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쫓기고 숨는 삶이 끝나기를 -1

아래의 글은 전영미씨가 한국에 입국하기 전 본회에 보내온 증언이다.
[탈북자증언]

 

 

쫓기고 숨는 삶이 끝나기를
 

전 영 미(탈북여성 2004.2.3 한국입국)

쫓기고 숨는 삶이 끝나기를.

고난의 북녘 땅을 뒤로하고

식량난으로 한창 많은 사람들이 죽어 매일 자고 깨어나면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누구 죽었다는 소리뿐이다. 길가에, 역전에, 시장주위에, 열차 안에 주인 없는 주검이 널려있고 시체들을 정부에서도 처리하기 끔찍해 서로 내리 먹여(아래 사람에게 시키는 것) 가져다버리게 했던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곳인 북녘땅.
먹을 것이 없어 세투리 풀과 쑥을 뜯어 토끼마냥 주식으로 때우고 피나무 잎과 피나무 껍질과 강냉이 대와 벼 뿌리를 가루 내어 그것의 3분의 하나만 낟알을 섞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십분의 하나도 못되는 때로는 낟알하나 섞이지 못한 것을 먹으려고 배고프다 못해 꼬라라져 끊어지는 듯한 쓰린 배속에 어떻게든 넘겨보려고 눈물 흘리던 어린자식들의 여위고 갈라터진 입술.
맥없어 발이 땅에 걸려 자꾸 넘어지고 한번씩 넘어지고 나면 온몸에 힘이 빠지고 후들거려 일어날 기력이 없어 울 힘마저 잃고 멍한 눈으로 안타까이 바라보던 아이들의 눈길. 풀만 먹어 부은 얼굴. 퍼렇다 못해 시꺼멓게 불든 이빨과 입술과 손가락들.

어제는 앞집의 누구 아이가 죽고, 오늘은 윗집의 누구 아이가 죽고, 내 아이들도 언제까지 견뎌낼지 알 수 없었던 지치고 허기져 아무런 장래의 소망도 없이 순간순간 생명주리를 허우적이고 발악하며 헤매던 초인간적인 삶의 위기의 시기인 1997년, 나는 중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무작정 떠나게 되었다. 요행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한번 편지가 왔었는데 그 주소를 가지고 찾아갔다. 중국에 있는 두 달 동안 벼농사하는 곳(천진 어느 곳)에서 더운 지방에 습관 되지 않은 체질과 숨 막히는 더위와 싸우며 힘든 일을 하면서도 늘 지금 이순간도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자식의 모습이 아프게 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고 내가 나가기 전에 아이들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까봐 가슴이 타다 못해 진정할 수 없었다.

돈 천원을 벌어가지고 두 달 만에 북조선으로 나와 보니 꽃제비(거지)가된 아이들의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다 터 갈라진 나무껍질 같은 손과 발. 발에 걸친 건 신발 아닌 넝마 같은 것을 끈으로 질끈 동이였고, 옷은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어지럽고 해진 누데기였다. 푹 꺼져 들어간 눈은 겨우 할딱이는 숨소리와 함께 삶을 갈망하는 애달픈 눈길이였다. 입안은 빨갛게 살이 연해져 짠 것만 대여도 쓰리고 아파했고, 터진 입술에는 피가 말라 있었다. 먼저 집한 칸 마련하고 아이들의 신발을 사서 신기고 대충 옷을 사 입히느라 음식도 한번 실컷 사 먹이지 못했는데 중국에 다녀온 것이 발각 되여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에 다녀온 것이 발각되어 감옥으로

감옥에서의 1년 가까운 세월을 말로서는 다할 수 없는 고생이 많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아이들의 걱정이었다. 나 혼자라면 죽으면 편할 것 같은 데 밖에 있는 아이들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곧 추위가 다가오는데 옷도 없고 언 땅을 받쳐줄 수 있는 신발도 없이 먹을 것 때문에 여윈 목을 빼들고 헤맬 모습을 생각하니 인생이 과연 이런 것인가 생각했다. 먹을 것 찾아 헤매다가도 먼 곳에서 나를 보면 너무 기뻐 얼음이 떠있는 찬 물속을 아랑곳없이 뛰어 건너오던 아이들의 손에 먹을 것 하나 변변한 것 쥐여줄 수 없던 그때 아프던 마음들이 생각나 더욱더 가슴이 찢어지는듯했다. 지금은 살아있을까? 어떻게 하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아이들의 모습이 안겨와 숨 막히는 것 같았다.

찬 감방에서 뼈 속까지 추위가 스며들고 이가 득실거려 사람 전체에 한번 이가 덮여있고 언 발에서는 물이 흘러 꿇어앉고 있노라면 얼어 붙어버린다. 목구멍에 거미줄이 치지 않을 만큼 삼켜버리는 서너 숟가락 되는 죽을 먹고 이곳저곳에서 배고파 꿀꺽이는 침 삼키는 소리뿐이고 참기 너무 힘들어 미칠 것처럼 내어 뿜는 한숨소리 게다가 전염병(장티푸스)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굶어 죽어가는 여윈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간신히 하는 말은 “선생님 먹을 것 조금만 주세요” 하며 내미는 거미같이 여윈 손. 장티푸스로 열 속에서 정신이 몽롱한테 간수들은 조금도 사정없이 욕하고 때린다. 여자와 남자를 짝 묶어 족쇄를 채워 변소에 함께 가서 봐야 했다. 지하 감방에 맨 위에 있는 작은 뙤창문에 틈이 있어 그곳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별이 살짝 보일 땐 아이들 생각이 나고 언제다시 해와 별 하늘을 바라보며 땅을 딛고 걸을 수 있을 까 하고 생각했다. 밖에서 보위부 가족 안해들이 김치를 담그느라 웃고 떠드는 소리와 김치 양념냄새가 폐 속까지 손 간에 스며들며 먹고 싶어 입을 꽉 다물며 참노라면 이빨이 부서지는 듯 했다.

중국 땅을 디뎌보지 못한 사람들도 반역 짓을 하려고 가려했다는 것으로 10년 또는 15년의 형을 받고 실려 갔다. 부흥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를 조직했던 사람들과 무궁화라는 단체를 만들었던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었는데 밤중에 어디론가 실어갔는데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어느 감옥에나 아니면 그때에 끌어다가 죽였을 것이다.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는 삶과 죽음이 엇바뀌는 순간을 꼽으며 살아 견딜 수 있어 출옥할 수 있은 것은 죽을 수도 살 수도 없었던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였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중국으로 가지 않겠으며 다시 갈 때엔 엄중한 처벌받겠다는 손도장을 찍고 나온 길이었으나 도저히 살래야 살 수없었던 그 세월 끔찍한 그 길이 막다른 길이였던 것 같다.

나의 어린시절-아버지와 오빠는 감옥으로

나의 어머니의 부모형제들이 해방 전 살길 찾아 중국으로 들어갔고 부모형제 그리워 어머니는 끝내 자식을 거느리고 아버지를 설복하다 못해 아이들만 데리고 강에 들어섰는데 처자식들을 보내놓고 집에 앉아있던 아버지는 참지 못하고 울며 뒤쫓아 나와 보니 강 가운데 서서 건너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식구들을 건지려고 뛰어들었는데 아버지는 조선으로 가자하고 어머니는 그냥 중국으로 가자하며 실갱이를 하다가 할 수없이 중국으로 넘어갔다.

몸을 숨길 곳 없어 공안의 눈을 피해 산을 넘어 다니며 장백산까지 가게 되었다. 장백산에는 범이 욱실대여 밤이면 우등불을 피워놓고 있었고 물이 없어 목 말라하는 내게 무릎에 눕히고 어머니의 침을 넣어주던 일이 생각나는데 그 때가 내 나이 5살이였다고 한다.

그러다 공안에 잡혀서 조선으로 끌려 나갔는데 큰 오빠는 공민나이가 되었다고 아버지와 함께 어디론가 끌려갔고 - 아마도 정치범수용소- 어린오빠, 언니, 어머니와 나는 농촌으로 추방되여 반역자라고 늘 투쟁회에서 핍박받았다. 먹는 우물에 똥을 넣기도 하고 그 우물도 못 먹게 하여 논두렁의 물을 먹게 하였으며 집안에 돌을 던져 오빠는 언니와 나를 구석에 앉히고 막아서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약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끝내 심장병으로 돌아가셨고, 언니,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셋만 남게 되었다.

결혼한 언니 가족도 정치범수용소로

언니는 시집갔는데 아저씨(형부)로 말하면 아저씨 어머니가 어릴 때 생활이 구차해서 부자집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류학다니던 남편과 함께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었는데 전쟁 때에 어머니와 아들(아저씨)만 두고 시부모와 남편까지 한국으로 갔다. 그들이 한국에 가서 어떤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북에서는 그 가족들은 다 나쁜 사람들로 취급되는 정책이여서 원래 살던 곳인 개성에서 북쪽으로 추방되여 왔다는 것이다.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던 아저씨가 언니를 만나 자식을 셋을 낳았는데 옆집 아주머니와 마당에 쌓아 놓은 나무더미가 자기 땅 쪽으로 더 왔다고 다툼이 생겼다. 옆집 여자가 정책에 대해 말하기에 이런 일에 무슨 정책이냐고 한 말을 정책을 헐뜯었다고 고발했다. 워낙 아저씨의 가족이 한국으로 간 것 때문에 성분이 아주 나쁜 것으로 되어있던 때이어서 인지, 날도 밝지 않은 새벽에 보위부에서 밖에 차를 세워놓고 늙은 어머니와 아저씨, 아이 셋을 실었고 언니에게 떨어지겠는가, 함께 가겠는가 물으니 젖먹이도 있는데다가 워낙 마음이 어질고 착한 언니는 함께 가겠다고 하여 어디론가 실려 갔다. 조선에 있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있다.

이런 경험들이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은 말 한마디 크게 할 수 없고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처지였으니 마음 놓고 살수도 없는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을 만나서

감옥에서 나오니 이제 더 뭐라 말 할 수 없는 꽃제비된 아이들의 상한 모습들을 보았을 때 나의 심정은 하늘인지 땅인지 분간할 수 없으리만치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흘렀고 가슴이 찢겨 숨만 헐떡이었다. 왜 인간의 삶이 이렇게 비참하고 모진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쫓기고 숨기며 사는 때나 지나면 언젠가 그 때는 하나하나의 일들을 추억하며 울기도 실컷 울고 옛말할 것이다. 힘든 생활은 나를 힘든 결심을 하게 했다. 부모 없이도 돈과 먹을 것이 있으면 사는 현실이기에 나는 일찍 두고 떠난 부모들을 늘 원망하며 그리워하여 어린시절을 보낸 내게 있어서 자식들에게 부모 없는 설움을 주지 아니하리라 한 것이 나의 소원이었건만 자식들을 살릴 길을 찾아 기약 없는 길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더 생활을 유지할 수가 없어 이제 내가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로 가겠으니 가서 일자리를 구하면 인차 친척들에게 말해서 당장 먹고 살 것을 먼저 보내달라고 하여 내가 벌어서 갚기로 하겠으니 인차 생각처럼 돈을 벌 수 있으면 내가 나오고 그렇지 못한 상황이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있어도 먹여 살릴 수 없고 다 함께 굶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다시 나를 못 만날 수도 있다. 몇 년 후, 아니 언제 만날지 알 수 없어도 어디서든 벌어서 너희들에게 보내주도록 하겠으니 나의 부탁은 형제끼리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어도 헤어지지 말고 무우 꽁지 하나 생겨도 한입씩 나눠먹고 있으면서 이 집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했다.

가을에 무우걷이를 다해간 밭에 가서 무시래기를 아이들과 함께 주어서 걸어놓은 것으로 소금이 있으면 넣고 없으면 맨 물에 삶아먹다가 남긴 것이 식량의 전부이다. 짐승도 맨 시라지를 삶아주면 안 먹는데 살기위해 먹어야만 했던 모진 인생. 땔 나무도 없어 차갑게 언 구들방. 참고 참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꼭꼭 삼키며 “어머니 빨리갔다오시오 예?” 하는 절망적인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 밖에 나설 때 하늘과 땅이 범벅이 된 듯 돌아가며 살고 있는 인생이 야속하고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가슴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아마도 이런 아픈 이별. 아픈 시련을 남기고 어린 자식들을 생사모르는 곳에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을 당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중국으로

그 곳은 내가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고 나서 자란 추억 많은 옛 동년이 있고 부모형제들이 내게 대한 애틋한 사랑과 내가 그들에게 잘해준 것 하나 없는 아픈 추억이 있으며 많은 친구와 이웃들이 함께 애쓰면 살아가다 세상 떠났고 남겨두고 간 자식들이 거지되어 거리를 헤매다 어느 구석진 곳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은 가슴 아픈 곳이다. 그 아픔을 안고 언제 어디서나 사랑하는 민족과 겨레에게 소망을 안겨주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살길 찾아 눈물뿌리며 정처 없이 가는 내게 대한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두만강의 얼음물을 건너 몇 시간 동안 사람의 눈을 피해 헤매며 집에 찾아들어가니 얼어서 딱딱하게 굳어진 바지로 인해 다리를 뺄 수도 없었다. 옷을 가위로 베여내고 신발도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 당겨서 벗기고 보니 다리는 얼어서 가지색이 되었다. 몸을 녹이지도 못하고 중국 공안의 조사로 더 있을 수 없어 아무 곳이나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겨울을 이겨낼 아무 보장도 없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생을 연장할 수 있는 것을 보내주고 간다면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손에 아무것도 쥔 것 없이 다시 그냥 나갈 수도 없고 바질바질 타는 가슴안고 연변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는 차에 앉은 나의 마음은 도와줄 이 없는 넓은 이 세상을 묵묵히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 너무 처량했고 아이들과 점점 멀어져가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친척들의 도움으로 내게 일자리를 해주려고 데리고 들어가는 사람과 함께 가면서 나는 북에 두고 온 아이들에게 지금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안타까운 사정을 얘기하자 이제 노력해 보자 하면서 나의 처지를 걱정해주었다. 이런 이야기들 중에 그 사람이 자기 집안 사정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말했는데 여자에게서 상처받은 후 혼자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중국은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 없고 돈이 많건 적건 생활의 차이점은 어떠하든지 먹고 살 걱정은 없는데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위해주고 아껴주며 사는 것이 편하고 만족할 텐데 가정이 깨진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서로 의지하며 살 수 있는 남편을 만나다

그의 집은 농촌이고 형의 딸 하나를 공부시키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까지 하여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고 밥이나 먹고사는 집안이다. 나와 같은 여자를 감당할 수도 없고 아이들을 도울 어떤 힘도 보이지 않는데 내 생각엔 돈은 벌면 생기는 것이고 없다가도 있는 것인데, 마음 착해 보이고 거짓 없이 진실해 보이는 그 사람과 마음과 노력을 합쳐서 서로의 욕심이나 계산이 없이 한 생을 걸고 산다면 서로의 아픔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그렇게 만난 사람이 지금의 남편 아이들의 새 아버지이다.

내가 울며 도와달라고 부탁하던 그 아저씨가 남편이 되고 보니 나 때문에 몹시 안타까워하는데 더 사정할 수 없었다. 부모들은 부담되는 것 같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이들 생각에 낮이면 낮대로 속에 불이 나서 앉아있을 수 없고 눈 오고 바람 부는 밖으로 뛰쳐나가 하늘만 바라보며 가슴을 쥐여 뜯었고 밤이면 윙윙대는 눈보라소리에 뼈를 깎아내는 듯 몸부림이 치면서 이렇게 추운 때에 먹지 못해 굶고 허기진 채로 먹을 것 찾아 나갈 곳도 없고 춥고 배고파 슬피 울고 있는 아이들 모습 때문에 도저히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몸을 이리 뒤치고 저리 굴며 몸부림치며 함께 껴안고 죽더라도 오지 말았을 걸 그랬다고 후회를 했고 아이들만 아니라면 조용히 누워 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도 했다. 눈이 시퍼래서 살아있으면서 아이들을 먹여 살릴 아무 방도도 없는 자신이 증오스러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