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4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4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령사님은 내가 말씀드리는 것을 일일이 다 받아 적으시고 한국에 전할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하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허광일 회장님과 또 다른 한분에게 나의 소식을 전하여 달라고 하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말씀 드렸다. 나는 일상적으로 전화번호 하나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 전화번호 수첩에서 3명의 전화번호를 짧은 순간에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전화번호가 틀림이 없는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어 만약 허광일 회장의 전화번호가 틀리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 협회를 찾아 허회장께 나의 소식을 전하여 주실 것과 날씨가 추워서 어려우니 겨울옷을 한 벌만 공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누구도 나의 석방을 위하여 일하지 말 것을 당부드리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허광일 회장을 찾은 것은 중국에서 일하다 잘못되면 모든 것이 끊어지니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허광일 회장께 북한의 모모 씨의 전화번호를 남겨놓으면서 나와 연결이 끊어지면 자동적으로 내가 남겨놓은 전화번호에 전화를 하되 무슨 요일 몇 시에 전화를 하되 서로가 이름을 묻지도 말고 밝히지도 말고 전화를 하면서 일을 하여 주실 것과 한국에 나오는 누구를 찾아서 잘 키워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내가 9월로 예정하였던 청도에 있는 탈북자들도 5-6명이 대기 하고 있는 상태인데 그들이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있도록 하자면 허광일 회장에게 소식을 알려주어야 허회장이 나의 부탁을 받고 어떻게 대책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중국에서 일할 때 허형이 나의 신변문제로 많은 걱정을 하여 주시였고 그분이 자신이 돕고 있던 탈북자들 몇 명을 나에게 부탁을 하시여 내가 3국 탈출을 성공시켰다.

우리는 표면상 탈북자들의 3국 탈출을 실행하고 있었지만 최종목표는 변함이 없이 북한이였다. 북한은 변할 수가 없는 우리들의 목표이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서라도 인민들의 의식 변화를 유도하고 북한 민주화를 위한 씨앗들을 만들고 심는 일은 쉬지 말고 꾸준히 하여 나가야 할 중대한 일들이었다. 허광일 회장님도 늘 북한의 민주화는 말이 아니라 실천에 어떻게 구현하겠는가를 강조하여 오셨기에 나는 그에게 비상연락망을 알려주고 움직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던 것이다. 령사님께 제가 드릴 말씀은 다 드리고 나니 령사님은 나에게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올 것이며 재판 할 때에 자신이 오지 못하면 다른 분이라도 재판에 참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

3명의 탈북자들은 현실적으로 대한민국 국민으로 등록도 되지 않고 국제 관계문제가 있으니 어렵지만 그들의 강제 북송을 막고 한국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을 다 하시겠다고 하신다. 령사님은 나의 건강과 식사 등 생활에서 어려운 점 들이 있는가를 꼼꼼하게 알아보시고 장미숙이 여기 간수소에 있는데 그가 식사가 입에 맞지 않아서 몹시 고생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령사님은 나의 수감소 생활의 어려움을 진심으로 가슴 아파하시고 도와주시려고 하시였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령사님께 간수소에 이야기 하셔서 성경책을 볼 수 있게 도와 달라, 이놈들이 나의 책을 빼앗고 주지 않으니 령사님이 한권을 구하여 보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리니 령사님은 자신이 북경에 돌아가시면 나의 옷과 성경책. 그리고 한국의 고추장과 한국제 라면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감옥에 들어와서 령사님과 대사관에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옷과 성경책만 보내주시고 라면이나 고추장은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령사님은 떠나시면서 나의 이름으로 간수소에 300원의 돈을 맡기시면서 필요한 생필품을 사는데 사용하라고 하실 때 먼 길에 오신 것도 미안하고 감사한데 나의 수감생활을 걱정하시면서 도와주시니 정말 무엇이라고 말씀 드릴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살아가던 그 몸 그대로 나는 중국에서 노예로도 살아보았고 한국에서 국적을 취득한 이후에는 한국인으로써 중국에서 일할 수가 있었다. 오늘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하여도 한국이라는 국가의 보호가 있으니 언제인가는 형식적이든 내실이 있든 나는 재판을 받을 수가 있고 발언권을 가지고 변론을 할 수가 있다.

만약 내가 탈북자로서 중국에 체포되었다면 어떻게 되였을까? 나는 구속 영장도 없고 기소도 없이 재판은 꿈에도 상상도 할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떠올랐고 감사하였다. 나는 언제인가 판결을 몇 년을 받든가? 아니면 추방이라도 될 수 있지만 나와 함께 떠났던 일행들은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 한 반도에서 같이 태어나 우리는 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나는 한국의 보호를 받을 수가 있고 은심이. 영옥이. 갈량이는 그 어떤 보호도 받을 수가 없다. 그들은 재판에 대하여 상상도 못하고 자기의 의지는 빼앗기고 살아서 다시 햇볕을 볼 수 있다는 담보가 없는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는 것이다.

정말 생각하기에도 너무나 끔찍스러운 것이 멀리도 아닌 바로 나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령사님께도 말씀드렸고 수잉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하니 그들이 한국에 함께 갈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여 보는 것 외에는 나는 너무나 연약한 존재였다. 그들도 인간이며 우리의 형제들이다. 그들에게도 삶의 권리는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일행의 강제 북송만큼은 반드시 막고 그들에게도 삶의 길이 열리기만을 바랐다.

령사님이 가신지 며칠이 지난 9월10일. 오전 오늘은 한낮이 다 되어 수잉지와 기록수, 그리고 통역이 나타나서 지난 기간 조사한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차 조사를 하는 것이다. 조사라야 지난 가간에 자기네 질문하고 내가 대답한 것을 반복하여 읽어주면서 확인하고는 손가락 지장을 찍으란다. 변방공안국 조사에서는 내가 3명의 탈북자와 련관된 것 외에 더 이렇다 할 것들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공안국에서 나의 가명을 집요하게 물어보았지만 나는 가명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끝까지 거짓 진술하여 그들도 알고 속아 넘어가는 눈치였다. 수잉지가 창문 쪽에서 서성거리며 무엇이라고 중얼거리고 있다. 통역이 나에게 이제는 조사가 다 끝났으니 네가 탈북자 몇 명을 탈출시켰는가?고 솔직히 말하여 보라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단신으로 70명 정도 3국으로 보냈으며 보호하였던 탈북자 수는 최소 300명 이상이니 당신네 북경 공안국에 누구누구 확인하면 그것이 다 내가 보호하고 있다가 3국 탈출을 시키기 위하여 브로커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내가 단독으로 일한 것이 70명이다. 그들은 배가 고파 중국에 왔다가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붙잡아 북한에 보내니 그들이 살기위하여 한국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니 나와 함께 가던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갈 수 있게 적극 노력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다음날인가? 간수소 경찰이 나를 불러 내여 조사실에 가보니 두 명의 여자가 무슨 서류인지 책상위에 놓아두고 내가 들어가자 수감자 걸상에 앉으라고 한다. 나는 이 여인들은 무엇을 하는 여자들인 가고 생각하는데 통역이 이들은 시린궈러멍 인민검찰원 검사들이며 나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다. 검사는 젊은 여인인데 보기 드문 정도로 아름답게 생긴 여성이 검사란다. 그들은 내가 군인들에게서 조사 받은 내용을 확인하고 싸인을 받으니 검찰원 조사는 끝이 난다.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조사가 끝난 것이다. 나는 검사들에게 다시 한 번 나와 함께 동행한 북조선인들은 난민이니 중국정부와 해당기관에서 그들의 한국행이 이루어 질수 있도록 적극 노력하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지금까지 공식 확인된 탈북자 3국 탈출시킨 수는 27명으로 되여 있다. 이것이면 이들은 나에게 7년 이상의 형을 안기고도 남을 것이다. 나는 군인들의 조사에서 2007년부터 탈북자들을 몽고로 보냈다고 하면서 매달 한 팀에서 한두 명씩 줄여서 진술하였던 것이다.

지금 많은 탈북자들이 몽고에 가면 무조건 살아남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중국에 체류 중인 탈북자들에게 알려드리고 싶다. 몽고에서는 탈북자들이 자기네 경내에 들어오면 경우에 따라서 탈북자들을 다시 중국으로 송환하는 경우가 있으며, 탈북자들이 많이 넘어오는 곳에 대하여서는 중국측에다 국경경비질서를 강화하여 달라고 통보를 보낸다. 내가 군인들에게 조사 받을 때에도 40x35Cm규격의 수 백 쪽 되어 보이는 책자를 앞에 가져다 놓고 내가 넘겨 보냈다고 판단되는 탈북자들의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집으면서 네가 보낸 사람들이 맞는 가고 확인을 한다. 나는 그 책자를 통하여 2006년 가을부터 2007년6월까지 내가 넘겨 보낸 사람들의 사진을 볼 수 있었으며 중국과 몽고 사이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이런 국경질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책에는 사진을 복사하여 붙여놓고 일일이 현대 몽고어로 무엇이라고 글을 달아 놓았으며 가끔씩은 현대 몽고어로 된 글을 중국어로 일부 번역하여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사진자료에는 내가 보낸 팀만 따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고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함께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것이거나 혹은 신분증 사진처럼 찍어서 복사하여 책을 만든 것이었다. 그 책에는 적게는 수 백 명 이상의 탈북자들의 사진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자들이 내가 보낸 탈북자라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내가 보낸 탈북자는 모두 몽고어로 된 소개신을 가지고 있다. 둘째로, 내가 보낸 탈북자들은 한 팀에 한대, 혹은 두 대의 휴대용 전화기를 지참시켜 보냈고,,그들이 방향을 잘못 잡을 경우 내가 중국쪽에서 전화로 방향을 수정하여 주거나 역전이나 군부대에 들어가라고 지령하여 주었다.

셋째로는 모든 탈북자들이 국경선을 넘어가는 방법과 략도를 충분히 숙지하도록 하였으며 한 팀에 중국제 군용 나침판을 한 개씩 주어 대오를 이끌 책임자가 나침판으로 조를 이끌도록 하였다, 등 공통점이 있는데 아마 몽고쪽에서 그와 같은 자료를 다 적어서 보낸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는 중국 군인들이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보낸 사람들만 꼭꼭 집어서 네가 보낸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가 없다. 분명히 몽고에서는 모든 자료를 다 보내온 것이다. 아마 중-몽 국경협약에 이러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2006년도 팀들은 무조건 모른다고 잡아떼고는 내가 2006년12월에 처음으로 국경선을 정찰하고 2007년 1월 중순부터 3-5명씩 데리고 다녔다고 진술하였다. 이렇게 조금 조금씩 인원수를 줄인 것이 27명이 되였던 것이다. 이제 15-30일 안에 재판이 열리게 된단다. 매도 첫 매에 맞으랬다고 모든 것을 빨리 끝장을 내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다.

나는 기나긴 수감생활에서 날마다 쭤발(침대위에 한 줄로 질서 있게 앉아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는 시간, 하루에 8시간 정도 앉아 있는다.)시간이 되면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 하였다. 나는 체계적인 신앙훈련을 받은 사람도 아니며 그렇다고 기도를 잘 할 줄도 모른다.

나는 원래 피난처를 운영 하면서도 반드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분을 모셔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으며 내가 중불나게 나서서 가르치고 기도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내가 탈북자들을 인솔하고 3국 탈출의 길에 올랐을 때면 휴식하고 새로운 길을 떠나게 되면 내가 우리 일행의 안전과 탈출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단히 기도드려 준것이 전부이다.

나는 앉으면 이번 일이 왜 잘못 되였을까?고 생각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있는 대로 간단한 기도를 수없이 반복적으로 하였다. “하나님 내가 당신 앞에는 죄인일지라도 이땅에 죄인은 아닙니다. 저들이 죽어가고 저들이 울부짖는데 내가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그 기나긴 시간에 무슨 말인들 아뢰지 못하였으랴,  기도하다가 생각이 막히면 찬송가가 연속 떠오르고,"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이 하리까?" 나는 일의 성장과 함께 도도하여져 갔고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아마 하나님이 나에게 시련을 주시고 매로 치는 거야? 나는 이렇게 저렇게도 생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많이 하였다.

나에게 재산이 있는가? 명예가 있는가? 그렇다고 따뜻한 가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처럼 재간이 없어 교회에, 시민단체에, 그리고 탈북단체에 탈북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선전을 하여 본적도 없다. 적어도 2006년12월 이전에 오신 분들은 나의 이름도 연락처도 모른다. 나는 그들에게서 돈 받을 일도 없고 일 시킬 것도 없으니 그들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내가 그들을 찾고 부르면 그들은 내가 자기네를 한국에 데려 왔다고 그러는가 하여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그들이 어느 곳에 가 있던지 그들이 잘살고 잘 되여 지기만을 바랄뿐이다.

나는 정말 선전 효과를 노리고 일하는데서는 알짜 문맹자였던 것이다. 혹시나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도 그들이 부담감을 가질 것 같아 조심스러워 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한 나에게 이러한 벌을 주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주여,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시고 굽어보신다면 이렇게 할 수가 있을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북자들에게 무료, 혹은 가장 저렴한 비용을 받고서라도 이 일을 원만하게 하려고 하였으며 내가 일하는 방식과 방법에 대하여 탈북자들이 나에게 침을 뱉더라도 일단은 그들이 살아서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라며 단호할 때에 가서는 단호하게 대응을 하면서 일하였던 것이다.

내가 용단을 내려야 할 때에 우물쭈물한다면 나를 따르던 많은 탈북자들이 그 대가로 생명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알고 있기에 3국 탈출의 길에 올라서 만큼은 단호하고 엄격하게 질서를 지킬 것을 요구하였다. 그렇게 할 때만이 탈북자들의 생명안전을 지켜줄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희생되어서라도 탈북자 문제만큼은 불을 질러놓아야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나도 북한 사람이니 탈북자들과 같이 북한에 보내달라고 말할 수가 있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감옥에서 어떤 일을 내여야 하는 것이다. 그 다음 일들은 한국에 있는 뜻이 있는 분들의 몫이고, 나의 바람은 결코 나의 모든 것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쉬는 시간을 조금 내여 놓고는 쭤발시간, 잠자는 시간을 다 이러저러한 기도를 하는데 바쳣다. 비록 숙련되고 다듬어진 기도는 아니었지만 나의 마음속 진실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마음껏 외쳐볼 수가 있어서 좋았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나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기도하고 쉴 때면 찬송가이고 다음은 또 기도하고, "내 고집을 꺾으시려고 시련을 주신 하나님, 나의 자존심을 꺾으시려고 고난을 주신 하나님. 나를 너무나 사랑하는 그 하나님이 축복의 채찍을 드시니, 은혜의 통로가 되라고 주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축복의 통로가 되라고 주님이 주신 시련이라고" 아마 나의 인생에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매여 달려 본적이 없었다.

사람의 생이란 무엇이게 그렇게 되는지 나도 모른다. 죽기를 각오를 하였으면 빨리 죽는 것이 편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이다. 나도 알게 모르게 삶 쪽으로 생각이 굳혀갔지만 결코 비굴하게 살아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모든 욕망의 분출이 기도하고 자기의 운명과 비슷하거나 바라는 찬송가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 같았다. 감방 안에서 찬송가들을 감상하느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도 많았다. 나의 하나님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 나는 시시때때로 찾고 외쳐보았다. 이 길은 내가 원하고 반드시 하여야 할 일이기에 묵묵히 혼자 걸어왔고 나의 인생의 황금기를 바친 것이다. 그 인생의 모든 것이 여기서 끝나다니. 아! 원통하구나. 나는 날마다 똑같이 반복되는 수감생활 중에서 차차 이성을 찾아갔고 조용히 나의 지나온 길들을 되새겨 볼 수가 있었다.

내가 한국에 와서 처음 배치 받은 곳은 포항이 였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생활의 첫걸음은 밟게 되였으며 김창식 담당형사님은 친형처럼 자심하게 생활의 구석구석을 잘 보살펴주시어 낯선 땅이지만 나도 모르게 친근감이 도는 세계 최고의 철강기술을 자랑하는 철의 도시였다

나는 담당형사님의 소개로 포항북부교회 한동식, 조연주 집사님들을 만날 수가 있었으며 그들은 나의 신앙생활과 일자리를 구해보기 위하여 정말 사심 없이 노력을 하여주신 분들이라 지금도 그들을 잊을 수가 없다. 친근하면서도 성실하였고 자신들의 친동생의 일자리 구하는 것 보다 더 열심히 나의 한국생활과 일자리를 위하여 노력하신 덕분에 나는 포항제절산업기술 주식회사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들은 나의 북한 경력을 고려하여 회사에 취직한 후 곧 품질관리에 저를 배치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북한에서 군검으로 10년이 넘게 근무하여 어지간한 도면과 여러 가지 측정 기구를 다룰 수가 있었지만 한국의 도면(설계)은 표기와 명칭을 모두 영어로 표기되어 있어 정말 나로서는 보통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나의 앞에 일을 잘 하여 나갈 수가 없었다.

회사는 너무나 웅장하고 깨끗하였으며 근로자들에 대한 복지시설이 최고의 수준으로 갖추어져 있었다. 나는 회사에 입사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천만뜻밖에 일이 생겨 더는 회사 일을 할 수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자고 하니 어려운 가운데서도 나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일자리를 소개하여주신 한동식 집사님 부부를 보기 미안 하였다.
집사님 부부를 찾아가서 조용히 나는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이제는 서울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살아서는 다시 이런 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 이제는 내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한번 일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집사님 부부는 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가면 어데로 가겠는가고 하면서 극구 만류하였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이미 굳어졌고 다시 돌아서지 않을 거라고 맹세를 하였다. 내가 서울로 떠날 때 집사님 부부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였고 그분들은 내가 서울에서 포항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일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이후에 포스코 구단( 포항제철 축구단)훈련장 관리를 하여 달라고 하면서 나와 함께 직접 구단 훈련장에도 찾아가본 적도 있다.

포스코구단 훈련장은 도시 북쪽 외곽으로 한참동안 나가면 푸른 동해 바다가 펼쳐져있고 한쪽으로는 아늑한 소나무 숲이 펼쳐진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 가면 구단 훈련장이 아니라 원산의 송도원을 방불케 하였으며 주변의 경치와 어울리게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는 훈련소 건물과 훈련장들을 볼 수가 있다.

여기가 북한이라면 어느 곳엔가 김일성의 별장을 들여앉혔을 것 같았다. 북한에서 손꼽히는 명승지로 불리는 송도원이나 명사십리, 그곳엔 모두 특권층을 위한 별장들이 자리 잡고 있어 일반 인민들은 그 근처에 얼씬할 수도 없다. 송도원에는 배나무골이 있었다.

나는 2001년 가을경부터 모 선교회에 자원봉사 형태로 일하여 본적도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많은 탈북자들이 경찰에 잡혀서 강제 북송되는지 지금도 나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난처에 여러 명의 탈북자들을 수용하면서 그들에게 충분한 안전규칙과 같은 것을 가르쳐주고 집단의 안전을 위하여 서로가 도와주면서 생활하도록 이끌었다면 그처럼 많은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탈북자들의 생활을 돌보아야 할 피난처 책임자, 사역자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강조하고 주의를 주면서 피난처 관리를 책임적으로 하여 나갈 수 있게 꾸준히 노력을 하였다면 당시에 발생하였던 사고로 탈북자들이 체포되는 것을 적어도 반수 이상으로 줄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한 달에도 몇 번씩 피난처가 습격 받아 피해를 받고 있었으며 3국 탈출을 시도하던 탈북대렬은 이송도중 체포되거나 목적지에서는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죽거나 중국공안에 체포되는 일들이 매일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개된 인터넷상에서는 초불이 간다느니, 꺼졌다고 하는 등 일행들의 안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들이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모든 것 을 극도의 비밀에 붙여놓고 일이 성공한 다음에는 공개하여도 별일 없으련만 일의 진행과정에서 이와 같은 일을 공공연히 말하는 것은 아주 위험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때의 경험을 살려 피난처 관리에서 사역자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탈북자들에게도 집단의 안전과 성공적인 탈출을 위하여 외부와의 연계를 모두 차단하게 하였으며 피난처에서 발생 가능한 일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피난처에 비상용 전화를 갖추어 놓고 탈북자와 사역자간에만 이용하도록 강하게 요구하여 그대로 집행되게 하였다.

다른 한 가지는 피난처에 들어온 탈북자들에게 가족이나 친척 등 반드시 필요에 의하여 피난처를 나가야 될 사람이 있을 경우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피난처를 반드시 옮기곤 하였다. 모 선교회에 자원봉사로 있는 동안에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은 이후에 중국에서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2004년5월에 첫 피난처를 두 곳에 개설하였고 2006년12월까지 피난처를 운영하면서 단 한건의 공안습격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중국 국내에서 600-2000 킬로미터의 먼 장거리로 탈북자들을 이송하는 경우에도 모두 성공적으로 탈북자들을 이송시켜 다른 피난처에서 안전하게 지내다가 3국을 탈출할 수 있게 하였다.

하얼빈과 장춘, 북경과 위해, 등 여러 곳에 탈북자들을 분산시켜 보내는 일도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어도 모르는 탈북자들을 한두 명도 아닌 4-7명씩 조를 짜고, 두 다리가 부서져 걷지도 못하는 탈북자. 고아와 어린이들, 그리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성들을 우리는 그들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나는 일들을 원만히 수행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와 같은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원인중의 하나가 선교회에 있으면서 내가 일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여 보고 나름대로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나는 가장 낮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살펴보고 탈북자들을 위해 명예와 부를 떠나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들을 일군으로 세우고 함께 논의하고 중국 내에서 계획하는 일들은 현지인들의 의견을 많이 수렴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실행한데 있다고 본다. 모든 일의 승패는 어떤 일군을 세우고 어떻게 일하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생각된다.

2001년과 2002년은 내가 보기에는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시련의 해였던 것 같다. 날마다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체포되었다는 소식과 3국 탈출이 실패하여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불안한 것이 아니 좋았다.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들도 헤어진 자기의 가족들을 찾고 그들을 한국에 데려오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을 하여도 그들의 애타는 마음을 풀어드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에 나오신 분들의 가족은 그나마 다행이다. 한국에 아무 연고가 없이 산속에 숨어 지내는 탈북자들의 경우에는 그 어떤 바깥세상의 정보를 접할 수가 없고 옷만 입었을 뿐이지 원시 사회의 원시인 그대로였다.

산속에 숨어사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은 한시도 미룰 수가 없는 초미의 과제였다. 정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아무 부담 없이 그들에 대한 지원을 하여 주어야 하는데 한국의 실정은 그러하지 못하다. 내가 일을 한다면 그들을 모든 부담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종교적으로도 부담이 없이 그들이 받아들이는 대로 순리에 맞게 하고 싶었다.
나는 중국에 갈수 없는 몸이다. 그 시기에는 북한이탈주민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탈북자는 5년 안에 해외에 나갈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여 보면서 나의 여권을 발급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탈북자 여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보았지만 나 하나의 힘만으로는 역부족 이였다.
2002년 봄경으로 생각되는데 나는 처음으로 탈북자동지회에 찾아가 김성민 사무국장(현 자유북한 방송국 대표)을 만나서 탈북자 여권발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의견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 만난 김성민 사무국장은 첫 인상이 부드럽고 소탈한 감을 주는 것이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때로부터 나는 성민형을 존경하였으며 우리는 백두한라회의 이름으로 서울시 관악구에 있는 중앙대학교 사회복지관과 결연을 맺고 주변에 사시는 독거로인들에 대한 봉사활동을 진행하였다. 봉사활동에는 백두한라회 회장 김성민. 비바리, 승희. 탁은혁, 정수반, 장천호 등 한국의 대학생들과 탈북자들이 참가하였다.

우리들은 홀로 사시는 독거로인들의 집을 방문하여 집청소도 하여 주었으며 겨울이 오기 전에는 겨울나이 준비를, 봄에는 집안 대청소와 어느 휴일을 택하여 한강 유람선을 함께 타고 독거로인들과 휴식의 한때를 보내곤 하였다. 나의 집은 포항이고 하니 서울에서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어 나는 서울역 3번 출구 옆 25시 고시원의 한 평 남짓한 방에서 살면서 노가다(일당로동)일을 하였다. 내 기억으로는 2003년 봄이라고 생각되는데 그해 5월은 유난히 나에게는 힘든 달이었다.

매일 아침 새벽이면 보짐을 꿍지여 가지고 인력사무소에 찾아가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도 일거리는 나오지 않는다. 하루, 이틀, 나는 이렇게 보름이 넘게 인력사무소에 찾아갔지만 단 하루도 일거리를 구하지 못하고 숙소로 돌아올 때면 정말 그때의 심정은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이 괴로웠다.

어느날인가? 아침 일찍 인력사무소에 찾아가니 오늘은 일거리가 있단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현장에 찾아가 열심히 일하였더니 석재를 책임지시고 일하는 분이 자기들과 함께 일하자고 한다. 보름이 넘게 단 하루도 일하지 못하였는데 여기서 함께 일하자고 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이후에도 열심히 일하면서 교통비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효창공원에 있는 고시원으로 자리를 옮겨 국방부 신청사 건설장까지 늘 걸어 다녔다.

나는 로동생활을 하면서 백두한라회 봉사활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으며 탈북자 여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민을 하면서 대응책을 찾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때로서는 사실 나는 해외에 두 번씩이나 나갔다가 온 경험이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해당기관에서는 당신은 여권을 발급 받고도 왜 자꾸 여권문제를 들고 다니는가?고 한다.

나 개인은 여권을 발급 받고 또 앞으로도 여권을 발급 받을 수가 있겠지만 수많은 탈북자들이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하여 중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가볼 수가 없었으며 어떤 이는 중국인들에게 인질로 잡혀 희생양이 되고 어떤 이는 가족을 그리워하다가 그의 가족이 북한으로 강제 북송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도 국가는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문제였으며 탈북자들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는 일이 자유의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을 하니 바른 정신에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탈북자들의 단결된 모습으로 함께 노력을 한다면 될 수도 있으련만 다들 앉아서 누군가가 대신 일하여 주기만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한해 한해는 실속은 없고 말뿐인 자유, 실망과 원망으로 그 무엇인가 하여 보려고 몸부림친 연약한 나의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그동안 서울정수 기능대학에서 직업훈련 과정을 거쳐 여러 가지 자격증도 수령하였다. 내가 직업훈련을 받은 목적은 중국에 가서 직업을 잡고 탈북자들에 대하여 그 어떤 일들을 하여 보려고 생각하였고 모 기관에서 자신들과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받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여권발급에 제한을 받게 되고 또한 탈북자들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일하고 싶었기에 나는 모 기관의 제의를 사절하였다. 내가 그곳에 가면 나로서는 편하게 일하고 살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곧 나의 손발을 묶는 보이지 않는 포승줄이라고 생각되어 힘들더라도 조용히 나의 방식대로 살며 일하고 싶었다. 일단은 나의 개인여권은 발급될 수 있고 내가 일하면서 여권문제는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여도 될 일 들이다.

이제는 아이의 시신을 한국에 들여오고 어린 나이지만 꿈에도 그리던 자유와 아버지의 품 가까이에서 편히 그리고 조용히 잠들게 하고 싶었다. 나는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고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철민이를 하루 빨리 한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살아왔었다. 이제는 그때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외교 통상부에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면서 우리 정부에서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여러 부서를 찾아다니며 호소하여 보았지만 실정법상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기에 그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없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정부이고 우리의 외교통상부인가? 고 생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같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