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죄수도 인간이다 – 12

[탈북자 수기]

이 글은 탈북청소년인 김혁 군이 북한에서의 생활 중 전거리 교화소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쓴 수기로써 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인간 세상 속에서-

김 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20일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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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부터 2000년 7월 6일까지 7년 4개월동안 가장 힘들었고 미래와 인권까지도 박탈 당해야 했던 쓰디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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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산은 파란 옷을 갈아 입고 들에는 염소들이 풀을 뜯는 계절이 왔다. 우리는 교화소에서 쓸 오이대와 콩대를 하러 산으로 가게 되었다. 점검을 끝마치고 철문을 나서니 아직도 겨울 티가 남아 있어 찬 기운이 온 골짜기를 메웠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산을 오르는 수감자들은 참으로 보기가 처참했다. 한 손으로는 무릎을 짚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안간 힘을 다하며 40도 정도의 산비탈을 오르는 수감자들 너무나도 인간됨됨이 잘 느껴지질 않았다. 그런 수감자들을 짐승에 비기면 소나 말같이 느껴졌다. 매를 맞아가면서도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 너무나도 험악했다. 나는 그들이 어디로 가지나 않나 하여 점검 번호를 부르며 나무를 찍었다. 오이대는 피나무면 피나무 박달나무면 박달나무, 무르건 세건 관계없이 곧고 약한 나무는 다 찍었다. 한 사람에 60대씩 져야 했는데 사회 사람들도 겨우 끄는 무거운 나무를 어깨에 메고 끈다는 것은 조련치 않은 일이었다. 산을 내려올 때는 그래도 경사막이라 어깨가 아플 뿐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사막을 내려와서 평지에 서고 보니 나무가 통 끌리지가 않았다. 우리는 초리와 가지들을 다 잘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도끼가 없다 보니 남의 도끼를 빌렸는데 도끼를 다 쓰고 허리를 펴보니 교화반이 어느새 떠나 버렸던 것이다. 금방까지 있던 것 같았는데 벌써 보이지가 않고 뒤에서 내려오던 다른 교화반 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끌바로 나무를 조여 묶고 대가리 쪽을 어깨에 멘다. 초리는 땅바닥에 대인 채 나는 끌기 시작했다. 얼마나 무거웠는지 허리가 시큰거렸고 발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좌우로 움직이며 걸었다. 그런데 이때 한 계호원이 달려왔다. 그는 우리 교화반을 담당한 계호원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어느 교화반에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대답하자 그는 독한 표정을 지으며 어서 빨리 교화반을 따라 잡으라고 했다. 너무도 멀리 떨어진 교화반을 따라 잡으려면 10분쯤은 남아 걸렸다. 뛰어 간다고 해도 말이다. 헌데 그 무거운 나무단을 쥐고 뛰는 것이란 도저히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나는 전혀 따라 잡기가 힘들 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애써 뛰려고 했으나 휘청휘청하는 다리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걷는 속도보다 더 떠보이기만 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깨가 쑤셔왔고 거만한 계호원(감시병)은 빨리 뛰라고 악에 찬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하지만 뼈만 앙상하던 내가 그 무거운 콩대를 메고 뛰면 얼마나 뛰겠는가…

이때 갑자기 무엇이 등을 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무를 어깨에 맨채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때 연속 구두발이 날아 들어왔다. 눈에서는 별지가 튀겼고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금시 숨이 넘어 갈 것만 같았다. 살이 다 빠져 뼈만 앙상한 조그마한 등을 사정없이 내려 밟는 계호원은 정말로 인정이란 조금도 없었다. <너 이새끼 도주하려고 했지>하며 사정없이 때리는 계호원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도주기도란 말뚝 (사형할 때 사람과 함께 비끄러매는 곽자(나무)) 감 밖에는 더 되지가 않았다. 즉 사형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도주를 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하려고 생각조차도 못해 보았다. 설사 이렇다 하지만 교화소측에서 <너는 도주기도다>라고만 하면 나는 사형 대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증거를 말하려고 해도 가뜩이나 의심만 품고 사는 계호원들에게는 한낱 변명 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얼마나 아프고 아팠는지 나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입이 터져 피범벅이 된 얼굴은 그야말로 보기 흉할 정도가 되었다. 온통 뻘건 피로 얼룩진 얼굴을 문지를 사이도 없이 매는 여전했다. 일어서려고 해도 그 세찬 구두발로 내리 밟으니 사회에서 사는 사람이라도 아팠을 것이다. 이런 때는 차라리 일어나는 것보다 누워서 매맞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얼마나 때렸는지 정신이 아찔했다. 뽀얀 흙먼지와 피가 범벅이 되어 얼굴은 온통 거멓게 되었다.

이때 담당 선생과 반장과 조장이 걸어왔다. 나는 선생을 믿었기에 일어서려고 안간 힘을 써보았지만 허사였다. 다리가 제대로 말을 듣질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다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점점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통증이 오기 시작했고 나는 일어서려고 안간 힘을 다 써보았지만 소용 없었다. 나의 다리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선생은 급히 반장을 시켜 나를 붙잡게 한 다음 자신은 다리를 당겼다. 얼마나 아팠는지 눈물이 마구 흘러 피범벅이 된 얼굴을 적셨다. 너무나도 아파 소리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무릎은 금새 퍼렇게 부어 올랐고 나는 반장에게 의지하여 걸었다. 왼쪽 다리를 전혀 땅에 대기 힘들어 하자 반장은 나를 업고 걷기 시작했다. 나는 반장의 등에 얹혀 신음소리를 내며 교화소까지 도착했다. 나는 감방에 들어가서 누웠고 밥을 먹고 난 다음 자신도 모르게 잠에 골아 떨어졌다. 다행히 몸이 약하다 보니 잠이 많아졌고 그로 인해 아픈 통증을 조금이라도 단 몇 시간만이라도 덜 수 있었다.

저녁이나 되었을까 담당선생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선생은 나를 보더니 다리가 괜찮냐고 물었다. 내가 일 없다고 하자 선생은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네가 정말로 도주하려고 한 거냐 너는 몇 달 안되어 퇴소 될 텐데 그것이 정말이냐> 나는 그런 담당 선생을 보며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선생님 제가 이런 몸을 해 가지고 도주하면 얼마나 뛰겠습니까 전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도주하려고 했다며 산에서나 역전에서 기차를 타고 도망치지 무엇 하러 길까지 내려와서 그것도 콩대를 쥐고 뛰려고 하였겠습니까?> 나는 엉엉 소리 내어 울며 얘기 했다.

사실 전거리 교화소는 산새가 묘한 곳이라서 한 발만 잘못 내디뎌도 교화소 도로로 다시 내려오고 만다. 그것도 험한 산새인지라 웬만해선 오르기조차 힘들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약 2∼3년 전 한 도주자가 감방 변소를 뜯고 도망을 쳤는데 온 밤을 걸아 새벽에야 도착해보니 전거리 교화소 정문 앞에 이르게 되었다. 날도 이미 밝았고 더 어디로 뛰려고 해도 잡히는 것은 뻔한 도리인지라 그는 죽음을 막론하고 교화소에 들어왔다. 그는 곧 잡혔고 교화소에서는 사형감이 그를 관대히 용서해서 독감방 7일을 주고 제 교화반으로 돌려 보냈다. 그것은 교화소 측에서 도주자를 미리 막기 위해서 살려주었던 것이다. 교화소가 이렇게 지리적으로 묘한 곳에 있고 도주해도 돌아오게 되어 있다고 교화생들에게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그 덕에 그는 말뚝 앞에서 면제 되었고 7일이라는 독감방 생활을 했다. 나는 이런 점들을 들며 선생에게 말했다 선생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딴 생각말고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나가버렸다.

나는 너무나도 억울한 교화세상을 한탄하며 울었다. 내가 정말 도주기도로 인정된다면 나는 말뚝감일 것이고 곧 죽게 될 것이다. 죽으면 어디로 가지 죽으면 과연 허공간에 떠다니는 먼지 같이 될까 죽으면 부모님들을 만날 수 있을까 살아서도 갈 곳 없고 죽어도 뭍일 곳 없고 연기가 되어 귀신이 되어도 갈 곳 없는 이 가련한 인생을 생각하며 나는 엉엉 소래 내어 울었다. 육신의 아픔은 둘째고 앞으로 닥쳐 올 일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마음의 아픔이 더욱 심했다. 마음이 무척이나 괴로웠고 앞으로 닥쳐올 악몽 속에서 몸부림 쳤다. 살고 싶어도 더 살 수 없는 세상, 죽어도 괴롭고 고통스럽게 죽어야 하는 이 저주스러운 교화소 세상…너무나도 한이 맺혔다. 눈물이 피가 되어 흐르는 것 같았고 멍든 가슴은 찢어지듯이 아팠다. 세상에서도 의지할 곳, 의지할 이가 없고 죽어 지옥에서도 날 달래줄 이가 없는 것이 너무나 나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그때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항상 앞으로 닥쳐올 죽음을 위해 죽은 다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저러한 생각을 다해 보았지만 이렇다 하는 정답을 찾지 못했다. 죽음은 항상 나의 바로 옆에서 나란히 서서 나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저주스러운 그녀를 생각하면서 죽으면 귀신이 되리라고 결심했었다. 귀신이 되어 세상에 와서 나를 고통과 슬픔 속으로 몰아 놓은 그녀에게 내가 받았던 고통과 슬픔을 다 안겨주고 싶었고 그의 영혼까지도 빼앗아 가고픈 심정이었다. 녀자는 괴물이었다. 저주스러운 존재였고 괴롭히는 존재였다.

그 후 몇일 동안 나는 일하러 나가질 못했다. 무릎이 부어 올랐고 몸이 쑤시도록 아팠고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기만 하면 앞이 캄캄해지고 한참 후에야 겨우 시력을 돌아와 보이기 시작한다. 매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몸인지라 너무나도 힘들었다.

한 열흘 정도나 흘렀을까 나는 다시 일하러 나가기 시작했다. 진흙을 교화본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가서 퍼왔는데 소달구지의 두 배나 되는 대차(사람들 여러 명이서 끄는 소 달구지)를 7∼8명이서 그것도 진흙을 가득 담고 끌어도 힘이 모자라고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진 이들의 힘에는 대차가 아무 효과도 없는지 좀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흙을 담을 때도 교대제로 올려 담는데 삽질을 기껏 한답시고 10삽이나 되나마나 한 양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게 교대제로 올리고 나면 또 다시 대차를 끌어야 했다. 교화소 정문가지는 오르막인지라 때로는 대차가 뒤로 밀릴 때도 있었다.

그 대차의 무게만 해도 2t에 가깝고 담은 량만 해도 한 톤 반은 넘었다. 근 3톤 500kg의 무게를 끈다는 것은 여간 힘들 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때 힘들어도 한가지의 희망은 담배꽁초를 줍는 것이었다. 힘을 쓰면서도 정신은 담배꽁초를 그리고 눈은 담배꽁초를 줍는데 돌아갔다. 담배 꽁초라도 발견하면 넘어지는 척하거나 날쌔게 줍는다. 하지만 줍는 동작이 조금만 늦으면 계호원들의 눈에 곧 들키고야 만다. 들켜 욕 먹는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매까지 맞아야 했다. 총탁으로 어깨를 내려 치고 구두발로 걷어차고 마치 짐승을 때리듯 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는 또 괜찮을 것이다. 교화반에 들어와서도 담당선생에게 매맞고 병원 신세까지 질 때도 많았다. 몇 일씩 일하러 나가지도 못하고 자신의 팔자를 생각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