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쫓기고 숨는 삶이 끝나기를 – 3

[탈북자 증언]

 

쫓기고 숨는 삶이 끝나기를
 

전 영 미 <탈북여성>

딸과 아들을 만나다

다섯달 만에 연변에 나와 지향이를 만났고 이어 일하고 있던 할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부모들이 몸이 편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세 식구가 부모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 달을 거의 쉬고 있었다. 이때 큰 아들 려명이가 오빠의 집에 오겠다는 전화가 걸려 왔기에 오빠가 려명이에게 너 혼자 올 수 있느냐고 하자 올 수 있다고 하여 그럼 빨리 오라고 하였더니 저 혼자서 어른들의 틈에 끼여 버스에 타고 왔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끼리 벌어서 먹여 살릴 순 있으나 아이들을 키울 집이 없었고 부모들은 역시 아이들을 맡아 데리고 있어주겠다고 하지 않았고 남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려명인데 그렇게 있을 수 없어 벌어놓은 돈이 좀 있어 차비만 가지고 지향이와 함께 연변으로 나오는 차에 앉아 아들을 만나게 된다는 기쁨으로 남편 가족의 섭섭함을 다 잊으려고 애썼다. 연길에 도착하니 오빠가 려명이를 데리고 와 있었다. 순간 려명이가 울면서 달려오며 하는 말이 “어머니! 어디 갔댔소”하는 것이다.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갈 수도 없고 얼마나 찾고 헤매며 애썼으면 어딜 갔댔냐고 물었겠는가. 어디에 있었느냐의 뜻일 것이다. 이렇게 되어 두 아이들 만나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조양 교회에 가면 조선 사람들이 여럿이 살고 있다고 하면서 그 곳에 가면 방조 받을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조양교회에서 생활을 시작하였고 세집이 나와 자기 집을 쓰고 살게 되었고 일자리도 구해주어 일을 하였다.

북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처음에는 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구제받기위해 별의별 거짓말과 수단과 방법을 다해 속이고 서로 싸워서 상하고 칼로 배를 찌르고 맥주병으로 머리를 까고 많은 사고들을 저질러 교회에 피해를 주고 잡혀나갔으며 참으로 수습 못할 일들이 너무 많아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용서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데 모든 사람들에게 알고 속히우면서도 현명하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었다.

나는 타락해있는 남편 하나 건져주지 못하는 것이 어찌 민족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생각되자 남편과 친분이 있는 전도사 사모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물으니 남편은 지금 술에 중독되어 정신이 거의 없고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나는 부탁하기를 정신을 좀 차리게 되면 말해서 연변으로 나오는 열차에 태워 주면 역전에 마중 나가겠다고 하였더니 뭐 이번엔 살아날 것 같지 못하니 다시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였으나 남편이 내게와서 며칠 살다가 세상 떠나도 좋으니 보내달라고 하였다. 정말 그럴 생각이냐고 하였고 집에 찾아가서 정신 차리라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하였는데 기뻐하면서 애써 정신 차리고 걷는 연습하여서 보름만에 떠나왔고 우린 다시 만나서 함께 살게 되었다.

팔릴 뻔한 고비를 넘어서-광명 소식을 듣다

한번은 북조선 여자인 것이 알려져 납치되어 팔려가게 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이제 나를 팔고 도망쳐 못 나오면 자기들이 경찰로 해서 그 집에 가서 나를 잡아가는 것처럼 데려내오고 그 집에는 조선 여자를 샀기 때문에 벌금을 시켜 팔아서 번 돈과 벌금 받은 돈으로 함께 나누어 가지자고 얼리었다. 나는 남편도 있고 자식들도 있는데 놔 달라고 눈물 흘리며 사정사정을 했다. 그때부터 묻는 말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고 기도만 하였다. 도망칠 수 있게 해주셔서 팔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전화로 택시를 불러 도착할 때가 되었을 때 날 지키라고 한 남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잠깐 밖에 나간 틈에 그 남자가 텔레비를 보다가 앉은 채로 잠들어 그 때 도망칠 수 있었다.

조선에 다녀온 한 사람이 작은아들 광명이가 조선에 있다 하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들을 만나러 정신없이 뛰쳐나가 그 가족을 만났다. 그때 그 애들이 중국에 왔을 때엔 그 애들의 어머니는 감옥에 간지 몇해 되었고 아이들 넷은 살길 찾아 헤매다가 하나둘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중국 공안에 잡혀 조선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끌려 나간 조선에서 아이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들 기뻐하였다고 했다. 그동안 감옥에 갔던 어머니도 방금 나왔는데 운신조차 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집도 없이 아이들이 조금씩 얻어다 주는 것을 어머니는 먹고 있었고 그들의 형편은 눈물나서 볼 수 없었다. 나는 광명이를 찾으러 다니는 20여일간 그 식구들은 데리고 다니면서 먹여주었고 그 애들은 나와 떨어질까봐 붙잡고 다녔다. 광명이가 있을 만한 데를 다 찾아보았으나 그는 조선에 없었다. 아마 중국 어디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어머니가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 자녀들이 있는 중국으로 돌아가야겠는데 그 애들이 자기들과 꼭 함께 가자고 하였으니 나는 망설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인간의 육정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계시면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밤이면 잘 곳이 없어 어데서 몸을 의지해 잘 때면 작은 아이가 나를 붙잡고 자다가 오줌을 싸서 내 옷까지 다 젖었고 11월의 찬바람이 몸을 떨게 했다. 이 식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는 민족 땅. 몇해 사이에 면목 없이 늙어버린 사람들.

중국에서 실어내가는 열차가 잠깐 역에 멎으면 꽃제비 아이들은 재빨리 눈을 피해 자루 속에 넣어가지고 영차에서 떨궈뜨리면 다해진 자루는 터져나 쏟아지고 그나마 걷어가지고 도망쳐 성공하면 국수 한 그릇이라도 사 먹을 수 있는데 그나마 하다가 들키기만 하면 밟고 때리며 맞아야 하고 어떤 아이들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맞고 쓰러진 채 숨지기도 한다. 부모 없이 알아주는 이 없이 불쌍하게 죽은 어린이들은 얼마고 먹을 것 찾아 중국으로 드나들다 물에 빠져죽고 산에서 죽은 아이들은 얼마랴.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고통하며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다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을 알지 못한 채 지옥으로 끝없이 가고 있었다. 보는 것마다 가슴을 허비고 눈물을 자아냈으며 참지 못해 구석진 속에서 얼마나 기도하며 울었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 조선에 나가 있는 거의 한 달간 걸음걸음마다 많은 위험한 고비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이 기적들을 행하셨고 악한자들이 해하지 못하도록 지켜주셔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는 길에도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아이들의 어머니와 5명이 떠났고 그집 큰아들이(25세) 갑자기 안가겠다하여 실갱이를 하다가 할 수 없이 바쁜 길이여서 떨구어 두고 오게 되었다. 그 일로 그 애들의 어머니는 마음이 아파하였다. 오는 길에도 많은 고생을 하면서 왔으나 연길에 도착하기까지 아슬아슬한 고비마다 하나님은 신가하고 놀랍게 보호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지 며칠이 안되어 조양교회에서 공부시켜주어 학교에 다니던 여러 명의 아이들이 고발로 잡혔는데 우리 두 아이도 있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겨우 만났는데 또 이런일이 있다니? 내가 쫓아나가서 아이들을 구하려다가 내가 잡히면 아이들도 나도 다 어려워지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앉아 기다리자니 속에 불이 났다. 우리의 도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달 되어 려명이와 남자아이들 셋이 먼저 왔는데 꽃제비 구호소에 갇혀서 매일 눈 덮힌 산에 나무하러 가는데 하루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셋이만 도망했고 경비대 군인들을 피하느라 눈 속에 엎드려 기였고 키를 넘는 얼음물을 건널 때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보기만하면 고발하는 사람뿐인데 마음착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지향이는 꽃제비 구호소에서 함께 잡혀나간 아이들 중에 제일 어린 8살난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애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려명이는 동생이라고 속였으나 끝내 알려져 그 애의 집이 있는 청진으로 나가게 되여 그애와 둘이서 떨어지기 싫어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것을 잡아끌어 어린아이들 데려내갔고 지향이는 소리쳐 울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 나와 함께 온 그 집의 큰 아들이 그때 떨어져 남아 있었는데 그날 동무와 함께 꽃제비구호소 옆을 지나게 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울음소리 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인데 그 울음소리에 이끌려 창문짬으로 들여다보게 되였는데 지향이를 발견하였고 지향이에게서 사연을 듣고 그날 밤에 늘 전기가 없어서 깜깜한 곳이라 어두운데서 한쪽에서 우정 싸움을 걸고 그틈을 타서 옷도 신발도 다 벗겨놓고 속옷만 입혀둔 아이들 속에서 지향이를 안고 나왔던 것이다. 이렇게하여 지향이를 데리고 건너왔는데 얼음물에 젖은 몸에 하루 밤새 눈 속을 헤치며 산을 넘어서 왔는데 발이 너무 얼어서 물통기가 쳤고 얼마동안 걷지도 못했다. 이렇게 그 남자아이가 지향이를 데리고 들어왔는데 아이들은 더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였고.

죽음의 고비를 넘어

조양교회에서는 북조선 사람들을 구제했다고 경찰들이 잡아가고 교회에 핍박이 점점 더 심해졌고 조선 사람들을 막 잡아갔다.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털리게 되였고 조선 사람들은 하나둘 살 곳찾아 떠났고 그동안 낯도 익히고 마음도 사랑도 나누고 신앙의 교제를 나누던 사람들과 헤어지게 되였다. 그 후 거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게 된 것을 후에야 알게 되였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더러 있겠으나 내가 알고 있던 여러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중국의 형세는 점점 우리에게 불리해져 북조선사람들을 돕고 있던 여러 교회들이 핍박으로 끊어버렸고 선교사들이 잡혀가고 쫓겨 갔으며 위험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었으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심장병이 더 심해져 10발자국 더 걷기도 힘들고 숨이 찼고, 갑자기 배가 아파서 5일 동안이나 밤낮으로 앓다가 교회의 조사장에게 이야기하여 300원을 가지고 병원에 갔는데 수술해야하니 3천원을 먼저 내라고 하였다. 수술비는 엄두도 못내는데 죽을 것만 같이 아팠다. 동통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을 때 수술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목안에서 선뜩거리는 느낌과 의사의 말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나를 지켜보는 교회 사람들에게서 수술 받게 된 사연을 듣게 되였다. 그날 교회에서는 한국에서 와서 수련회를 하게 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한국 전도사님이 수련회에 사용하려고 가지고 온 돈 3000원을 빼주어 나는 수술을 받게 되여 생을 연장할 수 있게 되였으나 안도에서 나와 꼭 같은 수술을 받으려고 온 한 조선여자는 수술비가 없어 죽었던 것이다. 내게 돈을 돌리고 그때 수련회에서는 얼마나 어렵게 진행되였을가? 퇴원 후 가슴이 너무 찌르는 듯 아파서 병원에 가니 심장이 많이 나빠졌는데 너무 늦었고 수술할 방법밖에 없다고 하였다. 생계의 어려움에다 숨어 살기조차 너무 힘든데 심장수술이란 생각할 수없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고 자기 힘으로 일할 수 있는만큼 벌어서 마음 놓고 열심히 살아보기를 소원하여 한국으로 가려하였고 도와주겠다던 조사장님은 어느 누군가의 고발로 잡혀 이미 도와준 몇사람들의 일로인해 감옥에 가게되었다.

대사관을 향해서

그러던 어느날 조선에서 온 한 아주머니가(삯 배 타러가서 알게된 아주머니였다) 지금 북경에서 여러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려고 대사관까지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제 몇 사람만 더 있으면 인차 가게 된다고 아는 분에게서 전화가 왔으니 가자고 하였다. 나는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날로 남편이 어데서 돈을 꾸어서 차표를 끊었고, 시아버지에게 남편이 전화하여 급히 돈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하여 다음날 새벽차에 시아버지는 어렵게 돈을 꾸어가지고 도착했고 우리는 북경으로 떠났다. 그 아주머니의 아이들과 우리식구들은 북경에 도착했고 우리에게 마중 나온 사람은 이제 래일 떠나게 되니 오늘 저녁은 마음 놓고 있으라고 하였다. 저녁에 한 외국기자를 데리고 와서 촬영하려 하여 이런 건 여러 모로 위험한 것이니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이렇게 해야만 이제 다른 일이 생겨도 넉근히 빼낼 수 있으니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였다. 잔뜩이나 심장이 힘들게 하는데 래일 어느 외국학교 담장을 넘으라고 하고 간 그 사람의 말을 생각하니 가슴이 너무 떨리고 별로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여 함께 간다는 청년 두 명과 우리일행이 아침밥을 먹고 났는데 어제 왔던 그 사람이 또 다른 외국기자 두명과 번역하는 여자 한명을 데리고 왔는데 미국기자들이었다. 취재를 모두 별로 원하지 않았지만 꼭 필요된다니 요구대로 끝내고 그들은 돌아갔고, 우리를 인도하는 그 사람과 우리일행이 택시를 타고 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식사가 끝난후 떠날 준비를 하라면서 옷은 얇은 옷을 간단히 입고 겉옷을 벗으라고 했으나 나는 속옷을 그냥 입고 있다가 담장 넘을 때에 방해되면 벗어던지려고 단추만 벗어놓았고 그들이 걸상 두 개를 사가지고 와서 곧 떠나 학교 담장 옆에 차가서면 내려서 남자들은 먼저 녀자들을 도와 담장을 넘게 하라고 하였다. 학교 안에 들어서면 한 장씩 준 종이장을 보여주면 도와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 종이에는 영어로 ‘나는 조선사람입니다. 도와주세요’와 대사관 전화번호가 적혀있었다.

이어 두 택시에 나누어 7명은 타고 떠났고 떠나서 3분정도가서 골목에 굽어 섰고 20미터쯤 가니 공지 뿐이고 길은 나있지 않았다. 운전사가 당황해하여 어디로 가느냐 물었고 앞에 앉은 남자가 담장 옆을 돌아가라고 하자 운전사는 차를 세우고 불안한 기색으로 어디 사느냐 묻고 우리는 빨리 가자고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뒤쫓아온 공안차에서 경찰들이 내려 차를 막아서고 어데 가느냐며 신분증을 보자고 하였다. 더 말할 사이도 없이 공안버스가 왔고 10여명의 경찰이 두 차에 앉은 우리들을 내리라고 하면서 총을 들고 위협했다.

온몸에서는 맥이 쪽 빠져버렸고 경찰들은 우리를 벽에 머리를 대며 세워놓고는 몸수색을 하여 종이장들을 께내였다. 총을 내대고 소리치며 발로 차고 때리면서 기승을 부렸다. 우리를 뻐스에 태워 구류소에 끌려갔고 한사람씩 심문하였는데, “도와달라고 쓰여있는 종이장은 어데서 생겼냐”고 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 도와달라고 하여 얻은 것이라고 하였다. 시끄러운지 더 캐묻지 않고 차에 태워 감옥으로 데려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