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7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7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이 마을에 50명이 넘는 탈북자들이 우글우글 하여도 나는 그들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경찰이 멀리 청두고개를 넘어오는 것 같으면 함께 있던 청년을 누구와 누구네 집에 가서 알려줄 거라고 시켜 탈북자들이 피신하게 하였고 내가 직접 탈북자들을 만난 일은 거의가 없었다.

나는 이 마을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일할 때도 가끔씩 이 마을을 걸쳐 지나가거나 혹은 들른 적이 있으며 여기에 있는 탈북자들은 내가 어데 가서 돈이나 잘 버는가? 하여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기서 일하면 돈을 한 푼도 아니 주는데 도망을 가라고 수차례 말하여 주었지만 갈 곳이 없었는지, 아니면 이곳을 떠나면 굶어 죽는다고 생각을 하여서인지 그들은 토굴 속에서 살면서 그 끈질긴 생명을 연장하여 보려고 마지막 몸부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막이 어떻게 생겼는지 일단은 보고 싶었다. 나는 손전등을 비추면서 여기 저기 살펴보니 어데서 주어온 것 같은 방수포를 벽면에 두르고 천정도 방수포로 깐깐하게 손질을 하여 꾸몄다는 것이 알린다. 가재도구랄 것이 없다. 밥그릇이 몇 개 보이는 것 같고 무엇에 사용하던 것 인지 알 수 없는 자그마한 소랭이가 아궁쪽에 뎅그렇게 놓여 있는 것이 이들 살림의 전부이다.

나는 밖으로 나와 어떻게 되여 이렇게 처참하게 살아가게 되었는가고 물어보았다. 경창들이 자주 와서 유무고래에 토굴을 만들었는데 그곳에도 경찰이 몇 번 와서 탈북자들이 수많이 잡혀갔고 자기네는 유무고래에서 겨우 살아났단다. 유무고래 쪽에는 이제는 아니 간단다. 오늘 여기에 와서 또다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였다.  평온해 보이던 이 자그마한 농촌 마을에서는 탈북자는 공짜 노동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됨으로서 탈북자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는 돈을 못주면 쌀이라도 주어야 하자만 린색하기로 그지없는 자들이 한줌의 쌀도 제대로 주지 않는단다. 내가 여기서 살았을 때는 탈북자들을 때린다는 말이 없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두들겨 패고 탈북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나날이 없어져 갔다.

길남은 한국가는 문이 빨리 열렸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 산자락 밑에는 진학이네가 사는 움막도 있단다. 나는 진학이 어머니를 잘 알고 있으며 진학이 아버지도 몇 번은 만나본적이 있지만 어릴 때 진학이, 진학이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었지만 진학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길남의 안내에 따라 산 비탈면을 따라 움푹 패인 곳에 내려와 다시 홈타기를 따라 올라가 막 근처에 달으니 진학이 아버지가 막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신다.

길남이가 올라가면서 진학이 아버지에게 내가 왔다고 소리치니 진학이 어머니가 방안에서 튕겨져 나오듯 달려오면서 나를 끌어안고는 나보고 고생했단다. 진학이 아버지도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진학이 어머니는 왜서 인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내가 두 분께 인사를 드릴 때 움막 안에서 다 큰 청년이 나와서 인사를 한다. 이 청년이 이름만 듣던 진학이고 온 동네가 진학이네 라고 부르는 그 청년이었다. 나는 이들과의 대화에서 맏아들이 한국행을 시도하다가 북경에서 체포되어 북송되었다가 얼마 전에 다시 나왔다는 것, 진학이 엄마가 동네 취보주임(중국의 말단 행정에서 법률질서를 관장하는 자)네 집에서 며칠을 일한 품값을 달라고 하였다가 진흙탕물속에 로인을 자빠뜨려 놓고 짓밟고 때려서 로인의 앞 이가 다 부러져 나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지금은 폭행이 만연대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진학이 어머니는 자신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시면서 계속 눈물만 흘리시었다. 진학이네는 여기에다 땅굴을 만들어 놓고 살면서도 산위에 더 올라가서 비상용 땅굴을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이들은 당연히 나를 부러워하게 되어있다. 한 고장에서 함께 있다가 누구는 한국 가서 팔자를 고쳤고 누구는 경찰의 눈을 피하여 앞산 뒷산 가리지 않고 도망을 다니고 누구도 믿지 못할 이런 땅굴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의 고생이 너무나 지독 하였기에 같은 운명의 길을 가던 탈북자가 꿈 같이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니 놀랍고 그렇게 기뻐하고 반가워하였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정리를 하여야 할 것 같다. 한집에서 탈북자를 2-30명을 수용하고 일을 시켰다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수년을 걸쳐 150 여명의 탈북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은 자를 결코 용서할 수가 없다. 나는 흡혈귀의 호화식 주택을 그자의 무덤으로 만들어 주리라 굳게 마음먹었다, 나는 탈북자이다. 탈북자의 이름으로 다시는 나의 형제들에 대한 악행을 함부로  저지르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가르쳐 주어야 한다. 나는 선을 좋아한다. 그리고 사랑하지만 결코 탈북자의 피와 땀으로 살아가면서 함부로 때리고 돈 한 푼주지 않는 자들을 결코 용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길남과 진학이 아버지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월 200원씩 도와 드릴테니 어려울 때 사용하되 반드시 도망을 다닐 수 있는 돈을 남겨두라고 말하여 주었다. 그리고 멀지 않아 당신들을 여기서 옮겨 집에서 살수 있게 할 것이며 내가 여기에 온 것을 절대로 외부에 알리지 말 것을 당부를 하였다. 나는 한달에 한두 번씩 여기를 올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다. 일단은 여기에 계시는 탈북자들을 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왕청의 룡산도에 눈을 앓는 탈북자가 있으니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란단다. 나는 눈병이 발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일단은 찾아가서 환자의 병 상태를 확인하고 병 치료를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환자의 집을 찾아갔다. 골목을 여기 저기 돌고 돌아 힘들게 환자가 있다는 집을 찾아 들어가니 몇 명의 북한사람들이 열심히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드리고 방안에 들어가고 있을 때 웬 청년이 내가 들어가는 반대 방향에 대고 "선생님, 오시느라 수고 많습니다."라며 인사를 한다. 보건대 멀쩡하게 잘 생긴 청년인데 분명히 나를 보고 인사하는 것 같은데 그는 다른 곳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었다. 이집의 주인은 누구인지? 청년들은 무엇을 저리도 열심히 하는지?또한 이 청년은 멀쩡한 사람이 왜서 한쪽 구석에 앉아 멍하니 어데론가를 쳐다보는지 ,나는 긍금해 나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인사를 한 청년 외에는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환자로 추측되는 분은 보이지 않으니 나는 누가 이집의 주인인가고 물어보았다.

주인들은 다 바깥에 나갔고 늦어서 들어오신단다. 나는 이 집에 눈이 아파서 고생 하신다는 분이 있다고 하여 찾아왔는데 환자는 어디로 갔습니까?고 물어보니 나에게 인사를 하는것 같았던 청년이 자기가 눈이 안보여서 걱정이란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그는 대단히 놀랄 만큼의 기억력과 조리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눈만 아프지 않았다면 그 무엇인가 하였을 것 같았는데 눈도 보이지 않고 생활이 어려워지니 중국에 가서 밥이나 얻어먹자고 들어왔다가 경찰에 잡혀 북송되어다. 지금 나의 앞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 있는 북조선 사람들을 이 맹인이 대오를 인솔하여 중국에 오게 되였단다. 믿을 수가 없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청년들은 북한으로 가져갈 짐들을 정리 하고 있다. 입던 옷가지들을 동네에서 얻어왔는지? 별의별 옷들이 몇 배낭은 잘될 것 같았다. 손짐 정리가 끝났는지 이제는 돈을 먹는다고 한다, 나는 돈을 항문이나 자궁 안에 넣는다는 말은 들어 보았지만 돈을 먹는 다는 것은 여기서 처음으로 본다. 중국돈을 물에 잠구었다가 마른천으로 물기를 잘 닦아낸 다음 돈을 네 겹으로 접으면 길이가 1.5 센티미터 정도 된다. 그것을 정성스레 돌돌 말아서 얇은 비닐에 싼 다음 입안에 물을 한 모금 물고 돈을 넣고 물을 삼키면 돈을 먹을 수가 있다. 그러하면 2-3일 후에 돈이 대변으로 함께 나오는 것을 분리하여 사용 한단다. 이들이 떠나가면 앞을 못 보는 청년은 갈 곳이 없다. 얼굴 표정은 나타나지 않는데 말하는 것을 들으면 목소리에서 그가 조바심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제 막 시작인데 처음부터 이렇게 큰 것만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근심이 생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보았으니 저를 버리면 온전하지 못한 것이 어데가서 헤매다가 또 잡혀갈 것이다. 나는 광남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데려 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고 왕청에 계시는 분에게 작은집 하나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광남은 자기는 일할수가 있으니 일자리를 소개하여 달라고 한다. 소경이 무슨 일을 하는가고 질문 하였더니 백초구 어디선가 소방목도 하여보고 무엇도 하여 보았단다. 오늘 따라 비가 내리여서 인지 택시도 드물고 버스도 아니 보인다. 나는 광남이와 함께 길거리에서 택시를 불러서 왕청에 계시는 분의 집으로 갔다. 집을 구해보라고 이야기 하니 자기네 윗칸에서 살면 된단다. 그 집 윗칸은 월세를 놓던 방이 였고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비어있다. 주인님이 광남을 돌보아 주시면 될것 같고 월세라야 얼마 되지 않으니 참 다행이었다.

이번길에 중국에 들어 와서는 처참한 모습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룡산도에 가서 본 청년들의 움직임은 왜서인지 나의 머리 속에서 떠나가지 않고 있다. 눈에 익은 북한 지하족 (로동화) ,깁고 덧기워서 본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낡은 배낭, 무엇 그리 다급 하였는지 사람이 들어갔어도 그 어떤 응답도 없이 정신없이 무엇인가를 주무르고 넣고 하던 모습, 몇 시에 두만강을 건널 예정인지,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정성스레 비닐에 싸서 하나하나 삼키여 먹던 모습,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감이 들었던 것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히 떠오른다.

지금의 인민들의 삶이 저럴 것이다. 째지게 가난하고 거덜이 난 경제 오직 살아야 한다는 강박 관념 하나에 사로 잡혀 정신적 여유도 없이 허둥거리며 행방을 떠나 다니는 인민들의 그 모습의 축소판을 본 것 같아 마음이 쓸쓸하기 그지없다. 요즈음은 송원에서 살던 왕씨를 불러다 한국어도 가르쳐야 하고 앞으로 탈북자들이 지나가야 될 로정들과 국경 지역에 대한 정찰도 조직 하여야 한다. 사람이 괜찮다고 하여 데려다가 월급 주면서 한국어 공부를 하라고 하였는데 잘 하지도 않고 피난처에 있는 영옥이, 향미에게도 삼촌에게 조선말을 가르쳐 주라고 하였는데 서로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국경 지역을 빠져 나가자면 조선족 보다는 한족이 나을 것 같아 수소문하여 사람을 추천받아서는 월급주고, 한국어 교재를 가져다가 틈나는 대로 한국어를 가르쳤지만 내가 계속 그곳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 피난처의 탈북자들에게 함께 중국어도 배우고 한국어도 가르치라고 당부를 하였던 것이다.

얼마 전에 북미 탈북난민 인권위원회인지 하는 곳에서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설문조사도 하여 달라고 부탁이 왔다. 한국에서 부탁을 받았으면 거절 하였으련만 중국에서 제가 잘 알고 계시는 분을 통하여 부탁을 하니 쉽게 거절 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 것이 나에게 이렇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줄은 몰랐다. 어쨋든 모든 것을 빨리 서둘러야 한다. 아마 2004년 6-8월경에는 내가 지원하여 주고 있는 탈북자들이 월평균 20 여명이 넘은 적도 있다. 많은 사람들을 자립하게 일자리를 소개하여 지원을 최소화 하여도 도움을 바라는 탈북자들의 수는 끝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탈북 루트는 없고 선교단체나 조금 이라도 일면식이 있는 브로커들에게 우리 피난처에 있는 탈북자들을 3국으로 옮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힘들다. 선교단체는 무료라고 하지만 막상 탈북자들에 대하여 지원을 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하면 수백만 원을 현금이나 후불이라고 하는데 선금쪽을 많이 택하고 있었으며 브로커 역시 최소한도의 선불이 얼마간은 있어야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의 탈출 비용을 내가 감당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하루 빨리 3국으로 갈수 있는 길을 찾아서 자유롭게 계획하고 일할수가 있도록 준비 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중국으로 가기 몇 일전, 년세가 많으신 것으로 추측되는 할머니가 자신도 중국에 가려고 하는데 함께 가자고 말씀 하시기에 나는 배편으로 중국에 갈 때 할머니를 모시고 갈수 있다고 말씀 드렸다.할머니는 자신이 비행기 값을 치를 터이니 비행기 표를 두장 끊으라고 부탁을 하신다.

나는 여행사에 부탁을 하여 두장의 비행기 표를 구할 수가 있었으며 인천 공항에서 중국에 가시려는 할머니를 만나보고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함께 동행하시기로 하였던 할머니는 80이 넘으신 년세였고 휠체어에 앉으시어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만나 보시겠단다. 도시에 있는 탈북자가 아니라 산속에 있는 탈북자들을 찾으려 간다고 분명히 말씀드렸고 그 할머니는 당연히 그렇게 하여야 하고 자신도 갈수 있다고 말씀 하시였기에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았지만 지금의 할머니는 휠체어에 앉으시어 그곳 형편을 잘 아시는지 비행기 안에서부터는 우리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하시면서 나에게 "훈시'를 하고 계신다.

우리는 심양에 도착하여 민박에서 잠시 휴식을 한 후에 또다시 심양에서 연길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연길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가 앉은 좌석 바로 뒤편에 김일성 초상기를 단 북한사람 두 명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혹시 이자들이 무슨 냄새나 맡고 이렇게 뒤 따라와서 앉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오싹한 전률이 흐른다.

연길에 도착하여 보니 이미 어둠이 짙어갔고 나는 공항에 마주 나오신 분들과 함께 할머니를 만국 호텔로 모셔다 드렸다, 할머니의 건강은 갑자기 아니 좋아지신 것 같다.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무척 힘들어하시고 말씀을 하시는 것도 조금은 흐려지신 것 같다. 인천에서 출발할 때 내가 보아왔던 할머니가 아니었다. 우리 일행을 위하여 공항에 마중 나오신 분들께 할머니의 건강을 잘 살펴봐 달라고 말씀드리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어는 곳에다 전화를 하여 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나는 급히 룡정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 나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중풍으로 병원에 입원 하시였단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서둘러 연길에 있는 연변뇌과병원 입원실에 찾아가보니 할머니는 병원 침대에 누워 계셨고 주위에는 어제 저녁 공항에 마중 나오셨던 분이 할머니 곁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는 아마 눈을 뜨기도 힘드신 것 같았는지 조금씩 몸을 움찔 하시더니 상반신을 일으키시려고 애를 쓰시는 것을 만류하여 편히 침대에 누워 있도록 하고는 이부자리 주변을 정리하여 드렸다,

조금 있으니 할머니가 정신을 가다듬으셨는지 나에게 갔던 일이 잘 되였는가? 고 묻는다, 나는 어제 저녁부터 여러 번 전화를 하였지만 상대쪽에서 전화를 받지 않아 만날 수가 없었다고 말씀드렸다. 실은 우리가 만나기로 하였던 탈북자 한 가족 3명은 3일전에 중국 공안에 체포 되였던 것이다.

그들이 체포되지 않았다면 오늘 저녁에 3국으로 출발하기로 되여 있었던 것인데 그들의 숙소가 경찰에 알려져 체포된 것을 한국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고 계시던 분이 체포된 소식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나에게 선생은 여기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 가? 고 말씀을 하시기에 나는 할머니 병 상태가 중하여 간략하게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와 나는 인천공항에서 만났어도 주변의 눈을 의식하여 서로가 아무 연고가 없는 것 처럼 하면서 연길까지 왔기에 할머니와 나는 한번도 대화를 하여 보지 못한 것을 할머니가 침대에서 하고 계시는 것이다.

가끔씩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간호원이 약품과 주사를 가지고 입원실에 들어오기에 우리는 꽃 한 송이를 침대 옆에 놓아두고는 일반 병문안을 온 것처럼 대화를 하기에 마음 놓고 이러 저러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짧고 간략하게 나에게 하여 주시면서 북한 내부에 대한 지원은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었다. 할머니는 이미 8년 전부터 북한의 탁아소, 유치원, 빵 공장에 대한 지원과 북한 내부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열심히 하여 오시였던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소망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사기였고 잘 훈련시켜 믿을만한 사람으로 북한에 파견하여 어려운 사람들에 대하여 지원하여 주라고 수많은 쌀들을 보내주었지만 그것은 다 개인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어려운 사람들의 손에는 가닿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년세가 많으신 분이 북한의 동포들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신데 대하여 감동스럽지만 할머니의 작은 소망마저 무참히 짓밟고 자기의 검은 배를 불리기 위하여 종교의 탈을 쓰고 사기행위를 한자가 한없이 가증스럽게 생각 되였다. 할머니는 계속하여 선생은 지금은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가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씀드리면서 나의 어려운 점들을 말씀드렸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신 할머니는 모든 것을 탈북자 지원에 중점을 두되 피난처에는 탈북자들을 오래 동안 머무르게 하지 말고 길이 열리는 대로 빨리 3국으로 사람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씀 하시면서 너는 인간을 믿지 말고 하나님만 진실하게 믿으라. 이 땅에는 허위가 너무 많아 희망이 없으니 꼭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신다.

그리하시고는 이미 준비하여 두시였는지 회중시계를 나에게 주시면서 자신이 못한 일들을 선생이 꼭 잘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마지막 말씀처럼 나의 두 손을 꼭 잡고 절절하게 말씀하신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제가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할머니의 건강이 아니 좋으시니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시라고 말씀드렸고 할머니는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 하시는 것이 못내 아쉬운 기색이다. 나는 할머니 침대 옆에 서 계시는 분에게 할머니가 한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실 수 있도록 잘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린 다음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입원실 문을 나섰다. 할머니는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았고 탈북자들에 대한 사랑이 진실 하였으며 감성적이 아니시고 현실에 대한 료해가 깊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시는 탈북자 문제만큼은 노련하신 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때 할머니가 나에게 준 회중시계는 지금도 나의 집에 정히 보관되어 있고 중국에 들어갈대면 그 시계를 보면서 할머니의 부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 또 다른 하나는 많은 탈북자들의 3국에로 탈출을 위해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을 때에 나에게 정신적 힘을 실어 주시였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주신데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나에게 그렇게 큰 정신적 힘을 실어준 분을 보지 못하였다.  오래전부터 준비하여 온 것들을 실행에 옮기여 볼 때가 되었다. 지금 피난처에 있는 한족청년과 조선족분에게는 아울산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탐색 하여 보라고 오래전에 말하여 주었고 시간이 있는 대로 피난처에 가서 그들이 가보아야 할 지점들을 지도상에서 확실하게 인식하게 하였다.

아울산은 장춘에서 가장 가까운 지리적 위치에 놓여 있고 아울산 북쪽 국경선을 넘으면 쵸이빨싼 족으로 가는 도로에 올라 설수가 있다. 그 근처에는 반드시 몽고 국경경비대가 있을 것이며 어느 곳엔가 주민부락도 있을 것이다. 국경선 근처의 강물은 겨울에는 얼어붙을 것이니 걱정을 아니 하여도 좋다. 어떻게 하나 국경 경비대의 위치를 확인을 하여야만 탈북자들을 그곳으로 보낼 수가 있으며 그 다음은 외교적 경로를 밟아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다시 넘어오는 것은 막을 수가 있다고 나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국경지역에 대한 첫 정찰이었다, 나는 떠나는 일행에게 첫째는 중국 변방대의 검문초소 위치와 우회로를 확인을 하여볼 것, 두 번째는 몽고쪽 국경 경비초소 위치와 그곳으로 접근 가능한 길을 확인하여 볼 것, 셋째는 아울산 방향으로 가는 렬차와 버스, 택시들에 대한 경찰의 검사 방법과 어떻게 우회를 할 것인가를 확인하여 보라고 임무를 주어서 떠나 보내였다.

며칠 후에 가셨던 분들이 돌아와서 경비대 위치를 확인을 못하였다고 하면서 아울산, 의차구 근방에서 몽고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탈북자들이 여러 명이 얼어서 죽고 11명이 발에 심한 동상을 입은 것을 중국 공안에서 체포하여 간단한 치료를 하여주고 얼마 전에 북송을 하였단다. 의차구 초소는 탈북자들이 개별적으로 간다면 초소 앞에 흐르는 개울 옆을 따라서 가다가 다리 밑으로 빠져서 나가면 가능할 것 같다고 하고, 뒷산으로 타고 넘어갈 경우는 미리 차를 대기 시켜놓고 산을 넘어가면 될 것 같다고 하면서 그곳은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무릎을 넘는다고 한다. 앞으로 탈북자들을 몇 명씩은 조를 묶어서 보내야 하겠는데 중국 사람들이 그런 눈 속을 헤치고 산을 에돌 것 같지는 않고 몽고 국경경비대 위치도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그곳으로 탈북자들을 보낸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의차구로 가는 곳에는 군용 비행장이 있으며 군마 훈련소가 있다, 그곳까지 가는 로정을 대충은 파악하고 있었기에 보다 세부적인 것에 대한 료해가 필요 하였지만 이번 일은 실패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수고스럽게 그 먼 곳까지 갔다 오신 분들께 내색을 할 수는 없고 일단은 수고를 많이 하였으니 휴식을 하면서 좋은 생각들을 많이 하여 보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내몽고 지도를 앞에 펴놓고는 여러 가지 상상들을 하여 보았지만 이렇다 할 좋은 생각은 떠오르지 않는다.  중부선을 이용하다가 북쪽으로 들어가자면 교통편이 좋아야 하는데 그런 곳들은 대중교통이 발달되지 않았고 재정적인 여력이 있다면 몽고로 갈수 있다고 판단되는 마을에 사람을 보내 한 달씩 있으면서 국경을 살펴보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두 달 후에 왕씨는 자기의 형이 싸이나이야스타이에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몽고에 가서 돼지와 양을 밀수하여 중국에 들여오는데 대형트럭으로 국경을 넘나든 단다. 지금은 추운 때여서 트럭에 돼지와 양을 싣고 나오면 짐승들의 발목이 얼어서 부러지기에 밀수를 할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이용 할 수가 있거나 최소한도로 밀수꾼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국경에 대한 료해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2005년2월에 다시 국경지역에 대한 정찰을 하여 보기로 생각하였다. 나는 국경지역을 살펴보기 위하여 떠날 일군들에게 지도상으로 어느 곳으로 어떻게 목적지 까지 가되, 탈북자들을 데리고 간다면 어떻게 빠져 나갈 수가 있겠는가를 잘 생각하면서 가보라고 하였다.

밀수꾼들을 만나 트럭으로 사람을 나른다면 일인당 5000원 한계에서 흥정을 하며, 흥정이 아니되는 경우에는 몽고쪽으로 나가는 루트를 알아 가지고 오되 절대로 국경선을 넘어서 몽고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일꾼들을 떠나보낸 후에도 나는 그들이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다렸지만 이번에도 실패를 하였다. 밀수꾼들은 자기네 차 값이 얼마인데 돈을 적에 주는 가고 하면서 차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인민페 5만 원 이상을 달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데서라도 큰돈을 후원 받을 수가 있으면 실행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재정적 후원이 전무한 형편이다. 한달에 지인들로 부터 10-30만원씩 받을 때도 있고 전혀 없을 때도 많다. 어데가서 내가 이런 일 하려고 하니 “돈 좀 주세요” 라고 할 곳도 없고 그런 재간도 없다, 그들은 밀수꾼들이 접근로를 알려주지 않아서 자체로 국경선에 나가 보았지만 도로나 주민부락, 경비대 초소를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고 한다. 오래 동안 큰 기대를 가지고 준비들을 시켰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그들이 일을 잘 했든 못했든 중국 사람들이며 그들이 위험한곳에서 자기의 몸을 바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2005년 봄에 접어든다. 내가 중국에 나지 얼마인데 너무 아까운 세월을 한 일없이 흘려보냈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금도 피난처에 있는 탈북자들은 자기네는 언제쯤이면 한국 가겠는가?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내가 능력이 있으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단체들을 찾아가서 탈북자들을 무료로, 혹은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한국으로 갈수 있게 교섭을 하겠는데 그것이 잘 아니 되는 것이다. 간혹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기네가 탈북자들을 도와줄 수가 있다고 하여 보내드리곤 하였는데 그곳에서 1년씩 성경 공부를 한다면 탈북자들의 속마음이 타 번져 재가 되고 말 것이고 그들은 내가 선교사들과 짜고 자기네를 그런 곳에 보냈다고 얼마나 원망을 많이 할 것인가? 사실 나는 탈북자들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한국 가기를 바랐고 입국비용은 당연히 브로커에게 지불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현금이 없기에 브로커들에게 넘겨주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대응책으로 선교사나 단체에서 탈북자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입국 시켜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중국에서 활동 하시던 많은 선교사들이 북한선교, 중국선교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탈북자들과 멀리 하고 있었으며 간혹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선교사나 단체라고 하여도 탈북자들을 종교의 대상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이 북한선교에 나갈 것을 거의 강요에 가까운 요구를 받고 있었고 철저한 신앙이 없으면 한국에 갈수가 없다는 정도로 신앙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요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싫었다. 나는 편하게 살고 싶고, 탈북자들 또한 편하게 살기를 원할 것이다.

성경교육을 하여도 그들이 편하게 받아들이고 전도는 하나님 몫으로 남겨두고 가르친다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못하다. 탈북자들이 요구 하는 것은 하루 빨리 한국에 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피난처도 여기저기에 몇 개는 있지만 한 팀 한 팀을 뽑아내기는 너무나 힘들다. 탈출로를 하루 빨리 열어놓아야 한다. 탈출로 확보는 더는 미룰 수가 없는 나의 과제였다.

가까운 곳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가 있고 경비도 절약할 수가 있어 좋을 것 같아 아울산과 싸이나이야스타이에 대한 정찰을 조직 하였지만 모두 실패 하였으니 이제는 마지막 카드를 확실하게 성공 시킬 수가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자면 중국 사람들로 정찰 조직을 하여서는 승패가 없다고 확신한 나로서는 내가 직접 다니면서 살펴보는 것만 길을 여는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나는 이련을 통하여 몽고(외몽)에 갔으며 그 후에도 두 차례나 외몽골 국경지역에 합법적으로 갈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2001년도와 2003년도 두 차례에 걸쳐 국경지역에 들어가서 여기서 다시는 탈북자들의 피와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할 것이라고 기도하고 맹세를 하였던 곳이며 그곳의 지형과 군부대와 역전, 마을 등 앞으로 필요 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 방향과 거리 등을 잘 기억하여 두었다. 뿐만 아니라 군부대장의 전화번호와 싸인까지 받아 왔기에 조금만 노력을 기울이면 될 것 같았다. 나는 우선 몽고어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로 생각하였다.

알고 지내시던 분들을 통하여 몽고어 통역을 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을 소개 하여 달라고 여러 곳에 부탁을 하였으며 인터넷을 통하여 몽고에 대항 여러 가지 정보를 검색하여 보았다. 인터넷에는 몽고에 대한 정보가 얼마 되지 않았으며 내가 이용 할만한 자료들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내가 이용 가능 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얻어낸 것이 디아스포라 몽골리아 드림(흩어진 몽고의 꿈)이라는 선교단체의 전화번호와 약도였다. 아마 지금의 기억으로는 서초구 사당동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선교단체에 찾아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서 몽고 국경경비대 부대장과의 전화 연계를 하여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나의 대답을 다 듣고 난 선교회에서는 자신들의 일과 성격이 다르고 선교회 사업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기에 도와드릴 수가 없다고 한다. 며칠 후에 문정동에 사시는 류평립 장로님으로부터 통역을 하여 주실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고 하시면서 시흥시? 근방에 있는 외국인 교회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는 몽고인을 소개 받았으니 함께 가보자고 연락이 왔다. 류평립 장로님은 탈북자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았으며 나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시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하시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