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3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3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2006년 4월경 김윤찬은 오래 만에 나에게 전화로 만나자고 하여 우리는 나의 집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때 김윤찬은 탈북자 3국 탈출을 200만원씩 받기로 하고 나와 함께 하자고 말하는 것을 나는 탈북자들에게 돈을 요구하여 본적이 없기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여 주었다, 실제로 나는 탈북자들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검은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2006년 9월 이후부터 내가 한국으로 입국시키는 탈북자들에게 "나는 최근에 아니 좋은 일을 당하여 많은 돈을 벌금으로 내여 주어 재정적으로 몹시 어렵다. 그러니 한국에 가서 남들이 내는 입국비용의 10-30% 한도에서 량심적으로, 그리고 자각적으로 돈을 돌려주기 바란다고, 호소하였다. 하지만 그렇게도 돈을 돌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김윤찬은 몇 달을 저에게 함께 일하자, 길을 가르쳐 달라고 수차례 저의 집에 와서 간청하기에 나는 그에게 탈북자들에게 돈을 많이 받지 말라고 이야기 하여주었고 윤찬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김윤찬에게 탈출하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었으며 날짜 선택하는 법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가을에 함께 이련에 가서 탈출하여 빠져나가는 장소로부터 불의의 정황에서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곳들을 알려 주었다. 그때 윤찬은 내가 나가는 곳으로 함께 나갔다가 돌아오면서 "야, 범의 입에 들어가는 것 같아 혼났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2006년 12월초 나는 왕청에 있는 진옥이네 가족을 할빈에 데려다 주고 연길에 돌아온후 준비돼 있는 탈북자들과 함께 이련호특으로 떠났다. 윤찬은 이때 두 명의 여자들을 데리고 떠났으며 나는 3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길을 떠나서 내몽고 중부선 열차에서 서로 만날 수가 있었다. 윤찬과 함께 떠난 두 명의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무슨 생각인지 잡념에 싸여 있었고 그들과 조금 떨어져 앉은 우리 일행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웃고 떠들면서 명랑하게 여행을 즐겼다. 우리는 준비한 음식도 넉넉하여 윤찬이와 함께 떠나는 일행에게도 음식과 음료를 가져다주었다.

한번은 싸이한 타라 역전에 들어가 차표를 사가지고 우리 일행들에게 주고 있는데 윤찬의 일행 중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그는 현재 송파구 거여동에 살고 있다고 함)가 나에게 와서 '선생님, 차표를 끊어주세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돌한 그녀가 믿음직하여 그들 일행의 차표를 내가 끊어주었다. 우리 일행은 정말 눈 속에 며칠을 있어도 끄떡없이 준비하였는데 두 여자 분은 옷이 얇고 수건도 변변치 않아 그때 나의 모자와 장갑을 벗어준 기억이 있다. 윤찬은 자기의 일행을 나에게 부탁을 하였지만 나는 우리 일행들에게 함께 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보니 다들 우리끼리만 가자고 한다. 나는 우리 일행들을 순조롭게 출발시켰으며 밤12시 30분경에 무사히 목적지인 역전에 도착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명일과 아가시는 미국으로, 윤명화는 한국으로 떠나보낸 것이다. 그날이 2006년 12월 25일, 성탄절이었으며 윤찬과 함께 있는 뚱보여인을 만나게 되였다.

내가 김윤찬에게 길을 알려준 것은 그가 끈질기게 접어든 것도 있고 한국에 오려는 탈북자들은 많지만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인권단체나 선교단체가 많지 못하였으며 선교단체라고 하여도 선금을 받는 선교사보다 후불로 입국비용을 받는 브로커가 훨씬 났다고 판단한데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윤찬에게 선 후불 포함하여 150만원이면 당신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있으니 절대로 그 이상을 받지 말라고 이야기 하여주었고 그도 꼭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였다. 나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탈북자들이 저렴한 비용에 안전하게 한국 오기를 바라고 탈출로를 알려주었지만 결국은 내가 걸린 함정이 되어버린 것이였다.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하자면 그에 걸 맞는 일군이 준비되어야 하며 재정문제, 환경문제 등 여러 가지 요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탈북자들을 따듯이 보살펴주고 사랑하여 줄 수 있는 생명 중심의 세계관이 투철한 일군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한명의 고발자로 하여 나의 인생의 전부를 걸고 진행하여 온 모든 꿈과 일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였으며 여러 명의 탈북자들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인 북한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나는 생각만 하여도 끔직한 소름이 온몸을 전율케 하였다. 내가 감방 안에 갇힌 신세가 되고 울음소리도 못 내고 눈물만 흘리던 은심이와 너무도 황당한 일을 당하여 안전부절 못하고 ‘선생님, 좀 도와주세요’라고 간절히 부르짖던 영옥이 모습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이 뚱보여인을 잡으면 천하에 복수를 다 하여주고 싶었다.

내가 탈북자들을 지원하면서 여러 차례 어려운 고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용케 고비를 넘기면서 3국 탈출을 성공시켰다. 그중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몇 가지 중에서도 내가 가장 피로하였고 또 탈북자들에 대한 료해가 없이 여성과 어린이 3명으로 구성된 팀을 몽고로 보내던 것이다. 나는 2006년 8월 5일경 연변에서 7명의 탈북자들을 인솔하고 북경의 모 피난처로 향하였다.

도움을 요청하는 탈북자는 많고 내가 그들의 요구를 다 받아서 처리하기는 사랑의 집의 수용능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시는 목사님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목사님은 우리 탈북자들을 안전하게 잘 보호하여 주실 수 있다고 하시기에 우리는 북경으로 출발하였던 것이다. 이틀간의 긴 여행 끝에 우리가 북경에 도착한 것은 밤 12시가 조금 넘어서였고 나는 탈북자들을 보호하여주실 선생님께 잘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하면서 함께 간 일행들을 넘겨주었다. 나는 그날 새벽 3시 반차로 다시 내몽고로 떠나 밤늦어서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하루 밤을 자고 버스로 집녕까지 왔다가 다시 렬차로 이련까지 가고, 다시 렬차로 왔다가 가고, 이렇게 연 이틀을 우리가 지나가게 될 길들을 정찰하였다. 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길을 탐색하여 보니 조금만 주의하연 능히 이련으로 갈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 밤차를 이용하여 북경에 도착하였다.

아마 새벽5시경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나에게 긴급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어제 낮에 위해에 있는 피난처에서 사고가 발생하여 두 명의 탈북자가 경찰에 체포되고 3개의 피난처에 있던 탈북자들이 온밤 바닷가에서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잤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그들이 당장 오고 갈 곳이 없으니 3국으로 탈출시켜 달라고 한다. 나는 며칠을 제대로 자지 못하여 몸이 지칠대로 지쳐있는데 탈북자들이 오고 갈 데도 없고, 더구나 그들을 돌보던 분마저 숨어버렸다고 하니 나로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이 내일 낮까지 탈북자들을 북경본역에 보내되 중국돈 1000원을 지참하여 보내라. 나에게는 돈이 없으니 그만한 액수의 돈을 보내주시면 나에게 남아있는 비상용 돈을 합쳐 탈북자들을 몽고로 보내드리겠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그날 낮과 밤을 북경역 대기실에서 보내고 위해에서 오는 렬차를 기다려 탈북자들을 찾아보았지만 그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위해에는 내가 5월말에 7명을 보내드린 적이 있기에 우리 사랑의 집 출신들이 대부분이니 나는 능히 탈북자들을 찾을 수가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내가 온종일 남방에서 올라오는 열차에 맞추어 개찰구에 나가 지켜서 있어도 탈북자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되였을까? 혹시 안내자 없이 자체로 오다가 다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러 저러한 온갖 잡념이 들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서울에 전화도 아니되고 나에게로 오는 일행들도 전화가 없으니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후 3시 반이 지나서 청도쪽에서 오는 열차를 맞아 개찰구에 나가 지켜서서 기다리니 손님들이 다 나왔을 무렵에 나는 사랑의 집에서 보호 받으며 지내다가 위해에 간 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 그들에게로 달려가 일행 한사람, 한사람 다 확인한 후에 조용한 곳으로 일행들을 인도하였다.

주변에는 수많은 여행객으로 붐벼 더 나은 데는 없지만 그래도 여기서 일차적인 주의사항을 주고 일행들의 옷차림을 점검하여 보았다. 탈북자들이 숨어 지내던 피난처에 경찰이 불의에 습격하니 옷도 제대로 못 입고, 신발도 못 신고 끌개 신을 신고 도망치다시피 나와 해변가에서 하루 밤 자고 나온 일행들의 얼굴은 보기 싫게 얼룩이 지고 옷주제도 말이 아니었다. 탈북자들이 자체로 북경까지 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일단은 북경서역으로 옮겨가서 보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일행들을 버스 정류장으로 인솔하여 갔다. 북경서역에서 내몽고 방향으로 가는 차편은 잘 알고 있으니 아직은 시간이 있어 일행들에게 화장지로 얼굴을 씻고 두 조로 나누어서 한조가 간이식당에 들어가 식사 하고 나오면 다른 조가 들어가 식사하는 방법으로 식사를 시킨 다음 주변의 매점에서 싸구려 옷을 몇 개와 손가방, 어린이 신발을 사서 옷 형편이 아니 좋은 분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에 중국어를 잘하시는 분을 선택하여 14번 매표소에서 내몽고 집녕가는 차표를 끊으라고 하면서 목적지의 중국식 발음을 알려주며 그를 14번 매표소 앞에 데리고 가서 차표를 사라고 했더니 그가 "내몽고 지닝"이라고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다.

차표 판매원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여 의아한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본다. 탈북여성은 내가 알려준 중국식 발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말한 것이 차표 판매원과 주변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된 것이다. 나는 급히 "네이멍구 찌닝 빠거"(내몽고 집녕 8개)라고 소리치며 차표를 달라고 하였다. 판매원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고 또 내가 당당하게 큰소리로 차표를 달라고 하여서인지 아무 의심 없이 차표를 주었다. 아마 탈북여성은 중국어 능력이 좋았지만 생소한 고장의 이름이고 북경이라는 이름에서 오는 위압감이나 불안감이 있었기에 잘못 말한 것 같았다. 이후로 나는 생소한 곳으로 갈 때는 반드시 내가 차표를 끊거나 중국어를 잘하시는 분이 있으면 목적지의 중국어 발음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다음 차표를 끊게 하였다.

8월10일 경이면 말복이라 렬차 안은 찜통 안처럼 뜨거워 사람들 호상 움직일 수 없이 빼곡히 들어서고 환기가 되지 않아서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 옷에는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바닷가에서 자지 못하고 북경까지 오느라 한잠도 못잔 우리는 앉지도 못하고 서로 기대여 졸며 부축하며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수가 있었다.

여성만 4명 15세 미만의 어린이 3명, 이들을 무사히 몽고로 보낼 수가 있을까? 나는 정말 많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지만 방법은 없었다. 무조건 앞으로 나가는 것만이 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우선 이들이 나를 믿게 하여야 한다.7명중 5명은 사랑의 집 출신들이기에 나를 만나서부터는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경찰의 불의의 습격으로 자기들과 함께 있던 동료를 잃고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어떻게 하나 정신적으로 안정시키고 그 다음 이들이 지나가야할 략도를 잘 말하여 주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을 한조에 한명씩 포함시키고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을 도시의 거리를 거닐게 하였다. 우리는 천천히 거리와 시장을 돌면서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고 나는 그들이 이 길로 가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륙로로는 가장 가깝고 목표물을 찾기가 쉬운 지점이라고 이야기 하여 주면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아직도 날이 어두워지자면 한 두 시간 기다려야 한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다시 남시장으로 간 다음 다시 조를 짜주면서 몇 시까지 어느 장소에 모이라고 알려주고 모두 시장 안에 들어가되 서로가 교차되는 방향으로 서로 왔다 갔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라고 알려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내가 속한 조를 이끌고 약속지점에 가니 다른 조는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시장의 한쪽 건물 모퉁이에 동그랗게 모여 간단히 기도를 하였다. 사랑의 집에서는 하루 한 두 시간씩 이야기식으로 성경공부를 하였으며 여러 가지 영상자료와 영상 간증자료가 구비되어 있어 탈북자들이 늘 이용할 수가 있었고, 위해의 피난처에서도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하였기에 모두들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나는 우리 탈북자들을 여기까지 인도하여 오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반드시 자유의 땅, 승리의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는다고 기도하였다.

우리 일행들이 며칠을 쉬지 못하고 고생을 하면서 제대로 된 식사도 변변히 먹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우리 탈북자 일행들은 아무 담보도 없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길 바라면서 가는 것 밖에는 다른 그 무엇도 의지 할 데가 없었다. 다들 연약한 여자들이다. 또한 이번 길에는 부모 없는 아이 한명을 포함하여 어린이가 3명이나 되니 더욱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7인승 소형버스를 불러 세우고 우리 일행들을 차에 태운다음 목적지 방향을 운전기사에게 알려주었다.

나는 우리 일행들에게 차안에서 당신들이 무사히 목적지에 들어가길 바란다고 하면서 낮에 알려주었던 방향과 거리를 다시한번 상기 시켜 준 다음 차를 세우면 곧 조별로 진출 방향을 향하여 가되 우리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고 마음속으로 인사를 나누자고 말하였다. 그곳에서는 조금이라도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기에 그들이 민첩하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미리 차안에서 마음속으로 인사를 나누자고 하였던 것이다. 차는 별일 없이 도시 외곽에 들어서자 나는 차를 멈춰 세우고 우리 일행들에게 침착하고 대담하게 ,방향을 잘 잡고 나가라고 거듭 당부하면서 일행들을 떠나보내었다.

모두 여성으로만 구성된 조를, 그것도 정신적으로 커다란 상처를 입고 충분한 지형과 방향 감각에 대한 훈련도 받지 못하였고,나침판이나 전화기도 갖추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떠나보낸 가장 열악한 상태에서 진행한 3국에로의 탈출이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그들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내가 탈북자들과 함께 하면서 가장 초조하게 시간을 보내던 것은 지난해 2월 달 팀을 조직하고 이동할 때였다. 아마 1월초중순경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협회 시무식에 참가하고 다음날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한 목사님이 저에게 지금 급히 탈출하여야 할 탈북자들이 있으니 급히 도와달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1월은 이미 7-8명이 조직되어 곧 출발하여야 하기에 1월은 안되고 2월은 내가 중국입국 비자를 다시 받아야 하기에 3월 달이면 제가 도와드릴 수가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분은 저의 이야기를 듣고 3명의 탈북자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가장 빠른 시일 안에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 대한 설명을 하여 주시였다.

나는 탈북자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일이 거의 없었고 당장 출발준비를 끝내고 대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헤쳐 모여식으로 조를 편성한다면 나도 신뢰를 잃게 되고 탈북자들이 많은 실망을 할 것이 틀림이 없었다. 나는 도움을 요청하신 분께 최대한 노력을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탈북자 한 사람당 인민폐(중국돈)1000원씩 준비시켜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나날이 어려워 가는 재정상태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2007년 1월1일을 기점으로 저에게 도움을 요청하시는 선교사님이나 혹은 인권관련 일들을 하시는 분들께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한국에 보내려면 일인당 무조건 1000원씩 준비하여 나에게 보내도록 하였으며 내가 보호하고 있는 분들에 대하여서는 100% 무료로 탈출시키기로 하였다. 3명의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하시던 그분은 돈은 걱정을 아니 하여도 된다고 하면서 나를 위하여 늘 기도 하시겠단다. 나는 중국 연변에 도착하여 쉴 틈이 없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탈북자들과 함께 3국으로 탈출의 길에 올랐으며 모든 일들은 순조롭고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제는 2월 팀을 어떻게 하나 제 시간 안에 3국으로 탈출시켜야 하는데 여권의 중국입국 비자를 원만히 해결하지 못하면 나도 다시는 중국에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내가 한국에 나와서 비자를 신청한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같을 것이다. 지금 많은 탈북자들이 중국에 가려고 하여도 중국 측에서 비자를 발급하여 주지 않아 중국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1년 복수비자로 그런대로 자유롭게 중국을 마음대로 드나들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되겠는지 조금도 전망이 내다보이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대로 모험을 한다고 하여도 최소한 23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일상의 생활로 보았을 때 2월까지라면 많은 시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아무때나 돈만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탈북자들을 인솔하고 떠나는 식으로 일한 것이 아니라 모든 조건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어도 나의 방식대로 시간계산이 맞지 않으면 절대로 모험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다시 중국에 나온다는 것은 담보가 없지만 내가 여러 곳을 통하여 알게 된 심수여행사는 될 것 같았다.

심수는 홍콩 맞은편에 있는 도시로서 중국에서 개혁개방의 물결이 가장 빨리 들어오고 현대화된 발달된 도시이다. 그곳에서 청도 공안국을 통하여 여권비자를 연장할 수 있다는 대답이 나에게로 온 것이다. 나는 즉시 EMS특급 택배로 여권을 심수로 보냈다. 그 여권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서 범죄적 목적에 사용되겠는지? 확실하게 비자가 연장되어 나의 손에까지 되돌아 올수 있는지를 계속 근심하면서 기다리는 재간밖에 없었다. 2월에 이동하게 될 팀 중의 3명은 국경경비대 출신이여서 중국어를 전혀 모른다. 그들은 오직 성경공부만 하고 있었다.

나는 2월에 할일들을 원만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하여 1월에 3국으로 가게 된 팀 중에서 중국어를 능숙하게 잘하면서도 침착하고 담대한 여성 한분을 빼돌려 2월 팀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조를 구성하였다. 탈북자들이 심리적 안정 상태나 피복(옷류) 등이 완전무결하다 시피 준비되었는데 나의 여권이 확실하게 된다, 안된다, 대답이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의 일들을 하면서도 나의 머리속은 여권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이 일이 잘돼야 하는데, 아무리 늦어도 2월15일까지는 여권이 무조건 나의 손에 들어와야 움직일 수가 있어"나는 계속 같은 생각만 반복적으로 하면서 정말 초조하고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두 곳의 피난처가 나의 신호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들이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내가 하루하루 손꼽아 여권오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틀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다. 이쯤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는 성탄절과 김정일 생일날에 꼭꼭 한 팀씩 선물로 3국을 탈출시켰다. 이번에도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그들이 한국에 나와 열심히 살면서 김정일 독재를 뒤집어엎을 도도한 철의 대오를 이루고 투사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지난해는 음력설이 2월18일 이였고 나는 음력설을 맞추어서 탈북자들을 국경선을 돌파하게 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계시던 분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음력설이니 중국의 공안이나 변방대가 특별 경비를 설 것이기에 위험하단다. 그러나 나에게는 물러설 틈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고집이 세서가 아니라 이 시기를 놓치면 탈북자들이 국경선을 넘어가는 데는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출발 날짜를 미룰 수가 없었다.

두 곳 피난처에 있던 탈북자들을 모두 한곳으로 집결시켰다. 나는 이미 한 달 전부터 남자들에게 그들이 나가야 로정을 설명하여 주고 략도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하였으며 나침판을 보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었고 며칠이 멀다하게 피난처의 상태를 점검하여 보았다. 국경경비대에서 두만강을 여러 번 넘나든 경험이 있는 분들이어서 나는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천만 다행으로 그들이 내가 계획한 날자가 좋다고 하면서 자신감에 넘쳐 있는 것이다. 자신감이 있으면 성공한 것이다. 모든 일들은 바라는 그대로 되는 것 같았다. 나는 2월16일에 연길을 출발할 것이며 2월16일에 출발하게 되는 동기를 설명하여 주었다.

나는 계속하여 탈북자들을 두조로 나누어 집밖을 어떻게 나가며 버스에 올라서 주의할 점들을 구체적으로 강조하여 이야기 하여주었다. 우리들이 출발하기에 앞서 C선교사님이 기도를 하여주셨다. 그분의 기도에서 특이한 것은 우리들이 한국, 자유의 땅에 가기를 원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리니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진 줄을 믿는다고 하면서 우리는 한국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역 땅에서 우리탈북자들을 위하여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선교사님이 존경스러웠고 사랑으로 우리 탈북자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데 대하여 가슴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이미 준비된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버스역 근처에 간 다음 나와 K선생이 우리가 타고 가야 될 차에 올라가 손님들이 동정을 살펴보고 다시 우리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우리는 음력설을 맞으며 여행객이 많을 것을 예견하고 미리 차표를 살 때 아래층으로 편안한 좌석을 구입하여 놓았었다. 차가 출발하기 5분전, 우리는 일행들이 탄 승용차를 한대씩 버스 옆에 대고 탈북자들이 버스에 오르도록 하였다. 여자들이면 괜찮겠지만 3명의 남자는 특히 조심하여야 하고 남의 눈에 띄는 경우 아니 좋은 일들이 발생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어 버스 옆에다 승용차를 세워두고 버스에 오르도록 하였던 것이다. 연길만 벗어나면 모든 것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갈수가 있다. 연변, 여기는 너무나 많은 탈북자들의 피와 눈물이 고여 있는 곳이다. 우리는 드디어 이곳을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장춘역을 에돌아 황하로 버스역에 도착하였을 때는 새벽4시반이 다 되였다.
버스역 앞에는 수많은 중국인들이 형형색색의 옷을 입고 크고 작은 보따리를 들과 지고 버스역 대합실이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우리 일행들이 조별로 사람들의 무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일단 버스역 문이 열리면 대합실 2층 B석 쪽으로 들어오라고 알려주었다.

내는 1월에 보내기로 하였다가 보류시킨 조아주머니를 데리고 버스역 출입문 쪽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출입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추운 겨울의 새벽인데도 중국인들의 가장 큰 민족명절인 음력설 전날이라 여행객이 얼마나 많은지 출입문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사람들로 꽉 차있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기도 힘들었지만 막상 출입문 앞에까지 가니 밀고 당기는 틈새에 끼어있어 서있기도 힘들 정도였다. 북한에서 렬차를 타기 위하여 역전 대합실에서 밀고 닥치고 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조아주머니에게 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건물 안 2층으로 가서 내가 표를 4개를 살테니 아주머니가 내 뒤에 있다가 표를 4개 사라고 말하여 주었다. 아침 5시 문이 열리기도 바쁘게 우리는 재빨리 건물 안 2층 매표소에 가서 통료로 가는 표를 끊을 수가 있었다. 조금 전에 밖에서 사람들을 보았을 때는 표를 어떻게 사나 하고 은근히 걱정을 하였는데 표를 사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우리는 흩어져 있는 일행들을 한사람씩 찾아 대기실안의 의자에 앉히고 나와 조씨는 곽밥을 사다가 우리일행들에게 식사를 시켰다. 버스역 근처에서는 새벽에 식당을 운영하는 곳이 없기에 나는 늘 여기서 탈북자들의 밥을 사다가 식사를 시키곤 하였다.

나는 버스가 통료역에 도착하면 터미널 밖으로 나가지 않고 터미널 안에서 출발을 기다리는 개루버스를 타고 다음 목적지로 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우리가 탄 버스가 통료에 도착하였을 때는 터미널 안은 텅 비어 있었고 관리원이 우리를 보고 밖으로 나가라고 소리쳐, 밖으로 나가서 다시 버스역 안으로 들어오자면 손짐 검사대를 통과하여야 되고 대합실을 순찰하는 경찰이 있어 아니 좋지만 우리는 할 수 없이 쫓겨나다시피 밖으로 나올 수밖에는 없었다.
나는 일단은 터미널 바깥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다시 일행들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매표소로 가서 차표를 달라고 하니 오늘은 휴일이란다. 오늘 아침만 하여도 장춘버스역은 사람들로 초만원이고 모든 버스들이 다 운행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딴 세상인 것이다. 나는 조씨에게 매표소에 가서 왜 차표를 팔지 않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 하여 보라고 말하고 그를 데리고 매표소로 가서 표를 달라고 하나 음력설을 맞으면서 3일을 휴식한단다. 나는 서둘러 일행들에게로 돌아와 두 조로 나눈 다음 나와 조씨가 한조로, 성순이와 청년들을 한조로 하여 택시에 나누어 타기로 하였다. 만약의 경우를 생각하여 청년들에게는 전화기를 주면서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면 즉시 전화하라고 알려주고 우리가 도착하여야 할 목적지는 성순에게 차근차근 말하여 주었다. 성순은 키는 작아도 당돌하였으며 중국어를 한족과 같게 하고 자체로 중국어 공부를 하여 웬만한 한자는 다 읽을 수가 있었다.

나는 조씨와 다른 두 명의 여자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청년들은 우리 뒤에서 다라 오도록 하였다. 잘되는 줄 알았는데 여기서 예상 밖의 일을 만나 택시를 타는 것이 마음에 아니 좋았다. 내가 이 길로 다녀보면 가끔씩 교통경찰이 택시나 버스를 세우고 검사를 할 때가 있었는데 버스는 사람들이 많은 틈에 앉아서 가면 의심을 적게 받을 수 있었고 택시는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고 가는 거야.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개루에 도착하여 택시를 돌려보내고 다시 삼륜차를 불러 타고 개루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가 있었다.

우리가 택시로 개루역에 가지 않고 도시 한쪽에 내려 차를 갈아탄 것은 만약의 경우 택시기사가 이상한 냄새를 맡고 경찰에 고발한다면 우리들이 가는 방향이 노출된다고 판단하고 삼륜차를 타게 되였던 것이다. 우리가 이용할 기차는 정시에 역에 도착하였고 우리는 무사히 집녕으로 갈수가 있었다. 음력설 전날 저녁이여서 그런지 렬차 안은 우리 일행 8멸과 여행객 서 너 명뿐이다.

다음날 아침 집녕에 도착하고 보니 식당, 상점, 공중전화소, 려관 모든 것이 문을 닫고 있었으며 우리는 어데가서 물 한 모금 얻어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여 버렸다. 서울에도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모든 것이 문을 닫고 있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 죽음의 도시라는 것은 이런 것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제밤 렬차에서 밥을 먹고 아침은 다들 굶은 상태다. 나는 중국어를 잘 할 수 있는 조씨와 성순이에게 초대소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확인하여 보라고 말하고 오늘은 어떻게 하면 이 긍지에 몰린 것을 헤쳐나갈까?하는 생각만 하였다. 교통편만 있으면 굶고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도시에서 3일씩 발목을 묶인다면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역전광장을 꽉 메우던 버스는 다 어데 가고 호객행위로 시끄럽던 택시는 찾아 볼래야 찾아 볼 수가 없다.

조금 있으니 초대소에서 사람을 받는다는 소식이 왔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초대소에 가서 4인짜리 방 두개를 구하여 한방에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을 한명씩 배치하고 여자 남자각각 2명씩 조를 나누어 두 방에 나누어 들게 한 다음 조씨와 여자 한분을 시키여 카운터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사다가 일행들에게 공급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제는 버스도 없으니 렬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우리가 타야할 기차에 검사가 있겠는가?하는 것이다. 그전에 렬차를 4차례 검사하여 본적이 있는데 렬차가 출발하여 2시간 정도 있으면 경찰이 여행객들에게서 신분증을 보면서 일일이 검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 검사를 피하자면 경찰의 검사가 끝나고 좀더 가서 렬차에 타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나는 늘 사이한 타라에서 열차에 올랐다. 그런데 오늘은 사이한 타라까지 갈수가 없다. 버스도 택시도 없으니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이 묶이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아직은 렬차 시간까지 몇 시간 있으니 일행들에게 잠을 자라고 말하고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만을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나의 맞은 켠 침대에 누워있는 아주마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무엇인지 모를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누워서 잠을 청하는 것 같았지만 두 눈까풀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한명이 불안해하고 동요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심리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만다. 웃어야 한다. 어떻게 하나 이들의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다들 편안해 보이는데 련화가 걱정이다. 나는 나의 옆 침대에 누워있는 박씨를 흔들어 깨워 앉혀놓고 지금까지 여기로 오면서 보니 마음이 어떤 가고 물어보았다. 박씨는 일이 잘될 것 같다고 하면서 우리가 떠날때 선교사님이 우리는 이미 한국에 가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그는 우리는 꼭 성공한다고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잠 못 이루는 아줌마를 앉으라고 하고 지금 마음이 편한가고 솔직히 말하라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왜서인지 계속 마음이 불안하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이 생각 저 생각 하다가 다른 방에 있는 남자들도 오라고 하고는 이제부터 너희네 살아오면서 일들 증에 가장 사람을 웃기는 이야기를 하여 보라고 하였다.

나의 옆에 앉아 있던 박씨가 자기네 아는 누군가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옛말 하는 것이 웃기는 춤까지 추는 것이였다.  이쯤 되니 저저마다 이 소리 저 소리 하면서 웃기는 이야기를 련속하여 대니 불안해하던 아주마의 얼굴도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열차를 타기로 결심 하였다.

나는 가상적으로 오늘 열차에는 여행객이 적다. 근무 중인 경찰도 오늘 만큼은 대수롭게 생각하면서 순찰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다. 만약의 경우 비상금을 손쉽게 꺼낼 수 있게 준비하여 경찰에게 건넨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출발 준비를 하되 카운터에 가서 작으마한 얼고터(중국술이름,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기 좋게 되여 있는 술병)두병을 사오라고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모두들 내가 있는 방으로 모이자 나는 일행들과 간단히 기도를 한 다음 렬차에서 주의할 점들을 이야기 하면서 렬차가 출발하여 한 시간쯤 지나면 남철과 최씨는 술을 조금씩 마시고 옷에 술을 뿌릴 것이며 술을 마신 후에는 절대로 머리를 앞으로 숙이지 말고 뒤로 젖힌 상태에서 잠을 잘 것이며, 누군가가 와서 두드려 깨워도 절대로 일어나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우리가 렬차를 타고 몇 시간 지나도록 있어보아도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잘되어 가는 것 같다. 우리 일행들의 정신상태는 아주 좋다. 이 정도면 국경을 넘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번 팀도 무사히 국경선을 성공적으로 넘어가리라고 보고 연변에 계시는 분에게 전화로 우리팀의 일이 잘되어 가고 있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이니 한국에 우리 일행 전원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였다고 통보를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오늘은 음력설이니 이련에 도착하여도 나는 한국에 전화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 연계를 취하여 놓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우리의 예상보다 렬차에는 손님이 적었으며 안전하게 이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고 나는 그들과 조용히 인사를 나눈 후에 여관으로 되돌아 왔다. 이번 팀을 조직하면서 부터 나의 여권 비자 발급이 잘되겠는지? 마음 조이면서 오랜 시간을 지나오기도 처음이었으며, 우리가 계획하였던 차편들이 없어지여 돌발적으로 새로운 차편을 이용 하면서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탈출하여 보기도 처음이다. 어렵고 위험이 도사리는 2400Km에 달하는 멀고 먼 로정을 안전하게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 일행들의 안녕만을 바라며 열심히 기도하여 주시고 후원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그들에게서 성공하였다는 기쁜 소식이 오리라.

내가 시린호트 간수소에 들어온 지도 퍽 오랜 세월이 흘러간 것 같다. 처음 며칠은 하루 종일 조사를 받아야 했고, 조사관들은 이것저것 계속 반복하여 질문을 하니 나도 짜증이 날 정도로 시끄럽고 국가의 법률에 따라 기계적으로 사람 잡이를 하는 조사관들이 인간 로봇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구류(구속)연장도 9월10일로 연기되었고 나는 언제 기소가 될지, 재판은 언제 받을 수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조사 받을 때마다 우리 일행에 대하여 잘 처리 하여 달라고 말은 하였지만 수잉지는 처음과 달리 아무런 응답이 없다.9월초의 내몽고 날씨는 쌀쌀한 것이 한국의 11월 날씨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갈아입을 속옷도 없고 따뜻한 옷 한 벌도 없어 감방 안에서 춥게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른 수감자들은 벌써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으며 가족들로부터 계속 령치 물자를 받음으로서 옷을 받고 있었으며 가족과 형제가 있고 친구들이 있어서 따뜻한 옷을 입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한여름 옷을 입고 기를 펴지 못하는 나를 보고 수감자들은 이제 겨울이 오면 간수소에서 옷을 준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이겠는지? 나는 지난 6월말에 중국에 들어 오다나니 얇은 옷 한 벌만 입고 있었던 것이다.

점심시간이 다 되여 나이 많은 경찰관이 나를 불러 내여 현관문 쪽으로 데려가서 내가 보니 현관문안쪽 소파에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남자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였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에 노기가 서리여 가지고는 경찰관들과 무엇인가 이야기 하고 있다. 조금 있더니 그는 나에게로 오면서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수고합니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한국 령사라고 소개를 하는 것이었다.

북경에서 여기까지 오자면 비행기를 두 번은 갈아타야 올 수 있고 내가 일을 잘하지 못하여 이렇게 되였는데 그가 수고 한다고 말하니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 공손히 인사를 하면서 미안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나와 령사님 조사국장과 통역원이 간수소 부소장을 따라 간수소 4구역 앞에 있는 부소장 방으로 들어갔다. 부소장 방은 햇볕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두침침한 방이었으며 방안에는 큰 책상과 함께 벽주위에 여러 개의 걸상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책상을 가운데로 하고 나와 령사님이 마주 앉고 부소장과 수잉지와 통역원은 벽주위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있었다.

령사님은 수고가 많았겠다고 하시면서 다시 한번 나를 위로 하여 주시고 어느 곳에서 어떻게 되여 체포되게 되였는가? 때리거나 인권침해를 당한 일은 없는가? 등 여러 가지로 자세하게 물어 보신다. 나는 령사님께 먼 길을 오시게 하여 죄스럽다고 하면서 담배가 있으면 한대를 달라고 말씀드렸다. 령사님은 큰 책상위로 허리를 굽히면서 나에게 담배를 주시였고 라이터로 불을 켜서 담배불도 붙여주시면서 담배를 피우는 가고 말씀하신다. 나는 술은 마시지 못하고 담배는 조금씩 피웠는데 여기에 들어오니 화가 번져저서(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고 술도 먹고 싶고 담배도 피우기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고 지금 이 간수소에 나와 함께 이동하다가 체포된 탈북자 3명이 있는데 조사국장이 잘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한국 갈수가 있다고 하는데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령사님이 해당 기관과 연결하여 탈북자들이 북송되지 않게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주실 것과 탈북자들이 명단이 한국 외교부 동북아 어느과에 있을 거라고 말씀드리면서 만약 그곳에 탈북자들의 명단이 없으면 한국의 xxx 단체에 문의하시면 탈북자들의 명단이 있을 거라고 하면서 탈북자들이 이름과 나이를 말씀드렸다.

령사님은 내가 말씀드리는 것을 일일이 다 받아 적으시고 한국에 전할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하라고 말씀하시기에 나는 허광일 회장님과 또 다른 한분에게 나의 소식을 전하여 달라고 하면서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화번호를 말씀 드렸다. 나는 일상적으로 전화번호 하나도 기억을 못하고 있었지만 내가 처음 체포되었을 때 전화번호 수첩에서 3명의 전화번호를 짧은 순간에 기억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전화번호가 틀림이 없는지 나는 확신할 수가 없어 만약 허광일 회장의 전화번호가 틀리면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탈북자 협회를 찾아 허회장게 나의 소식을 전하여 주실 것과 날씨가 추워서 어려우니 겨울옷을 한 벌만 공급하여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씀드리면서 누구도 나의 석방을 위하여 일하지 말 것을 당부드리는 말씀을 드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