어요.

 

그래서 예술부문에 들어가는 건 “하늘에서 별 따기”입니다. 그런데 예술인이 되려면 단순히 재능만 있어서는 안 되고, 집안환경이 우선 일본 놈하고 연관된 적이 있으면 “무조건” 안 됩니다. 그건 지금도 대단합니다. 게다가 “일본 밑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고생고생을 했다. 쪽발이들이 우리의 자원을 다 뺏어가서 빈 땅덩어리만 남았다”는 사상교육을 대단하게 합니다. 그래서 일본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왜정 때랑 똑같지 않습니까? (독도)을 강짜로 먹겠다는 건데, 일본이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하잖습니까! 그러면 즉시 북의 창작가들은 곡을 쓰고 노래를 만듭니다. 노래를 만들어가지고는 문화예술기간에 전국으로 퍼트립니다. 그러면 이 노래를 온 나라가 하나같이 부릅니다. 북한에서는 위에서 ‘아’하면 아래에서도 ‘아’하고, 온 나라가 ‘아’하는 곳이지 않습니까.

 


반만년의 핏줄을 이어 온 우리의 강토

 

게다가 북한은 항일무장투쟁정신을 무척 강조하고, 특히 문학예술 부문에는 그 정신을 묘사하는 내용의 노래라든가 공연이 많기 때문에 일본 놈과 연관이 되면,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예술부문 일꾼으로 발탁이 되지 않습니다. 또한 북한에서 문화예술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예술인이 일본인이랑 연관이 있으면 말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능력이 아주 뛰어난데도 왜정이랑 관련된 사람은 예술인 선발에서 떨어지는 경우도 많지요. 그런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당 중앙과 가까운 수도에는 두지 않아요. 오지에 보내거나, 문화회관으로 보내거나, 교원으로 보내거나 하지 실지 무대 위나 영화 화면에는 나오게 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이 좋지 않기 때문이죠. 가령 “우리 아버지를 죽인 놈이 저 놈의 아버지 아닌가?, 저런 놈이 어떻게 영화에 나와? 감히 저런 놈이?” 이러한 반발이 생기거든요. (국가건설)초기에는 특히 더 심했습니다.

 

다행히 저는 아내의 집안이 워낙 좋았습니다. 또한 저의 큰 아버지는 북한이 건설될 당시 법학자로서 북한의 첫 보안서원이었습니다. 비록 17살부터 함경남도 가무단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는 없었지만, 북한은 일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통신대학을 세우고,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저도 일을 하면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저는 예술인 활동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이러한 혜택들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무대생활을 거치지 않고 순수 대학 과정만을 거쳐서 무대로 온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학에서 배운 걸 무대에서 써먹자면 몇 년이 더 걸려야 해요. 아무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나와도 무대에서는 완전히 어리버리하고, 제대로 공연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예술인은 당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

 

이렇게 저는 17살부터 쭉 전문 예술인으로서 그리고 대학에서의 교육과정을 통해 예술에 대한 역할과 예술가로서의 사명감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당의 의도를 내가 먼저 알고, 그 당의 의도를 얼마나 관중들에게 빨리 전달하느냐!”에 대하여 저는 사명감을 갖고 정말 열정적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북에서 예술은 조국과 직결되어있고, 모든 게 그렇지만 수령과 직결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명과 나의 고향과 나의 조국을 위하여 내 부모 형제를 위하여 그리고 내일을 위해서 예술을 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노래하나를 불러도, 일을 하나 해도 예술이기 때문에 참 가치를 느끼며 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새 공동사설에 ‘석탄 전선과 수산 전선 그 다음에 경공업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나오면, 작가들은 그 내용을 갖고 작품을 쓰고, 작곡가들은 가사를 씁니다. 또 이렇게 가사가 나오면 작곡가들이 여기에 달라붙습니다. 또한 그 선율이 일단 나오면 무용부분으로 넘어갑니다. 이렇게 북한에서 예술은, 온 나라가 순수한 예술을 위한 지상주의적인 예술이 아니라, 당의 선전선동의 수단의 제1의 역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술과 문학이 북한에서 갖는 역할은 대단히 큽니다.

 

북한의 문화예술의 사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남한에서 저는 사회현실과 전혀 상관없는 예술을 많이 봐왔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농촌에 가면 농촌에 맞는 노래, 도시에 가면 도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 공장에 가면 공장과 관련된 노래를 한단 말입니다.

 

어머니, 나의 공장, 나의 일터여.

여기 보다 좋은 곳, 나는 몰라라.

우리들은,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노동자들의 소리가 높아야,

뚝딱뚝딱 기차가 생긴다.

뚝딱뚝딱 자동차가 일어선다.

철크덕 컬크덕 철이 생산된다.

 

그런데 여긴 지금 천안함 사건으로 몇 십 명이 죽어도 트로트 부르고, 댄스 추고 이렇게 하더라고요. 그런데 문화예술은 말이죠, 이 사회와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문화예술이 되어야 합니다. 북한에서의 공연은 1시간 20분이라면, 공연시간의 절반은 정치적인 것을 하는 시간이고, 그 나머지 절반은 교양을 하는 시간인데, 그 장소와 일 그리고 그 곳 분위기와 연관된 노래를 합니다.

 

동트는 새벽 농장 뜰 나가니,

그 처녀 벌써 나와 있었네. 종달이 처녀.

랄랄랄랄라라 종달이 처녀. 내 사랑 종달이 처녀.

살가운 모에 정이 들었나, 정이 들었나.....

 


병사와 벼 이삭 소리

 

북한의 노래 중에 “길가던 병사가 벼 이삭 서린 소리를 듣는다”라는 가사가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병사와 벼 이삭 소리, 왜 이 둘을 연결시켰을까요? 그건 병사들의 군기를 잡고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 집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동생들도 이 밥을 먹겠구나’ 생각하면서, 병사들에게 부모를 잊지 말고, 고향을 잊지 말고, 우리 부모형제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훈련하자고 결심을 다지자는 거죠.

 

모내기 철부터 군인들은 농장에 나갑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농장의 모든 일들을 도와주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고, 일단 모든 고비가, 힘든 고비가 넘어가면 초소로 돌아와서 다시 군생활을 합니다. 그때 훈련하느라고 도로를 대열 지어서 가는데 자신들이 심었던, 자신들이 김 메었던 그 벼 이삭들, 그 황금이삭 옆을 지나갑니다. 어제, 오늘, 며칠을 지나가는 데 막 그 벼 이삭이 익어가는 그 소리가 아, 익어서 탁탁 알이 터지는 그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마음속으로 ‘아, , , 풍년 들판아, , 올해는 아, 우리 집에서 우리 동생들 아버지 어머니들 아, 이 밥을 먹겠구나’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생각, 그 다음에는 어린 시절 논밭에서 뛰놀던 생각 그리고 냇가에서 놀다 물에 빠진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이런 얘기들이 다 노래가사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병사들에게 ‘병사들은 꿈을 잊지 말고, 일상을 잊지 말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잊지 말자’는 생각을 주입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이 노래들을 들려주고, 그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며 공연을 하는 겁니다.

 

고요한 초소의 밤 깊어도 경비대원 한 순간도 잠들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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