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 1

이 영(가명, 탈북여성, 1960년생, 2005년 한국입국)

나도 이젠 40대 중반기를 벗어난 녀인이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은 것이란 없고 오직 추억과 가슴속의 아픈 상처뿐이다.
정작 펜을 들고 보니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순서와 방향이 생각나지 않지만, 하나하나 더듬으며 나의 짧은 인생에서 멀고도 멀게 돌고 돌아 여기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 사연을 간단히 적으려 한다.

우선 이 글을 쓰기에 앞서,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모두를 새 생명이 탄생한 나의 제2의 고향 대한민국까지 인솔한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장님을 비롯한 여러분들과 중국에서 만나 우리 가족과 함께 여러 나라 국경을 함께 넘으며 고생을 하신 신사장님께 더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이 분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저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입니다.

< 고난 행군의 시작 >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딸 두 명에 아들 하나를 낳아 더없이 행복한 가정에 건강한 우리 부부의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동내에서 제일은 못 꼽혀도 어느 정도 부러움을 사는 행복한 가정이었다. 나의 남편은 직장에서 행정 사업을 맡아보는 일꾼으로서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듣지 않으며 노력하여 항상 혁신자 명단에 손꼽혔고, 나 역시 꼬리 없는 황소로 불리 우며 가정에서 손 두부ㆍ술ㆍ엿 등을 직접 만들었고 돼지ㆍ개ㆍ염소ㆍ닭ㆍ토끼를 키우며 아이 셋과 함께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0년서부터 우리들의 인생에 첫 시련이 부닥치기 시작한 것 같다. 국가에서 배급을 주다 말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니, 집안의 가정 집물과 재산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인민들의 한숨소리 구석구석 잦아만 갔다. 한해만 고생하면 끝나려니, 또 한해만 가면 끝나려니 하고 기다리고 기다려도 고난의 행군은 끝이 없었고, 백성들의 신음소리만 점점 높아만 가던 1997년. 그 때는 생각만 해도 소름끼치고 등골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내가 이곳 대한민국까지 와서 가끔 드문드문 옛 일을 추억하여 옛 말을 할 때는 한국 사람들 일부는 정말 그럴 수가 없다고 믿지 않는 이가 많다. 중국에서 살면서 중국 사람들도 거짓말이라고 한다. 하긴 실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믿기 힘든 현실들이었으니까 제일 힘겨웠던 시기가 94~2000년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사람들의 머리 속 사상이란 당에서 죽으라면 죽어야 되는 그 시기였으니 정말 어리석은 백성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도 이 시기 한창 자라나는 세 자녀를 죽이지 않고 키우느라 죽을 고생을 다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그 힘이 어디에서 생겨 그렇게 극성을 떨며 살았는지 나도 신기할 정도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마 속에 들어갈 낟알이 없어서 빈 가마에 불만 때고 아이들은 학교는 생각도 안하고 모두 산과 들로 뿔뿔이 흩어져 산나물과 미나리, 심지어 돼지들만 먹던 비듬 풀과 능쟁이 풀을 뜯어온다. 그것을 들고 내가 온 하루(하루 종일) 장마당에 나가서 장사를 해야 강냉이 1kg 값도 못 벌면, 두부하고 찌꺼기 비지를 한 덩이 사서 밑에 풀을 깔고 위에 비지를 올려놓고 끓여 먹는다. 소금이나 맛내기 같은 것이 들어가야 별 맛이 나지만 소금과 맛내기 살 돈이면 낟알을 500g이라도 더 샀기에 맛내기 맛을 본 지는 까마득하고 소금도 알을 혀서(세어서) 먹다시피 하니 메스껍지 않을 정도로 약간만 넣어 먹곤 하였다. 아이들도 산과 들에 나가 풀을 뜯자고 해도 가까운 근처에는 미처 풀이 돋아날 새가 없어 시내에서 10리 정도 까지 가야 먹을 만한 풀을 한 배낭씩 뜯어오곤 한다. 심지어 봄철이 되서 농사꾼들이 악전고투하여 심어놓은 콩밭에 콩이 싹터 올라오면, 나오는 대로 도둑놈들이 뜯어가서 농사꾼들도 낟알을 땅에 심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이 시기는 너나 할 것 없이 도둑질을 안 하면 굶어죽어야 하니,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가는 세월이었다.

어느 집에 중국에서 친척이 왔다면 손락이(힘이) 센 사람을 싹을 주어 경비를 세워야 했고, 경비를 세워도 도둑에 윗도둑이 있다고, 그들은 대문으로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 벽에 구멍을 내고 물건을 훔쳐가는 기술 또한 특출한 솜씨들이었다. 아파트에 사는 집들에는 아파트 옥상으로 해서 천반에(천장에) 구멍을 내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방법도 있었고, 밖의 창고를 털 때에는 집안 열쇠를 밖으로 걸어놓고 집주인이 나오지 못하게 하고는 창고를 털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어쨌든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 판이니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결사전 이였다.

이때부터 집짐승을 키우는 집에서는 돼지ㆍ개ㆍ닭 할 것 없이 사람과 함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집안 부엌에다 돼지를 키웠고 윗방에 비닐 막으로 칸을 막고 닭을 키워야 했다. 집안사람들 생활이 돼지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으니, 냄새 따위는 신경도 쓸 형편이 아니었다. 강냉이 이삭이 생기고 아삭 마다 알이 들었나 보면서 이삭을 찧어 본 때가 언제인지... 언제면 이삭이 여물어 이 주린(굶주린) 배를 한번만이라도 실컷 채워볼 것인가. 우리 아이들도 제일 작은애가 8살, 둘째딸이 10살, 큰딸이 12살이었을 때 이 애들은 강냉이 밭에 가서 점심 한 끼는 해결했다. 강냉이를 뜯어오다 잡히면 매를 맞으니 뜯어오지는 않고 빈 몸으로 강냉이 밭으로 오줌 누러 들어가는 것처럼 들어가서 강냉이 이삭이 돌기 시작한 이삭을 골라 송치까지 뜯어먹는데, 그때 그 맛을 지금 와서 찾아보라면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나의 막내아들은 한참 먹을 나이인지라 죽으로 끼니를 때우니 배만 점점 커져서 엄마, 아버지보다 더 먹으려 하는데 식구마다 죽도 한 사발씩밖에 차려지지 않는다. 이이들이 장에 나간 엄마를 기다리기 힘들어 먼저 죽을 먹고 엄마가 들어오면 엄마 먹는 죽이 먹고 싶어 죽 그릇 앞에 우두커니 앉아 엄마 먹는 것을 숟갈 가는대로 따라가며 본다. 딸애들이 너는 먹었는데 왜 또 그러느냐고 꾸중을 해도 들은 척 만 척하고 엄마가 남겨주길 학수고대한다. 그러나 그때는 나도 배가 너무 고프니 자식에게 양보를 못하였다. 겨우 생각해주는 것이 한두 수저 입에 넣어주면 두 누나들한테 한대씩 쥐어 맞으면서도 받아먹는 재미에 죽사발이 빌 때까지 앉아 있는다.

< 도적질, 먹고 살기위한 최후의 선택 >

낮에는 장마당에 나가 팔리지도 않는 장사를 하고, 저녁이 되면 아낙네들이 두세 명씩 짝을 지어 농장 밭으로 남새도적질을 하러 간다. 고추면 고추, 호박이면 호박, 파, 무우, 배추 할 것 없이 도적질을 해오는데, 밭마다 경비원들이 득실거려 빈탕 칠 때가 수두룩하였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뜯어오는 날이면 큰 성과였다. 한번은 고추밭에서 고추를 훔치러 갔는데, 한사람이 두 고랑씩 타고 세 명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버스럭하는 소리가 나서 고추밭에 납작 엎드렸더니, 그 쪽 역시 조용해지는 것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쪽도 고추 도둑질을 하러 와서 고추를 뜯으며 마주 오다가 인기척을 듣고 조용히 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서로 다시 고추를 뜯어가지고 제 집으로 간일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본심이 나빠서 이런 짓을 했다고는 생각지 마시요. 그렇게라도 안하면 굶어죽었기에 죽기를 각오하고, ꡐ앉아 죽으면 어떻고, 서서 죽으면 어떠랴. 죽기야 매한가지인데...ꡑ 하는 생각으로 너나없이 해먹는 일이었다. 하루 자고나면 누구네 온 집 식구가 자살해 죽었다. 또 누구네 아이가 굶어 죽었다는 소리도 파다하였고, 장에 가다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어 뚜지고(밀치고) 들어가 보면 사람 죽은 시체가 누워있었다.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시체를 등지고 내 볼일을 보러 떠나 버린다. 장에 나가 음식을 사먹으려면 전투를 겪는 격이다. 돈만 보면 꽃제비 아이들이(소매치기) 덮쳐가고 갸날픈 아이들이나 아낙네들이 음식을 먹는 기회만 나면 두세 명이 달라붙어 뺐지 않으면 덮쳐서 가지고 달아난다. 덮친 아이들은 갖고 뛰고 뺏긴 사람은 붙잡아 때리고, 아이들은 맞으면서도 음식을 입으로 웅켜(삼켜) 넣는다. 음식 파는 아낙네들은 광주리마다 그물을 씌어가지고 팔아야 했고 저녁 늦게까지 있으면 광주리채로 덮쳐 가지고 달아난다. 먹을 것이 없고 땔 것도 없어, 산에 가서 한 번에 삭정이나 생나무를 해 와야 불이라도 피우며 살겠기에 나와 처지가 똑같은 나의 제일 친한 동무와 나무하러 산(두만강이 옆으로 흐르고 중국이 마주보이는 산)에 밧줄을 가지고 가는데, 길에서 조금 더 올라가려니 산중턱에 피아노 건반처럼 차례차례 땅을 파놓은 것이 보였다. 왜 땅을 이렇게 순서대로 많이 파놓았을까 생각하면서 산에 올라 나무를 한 짐씩 해가지고 저녁에 내려오는데, 꽃제비 상무와 꽃제비 우두머리 세 명이 아이 하나를 관도 없이 맨땅에 파묻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제서야 그 때문에 이렇게 땅을 많이 파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좋은 철이 가을철이었다. 열 명의 순사가 한 명의 도적을 못 잡는다는 말이 있듯이 곳곳에 인민군대가 총을 메고 경비를 선다고 해도 굶주린 사람들의 갈취하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까. 강냉이를 도적질하다 매를 맞을 땐 맞더라도, 세 번 중 한 번만 성공해도 큰 성과였다. 남녀노소 아이들까지 아침에 눈을 뜨면 배낭을 메고 들로 나가 이삭을 주워오는데 말이 이삭이지 절반은 도적질이다. 그들의 행열 속에는 우리 식구도 물론 끼어있었다. 가을은 왜 그리 빨리 지나 가는지 세월이 얄밉기만 하더니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추위와 굶주림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가고 아우성치는 소리에 도시 분위기가 수산해졌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남의 소를 몰래 훔쳐서 잡아먹은 큰 도둑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소 한 마리만 잡아먹다 걸리면 무조건 총살되었다. 왜냐하면 소를 잡음으로서 협동조합을 파괴하려는 책동이었으므로 그런 처벌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겁내지 않고 나중에 갑산 가더라도 한 끼라도 실컷 먹고 죽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소 한 마리 잡아먹고 아버지 아들이 총에 맞아 죽고 가시아버지(장인어른)와 사위가 처형당하거나 형제끼리 해먹고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의 목숨이 소와 개에는 대비도 안 되었다. 개가 죽으면 임자가 서로 싸움질한다. 서로 자기가 임자라고 하지만 사람이 죽은 시체는 아침에 발견되면 저녁에 가야 없어진다. 우스운 소리지만 저의 남편이 아침 일찍 내 동생과 일보러 같다 오더니 오봉 다리 밑에 웬 개하나 죽은 것이 있다고 하길래 나는 임자가 있더냐고 물었다. ꡒ임자가 없으니 아직까지 있지ꡓ라고 하길래 내가 재빨리 ꡒ그럼 가져올 것이지, 참 아쉽다.ꡓ했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ꡒ누나, 개가 왜 아직까지 있겠소. 사람이 죽었습데(사람이 죽은 것도 아닌데 아직 남아있겠느냐)ꡓ라고 하여 한바탕 웃은 적이 있었다.

< 지옥 같았던 나날들 >

96~99년 때에는 아마 보름이, 일주일이 멀다하게 공개처형을 한 것 같다. 소 잡아먹은 것, 인신매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총에 맞아 죽는 일도 바로 내가 살던 회령에서 있었던 일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스산한 세월이었다. 95년 8월로 생각되는데, 장마당에 장보러 가는 중 방송 차에서 공개처형한다는 방송이 나와 구경하러 갔었는데 사람 5명을 세워놓고 먼저 범죄자들의 죄행을 폭로시키고 마지막으로 판결문 <조선민주주의 헌법 제xx조항에 의하여 사형에 처한다>하고 재판소 판결문이 떨어지자 특사 받은 안전원들이 죄인 한 사람당 3명씩 앞에 서서 총을 쏘는데 거리는 20m 안팎의 거리였다. 나는 그때 먼데서 설치게(어설프게)보면 꿈에 나타난다는 누군가의 말에 제일 앞에서 그 장면을 보았는데, 소를 잡아먹은 사위와 가시아버지도 있고 처녀들을 중국에 팔아먹은 40대 되어 보이는 중년 남자도 있었다. 지휘자의 ꡒ쏴!!ꡓ소리와 함께 죄인들의 얼굴이 먼저 총알에 맞았는데, 한 사람 얼굴의 한 쪽 면이 떨어지면서 속안의 뇌수가 땅바닥에 몽땅 쏟아지더니 얼굴 면이 다시 제자리에 올라가 붙는 것이었다. 8월의 더운 날씨에도 그 뇌수 떨어진 데서는 김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었다. 사격은 10분도 안 걸린 듯 싶더니, 금방까지 앞에 말뚝에 매달려서 행여나 아는 사람이 나와 있는지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이 모두 꼬꾸라져 있고 특사 받은 안전원들이 옛날 농촌에서 쌀을 담던 볏집 가마니를 들고 나와 죽은 시체를 거꾸로 집어넣어 서너 번 들었다 놨다 하니 시체가 가마니 안에 쏙 들어갔다. 새끼줄로 가마니 윗부분을 매서는 트럭 차에 하나 둘 셋 하면서 올리뿌리고(올려던지고) 싣고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공개재판, 공개처형을 해도 이런 일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다. 3일 굶은 범이 원님을 못 알아본다고,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먹고 죽자하는 판이다. 집 재산을 통 털어서 돼지고기, 이밥에 먹고 싶은 것을 사서 실컷 먹고 마지막에 음식에 아이들 모르게 쥐약을 넣어 다 같이 먹고 자살하는 집도 있었다.

여기서 내가 잊혀 지지 않는 이야기를 한 가지 하련다. 계속 죽물로 생계를 유지하던 우리 집에 어쩌다 사람다운 음식을 먹어보려고 통 강냉이 죽을 쑤어 먹게 되었는데, 통 강냉이 껍질을 기계로 발글(바를) 수 있으나 기계로 발그면 낭비가 되므로 손절구로 껍질을 대충 발그고 열 콩을 조금 넣고 끓이는데 누군가 통 강냉이 삶을 때 석회석 1덩어리를 넣으면 빨리 끓고 남은 껍데기가 홀랑 벗겨진다고 하여 나도 석회석 1덩이 아이 주먹만한 것을 집어넣었는데 이것을 큰 딸애와 작은딸애가 보았다. 이 애들은 이미 다른 집에서도 독약을 먹고 죽을 때 음식을 한 끼 잘해먹고 죽는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기에 이 애들도 어린 나이지만 이것을 그런 일로 인식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엄마 아빠가 무서워 말도 못하고 후에야 이야기 하여서 알았었는데 이제는 우리도 끝이 나는 줄 알고 부모들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옛이야기를 추억하면 눈물이 나오지만 그때는 어른이나 아이나 항상 조이며 살다보니 하루하루 사는 게 정말 생지옥이었다.

96~97년도에는 전염병, 파라티푸스, 장티푸스라는 병이 도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저 세상으로 갔는지 모른다. 이 병에 걸리면 무조건 죽어야 하는 병으로 알았었으니 말이다. 우리 식구도 5명 중에 큰 딸애만 하나 이 병을 안 앓고, 남편으로부터 시작된 병이 차례차례 나까지 몽땅 앓았다. 약도 없는 병원에 격리당한 환자들이 병실마다 넘쳐나 복도에까지 환자들이 줄을 지어 누워있었고 시체실의 시체는 미처 임자들이 찾아가지 않으면 그들을 넘기지 않고 집체로 싣고 어디론가 가서 묻어버리든지 그냥 버리든지 해서 처리해 버린다. 나도 한 달간 병원에 누워있었는데, 그때 사과가 몹시 먹고 싶었던 것이 지금도 사과만 보면 생각이 난다. 한 알에 30원씩 하는 사과 한 알만 먹으면 정신이 들겠건만 남편에게 말해도 한 알도 해결 못해오는 처지였다. 내 옆의 환자는 그래도 사과를 사먹는데 그 먹는 소리에 너무도 먹고 싶어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이불속에서 눈물만 흘렸다. 다 지난일이여서 글로 쓰기는 참 어렵지 않으나 40도의 고열로 입술이 초들초들(바짝바짝) 마르고 골이 빠개지는 듯 아픔을 당하며 주사 한 대 맞지 못하고 강알음을 앓을 때 같아서는 빨리 숨이 꿀꺽하고 넘어가길 얼마나 바랬었는지 모른다. 이 천한 목숨이 질기기도 질겨 사과 한 알 못 먹어도 살아났고 열이 떨어져 병원에서 퇴원하였다. 밖으로 나오니 집안 살림은 말이 아니고, 아이들은 장마당으로 돌아다니며 여자애들을 덮치거나, 도적질은 못하고 남들이 흘린 것, 낟알이라고 생긴 것은 다 주워 먹고 있었다. 작은 딸애는 음식 대에서 국수를 말아 파는 것이 있었는데 손님이 다 먹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다가 ꡒ국물을 버리지 말고 나를 주세요ꡓ하며 빌어먹고 살았다. 언젠가는 너무 먹을 것이 없어서 3일 동안 배추 속은 뽑아 군부대에 실어가고 껍질을 주워 삶아서 끼니를 메우며 산적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광경을 보는 듯 하다. 엄마 없는 아이들이 다들 살고 있었고 엄마가 없는 우리 아이들도 이렇게 간고한 나날을 겪으며 살았었다. 나는 여기서 나의 책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부모들이 역할을 잘못하여 아이들의 어린 가슴에 이런 쓰라린 상처를 남겨 놓았다고.

99년 가을에 산에 도토리가 많이 열렸었는데 나는 그때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비닐 장막으로 막을 쳐놓고 도토리 줍기를 하였다. 그때 남편도 있었건만 돈은 없고 활력이 없으니 보탬이 되지 않았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개인들이 산에 심어놓은 강냉이를 훔쳐 먹으면서 도토리를 주웠는데 산속엔 뱀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생활이 어렵다보니 신을 제대로 신은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큰 딸도, 작은 딸도 신이 찢어진 것을 천을 대서 기워 신으면 하루 산에 갔다 오면 또 찢어지고 저녁이 되면 딸애의 신을 깁는 것이 나의 일과이기도 했다. 아들은 천막을 지키고 딸애와 내가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는데 배가 고프니 산을 타는 일이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글로 쓰자니 참 간단히 헐하게 적게 되니 못내 아쉽다. 비가 오면 천막이 새서 눕지를 못하고 입은 채로 밤을 밝혀야 했고 나무가 젖어 불을 피우기 힘들어 애먹던 일, 아이들 신발이 찢어져 발을 찔려 도 엄마가 속상해한다고 천 오라기로 신발 위를 동여매고 날 따라 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 우리 작은 딸애가 참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기워 신고 기워 신고 하다가 결국은 더는 기울 형편이 안 되어 신을 버리고 맨발로 걸어 다녔다. 그때 나이 12살인지 13살인지 잘 생각이 안 난다.

어느 해 봄인데 그 해에는 중국에서 약초를 많이 실어갔는데 삼주뿌리 4kg에 밀가루 1kg씩 바꾸어주어서 온 회령시 백성이 산이란 산을 벌 둥지로 만들어 놓았던 일도 있었다. 아침 7시에 집에서 죽을 한 사발 먹고 도시락으로 비닐봉지에 죽을 싸가지고 떠나면 20리를 걸어 11시가 되어서야 산에 도착한다. 산에 오르고 나면 죽이 다 소화되어 배가 고픈데 꽉지질을(나물을 케는 모습) 1시간 정도 하고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점심 죽을 먹고 나면 또 꽉지질을 해야 하는데 2시간만 하면 두 무릎이 자연이 땅에 떨어진다. 그러면 두 무르팍을 땅에 붙이고 꽉지로 삼주뿌리를 캐어 집에 와서 저울로 뜨면 4~5kg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렇게라도 계속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참 다행이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