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2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월 >

이 시기에 나와 짝꿍이 되어 같이 다니던 동무가 있었는데 그의 친척뻘 사람이 유선에서 살았는데 사람을 잡아먹다가 걸려서 붙잡혀갔다고 하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리흥섬이라는 자가 꽃제비 아이 3명을 잡아먹고 네 번째에는 잡아서 팔다가 붙잡혔다고 한다. 네 번째 잡힌 아이의 부모는 내 남편의 동무인데 유선 내화물 공장 한개 작업반 세포비서의 아들이었다. 그 아버지의 이름은 내철이라고 하였는데 술을 몹시 좋아 하였다. 나의 남편과 한 작업반에 있으면서 나의 남편은 행정일꾼, 그는 세포비서로서 친했었는데 아주머니는 량강도 내기로서(출신으로) 살기가 힘들어 딸애와 아들, 남편을 버리고 본가 집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 후 살기가 정말로 힘이 드니 나의 남편 동무 내철이가 아주머니를 찾으러 량강도로 간다고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얻어먹고 떠난 것이 그와 마지막이었다. 후에 직장에 통지가 온 것이, 량강도로 가던 중 이전에 간이 나빴었는데 그 병 때문인지 아니면 굶어죽었는지 그가 죽었다고 통지가 와서 죽은 줄로 알고 있었다. 후에 딸이 외갓집을 찾아간다고 떠났는데 그도 무소식이었다. 아들이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집을 몇 번 이사하다 보니 그들과의 관계도 끝이 났었는데 후에 범죄자 흥섭이의 자백에서 내철이 아들을 잡았다고 하였다고 하여 알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빵을 주겠다고 얼려서(꼬셔서) 집으로 데려와 빵을 한 개 주어 아이들이 먹을 때 벽장보를 씌운 곳에서 도끼로 머리를 까서 죽였다고 한다. 죽은 아이들 발목 손목을 떼어 내포들을 끓여서 집에서 소비하고 가죽을 벗기여서 각을 뜯어 염소고기라고 장마당에 팔았단다. 뇌수는 간질병화자, 결핵환자들에게 강냉이 4kg과 바꾸어 먹었다고 한다. 밸(창자)을 가지고는 순대를 해서 팔았는데 그 집 순대가 제일 맛있다고 하여, 나오기만 하면 제일 먼저 팔렸단다. 옆의 장사꾼들도 많이 사먹었지만 후에 조사가 들어가니 그 누구도 무서워서 사먹었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흥섭이네 가족 딸, 13살 아들, 15살인지 하는 애와 아주머니를 비롯해서 뇌수를 알면서 팔아먹은 사람, 알면서 산 사람 모두 11명을 공개처형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월, 정말 말을 듣고는 믿기 힘든 현실이다. 그 시기에만도 정 배고프면 중국으로 갈 생각은 못하고, 중국으로 가면 나라를 배반하는 반역자로만 생각하였기에 이런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을 것이다.

< 첫 번째 탈북 >

그래도 백성들의 입에서는 장군님께서 언제면 먹을 것을 주시려나 하고 믿고 기다리며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나도 어리석게 한 해만 지나면 일 없겠지(괜찮겠지) 하며 또 한해 기다리다가 더는 도저히 배고품을 타협할 수가 없어 97년 봄에 장맛비로 두만강이 불어난 물도 마다하지 않고 중국으로 도주하였다. 그때 집에는 강냉이 4kg정도만을 남겨놓고 생명을 계약할 수 없는 초행길을 떠났었다. 물이 불어 선키에 목까지 오는 물을 죽기 살기로 건너 중국에 간 후 '세상에 이렇게 좋은 세상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내가 사는 내 나라가 제일로 좋은 줄 알았었는데, 분명 꿈은 아니었다. 중국에 와서 처음 한번은 중국에 있는 친척들의 방조(지원)로 굶어가는 집에 지원을 보낼 수 있었고 그 후부터는 나도 장사를 하고 식당에서 일도 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몇 번을 붙잡혀 곤경도 치르고 죽을 뻔한 고비도 몇 번을 넘겼으며, 죽었다가 살아난 일까지 겪으면서 천한 목숨 길기도 길어 결국은 하늘의 도움으로 여기 대한민국 땅에 들어섰고 지금처럼 글도 쓰게 되었다.

<타향살이>

1999년도부터 나는 정식으로 중국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식당일을 시작하였다. 집에 두고 온 세 자식 생각으로 시집을 가라는 중국 조선족들의 권유를 마다하고 신분을 숨겨가며 객지 생활을 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어느 식당이나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알면 무서워서 쓰려고 하지 않았고, 정작 쓴다고 해도 월급도 낮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였다.

제일 바쁠 때가(힘들 때가) 호구 조사와 신분증 검사를 할 때인데 그때마다 사람 운명이 10년씩 감소되는 것 같았다. 멀리서 공안차만 보아도 가슴이 방망질을 하고 공안복 입은 사람만 보아도 괜히 눈을 굴리면서 피해 달아났었다.

내가 제일 처음 취직했던 식당이 한족사람이 경영하는 식당인데 손님이 많았었다. 한족말은 니디워디도(아무것도) 모르니 북한사람이라는 것을 대뜸 알고 일만 잘하면 보호해준다는 식당 주인의 말에 용기를 얻어, 오전만 해도 20L가 들어가는 물통째로 5~6개 허귀가마를(전골냄비) 회사주(쇠줄로 엉켜 만든 수세미)로 가시는데 손이다 비어지고 힘을 너무 줘서 씻다보니 어깨가 쓰셔났다. 내 일을 다 하고도 한족 아이들의 일을 두어 주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식당 화장실 청소까지 도맡아 하려니 여섯 달을 하고나니 더는 팔의 뼈가 쓰려서 지탱하기 힘들었었다. 그래도 월 말이 되면 나오는 월급 때가 제일 눈물이 나올 정도로 기뻤다.

이 돈이 빨리 북한에 있는 내 가족들의 손에 넘어가야 할텐데. 장에 나가 남이 먹고 남은 국물을 얻어먹던 둘째 딸 생각과 집을 팔면 속도전떡(강냉이를 가공해서 만든 가루떡) 한번만 실컷 먹어 보게 해달라던 막내아들 생각으로 밤마다 눈물로 세월 보낸 날은 또 얼마였던지. 제일 눈물 날 때가 식당에서 명절이 되면 복무원들은 자기 집으로 가면서 부모들의 선물을 산다고 야단법석인데 오갈 데 없이 식당에 처박혀 피주(맥주)와 싸움질 할 때와 손님들이 먹고 남은 음식 중에 먹을 만한 것이 많은데, 그 음식을 뜨물동에 버릴 때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이라도 가져다 먹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면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쏟아지곤 하였다.

하루는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복무원이 와서 “아주마이 김일성 마크를 단 양복쟁이 조선사람 3명과 중국사람 4명이 우리 식당에 왔습니다.”하고 알려주었다. 나는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36개 줄행랑을 쳐서 음패 하였다가 30분이 지난 다음 살금살금 기미를 보려 다시 식당으로 와보니 그들은 우리 식당에 음식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노루 제 방귀에 놀라 뛴 격 이였다. 꽤 오래 앉아 먹고 나갔는데 중국 사람이 결산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이 결산하였다. 그들이 이날 먹은 돈이 중국 돈으로 1500원어치를 먹고 갔다. 1500원이면 내가 이집에서 3달을 죽게 일해야 가질 수 있는 월급의 숫자이다. 분명 김일성 마크를 단 사람이 결산하였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돈을 잘 쓰는지 부럽기만 했었다. 나는 그 식당을 그만두고 그 후로는 한국음식을 배우기 시작하여 한식스프(한국음식요리사)로 일을 하기 시작하여 2001~2003년까지 연길에서 800원의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수모를 얼마나 당하고 눈물은 얼마를 흘렸으며 싸움은 또 얼마를 했었는가. 지렁이도 밝으면 꿈틀한다고, 참는 것도 정도인 것이었다. 신분이 없으므로 참고 또 참다가도 너무해도 정말 너무 할 때에는 싸움질도 한 적이 있었다. 붙잡혀 나올 때 조선으로 이동하는 동안 보면 그래도 시집을 가서 중국 조선족 남자를 얻어 살던 여자들은 얼굴에 살도 보기 좋게 있었고 편안하게 살고 있었고, 한족 남자들한테 팔려가서 살던 여자애들은 고생 고생하여 손이 썩고 발이 밴 아이도 있었었다. 중국에서 사는 동안은 마음고생은 많이 하였어도 배고픈 고생은 하지 않아 행복한 추억으로 기억된다.

내가 식당일을 하던 2000년도에 나의 남편이 나를 만나러 연길에 몰래 들어와 내가 모아놓은 돈을 가져가서 아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그도 고생을 많이 했었다. 한번은 돈을 가지고 가다가 택시 운전수의 밀고로 룡정 공안에 붙잡혀 돈과 가져갔던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조선으로 북송되어 곤경을 치렀다고 한다.

밖에 눈이 내려 온 산과 들이 하얗게 덮히면 ꡐ회령의 처마 낮은 내 집 지붕과 마당에도 눈이 저렇게 덮혔겠지ꡑ라고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고, 비가 오면 ꡐ집이 낡은 집이여서 비가 새겠구나ꡑ하는 생각으로 눈물이 나오고 일할 때 밖에서 아이들이 엄마 찾는 소리가 나면 내 아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 같아 밖을 내다보고 있으려면 빌어먹던 새끼들 생각이 나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저렇게 자유로이 자기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왔다 갔다 하는데, 우리는 어찌하여 가족과 헤어져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보고 싶어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지, 밤마다 꿈에서 아이들이 배고파 떠돌거나 아이를 잃어버려 헤매다 울며 깨어나는 날은 얼마나 많았던지... 어느 날엔가는 꿈에 아들이 나타나 ꡐ어머니 배고픕니다ꡑ라고 하여 깨어난 것이, 온 밤동안 잠이 오지 않고 눈물로 날을 밝힌 적도 있었다. 글재주가 있고 말재주가 있으면 더 자세히 감정 가게 쓰면 좋으련만 재주가 없다보니 간단한 줄거리로 쓰려니 좀 아쉬운 점이 많다.

< 비인간적인 조선족 인신매매꾼들 >

나는 생각 끝에 2002년도에 나의 큰딸을(그때 나이 18세) 중국으로 데려 왔다. 조선에서 배고프게 고생을 하며 살기보다는 입 하나라도 덜면 남편도 수월할 것 같고 나도 혼자 벌기보다는 같이 벌면 좋을 것 같아서 옆에 데려온 것이다. 하지만 따끈한 친척이 없고 나도 숨어사는 신세에 딸의 신변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이러다 잡히면 혼자인 몸이니 크게 근심할 일은 없었건만 딸애 걱정으로 더욱 발편잠을 못 잤다.

내가 일하던 대동강 식당 로반 주인과 잘 말해서 월급을 받지 않고 일을 시켰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으로 한 달 가량 일을 하였는데 대동강 로반이 자기 시누이가 북경에서 식당을 경영하는데 연변은 무서우니 북경 식당에 가서 일을 시키자고 하였다. 연변보다 검사도 덜하고 젊은 아이들은 한족굴에 가서 한족말을 빨리 배워야 한다는 말에 또 대동강 식당 로반의 사람 됨됨을 보니 별로 의심이 가지 않아서 승낙을 하였는데, 딸아이가 북경으로 이동한지 일곱 달 만에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알고 보니 대동강 로반의 시누이라는 년이 내 딸애를 중국 돈 만원에 목단강으로 팔아먹고는 나한테는 딸애가 어떤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고 하였다.

거짓이란 시간이 지나면 꼭 들창(들통) 나기 마련인데, 왜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할까? 우리 조선 사람들은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혹시 거짓 신분을 말한 적은 있지만, 이런 경우에 거짓말을 하면 무사히 넘어간다고 믿는 비인간적인 중국 조선족 사람들...
배고파 먹고 살기 위해 중국으로 온 수많은 조선 여성들을 팔아서 자기 리속(실속)을 채우는 양심 없는 인간들이 많았다. 단편적인 한 가지 실례로 나의 딸이 직접 목격한 사실인데 중국 길림성 설한 안에 있는 중국 조선족은 하반신 불구이지만 큰 양어장을 경영하는 자였다고 한다. 집도 크고 좋은데 그 집은 큰 지하실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이 집 주인은 중국의 전국 각지에 줄을 놓아 조선의 불쌍한 여자들을 팔았고, 눅게(싸게) 사서는 비싸게 파는 무서운 인신매매꾼 이였다.

내 딸도 이 집에 끌려갔었는데 처음에는 잘 먹이고 옷도 고운 것을 사 입혀서 얼린단다(어르다). 그러다 남자를 정해주는 것이 병신이든 늙은이든 관계없이 돈만 많이 주면 팔아넘긴단다. 팔려가는 아이를 보며 말하는 소리가 갔다가 싫으면 도망쳐 자기 집으로 다시 오면 돈 2000원을 주겠다고 한단다. 도망만 쳐서 전화만 하면 자기들이 찾으러 가겠다고 전화번호까지 대준다고 한다. 우리 딸애가 그 집으로 목단강의 한 장사꾼한테 넘겨 끌려갔을 때에 그 집에는 이미 한 여자아이가 와있었는데, 시집을 안가고 일을 하겠다고 하니 그를 남자 둘을 시켜 죽도록 때려서 지하실에 처넣더라고 한다. 우리 딸애가 보고는 너도 시집을 안가겠다고 하면 저렇게 된다고 하였단다. 그 집에는 그 집일을 해주면서 주인의 일을 거들어주는 남자애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 주인이 남자애들보고 하는 소리가, 매 맞은 계집애가 저녁까지 정신이 들지 않으면 밤에 양어장에 처넣으라고 말하는 소리를 우리 딸애가 엿들었다고 한다. 겁에 질린 딸애는 시집을 안가겠다고 말했다가 더는 그런 말을 못하고 장사꾼들의 손에 끌려 화북성으로 팔려가서 집에 계속 가두어 놓고 전화도 못 치게 하여 나와의 연계를 못가지게 하였다.
한 달 만에 겨우 몰래 전화를 걸어와서 딸애의 소식을 알았고 그나마 엄마가 있으니 딸애는 찾아왔으나 조선의 수많은 여자애들이 이런 억울한 곤경을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설한에 있는 조선족 하반신 마비 장사꾼의 손에서 놀아난 여자애들은 얼마이며, 또 누가 알랴. 그렇게 매를 맞아 깨어나지 못해 양어장에 처박힌 아이들이 하나도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배가 고프니 일시 주린 배를 채우려고 부모 모르게 두만강을 건너 와서는 나쁜 사람을 만나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조선에 있는 부모들이야 좋은 신랑 만나 잘 살기만을 기대할 뿐 그들의 행처를 알 리가 없었다.

여기 대한민국에 온 북한인들 가운데 중국에 들어온 딸애들의 행처를 알지도 못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나도 딸애를 찾을 때 곡절도 많이 겪고 애간장도 많이 태웠으나 그래도 부모가 곁에 있으니 그나마 찾을 수가 있었지만, 엄마 따로 자식 따로 있으면서 소식도 모르고 타국에 와서 고생하는 조선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사는 이 동네에도 엄마가 먼저 중국에 들어온 다음 딸애가 엄마 찾아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소식만 듣고 한국으로 오다보니 딸애의 행처를 몰라 좋은 일,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딸애를 그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엄마도 있다. 그들을 볼 때면 나의 지난 일이 다시 생각나고 남의 일 같지 않아, 같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누구나 남의 말 하기는 쉽지만, 정작 그들과 같은 일을 겪어본 사람들은 이들의 아픈 가슴을 이해한다. 물론 나도 중국에서나 남한에서 우리 북한사람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것은 안다. 먼저 나온 사람들이 중국이나 한국에 와서 다는 아니더라도 몇몇 사람들이 누구나 아픈 상처 없이 한국까지 온 사람은 하나도 없으련만 정신 차리고 사는 대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날라리로 살 궁리를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었으므로 후배들인 우리들에게도 영향이 크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