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5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5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나는 서울 한남동에 있는 주한 몽고 대사관을 찾아가 브 락바 령사님을 만나 나의 사연을 말씀드리면서 몽고 정부와 인민들이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란다고 하면서 몽고 국가 대통령과 총리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여 드렸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존경하는 대통령님께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와서 정착하고 있는 북한 이탈주민 유상준 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모진 굶주림 속에서 처와 막내아들을 잃고 맏아들 유철민이와 함께 1998년4월 북한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서 살아가는 과정에 중국공안의 계속되는 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어린 아들을 남의 집에 맡겨두고 일자리를 찾아서 피신하면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두리하나 선교회 대표를 만나2000년 12월15일 한국으로 오게 되였습니다.

저는 한국에 왔지만 살벌한 중국 땅에 두고 온 어린자식 걱정에 순간도 마음 편히 살지 못하면서 수소문 끝에 철민이를 찾았지만 철민이는 끝내 한국으로 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으로 오기 위하여 철민이네 일행은 몽골로 가던 중, 길을 잃고 헤매면서 심한 굶주림과 탈진 속에서 방황하다가 몽골로 들어갔지만 어린 철민이는 그 과정에서 심한 탈진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태어나서부터 늘 배고픔 속에서 살아온 어린 철민이는 언제 한번 밝은 웃음도 지어보지 못하였으며 중국에서는 공포와 불안 속에 떨며 숨어 지내다가 자유의 세상을 눈앞에 두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꽃망울 같은 어린 꿈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몽골사막에 묻혀있을 어린자식을 생각 할 때마다 저는 깊은 자책감에 빠져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언제인가는 반드시 철민이의 소원대로 꿈속에서도 가고 싶어 했던 조국, 대한민국으로 그의 유해라도 이송하여 편히 잠들게 하고 싶었습니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북한 땅을 벗어나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어린 소년의 마지막 꿈이라도 이루어 질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로서 어린 자식의 마지막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이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탈북소년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부모로서의 마지막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몽골정부의 아량과 협조를 바랍니다.

몽골 인민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유 상 준 올림.
2003년 6월 12일.

나는 주한몽고 대사관에 편지를 진정할 때 사인원인. 부검결과 확인서 등을 원문 그대로 주실 것과 내가 자먼누드에서 원만히 일을 볼 수 있도록 정부의 협조를 당부하였었다. 내가 몽고정부에 보내는 편지를 번역하여 주한 몽고대사관에 진정한 이후 한달정도 있다가 한국의 모 기관에서는 지금 몽골은 휴가철이고 정세가 편하지 않으니 소식을 다시 드리면 들어가도 좋으니 모 선교회에 도움을 청하여 함께 오도록 하라는 것이였다.

8월말 나는 울란바타르를 경유하여 자먼누드에 갈수 있었으며 그곳에서 내가 지나왔다고 판단되는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 길에서 얼마나 많은 탈북자들 삶과 죽음의 싸움을 하면서 그대들의 앞길에 무엇이 기다려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선을 넘어온단 말인가? 이것이 오늘 날의 현실이고 이 현실 속에 우리 철민이가 아버지를 찾고 부르며 잠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이 아팠다. 너의 령혼만큼은 아름다운 세상에서 조용히, 그리고 편안하게 잠들거라. 몽고 비밀방첩국 부국장은 나이가 많으시고 점잖게 보이시는 분인데 아마 어린 자식을 앓은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려서인지 모든 일들을 잘 준비하여 주셨고 우리가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전 기간 직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친절하게 보살펴 주셨다. 오늘날, 이 지면을 통하여서라도 그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정중히 드린다.

나는 주몽 한국대사관에 가서 몽고정부에 의뢰한 사인원인과 부검결과를 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대사관측에서는 그런 것을 모른다고 대답한다. 나는 다시 한번 내가 몽고정부에 의뢰한 문건을 돌려 달라, 그것은 내가 몽고 정부에 공식적으로 의뢰한 것이니 당신들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다 고 말하였지만 대사관측에서는 아주 전혀 처음 듣는 소리인 것처럼 모르쇠를 하고 있다.

나는 격분하여지면서 당신들이 못주겠다고 하면 나는 이 자리에서 돌아가겠다, 빨리 달라고 하니 그때에야 담당 형사인 듯한 사람이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황급히 달려가는 것이었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니 형사인 듯한 사람이 서류봉투를 꺼내어 나에게 주는 것이었다.

나는 봉투안의 서류를 몇 장 꺼내어 보내 모두 영문으로 되어있다. 나는 그에게 여기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고 물어보니 자신은 모른다고 한다. 아마 그는 그 문건을 읽어보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근 시간 반 넘게 대사관에 있으면서 이것이 우리 외교의 현실이고 이것이 밥 먹고 국민 섬긴다는 공무원들의 행실이라고 생각하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하게 느껴진다. 이제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자, 나는 대사관에서 소개하여 준 숙소에서 하루 밤 쉬고 다음날 아침 서울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가 있었다.
내가 집에 도착하니 나를 친동생마냥 대하여 주면서 나의 모든 것을 걱정하여 주시던 405호집 아저씨가 뇌사상태가 되여 병원에 실려 가셨단다.

인천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김승희님이 함께 저의 집에 왔지만 옆집 아저씨가 한림대 병원에 입원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한림대 병원에 가니 김승희님도 저를 따라 함께 병원에 가겠단다. 우리가 병원 중환자 입원실에 들어서니 옆집 아저씨는 의식 불명상태이고 여든이 훨씬 넘은 할머니가 아들 곁을 지키고 있다가 반색을 하시면서 반기신다. 운명을 앞둔 아들의 옆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읽어줄 사람을 기다렸던 같다.

승희는 할머니의 집에 가서 자기의 손으로 할머니에게 음식을 만들어 올리고 싶다고 하는 것을 내가 반대하여 우리는 식당에서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한국은 사람들의 마음씨도 착하고 아름답다. 아마 그런 마음들이 있어서 이 세상을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깊은 밤 나는 혼자 외로이 앉아 너만큼은 이승보다 더 좋은 천국에서 편히 살라고 말한다.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김성민 (현 자유북한 방송국 대표)형과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 협회 허광일 회장님이 철민이 추모식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주시였다. 나는 성민형과 함께 철민이 유해를 가지고 오두산 통일 전망대로 향하였다. 우리가 나서 자라고 아름다운 꿈만 꽃피울 줄 알았던 우리의 고향은 김정일 독재의 신음 하에 폐허가 되였고 살아서 돌아가려고 하여도 갈수 없는 한 많은 땅, 원한의 땅이었지만 회귀본능이랄까 죽어서도 묻히고 싶은 고향인지라 성민형과 허광일 형은 철민이가 죽어서도 잊지 못하였을 고향땅을 바라보며 편히 잠들기를 바라면서 북한 땅이 지척에 보이는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서 추모식을 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오두산 통일 전망대에는 벌써 수많은 탈북자들과 북한인권관련 단체 회원님들이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추모식장은 어린 영혼의 평안을 기리며 정숙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추모식은 탈북자동지회 대외협력 부장 김민수님의 사회로 시작되었고 묵념과 천기원대표의 추모사와 성민형의 추모시로 막을 내리였다.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철민에게 바치는 시.

봄내 가으내,
너를 기다린 사람이 있다.
하루 한시도 잊지 않고
네 이름 불러온 사람이 있다.

예쁜 신발 보이면
마르고 터진 아들 녀석의 발이 떠오른다고
눈시울 적시던 사람,
학교길이나 학용품 가게 앞에선
그예 넋을 놓고 멍하니 북녘 하늘을 바라보던 사람,
그렇게 한시도, 단 하루도 너를 못 잊어하던 아비 앞에
무정한 녀석아, 너는 죽어서...
죽어서야 돌아왔구나.

아버지를 찾는 길이 그렇게 힘들더냐
자유를 찾는 길이 그리도 험악했더냐
단지 살아야겠다는 이유 하나로 고향을 떠난 너에게
삶의 길은 그렇게 꽉 - 막혀 있었더란 말이냐

제도는 무엇이고 이념이란 대체 무엇이기에
열두 살 어린 너를 사막에 묻혀야 했는지
한 치 한 치 저 목 타는 사막을 너 기어가는 동안
이 나라의 아비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철민아! 너 지금 준절이 묻고 있구나,

이제 눈을 편히 감아다오.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이 슬픈 현실 앞에서
주먹을 틀어쥐는 아비들을 믿어다오.
더 이상 아비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없게 하기 위하여
더 이상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 죽는 자식이 이 땅에 없게 하기 위하여
자유의 제단에 맹세의 꽃 정히 얹는다.
불러도, 불러도 답이 없는 철민아 !
너 못 누린 삶의 무게만큼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지켜봐다오,
너의 영혼
편히 눈 감을 때까지 자유를 향한
우리의 맹세를 지켜봐 다오.

추모식장은 추모사와 철민에게 바치는 시 랑송으로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어린 소년의 비참한 죽음과 자신들이 걸어온 쓰라린 지난날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살아서 다시 만나볼 수 없는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한 심정에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성민형은 철민이 추모식을 위한 일정을 짜고 온밤을 자지 못하고 눈물로 추모시를 쓰고는 지우고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하였단다. 나는 오늘 이 지면을 통하여 철민이의 추모식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움을 주신 오두산 통일 전망대 관계자분들과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셨던 성민형과 허광일 형님께 무엇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고마웠고 또 고마웠다.

이제는 내가 하여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하여 나가면 된다. 여권 발급문제는 국가 인권위원회에 진정 하였으며 인권위는 모든 것을 잘 알아서 처리하겠단다. 이번 중국 여행은 단순히 탈북자 실태조사와 일군을 어떻게 선택을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내가 중국에서 숨어 지내던 때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럿으니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졌을 것이고 탈북자들의 지방 분포 정형도 대충은 감을 잡아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나는 부득이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원을 하지 않고 곧 돌아서 나올 것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물품들은 탈북자동지회에서 잡지"탈북자들"과 황장엽 선생님의 저서 몇 권, 탈북자들에게 공급하여 줄 옷 30 Kg 정도를 준비하였다. 이미 중국에 알고 지내던 지인에게 어느 곳에서 친척 확인 전화가 오면 당신의 친척이 중국방문을 온다고 대답하라고 미리 이야기는 하여 주었기에 친척방문으로 비자 발급은 별로 문제 될 것 같지를 않았다.  그때만 하여도 처음 중국으로 들어가기에 비자 신청 발급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고 하여가장 손쉽고 또 몇 달 간의 기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친척 방문 비자를 신청 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부터는 친척방문 비자를 신청하지 않고 별도로 1년 복수 비자를 신청하여 체류기간의 제한이 없이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엇다. 중국을 출발하기 전 김성민 국장님과 주선애 교수님이 몸 조심히 잘 다녀오라고 자신들의 정성이 담긴 후원금을 나의 손에 쥐여 주시였다. 나는 중국어도 모르고 통역도 없이 중국에서 다녀야 하기에 조금은 걱정이 되였지만 일단은 첫 걸음을 밟으면 그 다음 일은 어떻게 되는대로 맡기면서 하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인천 -대련행 배에 올랐다.

배가 대련항에 도착하자 나는 짐칸에 놓아둔 옷 지함을 찾아들고 세관으로 나가는데 검사대까지의 거리가 멀고 경사가 가파로워 짐을 메고 나가기가 만만치 않다. 세관을 빠져 나오자 급히 택시를 불러 세워 타고는 역전으로 향하였다.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중국의 각 철도 로선에 대한 렬차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고 있었으며 대련항에 내려 급히 서두른다면 대련-도문행 렬차를 탈수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아니 되지만 2003년경에는 배에서 내려 급히 서두르면 대련-도문행 렬차를 능히 탈수가 있었던 것이다.

언어 소통이 아니 될 것 같아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오래전에 듣고 자습한 덕분인지 그런대로 차표를 끊고 간단한 회화를 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가 않아 다행이었다. 내가 가는 목적지는 연변이다. 그곳에서 3년 세월을 노예로 살았고 모진 매도 맞아 보았다. 그곳에서 탈북자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던 것처럼.

렬차는 아침에 연길역에 도착하였고 나는 서둘러 왕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제가 알고있던 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에 비하여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연길시 의란진을 막 벗어나는 길목에서 몇명의 군이들이 버스를 멈춰 세우고 일일이 려행객들을 살펴보고 있다. 내가 여기를 수없이 지나다녀 보았지만 예전에는 없던 검사가 진행되고 있으니 탈북자들이 여기저기로 자유로이 다니기가 어려울 것 같았고 특히 담이 약한 탈북자들은 영낙없이 잡히게 되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청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지인의 집에 도착하니 그분이 얼마나 반갑게 맞아주는지 들떠있는 분위기가 정말 놀랍고 뜨거웠다. 아마 온전히 살아남을 것 같지 못하던 사람이 기적같이 살아서 그 무엇인가 하여 보겠다고 다시 험한 중국에 온 것이 장하고 대견스러워 그리도 기뻐하시고 반가워하신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의 있었던 일들을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였다.그분은 내가 보내준 돈으로 탈북자 부부가 해산을 할 때 정말 요긴하게 사용할 수가 있어 해산을 순조롭게 하였다는 등 나머지 돈으로는 자기의 아들 고등학교에 보내는데 사용하였다고 하면서 정말 감사해 하였다.

내가 한국에 나와 받은 첫 정착금에서 한국 입국비용200만원을 드리고 H사장님께 300만원을 탈북자 지원에 사용하라고 보낸 다음 제가 어려울 때 일자리 구해주시고 식료품을 가져다주신 이 분께 100만원을 생활에 보탬을 하라고 보내드린 것이었다.
아마 주변에 살고 있던 탈북자 부부와 어려운 탈북자 몇 분을 도와주신 것 같다.
나는 그분께 앞으로 내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려고 하니 부모 없는 탈북 어린이나 자립이 불가능한 탈북자들을 소개 하여 주시고 그들을 잘 돌보아 달라고 말씀을 드리었다.
그분은 현재 자기가 아는 아이들이 두 명이 있는데 한국교회나 선교사들이 그들에 대하여 지원을 하여 주시면 좋겠다고 하면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어려운 점들을 차근차근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한국생활에서 체험을 하고 느꼈던 것 그대로였다. 우리는 먼저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여자아이를 보기로 하고 찾아가보니 그 집은 내가 동광쑤니창(세멘트 공장)에 다니다가 병들어 일을 하지 못할 때 돈을 받지 않고 뜸을 떠준 농부의 집이 였다. 그 농부는 정말 마음이 곱고 어려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있었으며 탈북자들에 대한 걱정이 많으시던 순박한 농민이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인 어머니가 반가워하시며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끌어안고는 기뻐서 어쩔줄 몰라 하신다. 나는 그분들께 많은 신세를 지였던 사람이고 하여 지난날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는 조선에서 온 아이를 보려고 왔다고 말씀드렸다.
주인 어머니는 윗방에 있는 한 여자애를 가리키면서 "야가 조선에서 온 아인데 아버지 엄마 는 아를 여기다 나두고 어디로 간지 모르겠소, 대 여섯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소, 잡혀갔는지? 영 소식이 없소" 라고 말씀하시는데 불편한 기색이 확연히 알리 였다. 내가 방 위쪽을 바라보니 작으마한 여자애가 컴컴한 ( 어두운)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얼굴이 까마짭짤하게 생긴 것이 양기가 전혀 없엇고 누군가 갑자기 자기가 있는 집에 들어오니 당황스러웠던지 몹시 불안해 하는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로 가서 "한번 안아보자" 고 말하면서 아이를 꼭 그러 안아주었다. 찬찬히 보니 그 아이는 사실 령리하게 생긴 아이인데 부모 잃고 남의 집에 있으니 기가 죽어 펴지 못한 것이 였다, 우리는 둘러앉아서 여자애가 몇 살인가? 조선에서 어느곳 에 살다가 왔고 아버지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가를 하나하나 물어보았다. 여자애는 13살이고 부모들은 이 근처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아이를 문 앞에 맡겨두고 어디론가 떠낫단다. 나는 아이가 불쌍하고 처량하게 느껴지였고 우리 철민이도 이렇게 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나 가슴이 아파났고 그래서 더욱 이 아이를 어떻게 하나 학교에 보내어 공부를 시키시면 학자금과 생활비는 내가 대여 드리겠다고 말씀 드리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옥별이었고 주변의 소학교에서 공부하다가 한국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우리는 저녁이 다 되여 왕청현 대흥구로 갔다. 그 곳에는 철호라는 아이가 있단다. 부모님은 어디로 가시고 그 아이를 어느 교회의 전도사가 맡아 키우고 있는데 너무 힘들어하신단다. 대흥구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한 남자 아이가 대리목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아이가 보였는데 행동거지를 보면 영락없이 조선 아이가 틀림이 없다.

차가 다리목 근방에 오니 함께 동행하시던 선생님이 차를 세우게 하시고 내리여 "철호야, 여기 오라"하고 소리치는 것을 보면 그들은 서로가 잘 알고 있은 것 같다. 철호도 부모님을 따라 중국에 왔는데 3형제 중에서 맏이였고 철호 밑에 철령이 철웅이 두 동생이 또 있단다. 철호는 부모님과 두 동생이 어느 곳에 가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말을 하기를 싫어하였다. 철호는 한족 할아버지와 조선족 할머니가 사는 집에서 같이 살고 있는데 그 집 내외분이 다정치 못하여 어린것이 그 집에 있기가 몹시 불편하였던 것 같다. 나는 왕청을 나와 화룡으로 가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여 보았다. 생각 하였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탈북 어린이들이 있을 것 같은 감이 들고 내가 중국을 떠날 때 보다 더 아니 좋은 상황에서 탈북자들이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밤 늦어서 나는 화룡에 도착하였고 그전에 알고 지내던 분의 집에서 쉬기로 하고 그 주번 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집 주인분의 이야기는 열기에 올라서 장황하다. 누구는 한국가고, 누구는 잡혀가고, 또 어떤 이는 조선에 잡혀갔다가 다시 와서 어디서 무엇을 한다고 상세하게 말한다.

그러면서 "유무고래에 가면 땅굴 파고 사는 아들이 얼마인줄 제 아오? 말 못하오" 하면서 이야기 하는 것이 탈북자들이 살아가는 비참함과 동정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유무고래는 내가 잘 아는 곳이다. 북한을 나와 중국에서 첫 일자리를 잡은 곳이며 그곳에서 42일간 철민이를 데리고 소 방목을 하였으므로 그곳 지형은 지금도 손금 보듯 환하다, 화룡시 부흥향(지금의 룡성향) 룡서촌(시거마을)에서 북서쪽으로 자그마한 고개 두개를넘어가면 유무고래이고, 유무고래 끝자락에는 한족사람들의 소 방목지가 있고 산 비탈면은 경사가 급하여 사람들이 다니기가 힘든 곳이다.

탈북자들은 한줌의 쌀을 구하기 위하여 그 먼 유무고래 산에다가 땅을 파서 굴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거마을에 내려와 삯일을 하고는 그 대가로 쌀이나 채소, 된장과 간장 같은 기초 생활필수품들을 구해다가 먹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가라고 하여야 자기가 일한 것을 매일 받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느 집에서 며칠을 일하고 쌀과 채소를 얻어 가는데 그 값어치는 탈북자들이 지불한 로동력 지불의 5/1- 10/1 밖에는 아니 되였다.

1998년 5월에 그곳에서 내가 초막에서 살 때에만 하여도 탈북자들은 자기가 일하는 집에서 함께 먹고 잠을 자면서 집주인들과 함께 일하러 갔으며 1999-2000년 까지 볼일이 있어 그것에 자주 가보았어도 땅굴에 사는 사람들은 없었다. 3년  후의 오늘날은 완전히 변하여 여기 저기 땅굴이나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숨어사는 신세가 되였으며 어데를 가도 찬밥 한 덩어리 얻어먹기 힘든 상황이 되여 버렸다, 나는 그곳에 있는 탈북자들의 생활정형을 듣고 난 다음 이번 길에는 탈북자들을 만나지 않기로 생각을 하였다.

탈북자들 중에는 나의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탈북자 지원보다 실태 료해 차원에서 들어 왔기에 그들에 대하여서는 다음 기회에 만나고 도와드리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본 결과는 한국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탈북자 지원을 한다는 선교단체나 인권운동을 하시는 분들중에 잘못된 정보를 가공하여 확산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게 되였다.

중국에서 체류하는 전 과정에 나의 머리 속에는 어두운 방에서 축 처진 어께를 드리우고
왜서인지 그리도 불안해하며 떨고 있던 옥별이 모습이 자꾸만 생각나군 한다. 그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이지 계속 중국에 놓아둔다면 저 아이도 크면 반드시 노예로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노예로 살았고 지금도 수많은 노예들이 한마디의 항변이나 저항도 못하고 공안에 잡혀가고 임금을 요구하였다고 하여 매를 맞고 고발당하고 쫓겨나고. 옥별이도 크면 피할 수가 없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옥별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중국분들께는 말씀드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 옥별이와  철호는 한국행을 하여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2004년 1월초에 백두한라회장으로 일하면서 자유북한 방송국 개국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성민형에게 메일과 전화로 여기 사정을 말씀드리면서 옥별이와 철호를 안전하게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중국 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재정부분은 내가 담당하겠으니 선을 빨리 찾아달라고 하였다. 몇일 후에 부모 없는 아이들을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연락이 나에게로 왔다. 도와주시겠다는 분은 백두한라회에서 봉사 활동도 함께 하여 본적이 있는 민규선생이 였고, 우리는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이제 몇일후 이면 아이들을 옮겨놓을 장소도 마련하여야 하고 어린 아이들을 책임지고 데려가야 될 사람을 선택하여야 하는데 나로서는 처음 하는 일이라 아이들을 데려 가다가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한번은 목단강쪽에 가서 일을 보고 있는데 동씨가 나보고 급히 룡정으로 오라고 하면서 말하는 것이 자기의 아들이 룡정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에게 인질로 잡힐 위험이 있으니 네가 도중에서 자기의 아들을 가로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빼돌려 달라고 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더구나 자기의 아들이라고 하니 나는 급히 룡정으로 돌아와 동씨를 만날 수가 있었다. 긴 이야기를 나눌 사이도 없이 동씨의 아들을 빼돌려 놓을 집부터 확인하고는 공농촌 근방에 있는 다방으로 갔다.

동씨와 동씨의 아들을 데려오는 것을 주선하는 사람은 다방 안에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하는데 더 쉽게 말하여 돈을 더 달라고, 돈을 깎아서 받으라고 하는 내용을 자기네 나름대로 의 외교용어를 쓰면서 지루하게 말하고 있다.

얼마 후 동씨의 아들을 태운 택시가 나타나고 일행들이 차에서 내려 이러저러한 말을 하는 사이에 나는 동씨의 아들을 택시에 태워가지고 골목으로 빠져 나갔다, 그 다음날 동씨의 아들을 북경으로 데려갈 사람이 우리가 있는 집에 왔었고 그는 자기네는 경찰을 끼고 어쩐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사기였고 그런 사람들에게 탈북자들을 맡겼다가는 큰일 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람이 화룡과 룡정에서 이름 있는 브로커란다. 동씨는 그 브로커와 함께 북경에 갔다온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그 브로커는 차 칸에서도 경찰이 오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서 피하고 려관에서도 함께 있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보려고 하여도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이 였다.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하였기에 나의 일군과 나만큼은 언제나 탈북자들과 함께 하였다, 한국에서도 많이 듣고 중국에서도 직접 보니 일군을 잘 선택하여 세우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하여 진다. 나는 큰 품을 들이지 않고 아이들을 몇일간 돌보아 주겠다는 분을 찾을 수가 있었고 왕청에 계시는 분에게 몇 일 날까지 아이들을 저녘 늦은 차를 이용하여 연길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다음날 낮에 나에게 한통의 전화가 왔다. 아이들을 당장에 빼여 돌리지 않으면 큰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급해하는가? 물어보니 철호가 있던 집 내외 로인이 철호가 다른 곳으로 가면 후원금이 없어지고 생계가 곤란하여 지기에 철호가 자기의 집에 서 나가면 즉시 공안에 신고 하겠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녘 늦은 차로 연길에 아이들과 함께 나오시면 내가 아이들을 받아서 돌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연길로 나가서 아이들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이제 아이들이 오면 마음을 안정시키고는 그들이 입고갈 옷을 장만하면 된다.

나는 약속시간이 되여 연길시의 모 지점에 나가서 철호와 옥별이를 만날수가 있었고 동행하여 오신 분과 함께 아이들이 있을 숙소로 향하였다. 옥별와 철호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 보다 많이 환해진 것 같고 아이들도 어디론가 좋은데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즐거워하고 있다. 함께 오신 선생님은 철호가 있던 집에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여 철호를 자신이 아는분네 집에 숨겨두고 온밤 쉬지 못하고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그날 밤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북경에 데려 갈수 있겠는가를 오랜 시간에 철쳐 토론을 하였다. 옥별이를 데려온 선생님이 철호와 옥별이를 아들딸처럼 위장하고 아이들이 갖고 있던 학생증은 목에다 걸어 사람들이 다 볼 수가 있게 하며 렬차는 북경행 렬차의 침대를 타고 가면 될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였다. 문제는 룡정에 있는 젊은 여자다. 그녀는 중국에 온지 6년이 넘었는데 중국어도 모르고 남편과 함께 구룡의 깊은 산에서 소나 방목하면서 살았기에 남편의 도움도 받기가 어려웠다. 나는 생각끝에 남편되는 사람을 만나 내가 당신을 생각하여 북경까지 여자와 함게 갈수 있께 도와주겠는데 북경 까지는 렬차 침대를 태워줄것이며 침대표값은 내가 부담을 하겠으니 돌아오는 차표는 당신이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하니 그는 감사하여 몸둘바를 몰라한다.

북경에는 몇시차로 출발할 것이니 렬차시간을 맞추어 역전에 나오셔서 대기하여 주실것과 가끔씩 전화 연결을 유지하자고 말씀드렸다. 오후 늦으막한 시간에 우리는 연길역에서 무사히 북경행 렬차에 오를 수가 있엇으며 나는 침대 구조와 자석번호를 확인한 후에 나와 인솔자 선생은 마주 앉고 선생의 량 옆에는 옥별이와 철호를 앉히여 한 가족이 려행을 떠나는 것처럼 하였다. 우리 뒤편 침대칸 2충과 3층은 젊은 여자와 남편이 하나씩 가지고 누워서 가라고 하였고, 렬차 안의 분위기를 몸에 익힌 다음 침대 맨 위쪽에 올라가 두 부부가 그러안고 잠을 자되 누군가가 깨워도 일어나지 말라고 당부를 하였다. 내가 말하고 돌아서자 이들 부부는 3층에 올라가 서로 끌어안고 누워서는 꿈쩍도 않는다.
아무리 바빠도 분위기 파악을 하고 누워야지 침대에 오르자 곧 둘이 끌어안고 누워버리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닌가?

나는 렬차에 오르기 전에 사 두었던 중국 잡지들을 그 부부에게 주면서 지금은 각자 자기 침대에 있으면서 책을 보는척 하다가 렬차가 떠날 쯤에 3층에 올라가라고 말하였더니 그리하겠다고 대답하고는 금방 3층에 올라가 누워버린다. 그의 남편은 렬차란 것을 생전에 처음 타보았고, 너무나 어리숙한 사람이었다. 경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성경의 말씀이 옳다고 말하여 준다. 아무리 한국에 가고 싶어도 정신 의지적으로 준비되지 못하면 열린 길도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함께 동행하시는 분들께도 위험을 끼칠 수가 있다. 지금 한국에 오시려는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100% 안전을 담보하여 줄 것을 바라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은 중국 경내 어느 곳에도 없으며 단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나가고 그때그때 대처 할 수 있는 요령들을 습득하고 인솔자의 의도를 잘 알고 그에 맞게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을 인솔하고 다녀 보면 어떤 분들은 경찰을 보기만 하여도 떨면서 머리를 들지 못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사고날 확률이 아주 높아지게 된다.

옥별와, 철호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렬차안에서 유쾌하고 즐겁게 마냥 웃고 뛰어다닌다. 두려움에 떨기 보다는 백배는 나은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몇 시간 뒤에 마음의 평안을 가자고 려행을 즐길 수가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한창 재롱을 부리며 공부하여야 할 이 어린 아이들이 삶의 길을 찾아 자유를 찾아 위험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부모와 같은 인솔자의 품에 안겨 고이 잠들어 있다. 너희들만큼은 한점 그늘이 없이 밝게 웃으면서 살아가거라.(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