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5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두 번째 북송- 회령 노동단련대 생활

한 번 잡히기 시작하면 세 번을 잡힌다고 하던 말이 있더니 진짜 맞는 듯싶었다. 99년 4월 중국 개산툰에 들어가서 잡혀 다시 조선으로 북송되어 단련대 생활을 또 하였다. 그때 단련대 생활은 회령시 벽성리에서 석회석 구워내는 일을 했고, 4월이다 보니 회령시 안전부 부업지 농사짓는 일을 위주로 하였다.

여기서도 아침밥을 먹기 전에 5시에 기상해서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한 통씩 끌어내려다 놓고 밥을 먹고 밭으로 일하러 나갔었는데, 회령의 날씨는 4월에도 산에 눈이 그대로 깔려 있어 낮에는 녹고 밤에는 얼구는(어는) 날씨였다. 단련대 인원은 거의 100명 정도 된 듯 싶다.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산에 올라 갈 때는 땅이 얼어서 괜찮은데, 나무를 톱으로 베서 가지를 쳐버리고 끌고 내려 오느라면 8시가 거인(거의) 되거나 좀 지나가는데 그때가 되면 해가 떠서 땅이 녹기 시작한다. 회령시 벽성이라는 고장은 집에 여편네를 팔아서 장화를 산다는 곳이다. 진흙 바닥이다 보니 얼다가 녹다가하는 바닥으로, 직경 20~25cm 길이의 7~8m정도 되는 통나무를 끌고 10리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 와야 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한 사람당 한 통씩 단련대 앞마당까지 끌어내려야 했는데 누구도 도와줄 사람도 없고 도움 받을 처지도 못되었으므로 죽으나 사나 내 자체 힘으로 끌어야 했다. 내리막에서는 그런대로 힘을 주면 끌려가는데 평지 길을 걸을 때에는 통나무가 땅에 틀어박히기만 하면 진흙탕에 들러붙어 떨어질 념(생각)을 안한다. 앞에서 사람이 서면 뒤에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면서도 도와줄 념을 못한다. 나도 힘이 드는데 누구를 도와주랴. 허리를 90˚각으로 굽히고 쇠줄로 만든 끌개로 어깨너머로 통나무를 끄는 힘이 연약한 여성들은 얼마나 괴롭혔던지 세월이 흘러도 흘러 보낼 수 없는 영원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

그래도 밭에 나가 꽉지(괭이)로 강냉이 뿌리를 캐내는 일이 가장 신선일이었다. 꽉지질을 너무 하여 손에 뭉퉁기(물집)지는 일은 통나무 끄는 일보다 참고 견딜 만 하였다. 손에 천을 동여매고 온 하루 꽉지질을 하여, 저녁에 들어올 때에는 손이 오그라들어 한참 주물러 주어야 제대로 손이 펴진다. 노동단련대 말만 들어도 머리가 곤두선다.

한 번은 노동단련대에서 산에 불을 놓아 잡혀 들어 온 예순에 가까운 늙은 남자가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새벽에 기회를 보다 도망을 쳤는데, 그는 이미 젊었을 때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감옥에 갔다온 늙은이였다. 늙은이를 잡으러 단련대의 몇 명이 그의 집으로 찾아가니 늙은이가 부엌 안에서 도끼를 들고 나오며 감옥에 가면 갔지 단련대로 안가겠다며, 단련대로 데려가겠으면 이 도끼로 내 머리를 쳐서 죽여 달라고 울며 사정하면서 자기절로(자기스스로) 벽에 골을 찧으며 야단치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하도 늙은 덕에 그쯤하고 말았으나, 그 후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모른다. 꼬빠꾸에 와서 고생하기보다 교화를 가서 생활하기가 낫다는 말이 우연한 말이 아니다.
그렇게 꼬바꾸라는 곳은 기한은 1~6달이지만 노동 강도가 말 못할 정도로 강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빠지지만, 돈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이 알짜 고생하는 사람잡이 도살장이나 다름없는 노동단련대. 나는 집식구들의 꾸준한 보살핌으로 용케도 한 달을 이겨내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역시 그 생활은 이겨나가기가 어려웠다.

세 번째 북송, 그리고 목숨을 건 탈출

또 중국에서 이밥에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으며 살던 생각으로 강냉이 죽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생활은 참고 견딜 수가 없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시도를 하던 끝에, 청진에 사는 한 늙은 아주머니가 자기 동생들이 중국에 있는데 그 곳까지 데려다 주면 중국 돈 500원을 주겠다고 하여 그 집으로 찾아 갔었다. 60세 좌우되는 늙은이와 합의를 보고 떠나 청진역까지 왔을 때 아주머니의 딸인 스무살 조금 넘은 여자아이가 안전부에 고자질을 하여 역전에서 붙잡혀가고 말았다. 내가 붙잡혀 들어간 곳은 우선 청진 여행자 집결소였는데, 여기는 기차 여행시 규정위반자들을 단속하여 일을 시키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달만 벌칙노동을 하고 다 내보냈는데, 나는 중국으로 들어가다 잡혔으므로 두 달을 그 안에서 생활하였다.

99년 4월 벽성 꼬빠꾸(노동단련대) 생활을 마친 뒤 인차 또 잡히다 보니 감자 꽃이 피고 지는 6,7월쯤 되었다. 나는 도중에 불려나가 비판서도 많이 썼고 남보다 취급을 더 많이 받았다. 왜? 도강자이기 때문이다. 두 달이 거의 되어 가는데 내 이름을 부르기에 이제는 집으로 보내는 모양이구나 하고 좋아서 대열 앞으로 나섰더니 청진 도보위부에서 나를 접수해간다고 했다.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도보위부는 시보위부보다 급이 높다보니 웬만하면 용서받기 힘든 곳이다. 더욱이 내가 사는 고장도 아니고 타 도시 보위부이다보니 더욱 가차 없을 것이었다.

내가 처음 도보위부에 이관된 것이 지금 생각하면 청진시 청암 구역 어느 지점인데 딱히는 생각이 안 난다. 나를 담당했던 보위원은 서른살 좀 벗어진 듯한, 곱슬머리였는데 자기 말로는 “내 손에서 살아나기 힘들다. 네가 중국에 들어가서 한 짓을 그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살려주고 그렇지 못하면 살기 힘들다”고 말하며, 책상 1개 있는 독칸 5㎡쯤 되는 칸에 가두어 놓으며 비판서를 쓰라고 하였다. 중국에 왔다 갔다 하며 한 일과 중국에 들어가서 교회에 나간 일이 있는가, 한국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가를 시간당으로 밝히라고 지시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집을 나온 지 두 달이 되었으니 어린 아이들 생각과 생사 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을 남편 생각으로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다시는 살아서 자식들을 볼 것 같이 않아 이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듯싶어서 어디 못이라도 있으면 먹고 죽으려고 못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내가 갇혀있는 감방 아랫부분은 쇠창살을 촘촘하게 하였는데 윗부분은 사이가 아래 살창보다 좀 넓어 보였다. 나는 쓰라는 비판서는 쓰지 않고 창문을 고정시킨 못을 뽑기 시작하였는데, 생각보다 힘을 많이 들이지 않고 공기창의 못을 4개 뽑았다. 날씨는 7~8월의 날씨라 더웠다. 당장이라도 곱슬머리 보위원이 뒷덜미를 잡을 것 같았다. 바깥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나는 화장실을 보려고 우선 문은 그대로 맞춰 놓고 출입문을 두드렸으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시간은 저녁 7~8시쯤으로 되 보이는데 아무리 소리를 쳐도 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내가 갇힌 감방 안에다 소화되지 않는 뒤(용변)를 보고는 비판서를 쓰라고 한 종이를 찢어서 덮어놓고 도주를 시작하였다.

건물에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으니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어느 구멍이던 머리만 빠지면 몸은 다 통과된다는데 머리를 밀어 넣으니 코가 밀려 나갈 정도로 아프게 겨우 통과 하였다. 허나 여윈 몸에도 단추가 걸려 빠지기 힘들어 다시 머리를 뽑아내고 옷을 하나하나 벗어서 창문에 걸쳐놓고 팬티바람으로 쇠창살 구멍을 통과하였다. 그리고 옷을 다시 주워 입고 담장을 넘으려니 높았다. 2m정도 되어 보이는데 전기선을 늘여놓았다. 내 생각에는 주민들도 전기가 없어 불을 못 보는데 전기 줄에 전기가 흐를 리 만무하였으므로 무작정 땅이 도드라져 보이는 쪽으로 뛰어올랐다. 잡히면 죽겠으니 최후 발악인 듯싶었다.

저녁의 거리를 거닐다 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나는 담장을 뛰어넘어 어디인지 분간도 없이 무작정 내 뛰었다. 한참 내 뛰느라니 청진 시내 한복판으로 흐르는 수성천이 나타났다. 나는 수성천 뚝에서 하룻 밤을 새우고 다음날에 회령으로 내려가다 혹시 곱슬머리 보위원이 눈이 뒤집혀서 나를 찾을텐데 하는 생각으로, 청진에 면목이나 경우 있는 집에 가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저녁에 수성역으로 가서 회령으로 내려가는 화차를 잡아탔다. 수성에서 기차로 한 30~40분 정도 달리면 고무산이라는 고장이 있는데 여기 철도 보위부가 대단히 검사가 심한 고장으로 이름이 있는 곳이다. 밤이건 낮이건 수십 명의 철도 검열대들이 나와서 사람들이라고 다니는 객차도 검열하고 석탄을 싣고 다니는 화차도 검열하여 증명서 없는 이들의 장사하는 짐을 수색하여 단속 물건들을 보기만 하면 빼앗고 벌금을 받아냈다. 양 옆이 산으로 꽉 막힌 곳이라 인도로와 철길만 봉쇄되면 빠지기 힘든 지역이었다. 인도로에는 10호 초소라는 곳이 있는데 증명서가 없이는 이 초소를 빠져나가기 힘들다. 증명서가 없으면 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돈도 증명서도 없으니 부득불 석탄을 싣고 다니는 화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탄 화차가 고무산역에 도착하니 좌우에서 호각소리 전자봉이 번쩍번쩍하는 검열대들이 매 기차 빵통마다 수색이 시작되었다. 나는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얼른 화차에서 내려서 기차빵통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검열 대들은 화차위를 다 검열하고는 기차 빵통 밑도 전지불로 비처 보며 지나갔었다. 나는 기차바퀴 축우에 납작하게 엎드려있었다. 내가 숨은 밑에도 불빛이 얼른 거렸고 구두 발소리, 말소리가 분주 하였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리가 “없습니다”한다. 무엇이 없다는 것일까? 혹시 나를 놓친 고수머리 보위원이 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해 놓은 것은 아닌지 검사가 끝나자 기차가 움직일 기미가 보였다. 우산 기차 대가리 부분에서부터 칙칙하며 가스가 마지막 빵통까지 통가한 후에 앞 빵통이 덜커덩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재빨리 바퀴 밑에서 기여 나와 빵통으로 매달려서 오르기 시작하였다. 기차는 이미 출발하여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손잡이를 있는 힘껏 거머쥐고 달리는 기차를 기어 올라가 다시 빵통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의 머릿속에는 '죽지 않으면 살겠지. 명이 짧으면 죽을 것이고 명이 길면 살 것이다.'하는 생각뿐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