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8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8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장로님과 나는 함께 모 교회에 찾아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한국에 체류중이였던 람차부부를 만날 수가 있었다. 람차는 외면상으로는 한국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으며 한국어도 능란하게 할 수가 있었고 한글 타자도 능숙하게 칠 수가 있는 여성이였다.

람차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 곧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하여 설명을 드리고 군부대 부대장과의 전화 통화를 담당하여 주실 것을 부탁을 드렸더니 람차는 별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듯 흔쾌히 나의 부탁을 받아 주었다.

나와 람차는 앞으로 이용할 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서로 교환하였고 잘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부탁을 드린 후 장로님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는 협조공문을 어느 단체나 개인에게 부탁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 해결하면 될 것 같았다. 협조공문 발급은 신뢰할 수 있고 공신력이 있는 단체여야 한다. 그러한 단체나 인사들에 대한 자료나 인맥은 나에게 없다.

어느 날인가 남서울 은혜교회 통일 선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계시는 몇명의 장로님과 목사님들께 제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체를 소개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말씀드리니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일하시는 김영자 사무국장님께 말씀 드려 보라고 하신다.

많은 선교회와 시민단체들 가운데서 그래도 북한인권시민연합이 좋을 것 같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란다. 북한 인권시민연합이라는 말은 많이 들었고 김영자 사무국장님의 모습도 여러 번 뵈온 적은 있지만 대화를 나누어 본적은 없다.

나는 북한 인권시민연합에 찾아가 김영자 사무국장님을 만나 도움을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국장님은 조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여 보시는 것 같더니 경비는 얼마나 받고 탈북자들을 데려오려고 하는 가고 물으시기에 지금의 형편으로는 100만원 정도 받으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나는 지금 탈북자들이 몽고 땅에 들어가면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가끔씩 탈북자들을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으니 외교적 경로를 통하여 탈북자들이 다시 중국에 되돌려 보내지는 현상을 막아야 하며 그렇게 하자면 협조공문이 필요하니 국장님이 잘 도와달라고 말씀 드렸다.

김영자 국장님은 잠시 후 조건부 없이 도와주시겠다고 말씀 하시였고 나는 곧 실무를 맡아보실 분을 만나 탈북자들을 몽고로 넘겨 보낼 위치는 이련이며 앞으로 메일을 보내 드릴때 목적지를 밝히지 않아도 문서를 작성하실 때에는 자동으로 이련으로 밝혀주실 것과그 외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 나누었다.

한국 내에서 필요한 것은 해결 되였는데 이련으로 가는 길과 국경으로 진출하는 통로에 대한 료해는 전혀 없는 상태이다. 이련으로 가자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갈수가 있다. 나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로정을 설정하여 놓고 버스와 렬차의 시간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 검사는 어느 곳에서 하며 어떤 방법으로 하는가에 대하여 잘 살펴보며 이련으로 가고 있다. 국경지대와 멀리 떨어진 중부 지역이라서 검사는 생각보다 없었고 통료역만 에돌면 능히 이련까지 갈수가 있고 조금은 피곤하더라도 안전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면 될 것 같았다.

오후 경에 이련에 도착하여 도시를 살펴보니 몇 년 전 몽고에 갈 때 움직인 방향은 기차역 뒤로 빠져 나간 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그곳으로 한참동안 가면 호수가 나타나며 그 곳에서부터는 철조망이 없고 몽고에 넘어가도 어지간히 숙련되지 않은 사람은 방향을 바로 찾아서 갈 수가 없고 드넓은 사막에서 헤메이게 되어있다. 중-몽 국경선은 직선이 아니며 타원형으로 동쪽방향으로 갈수록 국경선은 북쪽으로 밀려 올라가 있기에 주민지나 군부대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전북쪽200메터 지점에 동쪽으로 나가는 골목길과 역전 철로들이 연결 되면서 구내를 횡단하여 하여 걸어가야 하는데 그럴때면 역전 구내 불빛에 사람들의 모습이 멀리가도 찾아볼 수가 있었기에 나는 그쪽은 아니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의 생각은 도시에서 광야로 진출할 때 사람들의 모습이 빨리 어둠 속에 사라져야 하며 도시에서 외곽으로 쉽게 접근 가능하여야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시 주변에서 드넓게 펼쳐진 사막으로 나갈 때 불빛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형체를 숨길 수 없으면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

낮에는 관광도 할겸 "중화인민공화국 국문"에 가서 변방대 군인들의 수도 헤아려 보고 이들을 몇 개조로 나누어 국경에 분산배치 한다면 어느 만한 밀도로 경비조직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생각도 하여 보았다. 이것은 어데까지나 상상에 불과하며 군인들이 경비근무를 어떻게 서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가상의 것을 세워놓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하여 보았던 것이다. 몇 년 전에 여기로 넘어 갈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계병도 보이지 않았고 신호 장치도 되여 있지 않아 철조망을 들고 한사람씩 순조롭게 넘어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철조망을 넘기 전에 먼 곳에서 차가 불을 밝히고 오는 것을 보면 아마 순찰중인 차인 것 같다.

그 이후에 탈북자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분석하여 보면 잠복초소 보다 순찰에 걸리는 경향이 많았다. 지금 국문 앞에 서있는 군인들과 병실에 있는 군인들을 다 잠복근무에 내여 보낸다고 하여도 그 넓은 국경선을 다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국경선은 국문을 중심으로 16키로 미터가 철조망으로 봉쇄되어 있고 좌우 철조망을 다 합치면 그 길이는 30 키로 미터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막을 바라보면서 그쪽으로 빠져나가는 순간이 힘들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나도 모르게 두려움이 떨리던 것이 몇 차례 왔다갔다 하여보니 그것도 괜찮아 지는 것이다. 아마 국경지역이라는 심리적 압박감에 의하여 두려움이 오는 것 같았다.

밤에는 몇 십 미터 구간만 잘 벗어나주면 어둠 속에 쉽게 몸을 숨길수가 있을 것 같았고 서쪽으로 조금만 간다면 도시의 불빛 영향도 받을 것 같지 않다. 국경선 근방에서는 알지 못할 차들의 불빛이 나타났다 사라지군 한다. 무엇을 하는 자동차인가? 군인들이 순찰을 하고 있다면 지금이 순찰 시간으로 규정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엇갈리는 속에서 도시를 벗어나 국경선방향으로 항하고 있었다.

엊그제 시작한 것 같은데 탈출로를 살펴 보는데만 벌써 몇 달이 흘렀다. 탈북자들의 안전과 나의 안전을 위하여서라도 꼼꼼히 살펴보지 않으면 이후에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할 수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심양과 통료 방향을 특별히 잘 살펴보았다.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길만 살펴볼 수는 없고 탈북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다른 선교단체나 한국으로 가는 선이 있으면 최대한 그들과의 연계를 맺어 주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탈출로를 살펴본다는 것도 실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기에 한달에 한번 정도 탈북자들이 지나가야 될 로정들을 돌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자금문제도 앞으로는 조금씩 풀릴 것 같다. 큰 기대는 아니 하였지만 주변에서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시겠다는 분들도 있다. 나에게는 큰 도움이고 희망을 주었다. 언제인가? 카타콤 기도 모임에 참가하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팀 선생님이 나를 좀 만나 보자고 하시였다. 그분은 서투른 한국어 몇 마디를 하시면서 나를 돕고 싶다고 하신다.

사실 나는 오래전에 팀 피터슨 선생을 탈북자 문제를 다루는 회의에 참가 하는 것을 몇 번은 보아온 적이 있고 어느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하여 북한에 옥수수 지원을 하고 등 얼굴과 이름을 익히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8월경에 북한에 보낼 라디오를 풍선으로 보내기 위하여 철원군 로동당 청사에 가고 있을 때 40여명의 경찰병력으로 우리가 가는 길을 막고 풍선을 날려 보내기 위하여 준비하는 우리에게 뛰어 들어 라디오를 강제로 빼앗아 가지고 달아나는 것이다. 나는 차 위에 뒹굴면서 경찰들의 군화발에 짓밟혀져 있는 노베르트 폴로첸을 돕다가 경찰들의 손에 팔이 비틀려져 경찰들 무리 속 뒤켠으로 끌려 나가게 되었다. 뒤틀리었던 팔도 아프지만 여기가 정말 대한민국에이 맞는가?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 정말 무엇 이라고 형용할 수 없게 가슴이 아팠다.

그때 우리 일행 중에 있던 산매라는 분이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 어느 곳에 가면 탈북자들과 북한 인권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관심이 많은 곳이 있다고 하면서 시간이 나면은 함께 가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며칠 후 함께 카타콤 모임에 갔으며 그곳에서 기도 모임을 인도 하시는 팀 피터슨 선생을 만날 수가 있었다.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열리는 기도 모임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고 한국의 대학생들을 비롯한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카타콤 기도모임에 참가하였다. 기도 모임은 이야기 모임 식으로 현재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북자 문제가 많이 화제가 되였다. 나는 영어를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니 옆에 계시는 한국 분들이 나에게 부담 없이 통역을 하여주시어 큰 불편 없이 기도 모임에 참가할 수가 있었다.

내가 신앙이 적은지라 너무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것 보다는 우리의 모습에서, 탈북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을 찾고 이야기 식으로 모임이 진행 되어서 편안하고 중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들을 위하여 민족과 피부색, 문화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탈북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늘 기도하는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나오곤 하였다. 나는 일 하면서 시간이 나는 대로 카타콤 모임에 참가하였고 중국에 다녀와서도 기도모임에 참가하군 하였다. 탈북자 문제만큼은 참가자 모든 분들이 동정하고 가슴으로 아픔을 나누시는 다정하고 훌륭하신 좋은 분들이었다.

기도 모임에서 잊을 수 없는 크리스토, 오늘 날 인사동 캠페인에서 탈북자 실상을 한국민들에게 알리기에 위하여 열심인 데 모두가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다. 그 기도 모임에서는 나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를 하여 주시였고 중국에서 나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속에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나에 대한 사랑은 예수 사랑교회에 가서 가슴 뜨겁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예수사랑교회에서는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얼굴도 보지 못한 나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를 하였다고 한다.

아마 팀선생님이 나에 대하여 교회들에 소개를 하고 나의 영적 성장과 탈북자 지원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여 오신 것 같다. 팀선생님은 내가 힘들게 일 하는 것 같으니 자신도 나를 돕고 싶다고 하시는 것이다. 정말 어렵게 살아가고 있을 때에 팀 선생님이 자신도 나에게 도움을 주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나는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중국 현장에서도 많은 분들을 만나보면 앞으로 후원을 하여 주시겠다는 분들이 많았지만 실천에 옮기는 분들은 없었다. 팀선생님은 탈북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신 노련하고 신실하신 기독교 활동가였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탈북자들의 모습들은 비참하기 그지없다. 오늘도 생생히 기억되는 화룡시 경향 근처의 산 숲 속에서 어둠을 헤치고 뛰어 나오던 검은 무리의 모습,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 와서는 갈 곳이 없어 하루 종일 숲 속에 숨어 지내던 탈북자들 이다,,꿰진 배낭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두들 배낭만큼은 소중히 여기는지? 배낭을 산속에 버리라고 하여도 버리지 않던 그들, 나의 품에 안겨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는 15살이라고 한다. 그 어린 아이의 몸무게는 열댓 키로그램이 될 것 같았다. 보통의 상식으로 믿어지지 않는 여윈 탈북소년이다.

북한에 두 번씩이나 끌려가 보위부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얼굴이 다 부어서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되자 " 이 간나새끼. 너 나가면 또 아래 동네(한국을 말함)에 가라" 고 하면서 거리에 팽개치듯 버려져 혜산 거리를 기여 다니면서 죽더라도 한국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는 여인, 그에게는 이발(치아)이 없다. 그는 살아서 반드시 한국 가고야 말겠다는 생각뿐이란다.

파시(브라질)에 간 중국 남편이 북한 여자에게 돈을 주면 도망을 간다고 돈을 주지 않아 추운 겨울에 불을 넉넉히 땔 수가 없어 추운 방에서 한 돌이 갓 지난 아기를 안고 쪼그리고 앉아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을 하며 눈물을 흘리던 탈북녀, 죽어서도 묻힐 땅 한 조각 없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서 깊은 밤중에 집 뜨락앞 옥수수 밭을 파고 헤쳐서는 어미니 시신을 묻고 그 위에 다시 옥수수를 떠 옮겨 심은 탈북자 가정. 중국에 들어와서 얼마 안 되는 짧은 세월동안에 내가 보아온 믿을 수 없고 잊을 수 없는 탈북자들의 삶의 현장들이다.

누군인들 자기의 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고 싶으랴, 죽어서도 고향만큼은 잊을 수가 없어 고향을 그리는 북한 노래들을 벽면 가득히 적어놓고, 조선글을 잃어버릴까 걱정 된다고 여기저기에 조선글만 남겨놓은 탈북녀, 그들에게는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눈물이 흐르는 것을 힘들게 참아내곤 하였다. 내가 만나본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꿈과 미래가 없었다. 그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 공안에 잡히지 않고 마음 편히 살아볼까? 하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생각만 있다. 그들에게도 하루 빨리 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아름다움 미래를 그려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내가 그들을 충분히 보살펴 주기에는 한계가 있다.  주여,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들을 돌보아 주세요,

내가 변방대 군인들에게 체포 된지도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다. 처음 감방에 들어 왔을 때에는 냄새만 맡아도 역겨울 것 같았던 썩은 냄새가 푹-푹 나는 만투(빵) 두개로 하루를 견딜 수가 있게 감방안의 생활도 몸에 익숙하여 졌다. 수감자들은 짬만 나면 자기의 기소문 받는 날, 재판 받는 날을 점치느라 여념이 없다. 그만큼 간수소 생활은 힘들었던 것 같다. 감옥에 가면 먹는 것이나 여가 생활도 간수소 보다 많이 좋단다. 어떤 이들은 그 좁은 감방안의 침대 사이 길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카이팅라, 카이팅라"(재판-)하면서 꽥꽥 소리치는 이들도 있다. 아마도 간수소 생활에 지치고 지치였던 모양이다.

내가 간수소에 들어온 날로 부터 계산 하여도 지금쯤은 재판이 끝났어야 하지만 아직도 기소문이 내려 오지 않았다. 10월 18일, 오후 시간이 다 되여 당직 경찰이 나를 찾기에 복도에 나오니 현관쪽으로 가자고 손짓을 한다. 나는 그가 이끄는대로 간수소 면회실로 들어가 무슨 일인가?고 생각 하면서 말없이 경찰관을 빤히 쳐다만 보았다.

면회실은 창벽을 커다란 커텐으로 가렸으며 낡은 책상과 걸상 두개, 그리고 인터폰이 놓여 있었다. 내가 걸상에 앉아 경찰은 커튼을 거두어주면서 인터폰으로 말을 하라고 한다. 나에게는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면회실 맞은 켠 방을 살펴보니 키가 큰 최령사님이 꿈같이 나타나서 나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 9월에 령사님이 나에게 오셨을 때 나는 힘드신데 여기 먼 곳에 오지 마시고 재판을 할 때 오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렸고 그때 령사님은 나에게 한달에 한번씩 찾아오시겠다고 말씀 하시였다. 일단은 령사님께 오시느라 수고 많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대화를 하려고 보니 인터폰이 고장 나서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나의 옆에 서있는 경찰에게 전화기가 고장 났으니 살펴보라고 말하자 경찰은 전화기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전화선을 손질을 하는 것을 보면 아마 면회때 마다 불량한 전화기로 하여 애나 먹은 것 같다.

령사님은 나의 건강 상태와 간수소 생활을 간단히 물어보시고 한국과 미국등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짧고 명확하게 말씀을 하여 주시였다. 미국에서 나의 석방문제와 관련하여 공식 문건으로 중국 정부에 제출 하였다는 것, 어느 나라에서 항의가 있었다는 것, 한국의 언론 신문에서 나와 관련된 기사들을 싣고 있으며 문제가 복잡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다고 말씀을 하시면서 조금은 노여움을 타는 것 같다.

령사님의 말씀은 한국 정부도 노력을 하고 있으며 외교 일군들이 나름대로 하여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여 외교 부분의 일군들이 조용히 석방문제를 이끌어 나갈 수 있게끔 무엇인가를 하여 놓았는데 한국사회와 해외에서 공식적으로 항의하고 다른 채널들을 가동 시킨다면 지금까지 자신들이 노력하여 쌓아온 것들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 이다. 현재로써는 한국 사회와 언론의 대 중국 석방 운둥, 그리고 미국의 석방 노력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령사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한국과 각국에서 일어난 일들은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지만 일이 크게 번지여 가니 나도 당황스러웠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9월에 령사님이 나에게 오셨을 때에 분명히 나를 도우려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말라고 말씀드렸고 내가 령사님께 도움을 청한 것은 외교부에 들어가 있는 문서, 혹 외교부에 없으면 북한인권시민연합에 탈북자들의 신상 자료가 있으니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을 막고 함께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 전부였다.

나는 령사님께 내가 언론과 기타 다른 것들에 그 무엇을 바라고 있지 않다고 전하여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령사님은 나에게 무슨 예수라고 십자가를 혼자 지느라 하지 말고 빨리 석방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빨리 석방 되게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으니 건강을 잘 돌보라고 말씀 하시면서 북경주재 한국 대사관에서 령치금 1000원을 가져왔으니 필요한데 사용하라고 하신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령사님은 그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간수소를 빨리 나오라는 암시를 나에게 하여 주신 것 같다.

내몽고에서 10월 중순이면 추운 때이고 북경에서 시린호터에 오자면 비행기를 두번이나 갈아타야 올수 있는 먼 곳이라 령사님이 려행길에서 몹시 피로 하였을 것 같아 죄스러운 마음뿐이다. 령사님은 짧은 면회시간을 위하여 머나먼 길을 오시였지만 우리는 몇 마디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여야 하였다. 나는 령사님이 먼 길을 평안히 다녀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나는 면회를 끝마치고 8호 감방으로 돌아와 많은 것을 생각하여 보았다. 십자가를 혼자 질머질 생각을 하지 말란다. 그리고 나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공식 문건으로 중국에 전달되고, 한국의 언론이 떠든다고 한다. 천기원 전도사나 최영훈 선생이 탈북자들을 돕는 일하다가 체포 되었을 때도 역시 그랬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있고 교회가 있고 동료들이 있었으며 막강한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나를 아는 사람들도 없고 누군가 나의 석방을 위하여 주동적으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도 없다. 나는 언제나 조용하게 살아왔었다. 천기원 전도사의 석방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에서 모금을 하고 후원을 하였으며 중국 현지에 사람들을 파송하여 천전도사의 석방을 위한 일들을 하였는가?  나는 그의 석방과 관련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최영훈 선생은 기억이 아니 난다. 아마2003년 봄경에 최영훈 선생의 부인과 두 딸님이 남서울 은혜교회 통일 선교회에 오신 것을 본적이 있다. 통일선교회 임용석 목사님이 최영훈 선생님 사모님이라고 소개를 하시여 말로만 듣던 최영훈 선생님의 가족들을 직접 볼 수가 있었다. 최영훈 선생님의 부인은 조용한 성품이라 느껴지였고 아이들의 얼굴에는 약간의 그늘이 지여 웃음을 찾아 볼 수가 없었고 말을 하기 싫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이때에 처음 임목사님을 통하여 최영훈 선생님의 가족이 몹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최영훈 선생님은 탈북자들을 탈출 시키려고 하시다가 감옥 생활을 하고 계시는데 한국 교회들에서 최소한도로 가족의 생계만큼은 돌보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들에서는 무엇이라 이름을 달만 한 것들이 있으면 저마다 앞장서 이름을 빛내려고 한다. 그것도 꼭 이름을 나타낼만한 일, 명분을 세우는 일에는 정말 놀랄만한 재주와 능력을 나타내군 하는데 선의의 일이라도 자신들의 이름이 뜨지 않으면 점잖게 피하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정말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명을 받지 못하고 일하는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나 배려는 없고 말만 앞서고 어려운 일에서 몸을 사리고 야싹 바르게 카메라 조명만 받으려고 하는 현상이 한국 교회 내에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최영훈 선생님도 한국 기독교계의 끊임없는 석방 노력과 우방국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년여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였다. 한국에 석방되어 오신 최영훈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나 참담한 상태였다. 나라고 별다른 수가 있을 리 없다.

감방 안에서의 지루하고 초조한 나날이 흘러 어느덧 10월 말, 또다시 검찰원에서 나를 부른다고 한다. 저녁 늦어서 경찰들도 퇴근 하고 근무시간이 지났는데 보통키에 영준하게 생긴 검사가 조사실에서 다시 나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고 있다. 조사라고는 하지만 이미 9월에 진행한 여검사들의 조사 문건을 다시 한번 읽어주면서 맞나? 틀리나?를 확인 하고는 금방 나의 손에 인즙을 묻혀서 문서에 지장을 찍게 한다. 검찰 조사는 형식에 불과하여 보였다. 지금까지 기소를 하지 않고 있더니 무슨 생각이 나서 다시 읽어주고 나의 죄를 확인을 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늦은 시간이라서 그런지? 혹 무슨 약속이 잡혀 있었던 모양인지 검사는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재판을 언제 하는가?고 물어보니 "콰이댈"(빨리)하면서 황급히 복도로 빠져 나간다. 간수소 각 감방 안에 붙여 놓은 구속, 기소 에 관한 규정에는 구속7일. 연장23일로 총 구속 일수가 30일로 되여 있으며 검찰에 기소되어 30일, 연장 15일로 기소되어 45일 안으로 재판이 이루어 져야 한다. 오늘 날짜로 기소된다고 하여도 구속일수가 80일이 넘는다. 어두운 중국에서는 법을 집행하는 국가 사법 기관에서도 역시 고무줄 법집행을 하고 있다.

나의 구속 기간은 다른 수감자들에 비해 거의 두 배의 시간을 구속되어 있어서 검찰조사가 끝났어도 전혀 기쁘거나 그 어떤 미련이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앉아서도 늘 기도 하는 것 외에는 할일이 없고 늘 피난처에서 탈북자들이 부르던 찬송가 소리만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요,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감방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듣는다면 더 은혜스럽게 느껴지군 한다. 찬송가 구절구절은 우리의 인생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아 더욱 절절하면서도 은혜스러웠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검찰 조사가 있은 지로부터 십 여일이 지나 저녁 늦은 시간 한 감방안에서 함께 생활하던 수감자들은 나의 기소문이 내려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듯 나에게 무엇이라고 열심히 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 감방문이 열리면서 당직 경관과 함께 민간인 두 명이 나를 오라고 소리쳐 부른다. 내가 출입문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키가 큰 민간인이 나에게 몇 장의 A4용지를 건네주면서 싸인을 하란다. 내가 중국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룽이 날쌔게 뛰여와 취쑤수 쌰라이(기소문이 내려왔어)하고 내가 알아듣기 쉽게 말하여 준다. 싸인을 마치고 서류를 민간인에게 돌려주자 그는 내가 싸인을 한 서류 중 한 장을 골라서 나에게 주는것을 대충 흩어보니 기소문이고 전문이 중국어로 쓰여 있었다. "죽일놈들 같으니,"수감자중에 60%는 몽고족이며 몽고족들 중에 일부는 기소서(기소문)과 판결서( 판결문)를 민족어인 몽고어로 작성하여 수감자에게 주는데 한국인이 나에게는 중국어를 번역도 하지 않은 것 그대로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욕하면서 돌아서 침대로 돌아오자 수감자들이 와락 달려들어 나의 손에 있는 기소문을 빼앗아 가지고는 저저마다 기소문을 내용을 읽어보고 있다. 감방 안에서는 기소문이나 판결문이 내려오면 저마다 돌려보고는 나름대로의 형을 예상하여보는 관습이 있었다. 수감자들이 나의 기소문을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기소문을 가져오라고 하고는 중국어로 된 기소문을 읽어보았다. 나는 늘 중국어로 된 잡지를 보면서 글을 익혀 온지라 어지간한 글은 읽을 수가 있었고 통역이 없이도 글의 내용을 대충은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였다.

기소문은 시린궈러멍 인민 검찰원 기소서(기소문)이고 중화인민공화국 형법 제 318조,315조,312조, 조직, 운송 타인 월경(변경)등 형사 안건 활용법률 문제 해석(최고 인민법원)제1조,형사소송법141조 규정에 의하여 기소한다고 쓰여 있었다. 기소 내용은 북조선인 3명을 한국으로 데려갈 목적으로 조직하고 운송 하던 중 이련호특 역전 북쪽 150미터 근방에서 변방공안 군인들에 의하여 체포 되였고 아국(자국, 중국을 의미함)의 법률에 의하여 기소한다고 쓰여 있었다.

나의 진술은 27명이고 기소문에는 3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수감자들은 내가 재판을 받고 곧 한국으로 갈 것이라고 부러워하고 있었다. 감방 안에서는 수감자들 서로가 누가 무엇을 하다가 잡혀서 들어왔고 형이 어떻게 집행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나도 한 감방에서 생활하는 수감자들에게 내가 북조선 사람들을 몽고로 넘기려다가 잡혔다고 말하였기에 그들은 나의 기소문을 보고는 한국 사람이니 좋겠다고 저마다 나를 은근히 부러워 하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