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2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2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내가 북한 민주화를 주제로 한 노래들을 자체로 편집하여 중국에서 복사를 한 다음 탈북자들에게 공급하고 북한에도 공급하였는데 이때 성순이는 피난처에서 북한민주화를 주제로 한 노래 테이프를 온 밤 들었다고 한다. 지금도 성순이가 테이프의 노래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안겨온다. 성순이만 아니었다. 피난처에 있던 4명의 모든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마 고향을 생각하였을 것이다. 두고 떠난 부모형제와 그리운 고향을 다시 돌아갈래야 갈 수 없는 이 처절한 모습에서 그들은 김정일 독재에 대한 증오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이렇게 시린호터 간수소에서 탈북자 이야기로 첫 밤을 보내게 되였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하였다. "주여, 내가 여기에 있나이다. 이 땅의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저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잠을 청하려고 몸을 엎치락뒤치락 거렸지만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우리가 출발한때로부터 벌써 며칠이 흘렀고, 그동안 나는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온몸에 피곤이 밀려 왔지만 잠들 수 없었고 지나온 나날들이 생시(마치 눈앞에 현실이 펼쳐지는 것처럼)처럼 지나간다. 기쁘고 즐거운 날보다 외롭고 쓸쓸한. 그리고 무엇에 의하여서인가 늘 불안한 것 같은 나날 속에 그래도 회망의 빛이 있었던 나날들이었다.

하나원을 나와 처음으로 만난 포항북부교회의 한동식, 조연주 집사님 부부, 그들은 정말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으며 자신들의 신실함과 겸손, 그리고 사랑으로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다. 거의 강박에 가까운 집념으로 외로운 길을 갈 때도 늘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신 선교사 부부, 중국에서 우리 탈북자들을 자기의 자식마냥 아끼고 사랑하여 주시며 탈북자들을 위하여 그 얼마인지 모를 눈물을 흘리신 B선교사님, 자신이 양육한 탈북자들이 한국에 와서도 신앙을 지키도록 자심하게 보살펴주시고 오늘은 탈북청년의 어머니가 되여 내가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겠는지 늘 근심하신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여 밥 먹었느냐? 어디에 있느냐? 물어보고 가까운 곳에 있으면 빨리 와서 자신이 밥을 하겠으니 밥을 먹으란다. 혹 그럴 경황이 아니면 자신이 밥을 해놓고 가겠으니 와서 먹고 가란다. 탈북자들을 만나면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주고 우리끼리 시내에서 만나면 하남시장 안에서 가장 싸구려 음식을 골라 먹는다. 내가 미처 피난처를 마련하지 못하면 방을 빌려주고 내가 탈북자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켜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어머니 마냥 재미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준다. 지금까지 내가 탈출시킨 탈북자의 거의 반수는 B선교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셨으며 우리가 3국을 향하여 출발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그 분이 오셔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반드시 승리할 것을 약속하는 기도를 하여 주신다.

나는 세월이 흐르면서 기도의 위력을 느껴가고 있었다. 하나원에 들어온 탈북자들이 가끔은 저에게 전화로 이야기 하는 것이 "선생님, 그때 그 선교사님이 기도하여 주신 것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옥미는 국경선을 넘을 때 선교사님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그에 힘을 얻어 걸었다고 합니다."
옥미 어머니만이 아니었다. 만옥 아주머니. 최부부 그들은 선교사님이 기도하여 주신데 힘입어 우리는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고 떠낫고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분을 스승처럼, 누나처럼, 그리고 탈북자들에 대한 사랑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과의 연결의 끈을 놓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나를 동갑친구라고 부르는 사장님, 그 많은 년세에도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신다. 어느 곳에 탈북자 있다면 만사를 제쳐놓고 찾아다니다 시피 하고 있으며 탈북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줄때는 모든 것을 잊고 얼마나 정열적으로 하는지 나도 의심스러울 정도다. 종이에 이러저러한 그림들을 잔득 그려가면서 재미있게 설명하여 주고 탈북자 편의라면 내가 부러울 정도로 보살펴 주신다.

내가 처음 사장님을 만난 것은 지난해 1월 중순경이었다. 나는 연길에 도착하여 전화로 "사장님, 저는 아무개의 소개로 사장님을 알게 된 XXX입니다. 저는 지금 어느 곳에 있습니다.“고 전화 드리니 당장에 오시겠단다. 나는 그 먼 길을 지금 오시자면 힘이 든다고 말씀드렸다. 나도 연길까지 오는데 렬차에 움직일 틈이 없이 사람이 빼곡히 들어차서 온밤을 서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년세가 많으신 사장님이 자신은 괜찮다고 하면서 오늘 밤중으로 떠나겠으니 내일 낮에 꼭 만나잔다. 나는 너무 빨리 사장님께 나의 소식을 알려드려 사장님께 부담을 드리는 것 같아 마안한 마음이 들어 하루 종일 죄의식 같은 것이 드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전, 사장님이 나에게 전화로 몇 시에 모 장소에서 만나자고 하시기에 나는 미리 그곳에 가서 목소리를 통하여 사장님의 얼굴형과 체형을 상상하여 보았지만 비슷한 사람은 없기에 다시 사장님께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 있고 어떤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은 어떤 옷을 입고 계십니까? 고 문의 하니 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거기서 제일 잘생긴 미남자 찾으면 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 우리는 순조롭게 만날 수가 있었으며 구면친구처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다시 장소를 옮기여 당장 하여야 할 일들을 논의 하였다. 시간상 관계로 길게 이야기 나눌 수가 없었고 나는 곧 B선교사님에 대하여 소개의 말씀을 드리고 B선교사님과 함께 자리를 하고 두 분이 일하여 온 과정을 간단히 말씀들을 나누시었다. 나와 B선교사님은 곧 훈춘으로 가야하기에 작별인사를 드리니 사장님이 자신이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면서 승용차로 훈춘까지 우리를 태워주시고 우리가 일을 다 볼 때 까지 오랜 시간 밖에서 기다리시다 우리를 태우고 연길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시였다.사장님은 자신을 북한인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결단성 있고 현실적이었으며, 목표지향적인 명랑하신 분이시었다. 사장님은 헤어지면서 앞으로 모 지역을 통과할 때는 무조건 자신에게 전화를 하여라. 그러면 자신이 열차 침대를 끊어주고, 우리 동갑친구 하잔다.

한번은 먼 길을 갈 것을 생각하니 아찔한 생각이 들어 사장님께 차표를 예악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니 침대표를 끊어놓고 나를 기다리었으며 내가 차표 값을 드리자 친구가 무슨 짓인가 나무란다. 우리는 간단히 차를 마실 때에도 사장님은 현실분석과 일하는 방식을 성경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아주 재미있게 말씀하여 주신다. 특히 생명과 영혼에 대하여서는 알기 쉽고 편안한 이야기 방식으로 말씀하신다. 그 후에는 내가 사장님께 수고를 끼쳐드리는 것이 미안하여 차표부탁을 하지 않았더니 얼마나 섭섭하게 말씀하시는지 제가 앞으로는 꼭 지나다니면서 들렸다가 가겠습니다, 라고 약속을 하였다. 그분이 양육한 청년들이 몽고에서 직접 전화를 하니 정말 전화음성으로 들리는 그분의 목소리가 아마 하늘땅을 다 얻어도 그렇게 기뻐할 것 같지를 않았다. 이후에 제가 알게 된 것은 그분은 국가 원수를 만나기 보다 더 어려운 훌륭하신 분이시고 큰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나는 신실하신 좋은 분들을 만나 여러 가지로 그물망을 만들어서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더 효률적이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였다. 내가 일하는 특성상 악당도 만나고 천사도 만나지만 하나님이 보내주신 참 신실하신 분들을 만나 힘든 줄 모르고 내가 받는 사랑을 알게 되였으며 삶의 가치를 느끼며 더 큰 일들을 계획하고 희망의 꿈을 가질 수 있게 되였다. 진실한 사랑은 믿음을 낳고 능력이었으며 실천이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나는 이번 출발 길부터 꼼꼼히 다시 생각하여 보았다. 북한에서 나오게 된 가정은 7월말인가? 8월초인지? 북한에서 실시하는 선거에 참가하고 나오겠단다. 선거전에 나오면 자기네 가족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면 친척 분들과 동료들에게 해가 된다면서 선거가 끝나서 3-4일 안으로 중국에 들어오겠으니 이번 길에 꼭 함께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란다. 나는 늦어도 8월4일까지는 중국에 들어와야 하며 그래야 나도 편안히 일을 할 수 있으니 그리 알아두라고 하니 선거가 끝나면 무조건 탈북하겠단다. 나는 그들 4명과 은심이네 포함하여 7명을 계획하였고 연길을 출발하는 사간은 8월 7일로 못 박고 있었다. 하지만 북한 쪽에서 이러 저러한 변동이 생기면서 그들은 약속한 날짜에 탈북할 수가 없었고 나는 그들에게 9월말까지 탈북하여 연변지방의 모 피난처에서 대기하라고 일러주었다. 내가 그들을 9월까지 오라고 한 것은 산동성 청도에 몇 명의 탈북자들이 한국가겠다고 언제부터 도움을 요청한 것을 9월로 예정하였기에 청도 분들을 3국으로 보내고 북한에서 나오시는 분들은 10월에 탈출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은심이와 갈량이는 잘 아는 집사님들을 통하여 성경도 가르치고 하면서 보호하여 달라고 하였고 영옥은 중국 남편과 함께 있기에 떠나기 직전에 데려 오려고 하였다. 모든 일이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아서 나는 출발 날짜를 9일로 변경하고 모든 일행들에게 8월7일에 출발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모 피난처에 집결시켰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출발 날자와 시간은 변경하고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하여 늘 언제 출발한다고 통보하여 놓고는 2-3일을 앞당기거나 뒤로 미루었으며 드물게는 불의에 출발하군 하였다. 협조공문 발급을 위한 인적사항도 별도로 메일을 만들어서 전용으로 사용하는 메일을 통하여 암호화하여 설마 해킹을 당하는 경우에도 출발날짜와 시간, 방향을 알 수가 없게 하였다. 협조공문 발급을 위한 인적사항도 출발하는 날 오전 11시경에 메일로 작성하여 보냈으며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준비하고 저녁시간에 순조롭게 룡정을 출발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여 가는 가 싶더니 림동으로 가는 버스가 퉁료를 조금 벗어나서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버스 뒤쪽 기관실 뚜껑을 열고 스패너로 나사를 풀고 조이고 V형 벨트를 벗겼다 맞추는 것을 보아 열차시간을 맞출 것 같지 못하여 나는 은심에게 택시를 잡으라. 목적지는 개루이고 차비는 150원을 주겠다고 하라. 고 말하고 나도 택시를 잡기 위하여 길가로 나갔다. 내몽고 지역의 도시 외곽인지라 다니는 택시도 드물었고 혹시 빈 택시를 보면 개루로 가자고 하니 택시가사들이 아니 가겠단다. 퉁료에서 개루까지 택시비가120-130원인데 여기서부터 개루까지 150원의 택시비면 섭섭하지 않은 금액인데 택시기사들은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차 시간을 놓칠 것 같아 조급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부절 못하고 있는데 차수리가 완성됐단다. 차를 수리하느라 적어도 40분이상이 소요된 것 같았다. 조급한 우리들의 마음을 외면한 채 버스는 느릿느릿하게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나는 연속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차 시간을 맞출 수가 있겠나? 조금만 빨리 달려 10-15분의 시간만 얻으면 열차는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여가는 가 싶더니 림동으로 가는 버스가 퉁료를 조금 벗어나서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버스 뒤쪽 기관실 뚜껑을 열고 스패너로 나사를 풀고 조이고 V형 벨트를 벗겻다. 맞추는 것을 보아 열차시간을 맞출 것 같지 못하여 나는 은심에게 택시를 잡으라. 목적지는 개루이고 차비는 150원을 주겠다고 하라. 고 말하고 나도 택시를 잡기 위하여 길가로 나갔다. 내몽고 지역의 도시 외곽인지라 다니는 택시도 드물었고 혹시 빈 택시를 보면 개루로 가자고 하니 택시가사들이 아니 가겠단다. 퉁료에서 개루까지 택시비가120-130원인데 여기서부터 개루까지 150원의 택시비면 섭섭하지 않은 금액인데 택시기사들은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차 시간을 놓칠 것 같아 조급한 마음으로 안절부절 부절 못하고 있는데 차수리가 완성됐단다. 차를 수리하느라 적어도 40분이상이 소요된 것 같았다. 조급한 우리들의 마음을 외면한 채 버스는 느릿느릿하게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나는 연속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차 시간을 맞출 수가 있겠나? 조금만 빨리 달려 10-15분의 시간만 얻으면 열차는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들이 탄 버스는 드디어 개루에 도착하였다. 나는 열차를 타기는 틀렸다고 생각하고 다음 열차시간을 확인하고 열차표를 끊기 위하여 영옥과 갈량이는 버스역 근방에서 기다리고 하고 나와 은심은 삼륜차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은심은 청도에서 산 경험이 있어 중국어도 괜찮게 하였고 표정이 밝고 명랑하여 함께 다니기가 좋았다. 우리가 역 근처에 갔을 때는 이미 열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역전 안에 들어가 다음 열차시간을 알아보고 열차표를 끊은 다음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 왔다. 약속된 장소에서 갈량이와 영옥이가 초조한 마음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반갑게 웃으면서 잘 됐는 가고 물으면서 마주오고 있었다.

나와 은심이 한조, 영옥과 갈량이가 한조로 둘씩 짝을 지어 우리는 주변의 광장과 상업거리를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열차에서 먹을 샘물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가지고 삼륜차로 역전을 향하여 떠났다. 역전에 도착하여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다른 때보다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였다. 출입문에서 손짐을 검사하는 역무일군도 없고 대기실을 돌아다니는 경찰관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 일행들은 개찰구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고 나는 영옥이에게 손짐을 똑바로 건사하라고 말하고 있을 때 영옥이와 가까이 앉은 한 청년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다. 나도 그를 쳐다보니 18세가 되나 마나 한 청년인데 잘 생긴 것이 한족 (중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같지는 않아보였다. 오늘은 역전 안에 사람이 적어 휑한 감을 준다. 얼마 후 우리가 개찰구를 벗어나 역전 홈으로 나가는데 몇 명의 차림새가 눈길을 끌었다.

대기실에서 보았던 잘 생긴 어린청년과 그 앞에 걷고 있는 뚱뚱한 여자는 바지가 무릎위에 오는 것을 입고 있었는데 첫눈에도 다른 곳에서 온 사람 같았다.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키가 작고 허약해 보이는 여자가 검은색 작은 배낭을 메고 뚱보 여인과 청년을 따라간다는 것을 첫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그녀가 메고 있는 배낭은 연변에서 학생들이 메고 다니는 책가방 같아보였다. 내가 늘 이용하던 역전이라 렬차가 설 위치쪽으로 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청년과 뚱보가 우리 쪽을 살펴보더니 배낭을 멘 여자도 우리 쪽을 향하여 뒤돌아보는 것이다.

은심이와 영옥이가 '선생님. 저 사람들이 탈북자 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그들은 분명히 탈북자들이었다. 중국 사람들은 자기와 관련 없는 일들에 대하여 알려고 하지 않고 관심이 없다. 그런데 저들은 행동거지도 이상한데 순번대로 우리 쪽을 뒤돌아보는 것이다.

아마 잜 생긴 청년이 뚱보에게 우리가 조선말을 한다고 말했을 것이고 그의 눈에 우리들의 행동이 어데 인가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우리가 열차에 올라 막 자리를 잡고 있는데 뒤쪽에서 차에 오르던 뚱보가 나와 눈이 마추치자 픽 웃고는 돌아서서 일행을 뒤로 물러나게 한 다음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순간적으로 저 여자가 2006년 12월25일에 이련호특에서 잠깐만나본적이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들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는 이제 열차에서 어느 경우에는 어떻게 하고 등 열차에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일러주고 뚱보에게로 갔다.

뚱보네는 우리와 두 칸 건너 창문 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모두들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그런데 그곳에 내가 불쑥 나타나자 청년의 눈이 커다랗게 되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병색이 도는 여자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머리를 창가 쪽으로 돌리며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모른 체하고 있었다. 뚱보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 머리를 약간 숙여 인사를 하면서 웃는다. 나는 뚱보 옆에 있는 자리에 스스럼없이 앉아서 어떻게 되여 떠나는가? 이제 가다가 어느 차편을 이용하려고 하는가? 등을 물어 보았다.

뚱보는 열차가 아침에 도착하면 곧장 버스로 이련에 가겠다고 말하자 나는 그에게 만약에 버스로 들어가다가 일이 잘못될 수 있으니 반드시 차를 갈아타라고 말하여 주었다. 뚱보는 앞에 앉아 있는 탈북자들을 안정시키고 자기를 믿게 하려고 그랬는지 자기에게 사람들을 데려가도 좋다는 연변주 공안국장의 소개신이 있고 이련호특의 변방대대장이 자기 친구란다. 그래서 자기네는 가다가 단속되어도 아무 일 없다고 큰소리친다.

나는 탈북자들을 안정시키고 자기를 믿게 하려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뚱보가 얄미웠으며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나선 탈북자들이 가엾고 불쌍해 보이였다. 나는 뚱보에게 조심히 잘 하여 보라고 인사를 한뒤 우리 일행들에게로 되돌아 왔다. 뚱보는 이련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단, 내가 그의 우두머리 되는 자에게 가르쳐준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돈을 절약하고 쉽게 해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일한 것이다. 뚱보에 대한 아니 좋은 소식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렇게 엉터리없는 거짓말로 큰소리치는 여자인줄을 몰랐었다.

내가 아침식사를 사다가 일행들에게 먹여야 하지 않는 가고 하니 자기네 일행은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단다. 나만 혼자 열차 카운터에 가서 부탁을 하여 밥을 가져다 우리 일행들에 식사를 공급하였다. 왜서인지 뚱보를 만난 다음부터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기분이 아니 좋았다.
열차가 집녕에 도착하자 뚱보는 자기네 일행을 이끌고 버스역으로 가고 나는 늘 이용하던 형제 컴퓨터 방으로 우리 일행들을 이끌고 갔다.

형제 컴퓨터 방은 내몽고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잘 꾸려져 있었고 이용하는 손님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컴퓨터 두개를 신청하여 컴퓨터 한 개에 두 명씩 앉아 컴퓨터를 이용하게 하였다. 10시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점심식사로 빵과 과자, 바나나, 음료만 조금 사가지고 버스에 오르면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말 한마디도 조심하여야 하고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버스에서는 목적지를 말하고 표를 사는 것은 내가 현지인들처럼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일행들에게 이제부터는 특별히 조심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처럼 서로 도우며 잘 해보자고 이야기 하여 주었다.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달리고 달려 우리는 국경도시 이련호투에 까지 갈수가 있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이렇다할 흠잡을 것이 없었는데 누군가 우리를 고발했단다. 우리를 아는 것은 뚱보여인이었으며 그만이 우리가 같아 탈 열차와 시간을 알고 있었다.

먼동이 푸름푸름 밝아오자 수감자들이 하나둘씩 일어나서 복도에서 나름대로의 맨손 체조를 하고 있다. 손을 머리위에 올리고 앉아 토끼뜀을 하는 사람, 몸통을 한껏 비틀면서 온 밤 쌓인 잠기운을 다 털어 내려는 듯 운동하는 것을 보면 오래 동안 정상적으로 하여온 듯 몸에 익숙한 동작들이다. 드디어 아침 기상 벨소리가 울리자 잠을 자고 있거나 누워있던 수감자들이 군대와 같은 빠른 동작으로 일어나 침구정돈을 하고 한쪽에서는 순번대로 세면을 하고 있다. 침구정돈과 감방 안 청소가 끝나자 조금 있으니 간수가 커다란 바께쯔( 양동이 )에 죽물을 가져다 수감자들의 죽 그릇에 한컴정도씩 죽물을 나누어 준다.

죽물이라야 쌀알이 2-30알정도 들어있는 말 그대로 죽물인 것이다. 나는 나의 옆에 앉아있는 쫭족( 티베트인 )인 위표에게 죽물을 넘겨주었다. 위표는 광서 자치구 사람으로서 시린호터에 돈벌려 왔다가 어느 려관에서 일하게 되였는데 자기가 일하는 려관과 주변의 송전소등 3곳의 경리실 금고를 털어 인민페 4000원을 도적질한 것이 하루 만에 들켜 경찰에 잡혀 지금은 기소 중에 있는 것이다. 내가 속한 감방 안에서 위표는 가장 경한 범죄자이고 성품이 비교적 온화하고 한어 ( 중국어 )를 잘 하지 못하여 무리에 잘 휩쓸리지 못하였으며 내가 다른 감방으로 옮겨갈 때 그도 함께 옮기여 석방될 때까지 함께 하였다. 나는 석방되기 전에 위표에게 만약 내가 석방되어 다시 중국에 오면 너를 찾겟으니 그때 나를 도와 탈북자들을 미얀마나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말을 하였고 위표는 자기 동생과 자기친구들이 베트남 밀수를 하기에 잘 도와줄 수 있다고 하였다.

감방에서 하루 일과는 쭤발(감방안의 침대위에 한 줄로 질서 있게 앉아서 자기의 잘못을 회게 하는 시간)로 시작된다. 쭤발 시간이 되여 내가 제일 뒤쪽에 앉아 막 하나님께 기도드리려고 하는데 출입문이 열리면서 위썅쥔 (유상준)하고 큰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난다.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니 조사국장 수잉지와 간수소 부소장, 그리고 몇 명의 군인들이 문 앞에 서서 나를 나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군인들의 뒤를 따라 조사실로 가게 되였다.

조사실이라야 두 평 남짓한 방안에 작은 책상하나와 걸상두개 수감자용 걸상이 놓여 있었다. 수감자용 걸상은 사람이 앉으면 두발을 족쇄로 묶고 두 팔을 걸치대 위에 놓으면 손목을 묶을 수 있었고 손발을 묶어놓은 다음 가슴 아래 부분을 걸상에 고정되어 있는 판자형의 띠로 몸 상체 부분을 묶어놓을 수 있게 되여 있었다. 내가 조사실에 들어가자 두 명의 경찰관이 나를 수감자용 걸상에 앉히고 두발과 손을 묶으려고 하는 것을 수잉지가 무엇이라고 말하자 발은 묶지 않고 손목만 대충 묶고 가슴부분을 묶어놓았다.

수잉지는 처음 내가 보았을 때처럼 얼굴에 노기가 어려 있었으며 통역하는 여자가 나의 앞에 와서 몇 장의 서류를 주면서 읽어보란다. 내가 대충 서류를 보니 외국인은 구류(구속)되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자기나라 말로 조사에 응할 수가 있으며 조사나 통역과정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거나 통역의 교체를 요구할 수 있으며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는 등 간단한 중국의 법률을 중국어와 한국어로 번역하여 쓰여진 종이였다. 수잉지는 내가 변호사를 선임할 수가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하란다. 나는 공산주의 국가 법률체계가 다 일률적이고 계획된 것의 안에서 이루어지고 신뢰할 수 없기에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이제부터 조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수잉지의 첫 질문은 국가의 일을 하고 있는가? 고 묻는다. 나는 개인이며 한국은 3국에 있는 탈북자들에 대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거나 보호,3국에로의 탈출을 시키는 일을 하지 않는다. 탈북자 지원과 보호, 3국 탈출은 개인이거나 탈북자 문제에 관심이 있는 단체에서 산발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은 내가 수잉지를 만나서 첫 조사를 받은 것처럼 내가 이용한 항공편과 시간 려관과 열차의 이용 등에 대하여 비교적 구체적으로 물어본다. 계속되는 질문은 은심이와 영옥이. 갈량이를 어떻게 알게 되였고 어떤 방법으로 어느 장소에서 만났는가? 그들을 한국에 데려가려고 유혹을 하였는가? 등 여러 가지 질문을 내가 이것저것 생각할 틈이 없이 연속 하는 것이었다.

조사는 처음 잡혔을 때와는 상상도 못하게 깐깐하고 끈질겼으며 집요하게 질문하고 의심을 하면서 기록하였던 것을 수차례 반복 질문하는 것이었다. 조사과정에서 가장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캐어묻는 것이 은심이를 알게 된 경위와 은심이를 나에게 데려온 여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화룡지방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어떤 여인이 자기가 아는 탈북자가 있는데 어린것이 불쌍하다고 도와달라고 하여 나의 연락처를 주어서 은심을 알게 되였고 나는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 여인이 은심이를 도와준 사람일거라고 생각하고 이후로는 그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전혀 없다. 나는 그 여인의 전화번호나 이름도 모르고 은심이와 함께 만나자고 하여 연길에서 만났을 뿐이라고 하였다. 내가 말을 하여도 그들은 전혀 믿는 것 같지 않았으며 며칠을 두고 은심이 보호자에 대하여 집중조사를 하였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조사는 저녁 8시가 다 되어서 끝났고 경찰관들이 대기 하고 있었던 듯 나를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

내가 감방 안에 들어서자 수감자들이 알아듣지도 못할 중국어로 이것저것 묻는다. 아마 조사가 어떻게 되였고 등 그들에게는 궁금한 것이 많았던 것 같았다. 유일하게 통역이라도 하여 줄 수 있었던 공영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공영호가 어데 갔는가?고 물으니 오늘은 재판날이어서 법원에 갔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다. 공영호는 한족 택시기사들에게 인민폐 1000원씩 주고 탈북자들을 몽고 국경으로 넘겨 보냈으며 택시기사 한명, 한명 잡힌 것이 9명, 공영호가 유인하여 장춘역에서 이련호특 변방대 군인들에게 붙잡힌 탈북자 출신 한국인 장미숙 등 11명이 재판을 받아야 하기에 재판이 오랜 시간 진행되게 되였다. 취침시간을 앞두고 공영호가 들어왔다. 공영호는 자기가 대체로 몇 년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싶다.

공영호는 한국사람 좋은 노릇만 하여 주고 자기가 형을 살게 되였다고 불만을 내뿜으며 잠자리에 들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공영호는 한국 사람들과 함께 탈북자 일인당 한화 (한국돈) 400-450만원씩 받기로 하고 탈북자들을 중-몽 국경을 넘겨주는 일을 하다가 전화 통화내역 추적에 걸려 안도현 명월구 민주촌의 자기 집에서 이련호특 변방대 군인들에게 체포 되였으며 체포될 당시 공영호의 안해가 해산을 한지 7일이 되는 날이었다. 공영호는 2007년 3월 16일 체포되었고 자기의 죄를 씻어보려고 장춘역에서 탈북자 출신 한국인 장미숙을 유인할 데 대한 변방대 군인들의 조종에 따라 탈북자들을 인솔하고 3국 탈출을 시도하던 탈북자 출신 장미숙과 탈북자 6명을 체포하는데 공헌하였다. 공영호는 장미숙을 체포하는데 협조한 대가로 립공죄가 성립되어 시린호터시 중급 인민법원에서 판결 7년10개월 ,공영호의 형 공광호는 판결 11년3개월을 받았다. 나도 잠자리에 누워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일지라도 이 땅에 죄인은 아니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시옵소서" 인간은 어려울 때 일수록 본능적으로 신에게 매여 달리는 것 같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수잉지와 기록수, 통역과 경찰관 한명이 와서 나를 나오라고 한다. 내가 천천히 출입문 쪽으로 가니 수잉지가 밥을 먹었는가고 묻길래 밥 먹을 생각이 없어서 먹지 않았다고 대답 하였다, 수잉지의 얼굴 표정은 한가하게 느껴졌으며 나를 잡아당겨 한쪽벽면에 서라고 하면서 중국어로 유상준이라고 씌여져 있는 패쪽을 들고 사진촬영을 하잔다. 촬영이 끝난 후 우리는 어제 조사 받았던 방으로 갔다. 내가 걸상에 앉으니 통역이 나의 앞에 와서 문서인 듯한 종이를 들고 서툰 한국어로 "네 윤찬 아는가?"고 묻는다. 나는 처음에 이 여자가 누구를 말하는 가고 생각하는데 다시 "네 화자 아는가?"고 묻는다. 나는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김윤찬은 알고 있었지만 화자란 이름은 연길에 있을 때 아시던 분이 있었지만 그분의 이름이 여기에 오르내릴 수가 없었다.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을 정말 모른다. 나를 믿지 못하겠으면 나의 전화번호 수첩에서 화자라는 이름과 전화번호를 찾아보라고 하였다. 나는 책상위의 A4용지에 중국어로 김화자 1966년9월26일생. 직업, 무직. 학력, 중퇴. 주소란에 길림성 연길시 의란진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의란진 다음 글들은 종이에 가려져서 볼 수가 없었다. 뚱보의 이름이 화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떠올랐다. 언제인가 김윤찬이 그녀가 연길 의란에 산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이름과 연락처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통역을 하는 여자가 짜증석인 목소리로 "네 김윤찬 안다, 네, 화자 안다."고 말하자 나는 확실하게 모른다고 대답을 하니 의자에 비스듬 앉아 지켜보던 수잉지가 네가 내몽고로 오면서 누구를 보았는가고 묻는다. 나는 뚱뚱한 조선족 여인과 탈북자로 보이는 일행 두 명을 렬차에서 만났다고 하자 수잉지는 네가 어떻게 그들이 조선족이고 탈북자인 것을 아는 가? 고 반문한다. 나는 연변에서 오래 살았고 경험적으로 그들이 탈북자인 것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번에는 수잉지가 네가 지난해(2006년)12월에 어떻게 되여 이련호특으로 왔는가?고 다시 질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2000년도에 한국 갈 때 나갔던 길로 탈북자들을 보낼 수 있겠는가를 알아보려고 왔다고 대답하였다. 이쯤되고 보니 뚱보여인이 아주 구체적으로 고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뚱보와 김윤찬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포항에 살 때 김윤찬은 한동네에서 살았으며 이후에 경기도로 집을 옮긴 후로는 나는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