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3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넘어 >

중국에서 나의 생활은 정말 떠돌아다니는 가랑잎과도 같았다. 객지생활 6년에 성질은 더욱 과격히 변해 버렸고 사람이 사람을 싫어했고 조용한 곳에 가서 조용히 살고픈 생각뿐이었다. 나는 옛날 조선의 소설책에서 나라 없는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읽은 생각이 나는데, 정말 우리들이 중국에 와서 겪는 객지생활이 바로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나의 작은 딸애도 내가 잡혀가서 곤경을 치른 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올 때 데리고 들어와서 그도 중국 연길에 같이 큰 딸애와 집을 맡아 놓고 살았지만 너무도 경비가 삼엄하고 검사가 심하여 한시도 마음을 놓고 산적이 없었다. 그때가 2003년도였었는데 조선 사람들이 너무 들어오니 중국에서는 조선 사람 2명씩을 무조건 잡아야 하는 것이 공안국 한 사람당 임무여서, 공안사람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조선 사람을 잡느라고 야단이었다. 백성들에게도 조선 사람을 한 사람 고발하면 인민폐 100원씩 상금을 걸었었는데, 그 100원을 벌겠다고 보기만 하면 고발하여 정말 발붙일 수가 없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저녁 6시가 되면 집에 사람이 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불도 못키고 이불속에서 가만히 말을 하고 위생실 볼일이 있을 때면 바깥의 동정을 살핀 후 문을 열고 나가서 볼일을 보고는 주의를 살펴보고 집에 들어와 낮이나 밤이나 문을 걸고 사는 것이 생활화 되었었다.

2002년도부터 한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도 많이 만났고 한국 브로커도 여러 명 만났지만 인연이 안되어서인지 일이 풀리지 않아 애를 많이 먹던 중 2003년 3월에 겨우 줄이 놔져서 따라나선 것이 중국 내몽골 변방대에 붙잡혀 우리가족 세 명이 다시 북한으로 북송되어 죽을 고생을 다 겪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끼가 곤두서는 것 같다. 나는 물론 죽음을 각오하였지만 어린딸애들까지 이런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북한의 안전원들과 보위원들에게 대한 원망이 아니라 복수심이라고 말해야 더 정확할 것 같다. 그에 대한 복수를 꼭 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지금은 상갓집 개보다도 못했던 우리들의 운명에 새봄을 만난 격이다. 봄이면 모든 만물이 소생하고 겨울의 추운 날 동굴에서 활동을 중지하고 움츠리고 있던 동물들도 긴 기지개를 하며 새 삶을 위해 움직이는 시기이다. 이제까지 굶어죽고, 맞아죽고, 총에 맞아 죽은 이들 가운데 또 지금도 굶고 병들어 가고 있는 이들 속에서 그래도 우리는 선출된 사람들인가 보다. 정말 복 받은 사람들이다.

대한민국에 온 사람들 중 나는 더욱이 그러하다. 7년 동안 식구 다섯이 언제 한번 한 구들에 모여산적 있었던가. 계속 헤어져서 살다가 7년 만에 대한민국의 제2의 고향에 와서 한집에 모여 살게 되였으니 이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이젠 성공한 사람이다. 새봄을 맞이하여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들이다.

나는 앞으로 꼭 성공하고야 말 것이다. 우선은 나를 위해 내 가정을 위해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이런 악물로 만든 북한의 법관들 보란 듯이 내 성공한 모습을 보여 주리다. 너희들은 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밀어 버렸지만 나는 이렇게 성공하였다고 크게 외치고 싶고 크게 웃고 싶은 마음이다.

< 첫 번째 북송- 회령 노동단련대 생활 >

나의 인생 절반이 철장 속에서 늙어버린 듯싶다. 비록 10~20년은 걸리지 않았어도 그와 맞먹게 긴 세월을 보낸 것 같고 10~20년의 수명이 감소 된 것 같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곤두서고 등골에서 식은땀이 내뱉는 몸서리 쳐지는 감방생활. 생각도 하기 싫지만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나의 실지 생활을 글로 남기고자 다시 한 번 추억을 더듬어 글을 쓰게 된다. 나는 글재주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감방생활, 노동단련대 생활을 그대로 아주 그대로 글로 옮기련다.

나는 제일 처음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가 친척들의 방조(도움)를 받고 그 후로부터는 나 혼자 돈벌이 되는 일을 시작하였다. 물건이 좋은 것이 있는데 중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모르는 사람 길안내도 해주고 친척집까지 데려다 주고 수고비도 받아 가면 중국으로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던 중 98년 8월 장사 물건을 진 남자 두 명을 길안내하여 중국으로 들어가서 큰길에서 중국 변방대에 붙잡혀 조선으로 북송되었다. 나는 그때 함경북도 회령시 보위부 심문을 거쳐 노동단련대 생활을 한 달 하였는데 말이 한 달이지 1년 맞잠이로(맞먹게) 긴 세월 이였고 10년을 살아야할 면역이 떨어진 것 같다. 지긋지긋 했던 꼬빠꾸(노동단련대)생활. 노동 강도를 높여 사람들의 머리 사상을 개변시킨다는 꼬빠꾸는 사람을 죽이지 못해 살려두는 곳이었으므로 먹는 것이 통 강냉이 알로, 헤아리면 30~40알정도 되려는지. 국은 겨울에 염해놓은 배추시라기에 소금으로 간을 맞춘 시라기국을 먹고 살아야 했다.

아침 5시에 기상을 하여 식전작업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였다. 나무는 안전원들의 집에 불을 땔 수 있게 화목을 톱으로 잘라서 도끼로 다 패놓으면 차로 실어 내려갔다. 7~8시까지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8시부터 작업을 하였는데, 그때 일이란 회령시 안전부 부업만 양어장 건설 작업이었다. 위치는 회령시 중도리에 있는 자그마한 가촌 마을의 앞 강변 옆에 건설하였다. 내가 올라갔을 때에는 굴착기로 땅을 규격에 맞춰 다 파놓고 모래자갈 무쳐놓은 것이 큰 산 같았다. 이런 무지가 여러 개 있었다. 우리 꼬빠꾸 생들은 굴착기가 파 놓은 자갈 모래를 맛드리(나무 직경 40cm씩 되는 널빤지로 만든 상자)로 나르는 일이였다. 8월의 햇볕은 따갑기도 따가웠고 길기도 길어서 하루 지나가는 것이 얼마나 오래였는지 아침 8시부터 맛드리를 들고 뛰기 시작하면 점심 12시까지 갈 때도 뛰고 빈 당가를 들고도 뛰어야 했다. 통 강냉이로만 반 종지 정도 먹고 계속 뛰어다닌다는 것이 정말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남자 50명, 여자 50명 정도 되는 꼬빠꾸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밥 먹는 시간을 얼마나 기다리게 되는지 모른다. 남자들은 모두 웃통을 벗어버리고 뛰어야 했고 여자들은 그 더위에 옷도 벗지 못하고 뛰어 다녔다. 손에 손마다 모두 뭉통기(물집)가 져서 터지여 쓰리고 아파도 누구하나 위로해주는 이 없고 그래도 무조건 뛰어야만 했었다. 맛드리에 모래자갈을 절반만 담아도 조장들이 회초리를 지고서서 감독을 서는데 다시 되돌려 보내서 곡상씩(곱절로) 퍼 담아 오도록 한다. 조금 힘들어서 걸어가는 것을 보면 때렸다. 그때 단련대 반장 이름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최성재라고, 정말 악착같았었다. 그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었는데 왜 그리 악착같았는지.

단련생들이 생활하는 기숙사란 농장 관리 건물이었는데 세면바닥에 볏짚으로 엮은 나래를 깔고 여자 한 칸, 남자 한 칸에서 생활하였다. 여름의 무더위에 위생 사업을 제대로 못하다 보니 사람마다 이가 와글와글 하여 겉옷에까지 벌벌 기어다니는 형편이었고, 서캐는 머리카락 한 줄에 보통 2~3개씩 매달려 있으니 머리를 뒤집으면 참깨를 뒤집어 쓴 것 같이 보였는데, 어떻게 말하면 좋을런지 표현하기가 힘들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그러니 부끄러움이 없는 원시인들의 단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1998년 8월 18일. 우리 모두는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세수도 못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통씩 끌어 내려놓고 통 강냉이 차려지는 몫을 얻어먹고 작업현장에 나가 일을 시작하였다. 말이 아침을 먹었다고 하지, 위에 겨우 기별이나 갔는지 작업장에 나가서부터 배가 고픈 것을 죽으나 사나 일을 해야 했기에 더욱이 나이 어린 아이들한테 ‘개간나새끼’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뛰어 다니며 일을 하였다. 드디어 긴 해는 하늘 중천에 올라왔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땀과 모래투성이가 된 원시인 무리들이 점심을 먹으러 가려고 네 줄로 줄을 맞추어 서는데, 최성재 반장이 하는 소리가 “ 오늘은 작업 실적이 없으므로 벌을 주겠다”하며 자기 머리통보다 큰 돌을 하나씩 골라잡으라 하였다. 그때 단련대에는 나이 18세 먹은 어린 아이들도 많았고 밭에 불을 놓다가 산에 불이 번져 들어온 60살 먹은 늙은이도 있었지만 누구도 관계없이 돌을 주워들었다. 작을 돌을 주워들으면 큰 돌을 주워들라며 때렸다. 돌을 하나씩 쥐고 양어장 넓이가 한 200㎡ 정도 되었는데 그 넓이를 돌을 지고 한 사람이 열 바퀴씩 뛰라고 하였다. 남자들은 웃통을 다 벗은 후에 모래가 더덕더덕 붙은 돌을 올려놓고 뛰다보니 어깨가 다 까져서 피가 흐르는 이도 있었고, 허약자들과 늙은이들은 뛰다가 다리 힘이 없으니 넘어졌다. 넘어지면 어깨에 메고 있던 돌이 앞사람 발목을 까서 죽는 소리를 쳤지만 그래도 뛰어야 했었다.

난리도 이런 난리판이 어디에서 보았으랴. 한 사람이 열 바퀴씩 뛰라고 하는데 세 바퀴를 뛰고는 우는 사람, 반장한테 잘못했다고 비는 사람, 넘어져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ꡐ차라리 죽여주시오ꡑ하고 갈비를 드러내는 사람, 아우성 소리, 조장들의 돼지 멱따며 조원들을 달구는 소리, 이거야 말로 정말 포탄 터지는 전쟁판이라고 말하면 적합할 것 같다. 나는 그 속에서도 그래도 강한 사람 축에 속하여 힘이 들었지만 견디어 냈다. 네 바퀴를 돌고 반장이 다 모이라고 하여 조별로 줄을 지어 섰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