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과 슬픔의 세월

[증 언]

 

아픔과 슬픔의 세월
 

이 선 화
(탈북 여성)

나는 197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탁아소 유치원을 거쳐 11년제 의무교육을 마치고 1993년 대학에 입학하였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어려워지기 시작한 나라의 경제형편은 내가 대학 다니던 시기에 최고 절정에 이른 듯했다.

세계관이 정립되던 이 시기에 내가 보고들은 것은 오직 사회주의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참된 자유와 권리, 행복이 마련되며 이보다 더 좋은 사회란 없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배우는 과정에 현실에 부합되지 않은 공상화 된 사회이론을 배우며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사회주의 이념과 이론은 화려하지만 그 속에는 온갖 비리와 독재와 인민들의 원한과 눈물이 갈피 갈피마다에 감추어져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추위와 싸워야했던, 나의 일생에 가장 어려웠던 고난의 4년이었다. 지금도 돌이켜보면 인간답지 않게 살아온 시기였던 것 같다. 온몸이 오싹해진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물질문화 생활이 최대로 보장되고 누구나 다 자기의 의무와 권리를 행사하며 사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데 사회주의보다 못하다는 자본주의 다른 체계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주체담벽”을 쌓고 있는 이 나라 밖은 과연 어떤 세계일까? 이 나라 지경을 넘어 내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갓 호기심과 이루지 못한 꿈일 뿐이었다.

1997년 8월 대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내 앞에는 대학기간보다 더 어려운 생활 형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녀야할 공장은 멎어 섰고 로동자들은 농촌지원, 도로공사, 건설, 군사훈련에 쫓기고 있었고 순진한 인민들은 식량난 경제난에 휩쓸려 사방에서 애처로운 아우성 소리만 들려왔다. 온 나라가 이런 형편인데 우리 집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먹을 것을 찾아, 입을 것을 찾아 혹독한 독재정치를 피해 사람들은 산지사방으로 살 곳을 찾아 떠났다. 행복했던 가정들도 사회불안으로 말마암아 하루밤 새에 흩어져 버려 생사를 알 길 없고, 언제 불을 때고 쌀을 앉혀봤는지 녹쓸어 버린 밥 가마와 거미줄이 휩쓴 굴뚝, 막대기를 휘둘러도 거칠 것이 하나도 없는 텅 빈 집안들…….

그래도 그 사회주의를 지키겠다고 집안의 가정집물 다 팔아도 살 수 없으니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우리 가정은 혁명적인 분위기라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일그러져 가는 사회를 지키고 섰다. 나중에 어머니만이 뛰어다니며 가정을 지켰다. 한 개의 작은 가정도 지키기 어려운 형편인데 어찌 나라가 든든할 수 있으랴. 온 나라 방방곡곡을 뒤지며 다녀도 돈이 될만한 일이 없게 되자 강을 건너가는 사람들 속에 섞여 어머니도 들어섰다. 한 달이면 꼭 온다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하고 나 혼자만 알게 하고 어머니는 떠났다. 두 달이 되어 오는데도 생사를 알 수 없이 나는 어머니를 찾아 떠났다.

어머니의 행처도 알지 못한 채 중국으로 가면 만날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어머니를 만나면 손을 꼭 잡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면서 순진한 꿈을 꾸었다. 못 먹고 못 살아도 흩어져 한시도 살 수 없는 가족이기에…….

두만강을 건널 때 그렇게 서럽고 아팠던 그 감정과 기분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느낄 수가 없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찾아 중국으로, 어머니는 가족을 찾아 조선으로, 이렇게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가족의 비극이 벌어졌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몇 일 앞두고 어머니는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다시 나를 찾아 사방으로 눈물을 뿌리며 다녔다.

집에서는 선거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은 식구들이 있게 되자 직장, 안전부, 보위부의 매일 같은 질문과 감시의 눈초리들로 시선을 받았다. 그러한 감시 속에서 남은 식구들은 한 순간도 맘이 편해보질 못했다. 드디어 어머니와 집에 연결이 되어졌으며 1998년 8월 1일 이제는 이국 땅에서 다시는 혜어지지 말고 살자고 약속했다.

처음 한동안은 중국이라는 화려한 세계에 황홀함을 못 감추고 살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고 어느 한순간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음을 피부로 의식하게 되었다. 중국에서의 그 수많은 역사를 펜으로 한 두 장애 다 옮기기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다.

그 끈질기고 지독한 김정일 정권은 이국 땅에서나마 사람들이 편히 살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자기의 백성을 지켜주지 못한 김정일 정권에 침을 뱉고 돌아선 사람들이 어찌 다시 그 체제에 돌아가길 원하겠는가. 두 번 다시 살려준대도, 두 번 다시 죽는다 해도 그 속에 살고 싶지 않고 묻히고 싶지 않다. 살 길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공안에 잡혀 하루에도 수 십 명씩 수갑에 잠겨 이루지 못한 꿈을 품은 채 도로 피 비린 두만강을 건너 죽음의 땅으로 가고 있다. 그 땅에서 맞이하게 되는 사람들의 운명은 과연 누가 지켜줄 수 있겠는가.

잠시나마 한집에 오붓이 모여 살게 되었던 우리 가정에도 사정없이 풍랑이 덮쳐들어 한순간에 부모를 빼앗기고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이 가슴아픈 사연은 글로도, 말로도 다 표현하기에는 온 몸이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 조선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되는가.

아픈 상처를 뒤에 남긴 채 세월은 예까지 흘러왔고 이 마음 속에는 온통 칼로 난도질당한 듯 찢긴 상처뿐이다. 나는 고마운 분들의 도움으로 2001년 8월 31일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고 지금은 그 고통스러운 아픔과 슬픔을 힘으로 바꾸어 열심히 살 수 밖에 없다. 이제 더는 이러한 비극적인 과거들이 되풀이되지 말아야 하며 하루 속히 비극은 끝나야 한다. 내가 찾은 자유는 인간 본능의 행복을 위한 피타는 아픔과 노력과 투쟁의 결과였고,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한다. / 이글은 본회 계간지 「생명과인권」 2002년 여름호에 실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