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6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 네 번째 북송- 온성 보위부. 단련대 생활 >

드디어 내가 회령에 도착하여 개구멍(증명서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몰래몰래 다니는 곳)으로 빠져 집으로 가니 간다 온다는 말이 없이 사라져 두 달이 넘도록 오지 않으니 생활은 어렵고 하여 집을 팔고 그보다 못한 작은 집으로 웃돈을 벗겨 먹느라고 이사를 간 것 같았다. 집도 보위원들이 매복된 듯싶어 들어 못가고, 친구 집으로 찾아 갔더니 중국으로 들어간 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친구 집 아이들이 연락을 하여 나의 남편이 찾아왔다. 내가 살던 집 인민반장을 길에서 만났는데 청진 도보위부 사람이 두 번 찾아와서 우리 집 행처를 묻더라고 했다. 나는 내 집에 왔어도 집에서 별로 잠을 못자고 동무네 집과 동생 집으로 돌아다니며 객지 생활을 했다. 가을이 되니 이삭줍기도 했고 그 해 산에 도토리가 많이 열렸었는데 내가 앞에서 썼듯이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가서 막을 쳐 놓고 도토리를 주운 것이 바로 이 때의 일이다.

도토리 알로 150kg정도 주워놓고 나는 조선에 더는 있기가 힘들어져 다시 중국으로 영원히 있을 궁리로 1999년 11월에 또다시 두만강을 건넜다. 나는 이때부터 중국에서 식당일, 가정 보모일을 일삼으며 살다가 2003년 9월에 중국 연길 하남식당에서 일하던 중 신분조사로 또 붙잡혀 북한으로 나가게 되었다.

나는 중국 도문 감방에서 15일 정도 조사를 받고, 북조선 함경북도 온성으로 이관되어 온성보위부에서 한 20일 가량 조사를 받았다. 온성 보위부 감방은 세 칸인데 10㎡되는 정도의 칸에 20~25명씩 들어 앉아 아침 5시부터 차렷 자세로 앉아있으면 저녁 10시까지 가만히 앉아서 조사 받는 시간만 기다린다. 남자가 두 칸을 차지하고 여자는 한 칸만 차려지고 나머지 여자는 복도 맨 세면바닥에 두 줄로 차렷하고 앉아 있었다.

감방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복도가 있는데 앞뒤 복도에 두 줄로 꽉 들어차 있었다. 밥이라는 것은 강냉이로 국수를 가공한 뒤 국수에 물을 많이 넣고 오래 끓인 국수 죽인데, 이는 큰 수저로 다섯 수저면 다 없어진다. 중국에서 잘 먹던 사람들이 붙잡히다 보니 허약은 더 빨리 오고 계속 앉아 중국에서 잘 먹던 생각뿐이다. 보위부 안에서 먹던 국수 죽 맛은 지금 먹는 이밥에 돼지고기 맛에 대비 할 수 없다. 밸이 붙지 않을 만큼만 먹이다 보니, 믿기 힘들겠지만 뒤(용변)를 보는 일은 보위부에 들어 간지 20일 동안 한번을 보았다.

보위부 조사가 끝난 뒤 온성 단련대에서 한 달간 생활하였는데 단련대 생활도 이력이 트니 별로 힘들게 보내지 않았다. 오직 배가 고팠고 머리 서캐와 이 단련 받기가 더 힘들었다. 어디가나 그 물건은 왜 그리 흔한지 모르겠다. 저녁이 되면 피곤을 무릎 쓰고 그 물건들과의 전투다. 엄지 두 손톱이 피범벅이 되도록 잡아 죽여도 다음날에는 어디서 생겨나는지 역시 또 수두룩하였다. 이때가 2003년 9월에 잡혀서 11월 초에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다섯 번째 북송- 신의주 보위부 생활 >

그해 12월 초에 버릇이 안 떨어져서 집에 있는 둘째딸을 데리고 중국으로 다시 도주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연길에서 이미 들어와 있었던 큰 딸을 찾아 세 식솔이 모여 살다가 3월에 한국으로 가는 줄이 있어서 2004년 3월 초에 연길을 떠나 중국 내몽골 국경선까지 도착하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인민폐 500원씩 브로커에게 주고 11명이 떠나서 내몽골 변방 알링이라는 곳에 도착하였다.
브로커는 연길에 사는 조선족 남녀였는데 그들은 우리를 보고 짐작으로 불빛을 가리키면서 “저쪽으로 가라. 철조망이 5개 있는데 5개를 다 넘으면 철길이 보인다. 그 철길을 건너가서 불을 피워라 그러면 몽골 군대들이 잡아갈 것이다.”하여 그들이 시킨 대로 철조망 세 개를 넘고 네 개째 접근하다 중국 내몽골 변방대의 포위진에 들어 2명은 도망갔고 나머지 9명은 몽땅 잡혔다. 이미 길을 떠날 때 죽음을 각오하고 떠나긴 했지만 가족이 잡히고 보니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조선 보위부 감방에서 이미 한국문제로 잡혀 4~5달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고 떠난 지라, 이제 우리도 나가면 무조건 그 고생을 해야 하고 거기다 딸들까지 그 고생을 시키려니 무슨 궁리가 나질 않았다. 나는 중국 연길에서 떠날 때 혹시나 하여 수면제 100알짜리 한 통을 가지고 떠났었다. 작은 딸에게 주머니에 남은 사과 한 알을 남겨주고는 아이들 모르게 수면제 100알을 물도 없이 먹어 치웠다. 내 몸에 약이 있었던 것을 아이들이 알고 있던 터라 내가 우물우물 씹어 삼키니 아이들이 울며 불며 우리 엄마 약 먹었다고 야단하여 변방대 아이들이 눈치 챈 것이었다.


그 후일은 나도 생각이 안 나지만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3일 만에 아이들이 잡혀있는 알링 변방대 감방으로 돌아오긴 왔는데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지금도 안 난다. 그 후 기억력이 정말 희미해진 듯싶다. 무슨 일이건 두고 돌아서면 잊어 먹는다. 나도 내 자신을 원망할 정도이다. 알링 변방대에서 20일정도 조사를 받고 중국 단동을 거쳐 북조선 신의주 보위부로 북송되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조이며 북한 다리에 들어섰을 때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그때 심정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몇 번을 붙잡혀 나갔지만 이때처럼 심장이 멎을 듯 방아질하며 호송 되 보기는 처음이었다.
나갈 때는 모두 철석같이 죽어도 한국 가다가 잡혔다는 말을 하지 말자고 약속은 했건만 누가 알랴, 누구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입만 터지면 나는 더욱이 가족이다 보니 살기 힘들 텐데 나는 그런대로 이만큼이라도 살았으니 괜찮건만, 이제 18살, 20살짜리 딸애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다.
너희들 죄를 내가 다 짊어지고 나 혼자 죽는 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둘째 딸애는 중국 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들어와서 이밥도 겨우 세 달밖에 먹어 보지 못하고 이런 경우에 닥치게 되었으니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힌 일이었다.

신의주 보위부에 도착한 날이 2004년 4월 6일이었다. 신의주 보위부 감방은 칸이 열 칸 정도 되는데 남자 5칸, 여자 5칸 정도였다. 우리는 큰딸, 작은딸 그리고 나 모두 갈라져 감방에 갇혀있었다. 우리 행렬이 단동에서 떠날 때 한 30명가량 되었었는데 거기에서 두 명 빼고 나머지는 모두 한국문제로 잡힌 사람들 이었다. 이미 우리가 감방에 들어가니 한국문제로 잡혀서 나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감방에 배치되어 들어가기 전에 어디를 가나 몸 검사를 당한다. 중국 감방에서나 조선 감방에서나 옷을 홀랑 벗기고 팬티와 여자들 생리대를 찬 것까지 샅샅이 뒤지는 것은 감방안의 규정인 것 같았다. 여자들 생리대를 검사할 때는 중국이나 조선이나 신을 신은 발로 밟아보는 것은 공통점이다.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여자들은 돈을 자궁 안에 넣어가지고 나온다고 자궁 검사를 했는데 여자 군의가 고무장갑을 끼고 세수 대야에 약물을 들고 들어와서 여자를 한 사람씩 자궁 안에 손을 넣어 검사한다. 그리고 그 손을 약물에 헹구고 다음 사람을 같은 방법으로 검사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때에는 여자 군의가 아파서 며칠 출근을 못하다 보니 옷을 홀랑 벗고 서서 손을 뒤로 모아 쥐고 앉았다 섰다를 스무 번씩 하라고 하여 검사를 하였다.
매일 불려나가 취급(취조)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왜 중국에 들어갔으며 왜 북경을 지나 들어갔는가, 한국으로 가려고 하지 않았는가 등의 문초를 당하고, 조서를 쓰고 손도장을 찍어가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약속대로 한국행 시도를 절대로 말하지 않은 덕에 취급이 빨리 끝나 회령 보위부로 이관되어, 2004년 4월 16일 신의주 보위부를 떠났다.

< 끔찍했던 회령 보위부 생활 >

회령에서 보위원 일곱 명이 와서 회령 사람들 중 한국가다 잡힌 사람들과 우리 가족 세 명까지 해서 열두 명을 호송해서 데리고 갔다. 몇 개문을 거쳐서 집으로 갈까? 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팔과 팔에 연결 족쇄를 채우고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길을 이틀 밤을 기차에서 자면서 떠났다. 잘 때는 발에까지 족쇄를 채웠다. 19일 아침에 회령보위부로 들어갔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곤두서는 회령보위부, 온성보위부, 신의주보위부에 다 잡혀가 생활했어도 제일 지독하고 무서운 곳이 회령 보위부인 듯싶다.

칸은 네 칸인데 여자 두 칸, 남자 두 칸 이다. 나의 딸 두 명은 2호 감방에, 나는 4호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내가 들어간 4호 감방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방이었는데, 사람이 20~22명 정도 앉으면 앞사람 궁둥이에 뒷사람 무릎이 딱 붙어 앉게 된다.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밤 10시까지 차렷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고, 밥이라고 먹는 것은 강냉이를 가루 내어 죽을 쑤어 주는데 혹간(가끔) 가다 배추 몇 장을 조금 넣어 쑤면 맛이 별맛(별미)이지만 맨 가루를 소금 조금 넣어 죽을 쑤면 맛이 못하다. 그것도 양은으로 만든 공기에 국자로 두 국자정도 주는데, 위와 밸이 역학이나 면할 정도로 먹는다. 화장실은 우리들의 앉아있는 칸 구석에 높이 20cm정도의 높이로 막아 놓고 대중이 빤히 보는 앞에서 대소변을 보게 되어있다 보니 감방 안 냄새는 더 말할 것 없었다. 아침 5시부터 차렷 자세로 앉아 손은 무릎위에 올려놓고 머리는 숙이지 못하고 쳐들지도 못했고 조금만 움직여도 감방 관리하는 간수들한테 걸리기만 하면 매가 차려졌다. 몽둥이로 때리지 않으면 벌을 세워둔다. 두 시간씩 차렷하고 대소변은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10분정도씩 시간을 정하여 20~22명이 볼 일을 봐야 되는데 그 시간 내에 볼일을 보지 못한 사람은 다음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

 

 

감방에 들어가는 문은 허리를 굽혀서 기어 들어가게 만들어 놓은 문이다 보니 취급(취조)받으러 나갈 때 에는 허리를 굽혀서 문으로 나가야 했고 복도를 통과해 지나 갈 때에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굽힌 상태에서 취급담당 보위원에게 찾아가야 했다.
감방생활에서 제일 애로 조건은 물이였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하루에 물 한 바게쯔(양동이)를 가지고 24시간을 써야 했다. 그 물로 우리가 먹은 죽사발도 씻어야 했고 그 물로 방 걸레도 닦아야 했고 화장실 뒤를 본 다음 그 물로 씻어 내려야 했다. 아침에 한 바겟쯔(양동이)를 간수가 가져다주면 작은 소랭이(작은 대야)에 퍼서 죽사발 씻는 물을 따로 퍼놓고 반 바겟쯔 정도 되는 물로 간방안의 선배들(한국행 시도로 붙들려온 5~6달된 사람들)이 먼저 옷들을 뜯어서 만든 천 조각들을 물에 적시어서 얼굴과 이빨들을 대충 닦아낸다.
선배들이 다 씻은 다음 그 다음 들어온 순서대로 그런 식으로 닦는다. 마지막 사람까지 다 씻은 물에 선배들이 발을 씻는다. 몇 사람이 발 씻은 물에 선배들이 생리대 대신 쓰는 천 조각들을 씻어내고 그 다음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선배들 씻은 물에 생리대를 또 씻어낸다. 다 씻고 나면 물이 뻘건 것인지 까만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냄새 또한 코를 찌르게 역한 냄새였다. 마지막에 그 물을 그냥 두었다가 뒤(용변)를 본 후 그 물로 씻어낸다.
내가 갇혀있는 감방에는 제일 오래 있던 여자가 일곱 달 동안 갇혀있는 사람이었는데, 엄마와 딸이 한국에 들어가려고 내몽골로 가다가 잡혀서 북송된 집이었다. 엄마는 너무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해 얼굴이 하얗다 못해 백지장이었고, 딸은 31살이었는데 계속 앉아 울기만 하며 죽을 타령만 하였다.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 못한다고 한탄뿐이었다. 일곱 달 정도 이빨을 한 번도 닦지 못하고 몸도 한 번도 씻지 못하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 애들이 지금도 내 옆에 앉아 있는 듯싶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 여부도 모르는 여자애들 여덟 명... 그래도 나는 매를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문 덕에 나의 딸들은 20일 만에 석방되었고, 나는 한 달 만에 그렇게도 지긋지긋한 감방생활을 끝내고 5월 말 경에 회령 노동단련대로 여섯 달 만기를 받고 이관되었다.
< 회령 노동단련대 생활 >

내가 노동단련대에 들어 간지 5일 만에 우리 조에 11명이 한국행 시도로 내몽골까지 들어갔다 잡혔는데 그 중 남자 한 사람이 고문에 못 이겨 끝내 불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우리 가족도 한국행 시도로 잡혀 나온 것이 들창(들통) 나게 되었는데 그때 가슴조이며 사느라고 (생명이) 10년 감수되었다.

하룻밤을 자고나면 '역시 오늘도 살았구나' 싶었다. 오늘은 보위부에서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지 큰길에 승용차만 보여도 나를 잡으러 오는 것만 같았고, 안전복을 입은 사람만 나타나도 가슴이 뚝 멈춰 서는 느낌이었고, 전화 소리만 들어도 나를 호출하는 소리로 들렸다. 올 것은 오고야 마는 법이다. 드디어 우리를 신의주 보위부로부터 회령 보위부로 호송해온 보위원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가 있는 회령시 창두에 있는 단련대로 올라와서 나를 찾는 것이었다. 내 가슴은 큰 돌 뭉치가 내려 누르는 듯 하였고, 앞은 캄캄하여 어지러움을 느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찼다. ‘드디어 내가 판결 받는 날이 왔구나’...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식들이라도 무사히 살아났으니 이것도 나에게 차려진 행운이구나 하며 자체(스스로) 위로하였다.

나를 만난 보위원은 뜻 밖에도 관대히 용서하며 그냥 노동단련 6개월로 끝을 내기로 하였다고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너희 집에서 중국으로 가거나 도주해 없어지는 날에는 나를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단련대 대장과 잠깐 무엇인가 토론하고 내려가는 것이었다.

역시 아침 5시에 기상하여 밤 10시까지 고달픈 노동이 시작되고 끝이 나는데, 98~99년 단련대 생활 할 때와는 또 달랐다. 힘이 모자라고 젊은 사람들과 똑같이 뛰고 걷고 하자니 신체가 허락지 않았다. 집에서 7일에 두 번씩 면회를 온다 해도 기껏해야 강냉이를 가공하여 가루 낸 속도전가루를 가져오고 강냉이밥을 사오는 정도이지 별다른 영양보충이 없으니 몸은 점점 쇠약해졌고, 일은 점점 더 힘들어져서 단련대 생활이 지긋지긋하게 지겨워져갔다.

아침엔 아침대로 식전 작업, 오전 작업 끝나면 점심밥을 먹고는 밥알을 곤두세워가지고 작업장에 나가서 저녁 8시까지 광산에서 나오는 버럭 처리 작업, 산에 올라가서 동발목을 베고 나르는 작업을 했고, 저녁엔 저녁대로 무슨 공부를 하란다. 배고프고 졸리고 이가 득실득실한 가운데 공부를 해서 외워야 잠을 재운다. 조금만 잘못하면 온 대열이 집단적으로 밖에 나가 사상단련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 바퀴를 뛴다.

제일 힘들 때가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산에 나무하러 갈 때와 비가 올 때 비옷도 입지 못하고 비를 맞으며 작업장에 나가 벌벌 떨며 일을 할 때였다. 

나는 5월 말부터 6,7,8월까지 있다가 9월 9일에 병보(병으로) 퇴소되었는데 그 동안 죽을 고생을 다 한 듯싶다. 내가 단련대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은 두 사람 죽어 나갔다. 한 사람은 46살 먹는 남자인데 집에서 한 번도 면회가 없다보니 너무도 허약해서 지도원들로부터 모진 박대를 다 받으며 살다가 작업도중 오줌 누러 간다고 하고는 몰래 도망친 것이 산에 들어가 산을 올라타다가 집으로 갈 맥이 없어 도중에서 쓰러진 것이 영원이 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런 것을 동대주민이 송이 뜯으러 산으로 올라가다가 시체를 보니 차림새가 단련생이라 짐작하고 우리 단련대에 말해줘서 올라가보니 이틀 전에 도망가서 잡으러 갔다가 못 잡고 그냥 돌아왔는데 산에서 고인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 사람이 도망간 날 저녁엔 우리 집단이 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모른다. 저녁 8시까지 작업장에서 퇴근해 들어와서는 45도 경사되는 언덕길을 노동단련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올라뛰고 내리뛰고 했었다. 나도 너무 힘들어 울던 생각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리고 한 사람은 송이철이라 송이를 뜯으러 내보냈는데 송이는 한 송이도 못 뜯어 오고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보니 술 생각이 났는지 술을 마시고 단련대로 들어온 것을 반장과 조장이 발로 배를 걷어차서 밸이 터져버린 것이다. 다음날 그가 배가 아프다고 뒹구는 것을 일하기 싫어 꾀병 쓴다며 작업장으로 몰고 나갔는데, 너무 심하게 고함을 치고 하여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병원에서 결국 운명하고 말았다. 밸이 터져서 나온 불순물들이 오염되면서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한 쪽으로 생각하면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서른여덟 살 한창 나이에 처와 자식을 남겨놓고 간 그들이 불쌍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는 아무래도 한번 갈 길 빨리 가서 편안히 누워 생전에 실컷 자지 못한 잠이나 실컷 자게 되었구나 하는 부러운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래도 이 사람은 가족이 있으니 시체를 가족이 가져다 장례를 했지만, 산으로 도망가다 죽은 사람은 가족이 없다보니 단련대에서 사람 네 명이 작업 도구인 맞들이 들 거를 가져가서 시체를 거기에 담아 들고 와서는 땅을 대수 파고 평지와 수평이 되게 파묻어 버렸다. 이런 이들에게 관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한다. 우리 북한에서는 이런 것을 보고 직파했다고 말하곤 했다. 너무도 숨김없이 예술 없이 쓰는 것 같으나, 나의 지나온 생활 중의 일부일 뿐이다. 내가 단련 생활하는 동안 나의 집에서 특히 남편이 고생을 많이 했다. 나의 면회를 보장하고 아이들을 거두려니 수고가 많았다. 9월에 병보로 퇴소는 되었지만 나의 몸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걸으려 해도 다리가 맥이 없어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고, 영양실조가 오다보니 머리카락은 다치지도 않아도 슬슬 다 빠져나갔으며, 혓바닥은 다 갈라지고 터져서 음식을 입에 넣어도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깔깔했다. 그래도 남편의 친구가 단련대 직원을 하다 보니 많이 사정도 봐주었고 집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면회를 올라온 것도 이 상태이니, 가족이 없고 안면이 없는 이들은 여섯 달을 견디기가 정말 힘들다.

< 꿈같은 현실 >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것이 한낱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이 되고 남의 말 하듯 글도 쓰게 되지만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신비롭고 희귀할 정도이다. 천한 목숨 질기기도 하여 모든 고비를 넘기고 넘겨 오늘 드디어 옛이야기를 대충 기억하며 글로라도 남기게 되었으니, 눈 뜬 소명으로 살고 있을 우리 동료들을 생각하면 내가 숨이 답답해 난다. 이들도 언제면 제정신에 똑바로 눈을 뜨고 살 수 있을까? 추방되어서 영원히 갈라져 살아야 될 줄 알았던 남편과 큰 딸도 모두 모여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너무나도 꿈만 같은 현실이다.

나는 내가 다시 태어난 여기 대한민국에서 이제까지 내가 못한 꿈을 실현하고자 한다.

북한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곳 대한민국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