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6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6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우리가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마바산에 탈북자들이 있는데 그분들이 산속에서 정말 어렵게 지내고 있으며 그분들 만큼은 누군가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기별이 왔다. 다음날 아침에 왕청에서 만나 그들을 찾아보자고 약속을 한 나는 왕청으로 향하였다. 아침에 산에 갈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후에 마반산으로 안내하여 주실 분을 찾아 떠났다. 마반산으로 가자면 훈춘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하지만 훈춘행 버스는 많지를 않아 버스역에서 한참이나 기다려서 버스를 타고 마반산쪽으로 갈수가 있엇다.

마반산은 2-30호가량 되는 작은 마을이다.그곳에는 북한 여성들이 9명 정도 있고 마반산에 있는 어린이 9명중 6명이 북한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이란다. 북한 여성들이 많은 마을이니 그곳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나 종교단체,인권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그곳에 오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벌써 그곳에서만도 몇명의 여자들이 한국 간다고 떠난것이 소식이 없단다.

그곳 사람들은 탈북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다나니 탈북자들의 고통 같은것은 생각하여 볼 여지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탈북여성들에 대한 생활상 편의나 안전을 담보하여 주는 그 어떤 대책이 있는것도 아니고 하루를 넘기고 이틀을 넘기면서 오늘 살았으니 내일도 넘어 갈거라고 생각한단다. 나는 마반산 사람들의 경향을 알고 있음으로 마반산에서 내려 산에 간다면 저의 신분도 아니 좋을것 같고 산에 계시는 분들께도 좋은 영향을 미칠것 같지 않아 빠리산( 팔리산 ) 양로원 근처에서 내려 산기슭을 따라 가다가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1월중순이라 날씨도 차고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 가면서 보니 눈밑에는 산골물이 흐르던것이 그대로 얼어부터 얼음판이 되였고 눈이 발목을 넘게 와서 산으로 올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어려서 부터 산간 농촌에서 나서 자란 나는 산에도 많이 다녀보았지만 마반산 처럼 산밑에서 부터 산중턱이 넘도록 얼음으로 덮여져 있는 산은 처음 보았다. 길을 안내하시는 분은 힘들어서 갈수가 없다고 하면서 쉬여가자고 수차례 말씀 하신다. 한발자욱 내여 디디면 한번 넘어지고 또 한발자욱 내여디디면 넘어지고 나도 땀이나 흘리면서 가보니 산 비탈면에 작으마한 막이 보였는데 어데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이 산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그 미끄럽고 가파로운 산을 힘들게 올라 산막집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을 찾아도 인기척이 없다. 사람이 있겠는데 대답이 없지? 이상한 생각이 들면서 조용히 문을 열어보니 방안에는 살림도구와 곡식을 담아둔 자루 같은것들이 보였고 농쟁기들이 눈에 띄인다. 가마목에는 아침까지 불을 지핀것 처럼 열기가 느껴진다. 분명히 사람들이 살았는데 어데로 갔을까? 산에는 눈이 많이 와서 사냥을 나가기도 쉽지 않을 많큼 눈이 무릎을 치게 덮여 있다.

산막집 바깥 구경을 할겸으로 밖으로 나와 살펴보니 여기 저기에 사람의 발자욱 흔적이 있는데 우리가 올라 올 때에 어데론가 피하여 달아났을 발자국은 찾기가 어렵다. 2-300M정도 떨어진 곳으로 추측되는 산 비탈면에서는 어린개로 보이는 앙칼진 개 짖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온다. 분명히 여기에 살던 사람들은 우리가 올라오는 낌새를 알아채고 급히 어데론가  눈 속을 헤치며 도망간 것 같다. 내가 입고 있는 동복은 국방색의 옷이며 멀리서 보면 군인들이 입고 있는 동복처럼 보일 것이다. 산속에 숨어있는 탈북자들은 어데선가 우리들의 행동거지를 일일이 살펴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멀리까지 힘들게 온 터라 잠깐 다리쉼이나 하고 곧 산을 내려가기로 하였다. 우리가 그렇게 한 것은 탈북자들이 우리의 행동에서 공포감을 느끼고 산속에 오래 동안 숨어있게 되면 그들이 혹시 추위 속에서 아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안내하여 주신 분에게 혹시 이들과 어떻게 연락할 방법이 있으면 내가 다시 오겠다고 전하여 달라,,그러하니 절대로 도망을 가지 말라고 일러주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튿날인가? 산에 있는 분과 연계되었으니 함께 가자고 연락이 왔다. 마반산까지 갖다 오자면 대충 잡아도 하루 품인데 전번에 갈 때 고생을 하여서 쉽게 용기가 나지 않지만 일단은 약속을 한만큼 찾아가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마반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또 다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힘겹게 산에 있는 막에 도착을 하니 뜨락에 매여 있는 개는 죽어라 짖어대고 방문이 열리면서 60세 가량 돼 보이는 여자분과 남편으로 보이는 분이 나오면서 힘들게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수고가 많다고 우리에게 인사를 한다. 첫 눈에 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라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이마와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들, 까칠하게 그슬린 것 같은 얼굴은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말없이 알려주는 것 같았다.

대소한 추운때라 밖에서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에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두 칸으로 되어있고 몇 일전에 본 그대로였다. 이분들이 여기에서 살아오신 것이다. 우리는 서로가 자기의 소개를 간략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보고, 이 두 분은 부부이며 산 아래 있는 마반산에서 중국인 남자와 결혼하여 함께 살아가고 있는 딸님은 중국공안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 되였으며 같은 마을에서 일하던 아들은 중국인들의 싸움의 희생양이 되여 칼에 찔리어 사망하였다고 한다. 아버지는 먼저 간 아들의 시신을 찾아서는 그 가파로운 산으로 업고 올라와 장례도 못하고 양지 바른 산비탈 어느 곳에다가 물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살아온 눈물겨운 이야기를 하시는 두 로인 부부의 눈에서는 눈물이 그칠 줄 모르고 흐르고 있다.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오른다. 내가 왜 딸이 살던 집에서 함께 사시지 않고 이 산중에서 고생을 하시는가고 문의 하니 그분들이 하는 말씀이 원래는 딸과 함께 있었는데 그 집에서 좋아하지 않아서 갈 곳이 없고 하여 산에 올라와 한족 로반(사업가)이 운영하는 하마장(개구리장) 을 관리하고 있단다.

이 막은 나무를 넉넉히 해다 놓고 겨울에 불만 많이 때면 그런대로 살만할 것 같았다. 주민부락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산에 한번 오자면 여간 힘든 것이 아니기에 경찰의 단속도 피할 수가 있고 주민들의 극성도 피할 수가 있어서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산전막이 그들이 생활하는 집이 아니란다. 그들이 진짜 살아가고 있는 집은 산등성이를 넘어가서 다음 골짜기에 있는데 누구도 모른단다. 나는 이 깊은 산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긍금하여 겨울에 무엇을 하며 살아가시는 가고 물어 보았더니 옹노(산짐승을 잡을 때 사용하는 올가미)를 놓아 짐승을 잡고 새그물에 걸리는 새를 잡아 왕청 시장에 가져다가 싼 값에 넘겨주고 쌀이나 기타 필요한 것들을 사오신단다. 봄과 여름에는 산나물과 약초를 캐어 팔아서 북한에 있는 아들도 도와주고 있단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어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로인 부부는 우리가 먼 길을 수고스럽게 왔다고 자신들이 잡아서 깨끗이 손질하여둔 산새 고기로 맛있는 료리를 하여 주시였는데 어머니의 정성이 깃들어서 그런지 그날 점심은 정말 맛있게 먹었다.

얼마 후 우리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그분들의 집을 방문할 수 있게 되였다. 집이라야 평평한 눈이 덮여 있는 곳에 가서 눈을 한쪽으로 밀어서 치우고 통로로 들어가는 덮개를 열고 들어가면 한 평 남짓한 "방"안이 보인다. 벽은 모두 통나무를 어느 곳에서 자리가 나지 않게 베여다가 귀틀을 짜서 쌓아 올렸고 천정에는 자연 채광을 이용한 손바닥만한 채 광문 하나가 보인다. 어데서 구해온 듯한 이불 한 채, 그리고 밥그릇 몇 개와 숟가락, 지하에서 나무가 습기 차서 불을 피우기가 힘들어서 불을 피울 때 사용하려고 그랬는지 봇나무 껍질이 수북히 쌓여있다. 벽면 네 곳 모서리와 천정에는 이름을 알 수가 없는 버섯류들이 여기저기에 마구 자라고 있다. 방안을 살펴보느라 조금 있었더니 몇 년을 묵은 지독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것이 정말 현실이란 말인가?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 앞에 것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산등성을 넘어 산막으로 내려오면서 왜 산막에서 살면 되지 힘들게 산등성을 넘어가서 땅굴에서 사시는가고 물어보니 저 아래 산막도 안전하지 않다고 한다. 약초를 캐거나 산나물을 뜯으려 오늘 사람들이 다 좋은 사람들이 아니고 누군가가 경찰에 고발하면 경찰이 오기에 산막은 위험하다고 말씀하신다.

저 아래 산막에는 실제로 경찰들이 몇 번을 왔었는데 자신들은 용케도 위기를 벗어나게 되였고 그 이후에는 누구도 몰래 뒷산을 넘어와서 땅을 파고 움막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들과 헤어지기에 앞서 나도 탈북자인데 하나님 믿고 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선생님들도 기도를 하여 보세요,라고 하면서 이미 준비하여 두었던 찬송가 테이프를 주며 들어보라고 하였다. 이들이 산속에서 살아가기는 무척 힘들 것이다. 나는 일인당 한달에 200원씩을 지원하여 드리겠다고 하면서 돈을 손에 쥐여 드리니 두 로인 내외는 돈을 받을 수가 없다고 딱 잡아 떼는 것이다. 나는 그분들을 겨우 설득하여 생활비를 드릴수가 있었다. 로인 내외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생활비가 아니라 하루 빨리 한국 가기를 원하고 있엇다. 오늘은 두만강가로 가게 되였다. 내가 새벽 안개비를 맞으면서 두만강을 건너온 지 7 년만에 다시 두만강가로 가게 된 것이다.

멀리서 북한의 산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더니 금방 두만강 가에 다달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북한 땅을 바라보니 그 무엇이라고 형용못할 감정에 휩싸여 나는 하염없이 북한 땅을 바라보니 맞은 켠 산들은 산꼭대기까지 다 발가벗겨서 밭을 일구어 놓았다. 저기가 내가 나서 자란 곳이고 지금은 갈래야 갈수가 없는 곳이 되였다. 저곳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 높은 산 정상까지 다 벗겨서 농사를 지었을까?

힘들게 밭을 일구어 거름을 지여나르고 김을 매고, 저들의 손이 1년 365일을 쉬지 못하고 일하였을 텐데 저들의 생활은 얼마나 펴이였을까?  수 십 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너무나 판이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것이다. 그곳에서 살아 갈래야 더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 지금 시도 때도 없이 두만강을 넘어 살길을 찾아온다. 나는 지금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온 나의 형제들을 만나려 두만강 가에 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으신 분이 차 시간을 맞추어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마중 나오신 분의 집으로 들어가서 탈북자들과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가 있었다. 북한에 있는 친척들이 끝도 없이 도와달라고 하여 이제는 시끄럽고 조선에 친척이 없는게 편안하다, 강 건너에서 군인들이 밤마다 찾아와 담배달라. 술 달라. 쌀 달라. 피곤해서 못살겠단다. 그의 푸념을 들으려니 왜서인지 나의 얼굴이 부끄럼에 달아오른다.

아, 저곳이 내가 살던 곳인데, 마치 내가 아니 할일을 하다 들킨 것처럼 옹색하여 진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고 곧 뒷산에 올라 가보기로 하였다. 산골짜기를 따라 한참 올라가다가 오른쪽 비탈면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잘 은페된 곳에 자그마한 반 움막집이 보인다. 첫눈에 띄우는 것은 어데서 주어다가 설치하였는지 한 메터 남짓한 오지 굴뚝이다. 안내자는 숨어사는 사람과 잘 알고 도와주는지라 인기척 없이 움막집 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나도 따라 들어갔다.

이 집은 두 평은 좀 못될 것 같았는데 사람이 누울 자리라도 온전히 마련되어 있었고 부엌 아궁이에는 장작불을 얼마나 많이 피웠는지 시뻘건 숯불이 이글거리고 있엇다. 이 집도 나무를 베여다가 귀틀을 쌓은 다음 안팍으로 흙 매질을 하여 놓아서 그런대로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부엌 옆에는 찬장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곳에는 몇 개의 그릇과 양초가 수북이 놓여 있었고 가마목에는 금방 먹다 남은 것 같은 꿩 다리가 그릇에 담겨져 있었다.

모름지기 사냥하여 잡은 꿩고기를 먹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어데론가 달아난 것 같다. 이불은 언제 빨아 보았는지 알 수가 없게 어지러웠고 중국의 책 몇 권과 한국의 이름을 알만한 교회의 교육용 책자들도 몇 권 눈에 띄였다. 나는 안내하여 주신 분과 방안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방안의 구석구석을 깐깐하게 살펴보았고 여기서 사시던 탈북자분은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갔을까? 하는 생각만 하여 보았다. 조금 앉아 기다리다가 움막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와서 북한쪽을 바라보니 이곳 움막에서는 북한이 맞은켠 지척인데 불을 밝힌 곳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전기 사정이 아니 좋아서 전기공급을 못하는 것 같다. 암흑의 시대다, 사람의 영혼도 암흑이요, 자유란 생각할 수도 없는 암흑이요, 물질문화 생활은 지금 나의 앞에 펼쳐진 그대로의 암흑이다. 저 땅에도 생명의 빛, 자유의 빛, 복음의 빛이 언제인가는 반드시 비추리라,

우리는 함께 산을 내려와 동행하신 분의 집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였다. 주로 그분이 말씀하시고 나는 듣고 모를 것이 있거나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나는 직설적으로 물어보군 하였다. 최근에 두만강 연안의 북한 주민들이 비료를 요구하고 있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으며, 재정적으로 안받침 된다면 비료를 공급하여 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지금은 옛날 같지 않아서 힘이 있으면 산을 개간하여 밭도 만들 수가 있으며 그 대가로 한 평당 22-25원씩 국가에 바치면 된단다.

주민지에서 멀리 떨어진 산에서 농작물을 심어야 하기에 거름으로 농사를 짓자면 너무 힘들고 품이 많이 먹고 그리하여 선택하는 것이 중국산 비료이고, 비료에 대한 수요는 높단다. 자신은 북한에 비료를 공급하여 주는 일을 하여 보고 싶다고 한다. 다음은 내가 질문을 하였다. 여기 근처 어데인가 살고 있다는 북한 여자가 지난해 애기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 여자가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내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은 탈북자 부부가 두만강을 넘어와 강옆 가까운 산속 바위굴에서 함께 몇 년을 살면서 애기를 낳았는데 그들이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들이 여기에 있다면 언제인가는 만나보고 싶었다. 그분이 말씀이 북한 가까운 곳에서 사시던 탈북자들이 중국에 넘어와 자기네끼리 산 속에 돌아다니면서 만났고 마을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산속 자연 바위굴에서 살아가면서 주민 부락에 내려와 삵 일을 하였단다.

탈북녀는 산속 바위굴에서 두 번 애기를 낳았는데 그들의 힘으로는 애기를 키울 수가 없어 2-300원씩 받고 중국 사람들에게 애기를 주었다고 한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녀는 두 명의 애기를 낳아서는 남에게 주고 또다시 애기를 낳아서는 남에게 주었는데 그 후에 그녀와 남편이 북한에 강제 송환 되였고 세월이 흘러서 남편은 소식이 없고 여성분 혼자서 중국에 들어와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집 주인님은 "오늘 야네 또 오겠는지 모르겠다."하시면서 잠자리에 누우신다. 여기서 두만강까지는 수백 미터도 아니되는 지점인지라 그날따라 이상하리 만큼 잠을 들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침 식사를 끝내고 화룡으로 가는 차를 타려고 대문 밖을 나서니 눈에 익은 북한군 신발 자욱이 밤새 내린 눈 위에 또렷이 찍혀 있다. 신발자욱을 보면 군인 두 명이 내가 잠을 자고 있던 집 주변을 한바퀴 돌아서 창문쪽 울바자 밑에서 서성대다가 두만강가로 곧게 되돌아간 발자욱들이다. 이집에 북한 군인들이 자주 드나든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막상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승냥이 같은 자들이 나의 주변에서 맴돌았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오싹하게 돋아난다. 집 주인님 말씀으로는 두만강 국경 경비대 군인들이 담배나 술을 얻으려고 왔다가 자기네 집에 손님이 있으니 되돌아 간 것 같다고 한다.

일단은 이번 중국 여행길에서 예상 밖으로 두 명의 어린이를 한국으로 갈수 있게 하였다고 생각하니 그것은 생각 밖의 성과이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분들을 많이 선택하지 못한 것이 흠이다. 다들 좋은 말씀은 많이 하지만 탈북자들을 받아 안으라면 난색을 표하군 한다. 내가 공짜로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집에서 할 일이 없이 휴식하는 분들에게 연변에서 평균 임금의 중간 이상의 사례비를 드린다는 조건에서도 그 액수가 불만이다.

앞으로 탈북자 지원은 탈북자에게 직접 지원을 원칙으로 하며 3자를 통한 지원도 최대한 탈북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간접 비률이 높아지면 직접 비률이 낮아지게 되는 것이다. 내가 돈버는 재간이 좋은 것도 아니고 어느 교회나 단체에서 나에게 후원금을 주는 것도 아니다. 제한된 재정으로 효과적으로 잘 나누어서 사용하자면 씀씀이를 통제 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일단은 연길, 룡정, 화룡, 왕청 지역에서는 도와주시겠다는 분들이 있지만 핵심적 역할을 하실 분은 없다.

그런대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나는 성민형과 이민규님과 김영열님께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을 드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일을 하여 나갈 것인가를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모두들 탈북 청소년만큼은 무료로 지원을 하여 준다는 데는 같은 견해들이지만 유휴 자금을 어떻게 확보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겨울은 나에게는 시련의 계절이었다, 고정 직업이 없는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일당로동을 하여야 하는데 날씨가 풀리기 전에는 일거리가 나오질 않는다. 아직도 여권문제는 회신이 없다. 여권문제가 잘 풀려야 모든 일을 확실하고 계획적으로 잘 할 수가 있고, 그것이 잘 풀리지 않으면 나도 탈북자 여권발급 제한에 묶여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이번에도 어렵지만 나는 여권을 발급 받을 수가 있었다. 떠들어 대는 자들이 많으면 머리가 아파서라고 할까? 미운놈에게 떡 하나를 더 준다고 여권 발급하여 주고 조용히 있으라는 암시인 것 같다. 이번 길에는 마반산에 사시는 분에게도 집을 구하여 드리고 화룡에 사시는 탈북자들에게도 가능하면 무엇인가를 조금은 도와드려야 할 것 같다. 나는 무사히 중국에 도착하였고 지금은 내가 노예 살이를 하였던 그 산 골짜기를 따라 산으로 오르고 있다. 주변은 캄캄하지만 나는 이곳을 수많이 드나들었으며 화룡을 떠나 다른 곳에 살면서 여기로 올 때면 늘 이 길로 다녔던 경험이 있어 오늘 밤도 이곳을 지나가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다. 약속시간이 다 되여 우리가 만나기로 하였던 장소에 가보니 어둠 속에서 누구인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길남이였다. 그는 멀리서도 나의 모습을 용케도 알아보고 반갑게 달려와 인사를 한다. 나는 시거 마을에서 한 달 가량 길남이와 함께 일한 적이 있으며 이후에도 화룡에 오면 시거마을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다들 시내로 도망가라고 추동질을 많이 하였었다. 그때의 길남이가 토굴에서 살다가 내가 온다고 하니 멀리 유무고래 밑에 까지 와서 나를 기다린 것이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당신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어 왔다고 이야기 하면서 함께 가서 집구경이나 하면서 이야기 하자고 하였다. 길남은 지금은 유무고래에는 집이 없고 앞동산 쪽에다가 새로 토굴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엄아바이랑 함께 살고 있단다.

다들 북한에 잡혀가고 몇 명은 한국 간다고 떠난 것이 소식이 없고 나만이 한국에 가서 춘국이네를 도와주고 멀령에 누구네를 도와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어두움을 이용하여 마을 뒤편에 있는 오솔길로 조용히 빠져나가 길남이네가 살고 있는 곳을 찾아 가보았는데도 나는 나의 앞의 그의 집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어데 집이 있소?"하고 물으니 길남이가 그개(그거야.)그개, 하는 것이다. 나의 발 앞쪽을 찬찬히 내려다보니 옛날 묘지 비슷하기도 한 것이 어렴풋이 보이였다.

초막문 앞쪽에는 엄아바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듯 석쉼한 목소리로 " 오시느라 수고많았소"하면서 나에게로 오신다. 나는 그분께 어려운 곳에서 고생을 많이 하신다고 하면서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분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이곳에서는 한 달가량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는 내가 아는 분이 자기네 집에서 함께 일하자고 수차례 말하기에 그럼 내가 도와주는 셈치고 조금 있겠다고 하여 춘국이네 집에 있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