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소중한 남한에서의 5년의 시간

 

소중한 남한에서의 5년의 시간

 

 

                                변난이 |1980년생

입국: 2005년 5월 21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식량난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북한을 떠난 지도 근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에서 5년 동안 중국 공안(경찰)에 쫓기면서 힘들고 불안한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받아 제 3국을 거쳐 2002년 5월 25일 남한에 입국하게 되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자 무사히 한국에 도착했다는 안도의 기쁨과 낯선 곳에서 정착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두려움으로 많이 혼란스러웠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친구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하나원이라는 정착기관에서 2개월 동안 남한정착교육을 받고 2002년 8월 6일 하나원을 퇴소하여 남한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교육을 받으면서 불안한 마음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으며,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남한사회에서의 첫 생활이 시작 되었다.

 

언어의 장벽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남한에서 생활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았다. 여러 어려움들이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언어에서의 문제가 가장 컸다. 같은 조선말은 하지만 남한은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여 잘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억양 때문에 이 사람들이 나를 북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끼워주지 않을까봐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더욱 닫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애견미용가계에서 처음으로 일할 때였다. 애견미용에 사용하는 용어들은 외래어가 많아서 일을 하면서 알아듣지 못해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말하는 것을 상대방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알고 보면 같은 뜻인데 사용하는 용어가 달라 서로 이해를 못했던 것이다. 어쩌다 누구와 대화를 하면 내 억양에 ‘중국에서 왔어요?’라는 질문이 나를 더욱 허탈하게 만들었다. 하루는 손님이 와서 무언가를 물었는데 내가 ‘일없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손님은 얼굴을 붉히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없습니다’란 말이 ‘볼일이 없다’라는 뜻으로 남한에서 별로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그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중국에 쓰던 게 버릇이 되어 불쑥 튀어나왔다. 그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인데.... 언어의 장벽은 넘을 수 없을 만큼 높아보였고 나는 점점 말하기가 싫어졌다. 손님이 와도 ‘안녕하세요’라는 말만 했고 어느새 나는 매우 과묵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원에 있을 때, 들었던 바에 의하면 남한사람들도 대학원까지 나와도 취직하기 어렵다는데 내가 이제 공부를 시작해서 취직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더욱이 북한에서 고등학교 졸업 후에 오랜 시간 중국에 숨어사느라 공부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냈다. 5년이라는 학업의 공백을 깨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대학교 4년이 시간낭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시간동안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했고, 하나원 퇴소 후 유망직종인 애견미용사가 되기 위하여 한국애견미용학원을 1년 다녔고 애견미용사 2급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자격증을 받으면서 ‘나도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꼈고, 어떤 일에서도 두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애견미용사 2급자격증을 손에 쥐고 기쁨과 뿌듯함에 흠뻑 젖어있던 그 시기에 나를 남한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새터민 한명을 키워보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그 전화를 받자마자 그 곳에서 일을 배워보기로 결정했으며 남한에서의 첫 직장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면서 너무 뿌듯하고 좋았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한계를 느끼게 되었으며, 그때가 내가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전화점이다.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정한 상황에서 학교를 알아보고, 학과를 정하는데도 조금 어려움이 있었다. 대부분 새터민들은 명문대학에, 학과도 경제관련 학과를 선택하는 비율이 높다. 또한 많은 새터민들이 대학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이런 점들을 보면서 나는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데 신중을 기해야 했다.

 

  학과 선택에 앞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 지부터 생각해 보았다. 중국에 있을 때 나를 돌봐준 조선족 할머니가 양로원을 하셨다. 그곳에 있는 동안, 할머니와 독거노인들을 도우며 지냈는데, 일이 전혀 힘들지도 않았고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당시 내가 했던 일이 단순히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회복지인 줄 한국에 와서 알았고 또 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할 수 있다는 걸 알자 그게 바로 내가 할 공부라고 생각했다.

 

후회 없는 선택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며 공부를 해야 했기에 고될 거라 예상은 했지만, 대학생활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 가장 힘들었다. 교재비는 물론이고 교통비, 식비도 부담이 되었고 가끔씩 대학 동기들과 어울리는 데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한창 꾸미고 싶은 20대에 예쁜 옷이나 액세서리를 봐도 내 처지를 생각하며 유혹을 뿌리치고 지나쳐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정부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는 했지만 턱없이 부족해 주중에는 직장체험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야간에는 학교 공부를 하면서 살아야했다.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도 부족해서 교통비나 식비를 줄여야 할 때도 많았다. 2시간 남짓한 통학거리에 저녁 10시 30분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12시가 넘을 때가 많았고 일에 학교에 시간이 너무 빠듯하여 학과 공부까지 하느라 밤을 지새운 적도 부지기수였다.

 

학교를 다니면서 제일 어려웠던 과목은 영어였다. 처음 입학했을 때 ABC도 모르고 들어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고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게 다반사였고 시험이 있으면 영어 스펠링부터 외우는 게 더 급했었다. 그래도 2년이 지나면서 수월해 졌고 지금은 자신감도 붙었다. 이렇게 힘든 일도 많았지만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한다는 것과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친구들을 만나서 너무 좋았다. 입학해서 처음 OT를 갔을 때 지금의 친구들과 알게 되었다.

 

  나는 원래 성격상 누구와 쉽게 친해지지 못하고 나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는다. OT에서 서로 소개를 하다가 내 억양이 조금 다른 것을 알고는 ‘강원도에서 왔냐’고 물어보기에 그냥 그렇다고만 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너무 미안했지만, 친해지고 나서 말해야지란 생각에 그냥 덮어두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행동과 사회 환경’이라는 과수업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을 몇 개의 팀으로 나누어 둥그렇게 앉힌 후 이제까지 살면서 제일 기뻤을 때와 슬펐던 때를 학우들과 얘기해 보라고 했다. 내가 제일 기뻤을 때와 슬펐을 때를 얘기하면 북한에서의 얘기도 해야 하는 데 그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고 그 동안 친구들을 속인 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따돌림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수업이 끝나자마자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며 오히려 더 잘해줬다.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지 못한 게 너무 미안했다.

 

  대학생활 2년 동안은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지낸 것 같다. 주변 친구들과 나도 할 수 있다는 뿌듯함과 성취감에 모든 것이 마냥 재미있었다. 3학년에 들어서면서 뜻하지 않았던 오빠의 죽음으로 몸과 마음이 점점 힘들어갔다. 너무 힘에 부칠 때마다 휴학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지금 휴학하면 복학을 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기 때문에 선뜻 휴학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때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휴학을 면할 수 있었다. 엊그제 학교에 입학한 것 같은데 벌써 졸업이라니... 나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지만 4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내내 느낀 것은 학과를 잘 선택했다는 것이다. 4년이란 시간이 짧다면 짧은 시간일지도 모르겠지만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 나에겐 긴 시간이었다. 긴 4년 동안 내가 원하지 않는 공부를 했으면 내가 어떻게 됐을까를 지금도 가끔은 생각해 본다.

 

  앞으로 진로 선택에 고민하는 후배들이 있으면 너무 명문대나 유명학과에 매달리지 말라고 조언해주고 싶다. 물론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도 좋지만 학교는 들어가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공부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과정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원하지 않는 공부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정규과정을 따라가기 힘들어 결국 휴학하고 복학하기 힘들어 졸업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돈도 시급한건 사실이지만 조금 더 고생하더라도 전공을 고려하여 관련분야에서 일을 해보는 것이 경력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선택에 있어 신중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대학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또한 여느 졸업반 학생들처럼 취직문제는 큰 고민거리이다. 주변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채용에 있어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고 회사에서 남한사람들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대학생활도 열심히 했고 완전한 사회인으로 내 재능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취직하고자 직장을 구할 때, 채용과정에 있어 내가 북한에서 왔다고 차별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또한 이런 두려움들 때문에 면접이나 시험에 있어 나의 재량을 발휘 못할까봐 걱정도 앞선다.

 

불행의 연속

  청소년기인 17살에 고향을 떠나 부모님들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나는 항상 불만이 많았고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 곁을 떠나 타향에서 혼자 일어서야 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두려웠다. 아무리 옆에서 좋은 분들이 많은 도움을 줘도 부모님에 비할 수는 없었다. 북에 계신 부모님이 너무나 그리웠고 중국에 살면서 우연히 아는 아주머니를 통해 들은 맏오빠의 공개처형 소식과 둘째오빠의 사고소식에 슬프고 화가 났다. 힘들게 한국에 와서 짧은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둘째오빠 생각을 하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둘째오빠는 일과 집을 전부로 알며 정말 열심히 살았다. 오랫동안 주유소에서 일했는데 어느 날 노가다를 한다고 서울로 올라왔다. 건설 현장에서 일한지 열흘 만에 사고가 났다. 퇴근하려고 안전벨트를 풀고 내려오던 중, 지상 6층에서 지하로 떨어진 것이다. 안전망이 있었긴 했지만 낡아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현재 오빠의 사고배상문제로 재판이 진행 중에 있으나 변호사에 의하면 보상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고 한다. 이유는 호적에 따라 보상 대상자는 부모님이 일순위이고 그 다음이 둘째 올케인데 부모님과 올케 모두 북한에 있고 북한거주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통일부에 잔류자 확인서를 요청했으나 공문 처리하라는 무성의한 답변만 들었고 남한거주 중인 가족들의 명단만 받을 수 있었다. 다시 찾아가 부모님과 올케가 북한에 거주하고 있다는 증명서가 필요하다고 했으나 부모님과 올케가 중국에 있는지 다른 이름으로 한국에 입국했는지 알 방도가 없어 북한거주증명서(잔류자 확인서)를 줄 수가 없다고 했다. 탈북자에 대한 법이 만들어져 나가는 과정에 있고 우리가족과 같은 경우가 처음이여서 힘들 수도 있다고 이해는 가지만 탈북자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어야 할 통일부가 우리가족과 같은 사례가 앞으로 더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성의한 태도만 보여주는 것 같아 서운했다.

 

  이런 계속되는 시련에 항상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옆에서 힘이 되어주었던 고마운 분들 덕분에 잘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것 같다.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남한에 입국할 수 있었고, 또한 자유롭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이제야 느낀다. 고마운 분들이 옆에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나한테는 큰 힘이 되고 이젠 행복감과 희망으로 나한테 닥쳐오는 어떤 불행도 헤쳐나 갈수 있을 것이다. 시련을 극복한 지금은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고 나 자신이 더욱 성숙된 것 같다.

 

  나에게 긍정적인 사고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 많은 이웃이 있었기에 내가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나의 꿈은 사회복지사가 되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내년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사회복지사가 되어 관심을 갖고 있는 노인복지분야에서 일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받고만 살았던 나의 삶을 이제는 받은 것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나누면서 이웃하고 같이 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