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없는북한보다는 중국 감옥이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자유가 없는북한보다는 중국 감옥이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박은철(탈북청소년)
자유가 없는북한보다는 중국 감옥이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박은철(탈북청소년)

출생 및 어린시절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당시 학생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난으로 매일 굶어 죽고, 자고 깨어나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아침이 되면 누구 죽었다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죽은 시체가 시장 주위, 역전, 그리고 길가에 널려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개미 목숨보다 못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산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올라가 칡뿌리, 소나무껍질, 도토리, 이런 것을 주식으로 때우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병에 걸려서 얼굴이 붓고, 죽어가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저는 이런 나라가 인권이 무엇인지 과연 아는지, 그리고 나라의 기둥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부모를 잃고, 부모님들은 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동물들도 먹지 않는 것을 눈물 흘리면서 대충 먹고, 나무껍질 같은 손과 발로 시장에 나가서 장사하고 거기서 몇 푼 벌면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탈북 및 중국에서의 생활

1998년 8월 21일, 저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때 제 나이 18살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저보다 먼저 중국에 건너 온 북한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말해준 것은 길 다닐 때 경찰에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북한지 9일 만에 중국 도문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혔습니다. 중국 변방 구류소에 15일 정도 있었는데, 그 구류소 안에는 모두 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잡히면 한번에 모아서 북한에 보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명씩 나오라고 하더니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차에다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저는 교두다리를 건너 북한 남양 보위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보위부에서는 나이와 집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저는 혹시 집에 피해가 갈까봐 거짓으로 집주소를 말하였습니다. 북한은 통신이 잘 안 되기 때문에 틀리게 말해도 알기 어렵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학생들만 관리하는 구호소 (복지관)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중국에 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10평 되는 방에 25명 되는 아이들을 가둬놓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친구들과 쇠창살을 뜯어 탈출을 하였고, 20km가 넘는 길을 맨발로 걸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혼자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족이 많은 연길로 가서 교회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밥을 주더니 목사님이 교회에서 공부를 하면서 조용히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고 도망 안 다녀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거기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거기에 한달 정도 있다보니 점점 많은 북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성경 공부할 사람은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월세로 집을 하나 빌려서 북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2개월 정도 생활하던 어느 날, 중국 공안들이 집에 오니 빨리 피하라는 목사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모두 밖에 나왔고, 몇 시간 후 목사님은 우리들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돈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시 저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저는 뜻하지 않게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기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면서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밥을 먹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아저씨네 집에서 한 달간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주민이 신고를 하였고 저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중국 공안에 잡혔습니다. 이번에는 연길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밖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다니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언제쯤 나도 저들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까, 북한에 끌려가면 이번에는 또 어떻게 살아 돌아올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감옥에 있을 때가 차라리 행복한 편입니다. 북한에 가면 이틀 삶은 보리쌀을 한줌씩 줍니다. 중국에서는 비교적 좋은 식사를 하다가 보리밥을 먹으려고 하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니까 그런 보리쌀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가 됩니다. 오직 머리 속에는 중국에서 잘 먹던 생각이 나고, 그러다 보니 하루빨리 탈출해서 다시 중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어느 날, 근무서는 사람의 눈을 피해 또 다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3년간 생활하는 도안 모두 7번 잡혔습니다. 그렇게 잡히다 보니까 두려움도 없어졌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중국에서 사고나 쳐서 중국 감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북한에 가느니, 하루 3끼 밥이라도 주는 중국 감옥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단동 변방 구류소와 신의주 집결소

중국 대련에서 6번째 잡힌 날이었습니다. 대련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감옥에 가면 기본이 한달이라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있다 보니 북한 사람들이 몇 명 잡혀들어왔습니다. 거기서 한달을 지내고 난 후 저는 중국 단동 변방 구류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북한 신의주로 이소되게 되는데, 북한으로 갈 생각을 하니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 변방 구류소에 있는데 중국 공안들이 검사할 때 운 좋게도 제가 지니고 있던 시계를 뺏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잡혔을 때 못을 먹고 병원에 검사하러 간 사이 탈출했다는 한 탈북자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도해보기로 결심을 하고, 시계줄을 분해해서 다른 두 명과 나눠먹었습니다. 그 다음 중국 공안을 불러 시계줄을 먹었다고 했더니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였습니다. CT 촬영을 해서 몸속에 시계줄이 있음을 확인했지만, 괜찮다는 의사의 말에 저희는 다시 구류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날 시계줄을 삼켰다는 이유로 저희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북한으로 이송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또 죽음의 고비가 온 것입니다. 신의주는 중국에서 잡힌 사람은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떨면서 신의주로 갔더니 손목 수갑을 채워 신의주 보위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꿇어앉으라고 하였습니다. 움직이면 더 심한 벌을 받습니다. 보위부에서 조사가 다 끝나면 집결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집결소에 들어가 보니 중국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집결소에서는 하루에 두 끼를 주는데, 아침-저녁으로 이틀 삶은 옥수수 20알 정도를 줍니다. 그리고는 소처럼 일을 시킵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나니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시체는 바로 야산에 묻어버리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보면 소리지를 힘도 없어서 소리도 한번 못 지르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집결소에 있는데, 어느 날 선거를 하니까 집결소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평양에서 내려왔습니다. 다행히도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길로 바로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힘은 없고 물살은 엄청났지만 거기서 포기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그때부터는 차가 안 다니는 산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길로 가면 국경지대라서 중국 경찰이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 중국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중국 위해라는 곳, 조선족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한달에 한국 돈으로 4만원을 월급으로 받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일단 신분이 없으니까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남한 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공부하면서 집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한의 북한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2001년 4월 초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고, 좋은 집에서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말도 모르는 타국 땅에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생활을 하는 저의 동포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남과 북이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난민으로 인정되어 보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요. 또한 그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생 및 어린시절

저는 북한에 있을 때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살았습니다. 그때 당시 학생이었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현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식량난으로 매일 굶어 죽고, 자고 깨어나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아침이 되면 누구 죽었다는 소리뿐이었습니다. 죽은 시체가 시장 주위, 역전, 그리고 길가에 널려있었습니다.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개미 목숨보다 못한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산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산에 올라가 칡뿌리, 소나무껍질, 도토리, 이런 것을 주식으로 때우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병에 걸려서 얼굴이 붓고, 죽어가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저는 이런 나라가 인권이 무엇인지 과연 아는지, 그리고 나라의 기둥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고 부모를 잃고, 부모님들은 자식을 먹여 살리겠다고 동물들도 먹지 않는 것을 눈물 흘리면서 대충 먹고, 나무껍질 같은 손과 발로 시장에 나가서 장사하고 거기서 몇 푼 벌면 입가에 미소가 생기고 하는 현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탈북 및 중국에서의 생활

1998년 8월 21일, 저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때 제 나이 18살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저보다 먼저 중국에 건너 온 북한사람들을 만나서 같이 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이 저에게 말해준 것은 길 다닐 때 경찰에 잡히지 않게 조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북한지 9일 만에 중국 도문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혔습니다. 중국 변방 구류소에 15일 정도 있었는데, 그 구류소 안에는 모두 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잡히면 한번에 모아서 북한에 보낸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명씩 나오라고 하더니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차에다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저는 교두다리를 건너 북한 남양 보위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보위부에서는 나이와 집주소를 물어보았는데, 저는 혹시 집에 피해가 갈까봐 거짓으로 집주소를 말하였습니다. 북한은 통신이 잘 안 되기 때문에 틀리게 말해도 알기 어렵습니다. 저는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학생들만 관리하는 구호소 (복지관)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중국에 갔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10평 되는 방에 25명 되는 아이들을 가둬놓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친구들과 쇠창살을 뜯어 탈출을 하였고, 20km가 넘는 길을 맨발로 걸어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에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혼자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족이 많은 연길로 가서 교회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밥을 주더니 목사님이 교회에서 공부를 하면서 조용히 지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고 도망 안 다녀도 되겠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거기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중국어를 배웠습니다. 거기에 한달 정도 있다보니 점점 많은 북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은 성경 공부할 사람은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목사님은 월세로 집을 하나 빌려서 북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곳에서 2개월 정도 생활하던 어느 날, 중국 공안들이 집에 오니 빨리 피하라는 목사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모두 밖에 나왔고, 몇 시간 후 목사님은 우리들이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돈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또 다시 저의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저는 뜻하지 않게 좋은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자기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면서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당시 밥을 먹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 아저씨네 집에서 한 달간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네 주민이 신고를 하였고 저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다시 중국 공안에 잡혔습니다. 이번에는 연길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손바닥만한 창문으로 밖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다니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안에서 저는 언제쯤 나도 저들처럼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까, 북한에 끌려가면 이번에는 또 어떻게 살아 돌아올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중국 감옥에 있을 때가 차라리 행복한 편입니다. 북한에 가면 이틀 삶은 보리쌀을 한줌씩 줍니다. 중국에서는 비교적 좋은 식사를 하다가 보리밥을 먹으려고 하니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니까 그런 보리쌀도 없어서 못 먹을 정도가 됩니다. 오직 머리 속에는 중국에서 잘 먹던 생각이 나고, 그러다 보니 하루빨리 탈출해서 다시 중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만 하게 됩니다.어느 날, 근무서는 사람의 눈을 피해 또 다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3년간 생활하는 동안 모두 7번 잡혔습니다. 그렇게 잡히다 보니까 두려움도 없어졌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중국에서 사고나 쳐서 중국 감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북한에 가느니, 하루 3끼 밥이라도 주는 중국 감옥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중국 단동 변방 구류소와 신의주 집결소

중국 대련에서 6번째 잡힌 날이었습니다. 대련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감옥에 가면 기본이 한달이라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그렇게 있다 보니 북한 사람들이 몇 명 잡혀들어왔습니다. 거기서 한달을 지내고 난 후 저는 중국 단동 변방 구류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북한 신의주로 이소되게 되는데, 북한으로 갈 생각을 하니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 변방 구류소에 있는데 중국 공안들이 검사할 때 운 좋게도 제가 지니고 있던 시계를 뺏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잡혔을 때 못을 먹고 병원에 검사하러 간 사이 탈출했다는 한 탈북자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시도해보기로 결심을 하고, 시계줄을 분해해서 다른 두 명과 나눠먹었습니다. 그 다음 중국 공안을 불러 시계줄을 먹었다고 했더니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였습니다. CT 촬영을 해서 몸속에 시계줄이 있음을 확인했지만, 괜찮다는 의사의 말에 저희는 다시 구류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그날 시계줄을 삼켰다는 이유로 저희에게는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더니 북한으로 이송한다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또 죽음의 고비가 온 것입니다. 신의주는 중국에서 잡힌 사람은 매우 가혹하게 다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게 떨면서 신의주로 갔더니 손목 수갑을 채워 신의주 보위부로 데리고 갔습니다.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꿇어앉으라고 하였습니다. 움직이면 더 심한 벌을 받습니다. 보위부에서 조사가 다 끝나면 집결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집결소에 들어가 보니 중국에서 잡혀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집결소에서는 하루에 두 끼를 주는데, 아침-저녁으로 이틀 삶은 옥수수 20알 정도를 줍니다. 그리고는 소처럼 일을 시킵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고나니 사람들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은 시체는 바로 야산에 묻어버리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보면 소리지를 힘도 없어서 소리도 한번 못 지르고 죽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집결소에 있는데, 어느 날 선거를 하니까 집결소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보내라는 지시가 평양에서 내려왔습니다. 다행히도 쉽게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길로 바로 친구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힘은 없고 물살은 엄청났지만 거기서 포기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강을 건넜습니다. 그때부터는 차가 안 다니는 산으로 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길로 가면 국경지대라서 중국 경찰이 차를 타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며칠을 걸어 중국 시내로 들어섰습니다. 중국 위해라는 곳, 조선족 식당에서 서빙을 하면서 한달에 한국 돈으로 4만원을 월급으로 받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일단 신분이 없으니까 그것도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가 남한 교회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의 도움으로 은신처를 마련하여 공부하면서 집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남한의 북한인권 단체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2001년 4월 초에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고, 좋은 집에서 하루 세끼 밥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아직도 말도 모르는 타국 땅에서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생활을 하는 저의 동포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남과 북이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수많은 탈북자들이 난민으로 인정되어 보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구요. 또한 그들이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나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여기까지 오는데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