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 -13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13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일반적으로 간수소에서는 벌금형이나 무죄석방은 재판이 끝나서 3일이나 일주일 지나면 다 석방되여 나가고 있지만 나는 보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수감자들은 외국인이라 조금은 차이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위로하여 준다. 금요일에 석방되지 못하면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식일이라 석방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12월 15일,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키가 작고 뚱뚱하게 생긴 경찰관이 감방문을 열고 나에게 침구류와 세면도구를 가지고 나오라고 한다.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은 군용상점에서 제일 싸구려를 구입한 것이라 이불 겉 천으로 낡은 솜이 보기 싫게 나오고 이불의 곳곳에는 솜이 끊어져 뭉쳐져 있는 누더기와 같은 것을 안고 당직실로 가더니 그곳에는 신분을 알 수가 없는 사복차림의 젊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수소 경찰이 커다란 종이 박스를 나의 앞으로 가져다주면서 짐을 정리하란다. 박스 안에는 양말 몇 켤레와 팬티, 런닝그가 있었고 작은 성경책 한권이 있었다. 박스 겉표지를 살펴보니 북경에서 보내온 것으로 아마 한국 대사관에서 나에게 영치물자로 보내온 물품들인 것 같다. 나의 작은 손가방에 짐을 정리하고 한국 대사관에서 두 번에 걸쳐 영치물자와 영치금을 보내주었는데 물품과 영치금을 찾아달라고 말하자 경찰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한 인상을 쓰면서 자기네는 모른다고 한다.

종이 박스는 30 키로그람의 큰 것으로 한국 대사관에서 여러 가지 옷과 식료품, 의약품, 영양제를 보내준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간수소 경찰들이 영치물자를 모두 빼여 돌리고 영치금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간수소에서 잘 썩은 것만 생각하여도 분통한 일인데 법을 다스린다는 간수소에서 외국인의 물품과 돈을 뜯어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어 당직 경찰에게 영치금을 빨리 찾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경찰들은 간수소에서 수감자들의 물품을 빼여 돌리고 뜯어먹고 있는 것이 관행적인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내가 돈을 내여 놓으라고 소리를 치니 당황스러워 하면서 어데론가 슬금슬금 밖으로 빠져 나간다.

나와 간수소 경찰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복쟁이들이 무슨 돈과 물품을 찾는가고 물어보자 나는 종이 박스를 보여주면서 한국 대사관에서 보내온 물품과 돈을 간수소 경찰이 다 뜯어먹고 텅 빈 종이박스를 나에게 준다고 하자 사복쟁이들은 자기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 시간이 없으니 빨리 가자고 독촉을 한다. 사복쟁이들은 나의 여권과 간수소에서 찾은 물품 인수내용이 적혀있고 내가 싸인을 한 인계품목을 살펴보면서 내일 아침 10시30분 비행기 표를 이미 끊어 놓았으니 늦으면 아니 된다고 한다. 우리는 서둘러 간수소 밖으로 나왔으며 나는 간수소의 전경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굳게 닫혀져 있는 철문, 바깥세상과 완전히 격리시켜놓은 높은 담장과 그 위로 얼기설기 뻗어간 전기 철조망, 높은 간수소 담장의 끝 모서리 위에 설치된 경비초소에서는 경비병이 우리 일행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나의 모든 꿈들을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곳이라 생각하니 가슴만 답답하고 숨을 고르기가 힘들었다. 사복쟁이들은 벌써 차에 올라서는 나에게 빨리 차를 타라고 소리를 치고 있다. 우리가 탄 차는 찬바람이 불어치는 들판을 지나 곧게 뻗어있는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열차로 가면 조금은 편할 것 같은데 역전을 지나 계속 앞으로만 차가 달리자 나는 왜 역전으로 가지 않는가고 묻자 그들은 열차로 가면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승용차로 간다고 한다. 사복쟁이들은 자기네는 시린구러멍 변방공안 총대의 수잉지와 함게 일하는 변방대 군인들이라고 말하면서 간수소의 경찰들과는 다르다고 설명을 하는데 어데인가 모르게 뢰물과 부패로 짜들어진 경찰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의 말을 듣고 보니 제일 젊어 보이는 사람이 내가 이련에서 시린궈러멍으로 호송 되였을 때 은심이네를 담당하였던 장교라는 것을 알아 볼 수가 있었고 두 명의 군인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이였다. 두 명의 몽고족 장교와 한명의 한족 장교가 나를 심양까지 호송을 하게 되였다고 젊은 장교가 나에게 설명을 하여주었다. 몽고족 젊은 장교는 내가 입은 옷을 살펴보더니 이대로 가면 얼어 죽는다고 하면서 커다란 군용동복을 나에게 주면서 동복을 덮고 잠이나 자라고 한다.

나는 동복을 덮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여 몸을 한껏 쪼그리고 잠을 청하려고 하여도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엇다. 아마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막연한 바램이 현실에 이루어지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많이 흥분되었던 것 같았다. 잠들 수 없었던 나는 장교에게 성경책을 달라고 하자 장교는 나의 행동이 재미있고 우습다는 듯 웃으면서 성경책을 넘겨주었다. 성경을 받아서 책장을 번져 보니 히브리서 11장이 펼쳐진다. 성경책의 모든 말씀을 내가 분석하여 읽을 수가 없었고 히브리서 11장은 예배시간에 설교를 통하여 들은 것이 있어서 내가 즐겨 읽던 믿음장이였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로 시작된 구절을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읽어내려 가던 나는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같이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히브리서 11장 12-13절)를 구절을 읽는 순간, 그 무엇에 크게 얻어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연하게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하고 떠나 긴긴 세월을 방황하다 나도 옥에 갇힌 몸이 되였고 함께 떠낫던 분들도 모두 생사를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게 되였다.
지금은 나 혼자만 살아서 돌아가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정말 죽을죄를 진 사람이야. 하는 모진 자책감에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끝이 어데인지 알 수 없이 아득히 펼쳐진 사막에는 흰눈이 가득히 덮여 있었고 그 위로 곧게 뻗어나간 도로에는 제설작업을 하지 못하여 며칠 전에 내린 눈은 그대로 얼음으로 변하여 버렸고 그 위를 달리는 차들은 곡예 운전을 하면서 간신히 달리고 있었다.

하루 낮과 밤을 쉬지 않고 달리여 다음날 새벽 4시 반이 넘어서야 우리가 탄 차는 심양에 도착하였다. 심양에 도착하여 잠자리를 찾아보아도 모든 여관에는 손님들이 방을 다 차지하고 있어 우리 일행은 몇 곳을 돌아다니면서 겨우 방 한 개를 구할 수가 있었다. 여관방에 들어가자 함께 동행을 하였던 장교들은 얼음판 위로 차를 운전하는라 피곤하였던지 침대위에 눕자 금방 잠들어 버린다. 장교들은 멀고 긴 시간을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느라 피곤하고 짜증날 만도 할 것인데 누구 하나 불평을 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나도 비교적 마음이 안정되여 큰 불편 없이 심양까지는 편히 올수가 있었다. 조용한 여관방에는 장교들의 고르로운 숨소리만 들릴 뿐 나는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한국으로 간다는 환상 같은 즐거움, 제2,제 3의 삶으로 다시 태여나게 되였다는 기쁨이 나의 모든 것을 붙잡고 잠들 수 없게 하였던 것 같다.

아침 6시가 조금 넘자 함께 동행하였던 장교들도 외국인 호송이라는 책임감이 있어서 깊은 잠은 들지 못한 것 같았고 푸시시한 모습으로 하나들씩 일어나 세면을 하고 여러 가지 서류인 듯한 것들을 살펴보고 정리를 한 다음 우리는 여관문을 나섰다. 심양의 새벽거리는 석탄가스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으며 중국 특색의 빨간색 간판 밑으로는 각양각색의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어데론가 분주히 오고 가고 있다. 심양은 북쪽에 있던 시린호터 보다는 많이 온화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이여서 거리는 무질서 하게 달리는 차들로 복잡통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가 탄 승용차는 조심스럽게 혼잡한 곳을 빠져나와 심양공항에 도착 하였다. 공항 주차장에는 이미 우리가 오고 있다는 통보를 받았는지 키가 큰 장교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와 함께 동행하였던 장교들이 그에게 무엇이라 이야기 하자 키가 큰 장교는 나의 아래위를 뚫어지게 살펴보고 있다. 우리는 곧 마중 나왔던 장교의 뒤를 따라 공항 안에 있는 변방대 근무 장소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는 여러 명의 변방대 군인들이 나와서 나의 여권과 나를 대조확인하고 어데론가 흩어져 간다.

나를 호송하던 장교들도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나만 홀로 근무실 옆에 있는 대기실에 앉아서 다음의 절차를 기다리면서 앉아 있었다. 장교들의 움직임을 보면 수속이 간단한 것 같지를 않다. 여기저기로 분주하게 오고 가면서 서류를 확인하고 또 다시 확인하는 것을 보면 내몽고와 료녕의 변방대 사이에 치밀한 사전 연락이나 확인 절차가 미흡한 점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시간 남짓이 대기실에서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나를 호송하였던 젊은 장교가 나에게로 오면서 자신을 따라 오라고 한다. 나는 복잡한 사람들의 틈새를 빠져나가는 장교의 뒤를 따라 공항 수속 절차를 밟는 곳으로 갔으며 그곳에서는 내가 통과 하여야 할 통로의 변방대 군인의 얼굴을 기억하였으며 변방대 군인도 나의 신원을 확인을 하였다.

호송장교는 계속하여 내가 세관을 통과하면 손짐 검사대를 거치지 말고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가라고 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차근차근 설명을 하여 주었다. 나는 내가 나가야 할 통로를 잘 알 수 있다고 말하자 장교는 다시 나를 데리고 근무자 대기실에 돌아왔다. 조금 전 출국장에서 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탑승 수속을 하고 있었는데 시간이 그로부터 많이 흘러간 것 같다. 변방대에서 어떤 알 수없는 차질이 생긴다면 오늘은 한국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 탑승수속 시간이 끝날 것 같아 조급하여진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호송장교가 나의 탑승권가 여권을 돌려주면서 세관을 지키고 있는 변방대 군인들이 없으니 나만 혼자서 세관을 통과하여 나가라고 자세히 설명을 하여주었다. 호송장교와 함께 온 장교 두 명은 무엇인가를 촬영하려고 캠코더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호송장교는 나에게 세관을 통과하여 나가서 비행기에 오르면 된다고 하면서 세관앞까지 함께 나았다. 나는 호송장교에게 도와주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였다. 나를 호송하였던 장교들은 먼 곳으로 함께 동행하면서 내가 편하도록 실제로 많은 관심을 가지고 편의를 도와주었으며 간수소 경찰들과 달리 편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탈북자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먼 길을 불평 한마디 없이 나를 호송하여준 장교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하였다.

내가 혼자서 세관을 지나 탑승구 방향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보자 나를 호송하였던 장교와 두 명의 장교가 함께 캠코더로 나를 촬영하면서 따라오고 있었다. 장교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그냥 앞으로만 가라고 손짓을 한다. 탑승구는 이미 문을 닫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으며 장교들이 한참동안 무엇이라 설명을 하자 우리를 탑승구로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열어준다. 탑승구를 지나 기내에 들어서자 모든 시름이 한번에 물러가는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다. 군인들은 기내 안으로 들어가는 나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다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나의 자리를 찾아서 앉을 수가 있었다. 그처럼 안타까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 현실로 펼쳐지자 그 기쁨은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고 한편으로는 중국 땅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에 대한 걱정도 많아 마음이 가벼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하여 쫓겨 다니고 있을 것이며 나와 함께 일하시던 분들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시였을까? 나는 중국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가 없는 몸이 되였다. 내가 보아왔던 탈북자들, 그들도 하루 빨리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비행기는 금방 땅을 차고 날으려는 듯  요란한 동음 소리를 내면서 몸을 떨고 있다. 중국땅에서의 마지막은 나를 사랑하고 아껴 주시였고 도와준 수많은 손길들에 의하여 귀국의 길에 오르게 되였다. "주여, 늘 감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감사하신 하나님께 마음속으로부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기내의 스크린에는 배행기의 이동 경로가 나타나고 있었으며 어느덧 한국의 령해로 들어서고 있다. 내가 그처럼 바라고 있었던 나의 조국으로 들어오는 그 시각의 감정은 저 멀리에서 사랑하는 아들아, 어서 오라, 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12월16일 오후 1시경, 내가 몸을 실은 대한항공기는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주여, 죄 많은 이 몸을 구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기도가 나도 모르게 나온다. 잠시 후 나는 해당 수속을 밟아 공항 밖으로 다급하게 빠져 나가고 있었다. 나는 수감소에서 지낼 때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것들이 많아 옷도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였고 저의 몰골이 보기가 아니좋아 가급적이면 남들의 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인천공항 입국장 앞에는 귀국하여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표지를 들고 귀국하여 오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초췌하기 그지없는 나의 몰골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기도 싫었고 나는 싸움에서 실패한 패전병으로 귀국을 하고 있으니 부끄럽기도 끝이 없었다. 나의 앞에 길다랗게 늘어선 군중들의 앞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여서 나는 머리를 들지 못하고 황급히 달음질쳐 사람들의 앞을 빠져 나가려고 할 때에 누군가 나의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서 잠깐 뒤를 돌아보니 수많은 군중들이 무엇이라 쓰여 있는 커다란 프랑카드와 피켓을 들고 누군가를 찾고 환영을 하는 것 같았다. 프랑카드를 내걸고 누구인가를 찾고 환영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름 있는 큰 단체의 귀국이나 유명 인사의 한국 입국을 위하여 마중 나오신 분들 같았다.

나는 가던 길을 재촉하며 정신없이 군중들의 앞을 지나고 있는데 또다시 누군가가 나를 찾고 있었다. 내가 한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을 거야? 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쪽에 펼쳐져 있는 커다란 프랑카드에는 "탈북 인권운동가 유상준 씨의 귀국을 환영합니다"라는 커다란 구호와 함께 팀 피터슨님, 노베르트 폴로첸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면서 열렬한 환호와 함께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프랑카드와 피켓을 든 사람들은 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이들이 나의 귀국을 어떻게 알고 나왔을까?.하는 생각과 반가움에 나도 모르게 마중 나온 일행들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행중에는 팀 피터슨님과, 노베르트 폴로첸님, 북한구원운동의 이경환 기획실장님, 유상준 구원운동본부 대표를 맡으신 최영훈 선생님, 싸이몬 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큰  일을 하고 돌아오는 영웅을 맞아주는 것처럼 나를 안아주시며 위로를 하여 주시였다. 나는 죄인이였고 싸움에서 패전하고 돌아오는 사람인데 이들이 어찌 나를 이렇게 아끼고 진심으로 사랑하여 주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들의 따뜻한 사랑에 목메여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하여주신 이 땅의 고마우신 분들의 도움으로 귀국을 할수 있게 된 것만 하여도 무엇이라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를 영웅처럼 아껴주신다. "주여,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의 인사와 함게 내가 너무나 큰 사랑의 빚을 지게 되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피터슨 선생님은 나를 보고 기뻐서 어찌 할 줄을 모른다. 폴로첸 선생님. 최영훈 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자신의 친 혈육이 살아서 돌아온대도 지금처럼 기뻐하실 것 같지를 않다.  팀 피터슨 선생님은 나에게 몇 장의 편지를 전하여 주시면서 어제(15일) 내가 귀국을 하는줄 알고 많은 분들이 인천공항에 마중 나왔다가 내가 귀국을 하지 않아 되돌아갔다고 하시면서 그들의 사랑이 구절마다 담겨져 있는 사랑의 편지를 주시였다.

나의 석방운동을 소리 없이 뒤 받침하여 주신 싸이몬 목사님은 바쁜 시간을 내여 공항에 마중 나오시였고 그의 특유의 밝고 명랑한 웃음과 재치로 나를 위로 하시면서 내가 입국시킨 경비대 군인 출신의 탈북자들은 모두 건강한 몸으로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되였다는 소식도 알려 주시면서 기쁨으로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늘 조용하고 단정하신 품모의 이경환 기획실장님께 재판에 참석 하여 주시여 감사하고 그 먼 길을 오셨을 때 제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여 죄스러웠다고 말씀드리며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이경환 기획실장님은 북한구원운동 김상철 대표회장님께서 자신을 공항으로 보내시면서 나의 한국입국을 축하하여 주라고 하시였단다. 정말 나에게는 꿈만 같은 믿을 수 없는 일들만 있었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은혜와 축복이 아니였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였다.

공항대기실에서 저를 마중 나오신 분들과의 꿈과 같은 만남의 이야기를 마친 후에 나는 최영훈  생님과 함께 공항철도를 이용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영훈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의 많은 교회와 선교단체, 북한 인권단체들에서 저를 석방시키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주신데 대하여 많은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고, 그 말씀에서 나는 특이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자유북한인 협회 한창권회장님과 회원들이 저의 석방을 위하여 한국정부에 청원서를 보내고 외교통상부 앞에서 연일 시위를 하면서 석방을 촉구하는 운동을 하였다고 한다. 자유북한인 협회는 처음 듣는 이름이였고 한창권회장이라는 분은 어떤 분인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분들이 나의 석방을 위하여 노력을 하여 주신 것도 감사하지만 탈북자들 자율적 단체인 자유북한인 협회가 중국에 갇혀있는 탈북자의 석방을 위하여 시위와 캠페인 형식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던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였다.

나는 최영훈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유북한인 협회 한창권회장님과 회원님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함께 그들이 탈북자들의 인권문제에 대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을 띠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영훈 선생님은 한국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였고 자유청년연대 최용호 대표님이 지칠줄 모르는 의지로 중국대사관과 외교부를 통하여 석방운동을 하여 주시였다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12월의 날씨는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따스한 햇볕을 축복인양 받으며 그립고 그립던 나의 집, 더 정확하게는 나를 자식처럼 아껴주시고 보살펴주신 옆집 할머니를 찾아서 갔다. 할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을 하며 할머니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방안에는 동네 아줌마들로 가득 차 있다.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는지 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건강히 잘 지내셨습니까? 고 인사드리자 방 위켠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가 펄쩍 놀라며 나에게로 달려와 나를 그러안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신다. 할머니는 왜 그렇게 소식이 없었는가고 물으시자 나는 볼일들이 있어서 늦게 왔다고 대답을 드리자 할머니는 노여워하시면서 주먹을 쥐시고 나의 어깨를 때리신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몸은 괜찮은가고 물으시면서 나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내여 주시였다. 할머니가 주신 편지는 북한구원운동 이경환 실장님이 내가 감옥에 있으니 오지 못하고 있고 나의 집 동파방지를 하여 달라는 부탁을 적어서 보낸 편지였다. 할머니는 나에게서 소식이 없어서 걱정을 많이 하시였다. 동사무소에서는 내가 집을 팔아먹고 도망을 갔을 거라고 하더란다.  경찰서에서도 내가 세금을 어떻게 내고 있으며 집 관리는 누가 하며 은행 저금통장은 누가 관리를 하는가? 고 많이 신경을 쓰더란다. 할머니는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알 수가 없어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그렇게 속이 까맣게 타 본적이 없다고 하신다. 할머니의 집에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짧게 말씀드리고 나의 집으로 갔다.

6월에 집을 나서 처음으로 나의 집에 들어서자 집안은 깨끗하게 정리되여 있었고 난방도 잘 들어와 훈훈한 것이 이제야 사람 사는 세상에 들어선 것 같다. 그 추운 감방 안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뎌 낼만한데 추위만큼은 정말 참고 견뎌 내기가 어려웠고 그리하여 더욱 그리운 것이 늘 따뜻한 남쪽 나라 나의 집이 그리웠었다.  할머니는 경찰서에서 알려준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서 나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를 하였고 난방 밸브도 열어 놓아 오랫만에 집에 들어오는 나에게 불편이 없게 깔끔하게 정리를 하여 놓으셨다. 나는 할머니의 인정미와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받으면서 이 땅의 아름다움에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삼천리금수강산이 아름답고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 땅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사랑의 마음이 더욱 아름답다. 내가 오늘까지 일할 수 있었던 것도 알게 모르게 십시일반으로 자신들의 마음을 담아, 정성껏 후원하여 주신 고마운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나의 석방이라는 꿈만 같은 현실이 이렇게 빨리 올수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그 기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위의 아름다운 마음들이 모여서 이루어 낸 사랑의 열매였던 것이다. 꿈만 같은 현실 속에서 나는 무엇이라 말할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는 "주여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의 인사만 드리고 드렸다.

내가 귀국한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대전에 사시는 광일형제님이 전화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고 하면서 래일 B선교사와 정도마가 함께 서울에 갈 것이니 꼭 만나잔다. 광일은 몇 년 전에 한국에 나왔고 지금은 직장생활을 하느라 바쁠 것 같아서 전화로 만나면 되는 것이지 서울은 왜 오는가? 고 욕 아닌 욕을 하였다. 먼 곳을 오고 가면 광일의 직장생활에도 아니 좋을 것 같아 서울로 오지를 말라고 심심 당부를 하였었다. 성의껏 도와주신 분들께 인사를 다 하자고 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아침 일찍 자유북한방송국 김성민대표님을 만나려고 갔더니 외출중이였고 방송국에 있던 캔더스가 반갑게 맞아준다. 캔더스는 탈북자 문제만큼은 관심이 많아서 늘 탈북자들을 위한 기도를 하여 오셨다고 한다. 캔더스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거운 기분이다.

얼마 후 김성민 대표님이 들어오셨고 나는 나의 석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김성민 대표는 허허 웃으면서 고생이 많았겠다고 위로 하여 주시였다. 김성민 대표는 방송국에서 손님을 만나고 여러 가지 업무를 보시느라 분주히 일하시였다. 오후에는 보고 싶은 B선교사님과 정도마, 광일형제와 만날 수 있었다. 선교사님은 예전과 변함이 없는 모습 그대로였고 머리를 박박깍은 나의 모습을 보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하시면서도 어덴가 웃음이 나오는지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았다. 내가 감옥에서도 가장 많이 걱정을 하였던 분이 B선교사였는데 오늘 모두 건강한 몸으로 다 함께 모여 앉게 되였으니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모르겠다. 광일형제는 11월에 결혼식을 올렸고 선교사님은 자신이 양육한 청년이 오늘날 한국에서 어엿하게 성장하고 가정을 꾸린 것에 대하여 대견해 하시였다.

선교사님은 그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구체적으로 물어보시면서 자신들은 나에 대한 소식이 끊어지자 여러 곳에 알아보면서 많은 걱정을 하시였단다. 중국에서 함께 일하시던 분들도 나의 행처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면서 눈물로 기도를 하시였단다. 중국에는 믿음직한 동역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관과 사명감은 견고하였다. 중국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으면서 정말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만큼은 열심히, 그리고 모험에 가까운 정도로 적극적으로 일하여 나갔었다. 나는 B선교사님과 같은 훌륭하신 분들을 만나 어려운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수가 있었고 기쁨으로 일할수가 있었다.

탈북자들에 대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것 일하여 보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나섰을 때에는 그 어떤 후원도 생각할 수가 없었고 어느 곳에 가서 내가 이런 일들을 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 말할 곳도 없었다. 나의 이름을 등록한 특정한 교회도 없었고 단체들이나 개인들과의 관계도 없었다. 막연하게 일하다 보면 길이 있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하고 지쳐갈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기를 원하였고 그들의 사랑을 원동력으로 하여 일할 수 있었다. 5년 전에 만나 뵈었던 박초영 권사님, 남들보다 더 어려운 가정 생활속에 한푼두푼 모아 나의 손에 쥐여주신 유순음님,나의 로후를 생각하라고 하면서 보험에 들면 자신이 보험금을 납부하여 주겠다는 유광일 형제님, 내가 어렵게 일한다고 하시면서 자신도 나를 돕고 싶다고 하시던 팀 피터슨 선생님. 정말 잊을 수 없는 고마우신 분들이였다.

제3국에 넘어간 탈북자들이 다시 중국으로 넘어오는 것을 막으려는 한 가지 생각만으로 무작정 찾아간 북한인권시민연합, 그 곳에 있는 분들은 나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탈북자들의 생명안전과 인권보장은 최상의 과제라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정신적 높이에서 자신들의 사명감으로 받아들이고 탈북자들의 안전 보장을 위한 일들을 한 치의 흐트림도 없이 훌륭하게 보장하여 주시였다.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신 분들의 뒤에는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던 북한인권시민연합과 김영자 사무국장님의 숨은 노력과 사랑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였다. 어려운 속에서 나를 믿어주시고 오늘날이 있기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여 주시고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신 감사하신 분들게 깊이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지금도 중국에는 많은 탈북자들이 숨어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사람들도 있으며 김정일의 독재 밑에서 더는 사람답게 살 수가 없어 나오신 분들도 있다. 중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은 중국 당국의 비인도적인 탈북자 정책의 희생물의 되여 한시도 마음 놓고 편히 살아갈 수가 없으며 중국의 곳곳에서 노동착취와 폭력, 인신매매와 성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탈북자들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강제북송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여 있으며 중국공안은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탈북자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고 있다, 중국당국은 북한과 탈북자들의 현 상태를 그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탈북자들의 난민지위를 외면하고 탈북자들에 대한 탄압을 끊임없이 감행하는 범죄를 국가적 차원에서 저지르고 있다.

지구상에는 2300만 명 정도의 여러 종류의 난민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정치적 분쟁지역, 민족적 갈등으로 다른 인접 국가나 지역으로 이동하여 난민지위를 받고 유엔의 보호와 지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지구촌 그 어데서도 참혹한 생활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난민을 국가적 차원에서 체포, 구금한다거나 추방하는 일은 찾아볼 수 없으며 강제 송환을 하였을 때 가혹한 처벌과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북한으로 탈북자들을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은 인류의 량심을 짓밟는 야만적인 행위이다. 현재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인권이 아니라 생존권을 달라고 부르짖고 있다. 탈북자들은 동포와 형제이기 전에 그들도 인간이며 그들에게도 삶이라는 기본적인 권리는 보장되여야 한다. 탈북자들도 인간이며 그들의 생명도 귀중하다, 삶을 향한 탈북자들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 져야 한다. 탈북자들의 안전과 안녕을 바라면서.... 유상준 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