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죄수도 인간이다 – 1 김혁

[탈북자 수기]

이 글은 탈북청소년인 김혁 군이 북한에서의 생활 중 전거리 교화소에서의 경험을 중심으로 쓴 수기로써 사투리를 고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옮긴 것이다.

죄수도 인간이다 - 1
-인간 세상 속에서-

김 혁
전거리교화소 경험자
2001년 9월 20일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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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부터 2000년 7월 6일까지 7년 4개월동안 가장 힘들었고 미래와 인권까지도 박탈 당해야 했던 쓰디쓴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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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82년 청진 시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1986년 7월경 4살 때 나의 곁을 떠났고 아버지는 1995년 8월 경 세상을 떠났다. 나는 12살부터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다. 성장하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너무나도 인간적 권위라는 점을 많이도 깨달았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로는 힘들고 인간의 가장 추악한 곳까지 다 알았던 나였기에 쓰고 싶은 충동이 더욱 컸다. 또한 여러 사람들의 충고로 굳이 결심을 내렸고 살아온 것보다 살아갈 길이 많기에 나의 모든 본적과 이름도 가명으로 한다. 누구나 한번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길인 양 북한 죄수들은 누구나 다 말한다.

함경북도 어느 한 안전부 구류장 생활

1999년 3월24일 나는 비법월경 혐의로 구류되었다. 저녁 9시 경이라 죄수들이 금방 밥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계호원 김성철이 나에게 밥을 갖다 주었다. 밥이라고는 하지만 강냉이 겨밥 이었기에 목구멍이 깔깔해져 먹기가 힘들었다. 죄수들은 나를 보며 먹고 싶지 않으면 자기에게 달라고 나에게 달라 붙었다. 모두들 허약하고 감방 바닥도 기어 다닐 정도로 험한 그들 뼈만 앙상한 그들을 보노라니 차마 그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보름을 빵 한 개 씩으로 지내온 허기진 배이지만 그들을 보니 겨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 밥을 제일 허약한 사람에게 주었다. 그들의 70 ~ 80%가 비법월경 죄로 들어왔고 나머지 20 ~ 30%는 경제범이나 살인범이었다. 감방은 모두 열 개이고 매 감방에는 보통 10명 ~ 20명 정도가 있었다. 그 중 두개 감방이 여자 감방이고 나머지 7개 감방은 남자 감방이다. 마지막 1개 감방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때때로 급 있는 사람들이 2~3일 구류를 시키곤 했다.

예심과에는 소장 비서를 포함한 다섯 명의 예심원이 있었다. 계호원이 다섯 명 있었고 그외 감찰과가 포함되어 한 건물을 쓰고 있었다. 감옥에는 근 100여명이 남아 되는 장정들과 청년들 여인들이 갇혀 있었다. 그러던 4월8일 오후 계호원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아직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감옥에서 나갈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행여나 하는 생각으로 나는 일어섰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가위를 주며 머리를 깎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머리를 깎으라니 시원하기는 했다 한 것은 머리에 이와 서캐가 많이 끼였던 것이다. 감옥에는 이와 서캐와 벼룩이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계호원들의 교정보다 서캐, 이, 벼룩이의 교정이 더 심했다. 원래 똑바로 앉히고 손을 무릎 밑에 넣었고 하니 벼룩이나 이들이 마음대로 기어 다녔고 잡으려고 해도 계호원들의 눈에 들키면 온 하루 벌을 서고 매까지 맞아야 했다. 그나마도 10분도 안 되는 휴식시간은 오전에 1번 밖에 없을 뿐 아니라 잡으려고 해도 너무나도 많아 대체로 다음 휴식시간까지 연장이라 할 뿐 아무 효과도 없었다. 약을 아무리 뿌리고 바르고 해도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다. 이런 현실로 인해 사람들은 점점 약해 갔고 심리적 고통으로 죽으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누구나 머리를 깎으려고 한다. 머리가 무성하면 이와 서캐가 많이 낄 뿐만 아니라 머리가 하얗게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머리를 깎는다는 자체는 나는 이제는 죄수이며 인권을 박탈당한 사람이라는 증표이므로 마음은 침침하고 괴로웠다. 이제는 과연 이런 길을 모면할 수 없단 말인가, 재판을 받고 저주스러운 산 지옥의 교화소로 가야만 하는가. 일명 머리를 깎은 사람들은 죄가 있으므로 재판 받을 사람들이고 재판 받은 사람들은 교화소로 가는 탁구알 (교화생을 탁구알이라고 함)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 다음날 예심원의 부름에 나갔다. 예심원은 초보적인 진술을 놓고 얘기하며 진술서의 확인을 했다. 초보적인 진술이 끝나자 예심원은 나에게 담배를 권해 주었다. 나는 오래간만에 피우는 담배인지라 단번에 석 대를 말아 피웠다. 술 마신 것처럼 기분이 좋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참 오랜만에 입에 대보는 담배이라 기분이 좋았다.

감옥 안의 규정 중 이런 것이 있었다. 앉아 있을 당시 칼을 만들거나 바늘을 만들거나 움직일 때는 처벌이다. 물론 처벌이란 육신적인 고통이 처벌의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해서 7시에 식사를 하고 하루 교정이 시작된다. 10시경 10분 가량 휴식하고 점심식사를 12시 반이나 한시 경에 한다. 또 다시 지긋한 교정이 시작되고 이와 벼룩의 교정은 육신에 심한 고통을 주었다. 사람 기름에 절어 있다는 감방 벽은 거멓게 윤기가 돌았고 이깔나무 널바닥 짬사이에는 벼룩이들이 사람의 기름 마른 썩살들을 뒤집어 쓰고 숨어 기회를 보는 판이다. 계호원들은 소리를 죽이고 감방 벽에 붙어서 누가 나쁜 짓을 하는가만 살피다가 자신의 눈에만 띄우면 곧바로 일으켜 세워 교정을 준다. 손을 새살창으로 내밀게 하고 권총 소재대나 5승 5각자를 가져다가 사정없이 내려친다. 손은 퍼렇게 부었고 피가 흘러 나왔다. 저녁 7시경 식사를 마치고 저녁 9시 반 경 취침을 한다. 머리가 절대로 요 안에 들어갈 수 없고 감방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다시 시킨다. 그럴 때면 따뜻한 온돌방과 편안하게 누워 자던 집 생각이 나곤 했다. 밤이면 빛을 외면한 채 혼자서 몰래 울기도 했다. 그때만큼 부모 생각이 난 적은 없었다. 괴롭고 힘들 때마다 다가오는 슬픔을 부모로 하여금 더 컸다. 때로는 머리를 벽 모서리든 쇠살창이든 들이받고 죽고 싶은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했다.

우리 감방은 10호 감방이었다. 12명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은 못을 14대를 먹고 위가 썩어 한 달도 못되어 죽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어 헤매다가 소를 잡아먹은 죄로 들어왔다. 그는 심한 고민 중 밥 4그릇을 주고 남들 몰래 못 10대를 바꾸어 먹었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 보니 밥을 먹은 탓으로 10대는 고스란히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김철남) 예심을 받고 오던 도중 100mm짜리 못 4대를 몰래 감춰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누구도 모르게 못 4대를 화장실에서 다 먹어 버렸다. 화장실 문은 허리까지도 못 오는 문인데다 비닐방막을 가리워나서 사람형태가 다 알려질 정도였다. 그는 그 작은 반 평방미터 밖에 안 되는 작은 화장실 안에서 다 먹어 버렸다. 그는 그 다음부터 금식했다. 밥을 먹지는 않고 죽만 먹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또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는 몰아 먹기에 참가했다. 몰아먹기라고 하면 교화소 옛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놀음이나 아니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수단을 말한다. 일단 5명 6명이 짝을 지어 매끼마다 밥을 모아 차례차례 줌으로써 한명이 한끼에 6그릇씩 먹고 5끼는 굶는 것이다. 역시 생활상 지루함을 덜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배고픈 생각을 한 순간이라도 잊을 수 있게 해주었다. 허기진 배를 그러쥐고 차례를 기다리는 것도 괜찮은 감옥 오락이었다. 그런데 철남이가 끼어들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굶으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차례도 남에게 넘기며 근 7일을 국물만 마시며 굶었다. 국이라고 하지만 맨 물에 소금을 뿌려 간을 맞춘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국물을 마셔도 몸 건강엔 아무 유익도 없었다. 물만 먹다 보니 끝내 못이 위에서 용을 쓰기 시작했다. 입안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오기 시작했고 못은 썩기 시작했고 못이 서로 엉겨서 위를 자극시켰다. 가끔씩 위를 그러쥐고 나뒹굴기도 하고 움직이면 더 아파놨던지 나중에는 배를 그러쥐고 무릎을 구부리고 모로 누워 까딱 움직이지도 않았다. 아픔을 담은 얼굴에는 땀방울이 슬금슬금 솟아 났고 긴장한 모습 속에 죽음이 한 초 한 초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기상 소리에 일어나보니 그는 목석처럼 굳어져 있었다. 이미 영혼은 육신을 떠나버렸고 외로이 홀로 남은 육체는 하얀 공포 속에 서려 있었다. 그 시체를 바라보노라니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에게 전혀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앓고 계신 어머님이 계셨고 허약한 동생이 있는데 왜 미련이 없겠는가. 하루 빨리 재판을 받고 형기를 마쳐 사랑하는 어머님과 동생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거의 사그러져가는 미련이지만 그에게도 희망이 있고 미래와 그리움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자주 자주 엄마와 동생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그는 때론 이 일이 병보로 떨어졌으면 하는 기대감도 없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왜 이런 일을 시작했냐고 물었다. 그는 나와 가까워졌기에 그 못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나의 물음에 나도 남처럼 병보로 나가고 싶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와 사랑하는 동생을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미련마저도 성취하지 못한 채 시체가 되어 감방을 나갔다.

나는 그에 대비해 보았다. 나에게는 전혀 미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4살 적에 사망하셨고 사랑하는 아버지마저도 12살에 헤어진 제 마음 속에는 전혀 미련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나를 위해 몸을 닦아주고 누가 나를 위해 먹여주고 입혀주고 쇠약한 나를 일으켜 세워주겠는가 하는 생각에 한 많은 세상과 작별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프고 쓰렸다. 차라리 죽어 영혼이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계신 곳을 찾아가 만나고 싶었다. 나 역시 힘들지마는 편안히 저주스러운 세상을 하직하고 싶었다.
우리 감방에 장학범이라는 조국반역범이 있었다. 그는 중국을 다니며 밀수도 하고 인신매매도 하고 한국 사람을 만나 국가 비밀을 날라 준 죄로 온성군 안전부에서 제일 큰 범죄를 저지른 죄수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잘먹고 잘살고 사람답게 살았으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단 한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나도 짧은 24년이라는 인생이 너무나도 아까운 심정이다라고 했다. 사실 조선에서는 저주스럽게 생각되는 범죄지만 사회현실과 인간적으로 볼 때 결국은 자유를 원했고 인생에 대한 애착도 강렬했다. 맨 처음 시작한 것은 단지 배고픔으로 인해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과 중국의 사회적 배경을 느꼈기에 그는 이런 길을 택했을 것이다. 다시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다시는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으려고 돈을 많이 벌어 놓고 손을 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목표에 도달하기도 전에 잡힌 24세의 애총각이었던 것이다. 감옥이라는 저주스러운 곳에 잡혀 자신의 멸망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24세라는 나이는 감옥에서 처음이지 마지막 후회였다. 그의 슬픔을 함께 느껴 보노라면 그 역시 살고 싶은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뚝감(사형수의 뒤에 대는 십승십각자에 오를 사람을 말한다. )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너는 죽지 않는다 하여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태연히 고집부렸다. 그의 마음 속에는 살고 싶은데 24년이라는 짧은 세월이 아까운 심정에 충분하였을 뿐 아니라 미련도 있었다. 제발 보위부에 넘겨져 총살당하지 말고 영영 나오지는 못하지만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정치범 교화소에라도 가고 싶은 심정 이것은 분명히 생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그해 초겨울 면식을 배부르게 먹고 와서 한다는 말이 이 저주스러운 세상 이렇게 배부르고 잠이 소르르 오고 기분 좋을 때 사형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한 지 몇일 안지나 그와 그의 동범 명금이는 청진시에 나가서 총살을 당했다. 생각대로 말뚝에 서고야 말았던 것이다.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제일 강렬한 것은 살고 싶은 미련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지막 미련이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얼마나 살고 싶으랴. 만나보고 싶은 부모 형제와 가보고 싶은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으랴. 그들을 두둔한다 하기보다도 나는 그들의 심정을 느껴 하고 싶은 말이었다. 사람이란 과연 고귀한 존재이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이처럼 고귀한 생을 주셨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생각하다 잠이 들면 꿈 속에서 그들의 눈물을 보곤한다. 무서운 악몽이 찾아오곤 했다.

나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데다 폐렴이 겹치다 보니 방 안에서도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쇠약해졌다. 네 발걸음으로 화장실에 들어갔고 식사시간에도 나의 밥을 옆에서 덮쳐가도 그를 때릴 힘도 욕할 힘마저도 없이 그릇에 붙어 있는 밥그릇을 긁곤 했다. 그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생에 대한 미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남들처럼 생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더 강렬하게 강하게 살아나고 싶었다.

우리 감방에는 폐결핵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밥을 반도 못되게 국에 말아 먹곤 했다. 약이란 꿈도 못 꾸는 지옥이라 결핵이 옮던 말던 예심과에는 상관이 없었다. 오직 함께 있는 지옥 친구들에게만 자그마하게 통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를 위로하기도 하고 그가 주는 밥을 먹기도 했다. 죽어가는 이의 밥은 차마 량심에 꺼려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먹지 않으면 그 밥은 다른 감방에 넘어가고 그러면 아무런 내게 도움도 없는 것이었기에 먹었다. 그에게 나의 옷도 덮어 주고 그를 강제로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죽지 말라고 경고도 추억될만한 미련도 이야기 해주었지만 그는 그 해 가을 한 많은 감옥에서 죽었다. 그것도 나의 등에 기댄채…

나에게는 생에 대한 강렬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살아 나가야 한다는 마음 그것은 생애 대한 애착이었다. 너무나도 17살 나이에 죽는다는 것이 억울했다. 나 역시 죽으면 그들처럼 처참하게 시체가 되어 죽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살아 온 시간보다 살아가야 할 일이 더 많은데 비법월경죄로 내가 죽으면 영혼도 저승에 가서 부모 앞에 떳떳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부모님들이 다 살지 못한 한 많은 나머지 생이라도 끝까지 살고 싶었다. 이대로 한 많고 저주스러운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날 일어서게 했다. 나는 형을 항상 그리며 내가 살아 나가면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