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힘들었지만 후회 없는 선택

힘들었지만 후회 없는 선택

 

 

                배희진 |1982년생

        입국; 2003년 11월 27일

 

  나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도 장사에 소질이 없으셨고 끼니를 여러 날 거를 정도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15살부터 장사를 다녀야 했다. 17살까지 학교공부를 병행하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버는 돈은 하루에 한 끼 때울까 말까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장사뿐만 아니라 남의 집에 가서 살림을 살기도 했고 (가사도우미 일을 하기도 했고) 밭일을 나가기도 했다. 남의 집 일을 도와주면 돈을 받지는 못했고 그냥 쌀이나 먹을 것만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어머니 따라 장사를 하다가 경험이 쌓이자 장사하는 요령이 생겼다. 또 나이가 어느 정도 들면서 주변에서 돈도 빌려주고 장사도 어느 정도 되니 그나마 먹고 살 걱정은 덜 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은 기회

  내게는 중국에 사는 이복언니가 한명 있는데, 하루는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도 볼 겸 2003년 4월 국경을 넘었다. 국경을 넘을 때는 며칠 언니와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뜻하지 않게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지낸지 한 달이 좀 넘었을 때, 언니네 집에 한국행을 돕는 브로커가 찾아와서 한국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이 전부터 남한이 북한보다 잘살고 자본주의 국가라서 자유롭다는 어느 정도의 인식도 있었고 ‘나에게 찾아 온 기회다’라는 생각이 문뜩 들어 대뜸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브로커는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별다른 준비 없이 운 좋게 북경 영사관에 들어갈 수 있었고 영사관에서 4개월을 보낸 후 2003년 11월 27일 한국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못살았지만 한국에서 만큼은 열심히 일해서 잘살아 보자는 마음을 먹고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국정원에서 40일 정도 조사를 받고 하나원에서 2개월 정도 머물렀다. 하나원에 있을 때는 해주는 밥 먹고 지내니 편했고 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다 보니 재미도 있었다. 하나원 교육은 주로 한국문화와 한국에서 쓰이는 외래어를 많이 가르쳐 주었고 다단계 들어가지 말라는 등의 주의도 주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원에서 2개월 교육은 좀 시간낭비였던 것 같다. 일방적인 수업에 많이 지루하기도 해서 잘 새겨듣지도 않게 되었다. 나이든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젊은 사람은 사회로 빨리 나가 일하고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사는 게 적응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적응의 과정

  하나원에서 바로 나오자마자 일자리를 찾았고 주유소에 취직이 됐다. 아무리 내가 같은 한국말을 쓴다고 해도 일단은 말에 억양이 틀리다 보니 조선족이냐는 등 어디서 왔냐는 둥의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내가 탈북자라는 생각은 미처 못 하는지 북한에서 왔냐는 질문은 받아보지 못했다. 그때는 솔직히 말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 북한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거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진짜 그렇게 살기 힘들어요?’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고 ‘한국에 왜 왔냐?’라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다른 질문들은 다 괜찮았는데 ‘왜 왔냐?’고 물어볼 때는 정말 할 말이 없어지면서 서운했다. 당연히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좋고 거기서 살고 싶지만 먹고살기 힘들고 운명이라 생각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남의 아픔을 모르고 여기 사람들이 북한이 못산다는 걸 알면서 굳이 왜왔냐고 물어보는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손님이고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거기다 대고 내가 오고 싶어서 왔는데 보태준 거 있냐고 말해줄 수도 없어서 답답했다.

 

작년에 직업소개소의 도움을 받아 집근처에 핸드폰 조립 전자회사에 취직이 되었다. 일하기 전 이것저것 물어볼 때 솔직하게 북한에서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2~3일 뒤에 아무런 설명 없이 해고당했다. 소개해준 사람을 통해 이유를 알아보니 같이 근무하는 사람들은 다 아줌마인데 나만 나이가 너무 어리고 또 아줌마들이 내가 북한에서 와서 생각이 틀릴 것 같고 어려워서 말붙이기 힘들다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고 다르고 이상할 거라 앞서 생각해버리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밝히지 않는 게 차라리 편하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이때부터 직업을 구할 때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북한에서 왔다고 밝히지 않았다. 만약 누가 억양이 틀린걸 알아차리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면 강원도에서 왔다고 대답하기 시작했다.

 

  열심히 살겠다는 처음의 결심처럼 주유소에서도 일해보고 식당에서 일해 보았다. 열심히 살겠다는 내 의지대로 나의 성실함이 보였는지 일자리를 구하는 건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일하면서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남한에서 사용하는 외래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 가장 힘들었다. 식당에서 서빙을 할 때였는데, 손님이 냅킨을 달라고 했다. 냅킨이 뭔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다가 주방에 가서 물어보고 난 다음에 가져다주기도 하고 또 한 번은 손님이 리필을 해달라기에 리필이 무슨 뜻인지 몰라 주방에 가서 물어본 후 알 수 있었다. 주인이나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냥 얘기해 줄 때도 있었지만 바쁠 때 자꾸 와서 물어보면 일이 밀린다며 그것도 몰라서 어떻게 하냐고 짜증을 낼 때가 더 많았다.

 

  꼭 외래어가 아니라도 주변 남한사람들은 내가 무언가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북한에서 왔기 때문에 당연히 모르는거다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하고 또 내가 알고 있으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모르는 걸 남한사람이 모른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데는 차이가 있었다. 조금만 시야를 넓게 보고 생각하는 방법을 달리하면 되는데, 남한사람이 모르면 모를 수도 있지라고 가벼이 넘기고 내가 모르면 당연히 모른다는 식으로 꼭 집고 넘어가야 시원한 것처럼 일일이 그렇게 말하는 태도에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문제들이 계속 생기다보니 적응하는 게 더욱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북한 억양을 되도록 쓰지 말고 외래어도 빨리 익히자며 마음을 잡고 더욱 노력했다.

 

  나나 남편이나 허튼 데에 돈 쓰지 않고 아끼면서 살아서 빠듯하긴 해도 그럭저럭 살 수 있었지만 아기가 태어난 이후로 여기저기에 드는 돈이 늘어났다. 정부에서 출산 비 50만원을 지원해 주었고 매달 아기 앞으로 20만원의 보조금을 주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편도 아직 학생이라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 내가 주유소에서 일을 하면서 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하다 보니 아이를 놀이방에 맡길 수밖에 없다. 아이 놀이방 보내는 돈이 한 달에 37만 원 이고 분유며 간식비는 못해도 20만 원 정도는 든다. 혹여나 아이가 아프면 들어가는 병원비도 만만치 않다. 의료보험 혜택이 많은 줄 알았는데, 산부인과, 부인과, 치과 등은 의료보험이 되지 않는다. 정작 비싼 것이 보험이 안돼서 너무 힘들다. 예를 들어, 아이들 예방접종 중 폐구균 접종은 한번 맞는데 10만원인데, 2, 4, 6, 15개월 4번 맞아야 하고 그 외 뇌수막염, 간염 주사 등등도 3만원이 넘는데 이런 주사들은 보험처리가 되지 않는다. 엄마들이 다 그렇듯이 접종 시키지 않으면 혹여나 좋지 않을까 싶어 빠지지 않고 예방접종주사를 다 맞히려고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못할 때는 그마저도 힘들다. 딸이 지금 두 살인데 폐구균 접종은 2개월 때 한번 맞혔다. 그래서 아픈 사람, 아기가 있는 사람은 일을 하기 힘들고 아무리 일을 한다고 해도 수입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정부차원의 도움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들어 걱정거리가 있다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딸의 교육비다. 부모 된 욕심에 이것저것 다시키고 싶지만 한국은 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빠 저축해 놓은 돈이 없고 그렇다고 아이 때문에 무제한으로 일을 할 수도 없어 그게 제일 신경 쓰인다. 하지만 아이가 원한다면 원하는 만큼 다 해줄 순 없어도 공부하고 싶다는 만큼 최선을 다해 가르치고 싶다. 그게 아마 부모 된 도리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인 것 같다. 아직은 딸이 어려 아무것도 모르지만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엄마 아빠의 고향이 북한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부모님이 북한에서 온 걸 다른 아이들이 알게 되면 차별이 있지 않을까, 다른 아이들이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내가 따라다니면서 보호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알면 씩씩하게 자라날 거라 생각한다.

 

  결혼 전에는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딸이 태어나고 나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대학을 가기보다는 기술을 배우고 싶다. 아직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결심하진 않았지만 경리일을 배워보고 싶다. 지금 일하는 주유소에서 경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아직 컴퓨터를 알지 못해 경리직을 맡기에는 무릴 것 같아 해보겠다고 하지 못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우고 일을 배우면서 차분히 생각하고 싶다.

긍정적 생각과 노력의 필요성

  한국에 온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에서의 생활을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적응해야 하는데 힘든 게 당연한 것 같다. 정부가 탈북자들의 힘든 상황을 알고 더 많은 지원을 해주길 바라는 것도 좋지만 내 생각에는 일단 무언가를 바란다는 생각을 바꾸고 스스로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많은 탈북자들이 적응에 힘들어 방황을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도 여느 탈북자들처럼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국에 온 걸 한 번도 후회하며 스트레스 받고 내가 여기 와서 무슨 고생이냐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오히려 잘 와서 팔자 고쳤다고 생각하며 의지를 키웠다.

 

  원래 집이 가난해 북한에서 남편을 잘 만나 호강하지 않으면 끼니 걱정하면서 힘들게 살아야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나의 의지에 따른 자유와 내가 일한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남한에서는 내가 몸을 움직여 일을 하면 단돈 얼마라도 들어온다. 예를 들어 남의 집 가정부라도 일당을 받으면서 일하지만 북한은 남의 집 일을 해줘도 한 줌 밥이나 쌀이나 조금 주는 게 전부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무슨 일이든 내가 노력한 만큼의 보상이 있어 부지런히 일했고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어디가든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며 살아가는데 매일 좋을 순 없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힘들어도 항상 긍정적이게 살려고 노력했다. 내가 단순하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은 임금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 계약에 따라 임금을 주면 그에 만족했고 일을 시작한지 얼마가 지나 사장이 내가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 임금을 올려주면 감사히 받았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내가 새로이 오는 탈북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북한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외래어를 익혀 이 사회에 빨리 적응하도록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조바심 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내 주변에서 우울증이 걸렸다는 말을 들으면 이해가 잘 되지 않았으나 출산하고 아이와 집에만 있으니 산후 우울증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왕이면 즐겁게 사는 게 좋고 당연히 욕심이 생기겠지만 지나친 욕심 부리지 않고 여유롭게 살면서 노력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