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 – 9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9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11월 24일,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 감방 소장이 나를 불러 나오라고 하면서 네가 한국에 친구들이 있는가고 묻자 나는 가까운 친구라고는 없다고 대답하니 평시에 악마 같은 얼굴기색은 찾아볼 수가 없게 나에게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소장이 이끄는대로 간수소 면회실에 들어서자 면회을 오신 두 명의 남자와 한명의 젊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칸막이 창가로 다가 오면서 고생하였다는 듯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내가 인사를 하고 어떻게 찾아오셨는가고 물어보니 그들의 대답이 알아듣지 못할 몽고어 비슷한 중국어로 말하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내가 중국어를 모르니 통역을 바꾸라고 말하자 옆에 서 있던 젊은 여인에게 전화기를 넘겨주면서 무엇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젊은 여인은 챙챙한 서울 말씨로 두 분은 내몽고 변호사 협회 변호사이고 한분은 한족 변호사 츠치왠, 한분은 몽고족 우바터얼 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빨간 변호사증을 내가 잘 볼수 있도록 사진이 있는 부분을 펼쳐 보이면서 나를 도우려고 오셨다고 하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안국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겠다고 이야기 하였고, 기소문을 받을 때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 왔을까? 이들은 나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공안국이나 대사관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돈이 없으니 변호사비를 담당할 수가 없고 당신들의 성의가 감사하니 돌아가라고 말하자 그들은 당황해 하면서 한명은 급히 밖으로 나가면서 누구에게 급히 전화를 하고 있었다. 통역은 계속하여 서울에 서씨라는 친구와 정씨라는 친구가 있는가? 고 하면서 서울에 있는 나의 친구들이 변호사비를 대여 주었고 이분들이 나를 도우려 왔으니 나는 곧 한국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변호사 선임을 한다는 싸인을 하라고 독촉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변호사는 통역하시는 여성분의 뒤에 서서 무엇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서류봉투를 보여주는데 서류 봉투에는 한국 서울주소와 이경찬이라는 이름이 한자로 쓰여 있었다.

나는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하자 이번에는 변호사들이 변호사비를 이미 다 받았고 내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으면 자기네는 나의 재판에 참석은 할 수가 있지만 변호는 하여쭐 수가 없으니 빨리 사인을 하란다.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의 돈을 받고 욕먹을 일 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내가 매일 기도만 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말하자 통역하는 분이 "이분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일수 있잖아요?" 하면서 무엇인가 서두르는 기색이다. 변호사들은 소장을 시켜 서류를 나에게 보내 주면서 빨리 싸인을 하란다. 소장도 별 생각 없이 싸인을 해야 될 부분을 가리키면서 인즙을 내어주는데 무엇이 좋은지 안색이 밝아진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려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통역을 하시는 분은 내가 감방 생활을 잘한다고 변호사들이 평가를 하여 줄 것이고 무조건 잘못하였다고 말하면 금방 한국에 갈수 있다고 변호사의 이야기를 통역하여 주었다. 그들은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것처럼 삼일 후에 재판을 하는데 무조건 잘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며 재판에 성실히 임하면 당신은 빨리 한국에 갈수 있다고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인가 시작된 것 같으니 이왕에 잘 도와달라고 부탁의 인사를 드리고 그들의 가는 뒤모습을 바라보니 그들도 가벼운 걸음으로 가는 것 같았다.

감방으로 돌아오면서도 나의 생각은 정말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만 줄곧 떠오른다. 일인당 변호사비도 중국인 평균보다 5배나 비싼 변호사비를 누군가 지불 하였단다.  나의 친구라는 서씨는 누구이고 정씨는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을 하여 보아도 알 수가 없엇다. 정말 하나님이 나를 가엽이 생각하여 천사들을 보내신 것일까? 나의 변호사들은 중국에서도 이름 있고 권위가 있는 변호사라고 통역이 나에게 소개를 하였다. 통역을 맡았던 그녀가 거짓으로 꾸며서 이야기 하는 것 같지를 않다. 이것은 정말 꿈이였다.

솔직히 나는 어려운 길을 외롭고 힘들게 걸어 왔었다. 어느 곳에 가서 속 시원히 토로할 곳도 없었고 가슴에 받은 상처들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모진 생활 속에서도 정말 기쁨의 순간은 탈북자 일행들이 무사히 몽고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는 전화 연락을 받는 순간뿐이다.

그 단순하고 짧은 삶의 순간마저 이 감방 안에서 다 빼앗기고 인생을 마친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정말 나의 감정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의 마음은 찢어져 나가는 것 같이 아프고 고단하여 하나님을 찾고 부르며 날마다 기도를 하면서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여 보려고 얼마나 애써 노력을 하였던가? 신앙심은 깊지 못하고 훈련 되지 않았지만 늘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한걸음, 한걸음 위험이 도사리는 곳으로 나 혼자만이 아닌 탈북자 일행들을 이끌고 다녔다. 나의 힘으로는 안 되기에, 너무나 힘들고 위험한 일 이여서 하나님이 우리 일행들을 보호하여주시고 인도하여 달라고 그리도 간절하게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던 그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내신 것이다.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않고 구원하여 주시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나의 입에서는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내가 받은 기소문 내용을 그대로 재판장에서 다룬다면 나는 확실하게 석방될 수가 있다. 수차례에 걸치는 변방대 조사와 검찰조사에서 내가 3국 탈출을 조직한 것만 수십 명에 이르는데 아무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기소문에 3명으로 기록 될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단순한 실무적 착오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 감방 안에서 하루하루를 손꼽아 세어보면서 지나온 날들이 120일이 넘고 일상의 생할에서 느낄 수가 없었던 그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는 계기였지만 그보다 더 간절히 바라고 있던 것은 조건 없는 석방이었다. 돌이켜보면 기쁨과 슬픔이 엇갈리고 위험과 피로에 지쳐 만신창이 된 몸을 힘들께 유지 하면서 4년여 세월을 이 광활한 중국 대륙을 일사 분란하게 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다.

내가 중국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으로 만나본 옥별이, 끝이 어데인지 알수 없는 멀고 먼 여행길에서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한족 아줌마들 뒤를 따라 다니면서 "아에, 아에" (이모,이모)하고 소리쳐 부르면서 웃을 때에는 그 얼굴이 그렇게 맑고 밝을 수가 없었다. 북경에서 만났던 향심이는 노래를 잘 한단다. 우리 일행이 북경 서역앞 광장에 빙 둘러 앉아 다과를 먹으면서도 나의 생각은 탈북자들이 낮선 북경 땅이라 위압감을 느낄 수 있다고 판단을 하고 그들 의 마음속 긴장을 풀도록 하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모두들 향심이가 노래를 잘한다고 하나 향심이에게 노래를 하여보라고 하자 향심은 얼굴이 발그스레하여 지더니 곧 북한 노래를 부른다. 어릴 때 학교를 다니면서 많이 부르고 좋아하던 노래였던 것 같다. 향심은 맑고 청량한 목소리로 한 곡조 부르더니 이번에는 다른 노래를 부르겠다고 자진하여 한 곡조 더 부른다. 모두가 고향을 그리는 노래이고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였다. 어린것의 마음에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차고 넘쳤던 것 같다.
나의 집 밝고 깨끗한 곳에는 한 장의 여자 어린이 사진이 놓여 있다.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은 송림이고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언니와 함께 중국에서 숨어서 사는 것을 데려왔었다. 15살이라고는 하지만 키는 작아도 여물어져 보인다. 내가 조선글을 씌여 보니 글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송림에게" 너는 공부도 안하고 뭐 했어"하고 말하니 어린것이 아버지가 일찍이 세상을 뜨고 어머니가 병으로 앓고 계셔서 언니와 함께 산에 가서 약초를 캐다 장마당에 가져다 팔아서 강냉이 사고 어머니 약 사느라 공부를 못하였단다. 귀염둥이 송림은 사랑의 집에서 탈북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재롱을 부리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송림은 생긴 것처럼 귀엽고 특히 노래를 잘하였다. "송림아 노래 해보라"하면 제절로 흥이 나는지 몸짓을 하여 가면서 노래를 한다. 송림은 노래를 하여도 조선에서 어린이들이 노래가사를 왜곡하여 부르는 동요만 부른다.

2006년8월에 북경의 모 피난처에 보낸 후로는 종 소식이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내가 데려 왔을걸? 하는 후회가 많고 송림에게 죄를 지은 것 같다. 2007년5월 어느 날, 몽고국경을 통과 하였지만 군인들이 불을 켜고 뒤에서 따라온단다. 선생님,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국경선은 넘었지만 중국군인들이 쫒아 가는 것일까? 그곳은 분명히 군인들이 없는 지대인데? 나는 급히 몽고쪽으로 2 Km를 더 들어가라고 하였다. 일단은 안전 하여야 하고 조금은 방향이 흐려졌지만 일행들이 능히 방향을 수정할 수가 있을 것이고 목표물인 경비대나 역전은 불빛이 환하여 목적지를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 하면서 온밤을 자지 못하고 몽고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려도 전화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다.

5월 팀은 탈북자 8명이 한 팀으로 구성되어있다, 일행 중에는 혁철이, 혜경이가 있으며 이들 오누이는 중국에서 어머니와 혜여진후 모 피난처에 있다가 나에게로 온 것이다. 혜경이 혁철이는 오누이라고는 하지만 얼핏 보면 쌍둥이 같아 보인다. 비가 오는 어두운 길거리에서 이들이 얼마나 어머니를 그리고 있을까? 나는 혜경이를 꼭 그러 안아주면서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몽고이고 그곳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하여 주었다.

혜경이는 국경지역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듯 한껏 긴장된 목소리로 예 하고 짧막하게 대답한다. 춘선아주마가 혜경이네를 데려왔지만 그녀도 힘든 상태인데 혜경이네를 잘 이끌고 넘어갈까? 이번에 일행들 속에는 수술을 끝마친 지 얼마 안 되는 중환자도 있고 부모 없는 어린이 두 명이나 되여 더욱 신경이 씌여지는데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없어 더욱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년 동안에 부모 없는 탈북 어린이 5명을 한국으로 입국 시키는데 성공을 하였다. 그 외에 네 명의 탈북 고아들은 내가 다 보호하기는 힘들어서 몇 달씩 피난처에 데려다 공부시킨 후에 다른 피난처들에 보냈으며 그렇게 다른 피난처에 간 일행들 중에 귀염둥이 송림이가 있었다.

나에게는 이런 일도 있었다. 2004년 5월경, 북한에서 통신 중대장을 하던 사람이 중국 공안의 총에 맞고 도문의 어느 병원에서 수술 치료를 받은 후 공안국에서 파견한 간호원이 총에 맞은 탈북자를 병간호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나는 탈북자가 있다는 집을 찾기 위하여 수소문 하여 알아보는 과정에 하마탕에서 숨어사는 탈북자를 통하여 총에 맞은 탈북자가 있다는 집 위치를 알아 낼 수가 있었다. 공안국에서 사람을 붙여 놓았으니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도리어 내가 상할 수가 있고, 나는 생각하던 끝에 띠필라이(망나니,깡패)들을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을 끌어들여서 부상자가 있는 집 골목길 네 곳을 차단시키고 택시를 이용하여 부상자를 빼여 돌리면 되는 것이다. 며칠 동안에 사람을 구하고 주택가를 에워싸게 치밀하게 준비하여 놓은 다음 부상자의 현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을 하여보니 하루 전에 북송되었다고 한다. 나로서는 일을 다그쳐 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부상당한 탈북자를 빼앗기였던 것이다. 통신중대장 출신 탈북자가 총에 맞게 된 것은 2004년 봄에 도문의 주택가에 있는 세집 뜨락에서 땔나무를 패고 있을 때 중국공안원들이 자기의 집 근처로 오고 있었다.

언제나 위기감속에서 살아가고 있던 탈북자는 경찰들이 자기를 잡으려 오는가? 고 생각을 하였고 마을 뒷산 쪽으로 죽기 내기로 도망을 치였다고 한다, 사실은 탈북자가 숨어살고 있던 세집 뒤에는 체포령이 내려진 범죄자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이 범죄자의 집을 찾아가고 있엇는데 갑자기 누군가 산으로 달아 나는것을 보고 범죄자로 착각을 하고 탈북자를 뒤쫒아 가며 서라고 경고를 하여도 계속 달아나니 3메터 거리에서 총을 쓴것이 탈북자의 다리를 관통을 하였던 것이다. 그 탈북자는 중국에서 전자제품 수리를 하면서 살았고 몇 달 후 북한에서 나오는 탈북자들을 통하여 부상당한 탈북자가 온성군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2006년4월경, 안도현 공안국 교통경찰대 차에 치여 두 다리가 부러진 탈북자 수남이가 안도현 병원에 입원하고 있으며 공안국에서 그에 대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데려 오기로 마음먹고 여러 방면으로 그를 현병원에서 간호원 몰래 뽑아낼 사람을 찾고 있었다. 며칠 뒤에 안도에서 일을 할만한 분을 찾을 수가 있었으며 그를 통하여 부상자를 빼내려고 시도 하였지만 수남의 두 다리는 완전히 부셔져 있었기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는 수시로 그의 건강상태를 확인하여 보면서 탈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만 좀처럼 기회는 만들어 지지 않았다. 내가 한국으로 나오려고 대련에 머무르고 있을 때 새벽에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수화기에서는 수남이를 성공적으로 빼여 돌려서 지금 사랑의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2004년도에 계획하였던 통신중대장 출신 탈북자를 빼여내는데 실패를 하였지만 이번에는 멋있게 성공을 하였단다. 우리는 수남이의 병을 고쳐주기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의 힘을 다 쏟아 부었다. 나는 수남에게 날마다 지팡이를 집고 걷는 연습을 하라고 하였고 수남의 병 상태는 하루가 모르게 달라져 가고 있었다.

그해 5월말 나는 김영금, 조순옥, 수남, 그밖에 어린이 두 명을 포함하여 위해에 있는 피난처로 보냈으며 수남은 사랑의 집과 예수님을 주제로 한 자작시 6편과 감사 편지를 보내여 왔었다. 수남에 대한 애정과 그의 병 치료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05년 8월9일 오후, 수남은 담당하신 선생님의 승인을 받지 않고 피난처를 나와 자유주의적으로 돌아다니다가 또다시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강제 북송되었다, 피난처 관리는 엄격한 규률과 질서를 세우고 잘 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수남과 조순옥은 체포되여 그 주변에 있는 피난처들을 경찰에 말함으로써 위해에 있는 3개의 피난처를 버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잠을 자며 쫓겨 다니게 되였고 연변에 있는 피난처들을 경찰에 말함으로서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하신 동역자들이 경찰에 체포되고 교회의 자동차등 엄청난 인적, 물적, 정신적 피해를 당하게 되었다. 연변의 피난처에 있는 탈북자들은 사고 소식을 접하고 빨리 손을 써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사역하신 분은 자신의 집에서 경찰에 부부가 함께 체포되게 되였던 것이다. 피난처는 감성적으로 운영하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연변 피난처는 탈북자들이 자기들이 들어갔던 곳을 잘 모르고 있었으며 외부와의 접촉과 통신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었다.

2006년5월경에 회령 출신 김영금이라는 아주마가 담낭염으로 고생 하는것이 위급한 상황이 된지라 사역하시던 분이 김영금을 병원에 입원시키기는 어렵고 하여 자신의 집에다 김영금을 데려다 치료를 하여 주었다, 이때 김영금은 치료를 받으면서 사역하시는 분의 교회와 성씨를 알게 되였고 피난체에 돌아와서는 탈북자들에게 사역하시는 분의 교회의 이름이 무엇이고 성씨는 무엇이라고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 수남과 조순옥은 영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진술서에 적어놓았었다.

피난처 안전만큼은 탈북자들의 운명과 직결되기에 어떤 경우에도 질서를 파괴하여서는 아니되며 사사로운 감정이나 동정은 수많은 생명들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것이다. 나는 급히 서둘러 인맥을 동원하여 3만원(인민페)의 돈을 주고 두 부부를 3일 만에 석방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주 공안국과 종교국의 검은자들이 계속하여 교회 문을 닫는다. 교회차를 압류한다고 극성을 부리면서 또다시 교회차를 압류를 한 것을 철이 어머니의 도움으로 줄을 대여 인민페 1만5000원을 먹이고 교회와 재산을 지켜 나갈 수가 있었다.

철이는 2006년 1월에 내가 입국시켰고, 철이 형은 2006년9월에 한국 입국시켰기에 철이 어머니는 나를 적극 적으로 도와주려고 하였다. 철이 어머니는 2007년 1월에 무사히 몽고로 넘겨 보내여 한집안에서 3차례 나뉘여 모두 입국에 성공하였다.

수남이와 조순옥의 사건으로 하여 산동성 공안국과 길림성 공안국에서는 중국 경내에서 발견된 최대규모의 피난처 사건으로 등록하고 피난처를 조직하고 운영을 XXX 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찾는다고 합동으로 수사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한번의 사건으로 나는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고 앞으로 계획하였던 많은 일들을 맡아 나가실 귀중한 분들을 여러 명 잃게 되였다. 나의 일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준 위해에서의 수남과 순옥의 행위는 용서할 수가 없는 범죄였고 탈북자 구출 활동을 계획하시는 분들께는 반드시 참고 하여야 할 귀중한 자료가 되길 바란다.

한국에 들어오면 한달에 한두 번 정도는 컴퓨터를 이용하고 있었으며 탈북자 관련 사이트를 통하여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현황과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사건사고들을 찾아서 나름대로 분석을 하여 보고 있었다.

2006년 9월경, 탈북자 동지회 자유게시판에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는 글에는 자기의 어려움을 토로 하면서 한국에 갈수 있도록 도움을 바라고 있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자기의 이메일 주소를 기록하여 놓은 것이 보였다. 필자의 이름은 영미이다. 나는 영미의 글을 읽어보면서 진실성 여부를 가늠하여 보니 아마 몹시 어려운 처지에서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것 같아 영미의 메일주소로 회신을 보내여 언제 탈북하였으며 현재는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고 어떻게 어려운가? 그리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나의 이메일을 통하여 빨리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영미는 나에게 전화번호를 적어 보냈으며 며칠 후 중국에 들어간 나는 그에게 전화로 며칠 안으로 만나보자고 말하였다. 우리가 만나기로 되여 있는 시간이 다 되여 연길에 들어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우산을 준비하지 못하였으므로 비를 맞으며 약속한 위치에 있는 영미를 찾고 있었다.

얼마 후에 우리는 비교적 순조롭게 만날 수가 있었고 영미는 키가 작고 당돌한 모습으로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다. 나는 영미와 함께 우산을 쓰고 조금 가다가는 멈추어 서서 영미가 걸어가는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엉덩이가 씰룩거리며 다리를 절룩거리고 있었다. 영미와 처음 전화통화를 하면서 왜 한국에 가려고 하는가? 건강은 어떠한가? 등을 물어보면서 그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이 아파트에서 떨어져서 골반이 깨여지고 그 후과로 걷기도 힘들고 몸이 아파서 일도 제대로 하기 힘들어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영미의 건강 상태를 말로만 들었기에 실제로 어느만큼 걸을 수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영미를 관찰하여 보았던 것이다. 영미는 아파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그러한 몸으로 무조건 한국에 가겠단다. 한국에 가자면 다른것은 몰라도 30-40리는 무조건 걸어야 한다.

나는 영미의 건강상태로는 함께 한국으로 가기는 힘들며, 다른 일행들에게도 짐이 될 뿐만 아니라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면 영미의 생명까지 담보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여 주었지만 영미는 한국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나는 영미에게 조금은 시간이 있으니 병 치료를 열심히 받으면서 걷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하면서 나는 그를 9월 팀에 포함시켜 데려 갈수가 있을지를 속으로 생각하여 보았다. 자신은 없었지만 노력을 하여 보면 될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것은 영미가 강한 의지로 걸어간다면 될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영미에게 어떻게 되여 엉덩이가 깨여지는 것도 모르고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게 되였는가? 고 물어보았다. 영미는 아무런 주저 없이 자기가 아파트에서 떨어지게 된 경위를 차근차근 말하면서 몸동작까지 흉내 내며 비장하였던 그때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 얼굴에는 비상한 각오까지 나도는 것 같다. 영미는 연길의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고 저녁 늦은 시간이 되여 일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누군가 출입문을 쾅쾅 두드리는 것이 일반 민간인 같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민간인들이 남의 집 문을 두드린다면 가볍게 손기척을 내겠는데 오늘 밤은 누구인지 쾅쾅 문을 두드리는 것이 섬찍한 생각이 들어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출입문에 있는 문 걸개를 잠구어 놓았다. 밖에서는 경찰인 듯 한 사람들이 열쇠 수리공을 불러서 출입문을 열라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한밤중에 오고 갈 데가 없는 영미는 급히 집안의 이부자리를 뜯어서 밧줄을 만든 다음 창문베란다에 끈을 묶고 줄을 타고 내려오니 6층집 창문이란다. 창문 밖에서 밧줄에 매여 달린 영미는 창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그 집에는 사람들이 없었으며 그는 창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 출입문으로 빠져 나가려고 하니 그집 출입문 앞에도 경찰들이 지켜서서 무엇이라고 떠들고 있었단다. 영미는 또다시 그 집에 있는 이부자리를 뜯어서 끈을 연결하고는 창문가에 밧줄을 매여 놓고 밧줄을 타고 내려오려고 하는 순간부터는 아무런 기억도 없다고 한다. 그의 기억은 손맥이 풀리던 것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주변에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신분증"이라고 말하던 소리를 들은 기억만 있단다. 영미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으며 그와 가까이 지내던 언니되시는 분이 영미의 병 치료를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셔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다. 영미는 경찰에 쫒기여 도주하다가 아파트에서 떨어져 골반뼈가 상하고 갈비뼈가 끊어지고 팔이 부러지게 되였던 것이다. 영미의 건강은 아니 좋다, 3국으로 출발할 날짜는 며칠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미를 무사히 몽고에 보낼 수가 있겠는지 더욱더 의문이 되고 걱정이 되었다. 설사 3일간의 긴 로정을 따라 기차로 버스로 목적지 근방까지 간다고 하여도 며칠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친 몸으로 수 십리를 걸어서 간다면 영미의 골반뼈는 완전히 파괴되여 지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며 변방대 군인들의 순찰에라도 걸리면 영락없이 걸리게 되여 있다.

영미를 만나본 이후로는 영미를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걱정 속에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많이 하여 보았지만 성공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적었다. 내일이면 출발하겠는데 영미는 지금도 걸을 때면 아프다고 울면서 전화로 말한다.

3국으로 갈 팀을 다 점검한 후에 나는 영미를 만나 이번 길에 함께 갈수가 없다. 사고가 나든 안나든 너를 데려가면 너의 생명을 담보할 수가 없으니 몇 달을 기다려라 내가 어떻게 하나 너를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갈 방법을 찾아보겠으니 그동안에 좋은 길이 있으면 나를 믿지 말고 한국으로 가고, 그렇지 못하면 나를 믿고 기다려 보라고 이야기 하여주었다.

나는 영미의 생활비와 병 치료비가 걱정되어 조금은 도와 드리겠다고 하니 영미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기가 한국에 갈수 있도록 꼭 도와달라고 한다. 영미의 한국 입국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힘들다. 그의 건강도 보존하여 주면서 안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국에 들어온 후 영미의 입국을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나는 나름대로의 힘을 다하여 열심히 노력을 하였었다.

나의 생각은 빠르면 3개월, 늦어도 6개월 안에는 영미를 3국에 있는 외교공관이나 국제 기구에 들여 보내여 끝장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으며 그에 필요한 준비들을 빈틈없이 갖추어 나갔다. 영미의 입국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조언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여 내가 생각하였던 것 보다 훨씬 빨리 영미의 국제기구 진입이 성공하게 되였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가지 절차와 일정을 계획하려고 하여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인데 영미의 문제는 꿈 같이 풀리어 갔던 것이다.

나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영미에게로 갔으며 그와 함께 북경에 갈 때는 영미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잘하여 별 어려움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가 있었다. 영미는 나와 헤어질 때 바늘처럼 가늘게 돌돌 말아서 실로 꽁꽁 묶은 것을 나에게 주면서 한국 집에 가서 풀어보라고 말하였다. 귀국하면서 영미가 나에게 넘겨준 것을 조심히 풀어 헤쳐 보니 100 $짜리 종이돈 한 장이 나온다. 그 돈은 영미의 마지막을 지켜줄 최후의 담보물로 영미의 품을 떠나본 적이 없었을 것 같다.

영미는 중국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는 모험을 강행하다 아파트에서 떨어져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오직 살아야 하기에, 죽어서도 북한에 잡혀 나가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이 영미를 한밤중에 아찔하게 높은 아파트 창문가에 매여 달리게 하였을 것이고 죽음과 공포 속에서 벗어나보려는 영미의 마지막 몸부림이 연약한 몸을 어두운 창공에 매여 달리게 하였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