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북한으로부터의 탈출

[증언]

 

북한으로부터의 탈출

강 춘 혁
1986년생, 1998년 탈북
2001년 한국 입국

1. 탈북

1998년 3월 초순,

두만강을 넘어...

잠결에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다. 눈을 떠보니 밤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외출복을 입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자~!!!” 낮은 떨리는 목소리였다. 새벽잠에서 깨어난 나지만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역력하였다. 밖에서는 추운 바람소리가 거세게 불고 있는데 지금 어디로 가는지 하는 의구심이 많았지만 바라보는 긴장된 얼굴마다 나의 물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시는 외할머니의 모습과 돌 생일을 갓 지난 사촌동생을 껴안고 흐느끼는 큰 이모의 얼굴은 나의 시선을 한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게 하였다. ‘잘 가라’, ‘잘 있으라.’ 말 한마디가 눈물로 되어 더 이상 말을 하면 누군가는 쓰러질 것 같았고 가슴을 쥐여 뜯으며 입을 막고 눈물을 흘리시는 외할머님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다시 볼 수 없는 길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그 마음속엔 아마도 피눈물이 흐르고 있으리라. 밖을 나서니 얼굴을 때리는 먼지바람을 따라 우리 가족 외 작은 이모는 어둠을 헤치며 새 세상을 찾아 떠났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숲속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종종 걸음을.

얼마나 지났는지 날이 밝기 시작했다. 멀리 두만강이 보이고 벌써 길에는 인적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더욱 긴장했고 이 모습을 보며 숨이 턱에 닿아도 나로서는 투정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두만강 옆을 지날 때였다. 언제 주변 상황을 탐문하시였는지 갑자기 아버지가 어머니와 나의 손을 잡으며 강변으로 뛰기 시작하시였다. 3월이라고 하지만 두만강은 좀처럼 봄이라는 느낌이 없는 얼음으로 뒤덮여있었다. 뒤돌아볼 사이도 없이 우리 일행은 무작정 두만강을 밟았다.

얼음위로 들어선지 불과 몇 초도 안 되어 뒤에서 휘슬소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가족은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앞만 바라보며 오직 강기슭으로 뛰고 또 뛰었다. ‘중국’강 기슭에 가까이 다가서며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몸이 얼음구덩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목이 막히며 앞이 캄캄하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보다 더 당황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빠져들며 나를 안고 기슭으로 헤쳐 나갔다. ‘중국’기슭에는 물이 깊지 않아 얼음이 녹아있는 곳이 많았다.

얼음물에 빠져 온몸이 젖었지만 언제 뒤에서 목덜미가 잡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라 할 것 없이 서로 얼어버린 몸을 이끌며 산으로 몸을 숨기기에 숨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한참을 달려 목에서 불이 타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족은 그제야 걸음을 멈추었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후 산으로 피한 우리들은 서로의 몸을 부비고 햇볕에 옷을 말리면서 어두운 밤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와 당시 26세의 작은 이모인 연녀이모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고 아버지는 붉게 상기된 모습 속에 그 무언가 생각에 잠겨 계셨다. 태어나서 가족과 함께한 나의 첫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때 내 나이 12살이었다.

2. 얼음세상

말이 12살이었지 중국 애들에 비하면 키도 너무나 작고 또 못 먹어 허약한 몸 상태였다. 친척도 없고 아는 연고도 없는, 말 그대로 살얼음 위에서의 행군이었다. 고생을 해서 건너온 중국 땅은 건물도 높고 번쩍거리고 길거리 사람들 모두 잘 입고 키 또한 크고 정말 북한에서 늘 말하던 잘 먹고 잘사는 세상이 이런 곳이었구나! 하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고 북한에서 상상하던 미래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그런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모르고 아이들의 나이도 어리기에 같이 어울리는 것조차 꺼렸었지만 점차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나아졌고 낯선 중국 땅에서의 생활도 점차적으로 익숙해져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잠시 우리 가족은 연변에 가서 자기가 좋은 일자리를 알선 해 주겠다고 하면서 여기서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편하게 돈 더 많이 벌게 해준다고 하자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야했고 난 학교를 그만두고 살던 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 사람이 우리를 이용하려고 데려온 것인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연변에 와서 우리는 근 한 달 동안 아무 일자리도 찾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보내게 되었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지나서 이 사람은 우리를 보고 인터뷰를 하라고 하였다. 한국에서 온 기자인데 인터뷰를 하면 돈을 받을 수 있고 우리에게 유리한 일도 생길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때 인터뷰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딱 잡아떼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북한에서 들은 한국 사람들은 북한사람들을 잡아가고 피를 뽑아 죽이고 이득이 안 되면 죽인다는 등 여러 가지 헛소문들을 들었었고 그런 소문을 들은 그런 우리 앞에 한국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자 그 기자 분들은 그냥 말만 몇 가지 듣고 싶어 하니 몇 가지 질문에만 말해달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카메라는 절대로 우리 얼굴을 찍지 말라고 하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였다. 우리 얼굴이 담긴 이 비디오가 한국이나 다른 나라에 나오게 된다면 북한에 계시는 모든 친척 분들에게 해가 될까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인터뷰가 끝나고 또 그 사람의 소개로 연변대학에 계시는 대학교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 한국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을 듣고 한국은 중국보다 더 발전하고 더 잘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변에서 일자리 찾기란 쉽지 않았고 돈도 없었기에 인터뷰를 하면 한국 분들이 인터뷰 값을 조금씩 주었고 그것으로 목숨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나는 북한 내용을 담은 만화를 심심삼아 그리게 되었고 그게 시간이 지나고 지나 몇 권으로 이야기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연변에서의 생활도 잠시 연변으로 데려온 그 사람은 우리가 도움이 안 되고 짐만 되자 우리 작은 이모에게 시집을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그때 작은 이모는 결혼도 못해본 처녀였기에 나이도 있고 해서 차라리 우리랑 같이 고생하는 것보다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도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에 홀딱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이 사람은 우리를 생각해준 것이 아니라 작은 이모를 팔아 돈을 벌려고 한 생각이었다. 그 후로 작은 이모의 소식은 지금까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우리 또한 좋은 일자리가 흑룡강 성에 있다고 소개시켜주고 흑룡강성 시골 농장 같은 곳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조건은 먹여만 주고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미리 그런 음모를 알았으면 좋으련만 팔려나고 그 후에도 하소연할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를 할 수가 없는 우리 가족의 슬픔은 시작과 반복의 연속 이였고 그냥 그놈에게 속은 게 원통하고 분할 뿐이었다.

그렇게 반년을 산골에서 보내다가 우리가 팔려온 농장 주인이 우리를 데리고 또 어디론가 떠난다고 하였다. 흑룡강 성의 금광이란 시골로 옮겨졌는데 그곳은 금을 캐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금 캐는 일을 하면서 월급은 중국 사람의 4분의1정도 받으면서 머슴이 되어 소처럼 일을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어머니는 살림이 어려워도 나는 나이가 아직 어리고하니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라고 하였고 사장에게 간청을 하여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학교생활이 좋을 리가 없었고, 학교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게 되고 중국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왔단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가서 수업마치고 항상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항상 시비 거는 애들이 있었고 매일 싸움만 하고 선생님에게 불려가고 잘못한 게 없어도 나만 탓하는 선생님들도 미웠고 이렇게 사람답지 못하게 사는 내 자신도 싫었다.

우리는 매일 그 조선족 놈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마음 좁혀 지내면서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이놈이 술을 먹고 아버지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참고 있던 아버지가 그놈과 싸운 것이다. 하지만 난폭한 깡패인 그놈과 그 밑에 놈들에게 아버지는 무참히 밟혔고 칼에 여섯 곳이나 찔리고 피를 토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아무 도움도 바라지 못하였다. 아버지는 온몸이 멍들고 쓰러지셨고 결국 폐결핵까지 걸려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였다. 병들어 쓰러지신 아버지는 아무 힘도 쓸 수 없었고, 어머니 또한 어떻게 해야 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때 너무 어린 나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이 그냥 그런 광경들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눈물만 소리 없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 후 아버지가 회복되시고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또 도망가야 한다고 마음먹고 홀몸으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새벽에 문턱을 나섰다. 정말 집 잃은 개와 같이 떠돌이 방랑자와 같은 이런 삶을 살 바엔 북한에서 굶어 죽는 게 백번 낫다고 생각했다. 그대 나의 사촌형님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으로 들어온 사촌형님이 연변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알고 우리는 그곳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연변으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저녁에 타서 다음날 새벽 4시쯤에야 사촌형이 살고 잇는 곳에 도착하게 되었다. 거기서 형님을 만나 몇 년 동안 못한 말, 북한에 계시는 할아버지, 할머니, 친척 분들의 소식도 들으면서 그동안 고생한 이야기들을 했다. 우리는 이제는 연변에서 형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더 이상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살아나갔다.

땔감이 없어 탄굴(탄광)에 들어가 (인민학교 4학년 때)

형은 북한에서 왔지만 왕청의 ‘림업국’이라는 목재공사에서 사장이 인정해주는 일꾼이었다. 원래 북한에서부터 부지런한 형이라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도 형과 같이 목재공사에서 일을 하면서 그동안의 고생을 다 잊고, 아니 잊으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잘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연변에서 그리던 만화를 계속 그리던 상태이고 또 중국에서의 생활모습을 사실대로 그림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국 분을 한분 만났는데 그 분이 내가 그린 만화집을 달라고 하였다. 자기에게 주면 자기가 한국에 가서 이 만화집을 보이고 우리를 남한으로 데려갈 수 있게 힘써주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때는 이미 한국이 어떤 나라이고 얼마나 부유한 나라인지를 알고 있었고 또 같은 나라 말을 할 수 있고 같은 나라 사람들이라 정말 한국에 가서 열심히 살면 새롭게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중국처럼 북한사람을 천대하며 인간취급 하지 않듯 대하지 않을 것이고 또 지금 중국에서의 이러한 삶보다는 백배 아니 천배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을 몇 십번 몇 백번이고 해왔다.  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고 매일 밤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라디오 앞에서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매일 밤 부푼 꿈에 있었다. 그리하여 아버지는 그 한국분의 조건에 응하였고 내 만화집을 그 분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그 사람의 소식은 오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냥 이 일은 접어두고 나는 나의 일과에 열심히 하였다.

내가 연변에 있을 때 한류열풍은 대단했다. H.O.T, 핑클, 잭스키스, 유승준 등 유명가수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나는 그런 연예인들의 사진들을 그려서 연변의 문화궁(극장)밑에 있는 한 도서관에 그림을 팔아 달라고 하였고 그림이 팔린 금액에서의 몇 %는 내가 가지고 몇 %는 서점 사장이 가지는 그런 조건으로 그림들을 매일같이 그려서 넘기곤 하였다. 또 연예인들 사진이라면 환장하는 중국 애들이라 그림 또한 잘 팔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이 취미였다. 눈만 뜨면 연필부터 손에 쥐게 되고 또 싫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그냥 취미 일뿐 내 꿈을 어떻게 펼쳐 나갈 길은 없다. 나도 지금 남들과 같이 북한에 있었다면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가야 할 것이고 갔다 와서는 내 고향땅 탄광에서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던 모습대로 석탄을 캐면서 땅굴 속에서 살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나에게 중국 땅에서 비록 불법체류로 남의 나라 땅에서 살지만 종이 많고 연필 많은 이 나라에선 나의 꿈을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3.북송의 벼랑에서

하지만 중국 땅은 불법체류자인 우리를 그냥 가만두지 않았다. 다른 날과 같이 아버지, 어머니, 형, 나 이렇게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어서 얼마 지나지 않은 새벽,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불도 켜지 못한 채 문 앞에 다가서서 밖을 살폈다. 순간, 가슴이 놀라서 터지는 것 같았다! 중국공안들이 문 앞에 손전등을 가지고 몇몇이 문 앞에서 서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쩔 바를 모르고 침착하게 생각하다가 뒤 창문으로 빠져 도망가자고 소근 거리고 재빠르고 조용하게 뒤 창문으로 나왔다. 사촌형이 창문으로 빠져나와 옆집 지붕에 올라갔고 나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중국공안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우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중국 공안들에게) “우리는 잡아가더라도 아들은 보내주세요.”

형은 나에게 빨리 올라오라고 손을 내밀었고 나는 손을 잡고 올라가려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는 중국 공안에게 잡히고 말았다. 나는 그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잡힌걸 보고 차마 혼자 도망 갈수가 없어 형보고 먼저 가라고하고 나 또한 스스로 잡히고 말았다. 도망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잡힌걸 보고 차마 혼자 도망 갈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나는 공안에게 잡혀서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기서 각각 다른 방에 가두어 놓고 나에게 고문을 하는 것이었다. 양손을 뒤로 비틀면서 중국에서 도둑질을 몇 번 했으며 나쁜 짓은 몇 번 했냐고 다짜고짜 윽박지르며 구타를 하였다. 하지만 난 도둑질 나쁜 짓 같은 것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말하자 솔직히 실토하라고 하면서 다시 구타를 하였다.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였다. 이제는 사람취급 안하는 것 마저 모자라서 죄를 덮어씌우려는 중국공안의 악랄한 모습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었다. 다음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경찰서에서 어느 한 감옥으로 옮겨졌다. 어머니와 나는 한방에 있었고, 아버지는 후에 알았지만 아래층에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어떻게 못 내보낼까하고 주변을 살피시고 못을 가지고 벽도 긁어보고 닥치는 아무 방법이나 다 써 보셨다. 그러면서 왜 그때 도망가지 않았냐고 하면서, “우리는 북송되어 죽어도 되지만 넌 어린것이 갔다가 어떻게 다시 살아오랴”하면서 울먹이시면서 걱정하셨다. 그렇게 며칠 감옥에서 지낼 때 집에서 탈출한 사촌형이 마을에 아는 중국 몇 분에게 도움을 청하여 중국 돈(인민비)6000원 정도의 거액을 만들어 중국 공안에게 잡힌 우리를 살려내었다. 정말 중국 땅도 우리 “탈북자”들을 발을 붙이고 살수 없게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사정없이 짓밟는 지구의 또 하나의 “감옥”이었다.

4. 또 다른 도전

기적적으로 살아난 우리가족에게는 더 이상 이 땅에서의 삶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 얼굴을 보여서도 안 되고 또 공안에게 잡힐 우려가 많아 마지막 생각 끝에 사촌형은 한국 땅으로 가자고 하였다. 하지만, 한국으로 갈수 있는 선이 있었는데, 필요한 돈 액수가 어마어마하였다. 중국 분들에게서 우리를 빼내오느라 빌린 돈이 6000원이나 되었고 그 돈을 갚을 길도 막막한데, 이제 어디서 또 돈을 구해서 간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우리와 가깝게 지내시던 한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진짜 풍이 오신 할아버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우려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다.

우리는 꼭 한국에 도착하면 갚는다고 하고, 사촌형과 나 그리고 안내하는 사람 등 3명이 길을 나섰다. 우리가족 모두 같이 가려고 해도 돈이 부족한 상태였고 또 형과 나는 가다가 잡혀도 ‘어차피 여기서 잡혀 죽으나 가다가 잡혀 죽으나 마찬가지다!’라고 비장한 각오 속에 우리는 한국에 도착하면 꼭 아버지와 어머니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났다.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어떠하리라는 보장도 없는 또 다시 헤어지는 순간들이었다.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와서 길을 소개 해주는 분을 만났는데 돈을 또 사기 당하였다. 비정한 이 세상은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았고 우리는 눈물조차도 메말라 붙어버렸고 마음속에는 회색 재밖에 남지 않았다. 도중에 돌아 갈수도 없고 하여 형과 나는 지도만 있으면 가지 않겠냐 하고 우리는 가야만 산다고 생각하면서 세계지도를 한 장 사들고 무작정 남쪽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우리는 최대한 중국 사람처럼 보이려고 말도 별로 안하고, 기차 안에서 신분증 검사를 하는 공안들의 눈을 피하면서 말 그대로 심장이 머리 우에서 ‘쿵쿵’ 하는 소리에 자기 스스로 놀랄 정도로 그렇게 흘러갔다. 지도를 펴고 보아야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하고 물으면서 갈 수도 없었다. 눈물의 자국을 남기면서 떠난 길에 시간은 금이었고 우리의 앞길은 아무도 몰랐다.

열차좌석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승강대에 기대여 지나가는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정말 갈수가 있을까,’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 길일까?’ 하며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흘러가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온종일 달려도 끝이 어디인지 알 수조차도 없었다. 이때 승강대에 담배를 피우려고 나오던 한분이 우리를 보고 연변 사람으로 알고 사촌형에게 말을 시키는 것이었다.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조선말을 처음 들어 너무 반가웠다. 사촌형은 두렵기도 하였겠지만 경계심을 갖고 한두 마디 시작하면서 정말 우리 앞길에 빛이라고 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사촌형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를 동남아시아에서 밀수를 하는 일행으로 알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 우리가 국경을 무사히 넘어 갈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미궁에 빠진 우리에게는 그나마 길이 아닌 길이 생겼고 하루빨리 중국 국경을 넘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정을 하였다. 사촌형의 얼굴에는 이미 결심이 굳혀있는 듯 했고 나도 힘이 생겼다. 하여 그 분이 이야기 한 대로 어느 한 역에서 내려 국경과 가까운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상하게도 남쪽 지방에서는 우리 일행을 별로 개의치 않게 대했고 연변보다는 조금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날이 어두워 여관에 들었을 때였다. 잠자리에 누웠으나 말이 여관이지 창고 같은 숙소의 분위기는 우리 마음을 더욱 초조하게 하였다. 우리는 이때에야 비로소 기차를 타고 오는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서로의 입에서도 배고프다는 말이 없었고 허기진 배의 굶주림의 감각조차도 무뎌져버렸다. 우리 마음은 이미 한국 땅에 가있었고 연변을 떠난 지도 한 달이 가까워 오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를 걱정할 것이고, 그 국경지역은 검문이 심한 곳인데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도 잠들지 못하고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국경을 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여하튼 아침이라고 먹고 난 우리일행은 열차에서 들었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어 길을 떠났다. 사촌형은 한번 다녀간 곳을 찾아가는 사람인 듯이 길을 잘도 찾아내었고, 내 마음도 조금씩 안정감을 찾기 시작하였다. 국경이라고 생각되는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처럼 비까지 오기 시작했고 우리의 차림은 말 그대로 거지의 행색이었다. 마을의 어느 한 집으로 사촌형과 나는 무작정 들어갔다. 그 집주인은 처음에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묻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에 물었던 말은 베트남 말이었고 두 번째 말은 광동말이라는 중국 남쪽말이라고 생각된다.) 몇 마디를 하더니 그제야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작정 돈을 줄 테니 국경을 넘어 갈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보더니 머리를 흔드는 것이었다. 비를 맞으며 나타난 우리의 행색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우리는 머릿속에 있는 중국말 단어를 모두 동원하여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시간이 좀 지나서야 이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길고 긴 여정 속에 우리는 지쳐 있었고 무조건 이곳에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상황에서 물러 설 수가 없었고 돌아갈 곳도 없었다. 집 주인은 고맙게도 우리에게 식사를 건네었고 옷을 말려 입게 도와주었다. 시간도 지나고 날이 어두워져 우리 일행의 일거일동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집주인이 늦게야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했고 우리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다. 산이라고 해야 할지 벼랑이라고 해야 할지 구분할 수 없는 가파른 곳으로 형과 나는 미끄러지면서도 밀고 당기면서 한걸음씩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만이 다니는 국경을 넘어 다니는 길인지 무척 험했고 비에 젖어 넘어지면서도 갈수 있는 길이 있어 행복했고 힘들지 않았다. 2시간 넘게 여러 개의 산을 넘어 도착한 곳이 바로 베트남 땅이었다. 목적지는 멀고멀었지만 그래도 중국 국경을 무사히 넘을 수가 있어서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버스를 타고 3박4일을 가슴을 졸이며 베트남 국경에 도착한 우리는 또다시 국경을 넘는 일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그래도 뭐가 통했는지 오토바이 기사를 만나 우리일행이 안내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모두 꺼내들고 말도 통하지 않는 협상을 시작하였다.

정말 모든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기뻐하기는 일렀다. 야밤삼경도 아니고 해가 지지도 않은 대낮에 국경을 넘으려고 하였으니 간도 어지간히 부어있었다. 2대의 오토바이에 나누어 타고 국경을 넘다가 결국 순찰중인 군인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돈은 먼저 주지 않았지만 도망칠 여력도 없었고 또 주위에는 국경인지라 총을 들고 있어 잘못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여권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아 두말없이 잡혀 호송될 위기였다. 그래도 갈 때까지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촌형과 나는 중국말과 영어를 써가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상황은 누가 봐도 해결책이 없는 캄캄한 암흑 상황이었다.

몇 시간을 두고 심문하고 또 심문하던 책임자인 듯한 군인이 우리에게 벌금을 내면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형님의 말이 먹히었는지 아니면 동정인지 우리에게 결정을 하라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벌금을 낼만한 돈도 없었고 주머니를 다 보이며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내놓았다. 형님은 이 돈으로 길을 가야하고 다 주면 먹을 여비도 없다고 호소하였다. 그래도 용서가 없었고, 이들은 돈을 받아 가지고 우리보고 나가라고 하였다. 국경에서 살아난 기적 같은 현실 앞에 감격의 눈물도 잠깐 낮에 보았을 때 국경은 들판으로 되어 있어 잘못하면 다시 한 번 잡힐지도 모르는 운명의 기로에 서있었다. 여하튼 국경까지 왔으니 무조건 앞으로만 가야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우리의 정성에 손을 내밀어 주었는지 우리는 무사히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에 들어서게 되었다. 논판에 빠지고 뒹굴고 벗겨지고 할퀴고 사람인지 짐승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형과 나는 기쁘기만 하였고 주머니에 돈 한 푼 없어도 살아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짐작으로 캄보디아라고 생각하고 정처없이 밤길을 가고 있을 때었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고함소리와 함께 사복차림인 건장한 남자 여럿이 앞을 막고 있었다. 이들은 손전등을 우리에게 비추면서 형과 나의 몸을 밀치면서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또다시 캄보디아 국경초소에 잡히고 말았다.

이들은 우리의 온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자 우리를 짚으로 되어있는 말사로 데려가 가두는 것이었다. 돈도 없어 벌금도 못하는 것이고 이젠 마지막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어둠속의 한 곳만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밥을 먹지 못하고, 돈이 한 푼도 없어도, 온몸이 벗겨지고 할퀴여도 괜찮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잡혀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중국에서도 북송되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잡혀 송환될 것을 생각하니 앞으로 당하며 살아가야 할 일들이 필름처럼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형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이 몇 시간 지났을 무렵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문이 열리자 어둠속에서는 한 사람이 서있었다. 손전등을 형의 여기저기를 비추던 그 사람은 형님에게 팔목의 시계를 달라고 하였다. 주고 안주고 경황도 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지금 시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포로’가 된 우리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어떻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사람은 우리에게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보이며 입을 손가락으로 막으며 뭐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으로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정말 송환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팔아넘기려는 것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형이 나에게 가자고 하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형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이곳을 뜨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보니 진펄과 수렁이 갈래를 이루어 낮에 우리끼리 간다고 해도 길을 찾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진펄사이를 지나 30분정도 걸어갔을 때 이 사람은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이었다. 통하지도 않는 말로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 사람이 휘슬소리를 내자 오토바이 한 대가 조명도 켜지 않은 채 우리 곁으로 오고 있었다. 이 사람은 오토바이 기사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우리보고 타라고 하고 금방 오던 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서있는 우리를 태우고 오토바이는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조명도 없이 달리는 오토바이는 진펄사이를 요리조리 잘도 달렸다. 마을에 들어서서도 한참을 달리다가 오토바이는 외따로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오토바이는 우리를 내려놓고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는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지금 경찰서도 아니고 감옥도 아닌 곳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는 왜 왔고 집주인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무도 없는 덩실한 집안에 조금 있다 보니 주인인가 하는 우람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우리에게 밥을 먹게 하고 구석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잠을 자라고 하였다. 정말 형과 나에게는 오늘 이 하루가 평생을 잊지 못할 행복한 추억이 될 것이다. 하루 이틀 지나도 집 주인은 말도 건네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또다시 초조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야 집주인이 우리를 차에 태우더니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달려 어느 한곳에서 우리를 다른 차에 인계하는 것이었다. 차안에는 선글라스를 쓴 나이 지숙한 사람이 우리를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뜻밖의 ‘평양’말과 비슷한 조선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두말없이 북한 보위부에 잡혔다고 생각했다.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는 북한 사람이다’라고 숨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우리의 심장을 갑자기 얼어붙어버렸다.

5. 새 생명

차가 멈추면서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를 이끌고 마당이 넓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집안의 분위기는 우리의 심장을 얼어버렸던 그런 예측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벽에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고 흐르는 음악은 태어나서 처음 듣는 듯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제야 우리를 차에 태우고 온 분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한국으로 가려고 온 ‘탈북자’들이 아니냐.” 하면서 우리가 있는 곳은 교회이고 자신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었다.

정말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고 그보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지금 수갑을 차고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한국 땅으로 갈수 있다는 눈물겨운 사실이었다. 연변을 떠난 지도 45일, 드디어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목적지까지 도착한 것이다. 우리보다 더 한 고생을 하면서 오신 분들도 만나 보았다. 피를 흘리시며 오신 분, 갓난아기에게 수면 약을 먹여 재워 국경을 넘어온 아기엄마, 물 한 모금 때문에 일곱 살 되는 소년을 사막에 묻고 떠나야만 했던 한 형님, 자신의 사랑하는 여자가 성폭행 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 힘없이 당하여야만 하는 현실이 바로 ‘탈북자’들의 겪었던 영화 같은 현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난생 처음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여기에서 처음으로 배운 노래가 있다.

          멀고 험한 이세상길 소망 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며 정처 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쉴 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 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주예수 찬양하네.

6. 새터민

지금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고 있다. 새로운 땅에 도전하고 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실수와 잘못을 하기도 하고 굶주린 새끼 늑대같이 넓은 벌판을 헤집고 다니며 마음껏 자유를 만끽해보기도 하였다. 겉모양새는 웃고 있지만 그 많은 세월 속에 쌓이고 쌓였던 아프고 아팠던 내 작은 멍든 사연 사연들로 가슴속은 크게 울부짖고 있었다. 자유 대한민국의 땅에서 뛰고 뒹굴고 하면서 진정 내가 가야할 길, 진정한 삶을 찾아보고 있다. 상당한 적응 시간도 필요했다. 자유롭고 풍요롭고 찬란하지만 한편은 허전하다. 무언가 빠진듯한 삶이고 생활이다.

나는 대한민국에 와서 우리 민족의 위대한 힘을 알게 되었다. 정말로 “탈북자”들만이 할 수 있는 삶의 도전이다. 지난날 시키는 일로만 인생을 살아온 우리 “탈북자”들이 버러지만도 못한 삶을 마치고 떠나간 조상들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이었겠는가? 세상 그 어느 부모도 자식만이라도 하며 바라며 산 세월이 그 얼마이랴. 진정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 사변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세기의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