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 나는 브로커였다 -12

이 수기는 1998년 4월 북한을 탈출했고, 2000년 한국에 입국한 탈북동포이자 활동가인 류상준씨가 중국에서의 탈북동포 이주활동을 벌이다가 2007년 8월 중순 중국공안에 잡혀 12월 16일 추방당하기까지의 생활을 일기 형식으로 작성한 것을 본인의 허락을 받고 본회 뉴스레터에 게재하고 3회분씩 묶어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나는 브로커였다. - 12

류 상 준
탈북동포, 활동가, 2000년 한국 입국

탈북자라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일 하여도 중국 사람들은 탈북자라고 조롱하려고 하였고 밀린 집세를 내기 위하여 로임을 달라고 하였더니 밤중에 깡패들을 나의 숙소로 보내여 몽둥이로 죽어라 두둘겨 패고는 도망을 간다. 정말 뒤돌아보기도 끔직한 중국에서의 노예생활은 천대와 멸시, 중국 사람들의 조롱과 협박 속에 시달리는 고된 나날이었으며 공안의 습격이 두려워 세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온밤을 거리를 돌아다니고 새벽 일찍 일어나 도망치듯 일하려 다니였던 기구한 운명의 나날이였다.

나는 2006년 12월 대전에 살고 계시는 탈북인 출신 여성으로부터 왕청의 모 지역에 수많은 탈북자들이 있으며 그들을 지원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들에 대한 지원을 하여 드릴 것이라고 약속을 하였고 첫 번째 지원 대상으로는 산속에 있는 가정이나 탈북자들을 찾고 도와주기로 결심을 하였다. 몇 명의 탈북자들을 만나는 과정에 왕청현 백초구 길청령과 방초근방에 산에 숨어 살면서 자신의 어린 아들을 남의 집 문 앞에 맡겨두고는 어데론가 떠나가고 소식도 없이 몇 달이 지나서 아이를 데리고 함께 어데론가 떠돌아다니는 탈북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남의 집 문 앞에 두고 어데로 간다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어려워도 집 주인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아이를 맡겨야지 아무런 말도 없이 아이를 두고 다닌다고 하니 세상에 지금도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다니? 나는 탈북어린이와 아버지를 찾기 위하여 여러 곳에 수소문하여 2007년 5월 초경에 탈북어린이가 있는 곳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안내자와 함께 방초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얼도구(2도구) 골짜기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멀리 산비탈 아래에 두 채의 집이 보였다. 집에는 주인들이 없는지? 집 마당에 묶여져있는 큰개 한마리가 악을 쓰며 짖어 대고 있었고 누구도 밖으로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집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살펴보니 한족집 구조여서 부엌에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주머니들을 많이도 쌓아놓아 부산스러워 보였고 안방에는 어린 아이 하나가 잠을 자다가 일어났는지 부시시한 모습으로 일어나 앉아 불청객 같은 우리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탈북어린이의 얼굴에는 어떻게 되여 화상을 입었는지 알 수 없는 큰 화상자리가 있었고 머리에도 큰 화상을 입었던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어린 아이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다. 일단은 아이를 위하여 준비한 당과류와 음료를 주면서 이름과 나이, 조선의 어느 곳에서 살았고 왜 중국에 왔으며 아버지는 어데로 갔는가? 고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어린이의 이름은 영석이였고 2년 전에 아버지, 어머니 함께 탈북 하였으며 두만강을 넘어오자 어머니는 어데로 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도 한 달 전에 에데론가 떠나갔고 어린이절(6월1일)에 아버지가 오겠다고 하였단다. 왕청 지역에서 영석이네를 찾느라고 여기저기서 들은 소리는 영석이가 15살이라고 하였는데 오늘은 자기의 나이를 13살이라고 한다. 아마 아이의 키가 작으니 아버지가 13살이라고 대답을 하라 시킨 것 같다. 키도 작고 몸도 왜소해 보이는 영석은 과자 봉지를 주물럭거리면서 먹지를 않고 우리들의 거동만 하나하나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는 영석이를 안정시키면서 여기서 누가 살아가고 있으며 아버지는 어떻게 되여 떠나갔는가를 물어 보았지만 영석은 기여 들어가는 소리로 무엇이라고 혼자 중얼거릴 뿐 알아들을 수가 없다.

우리가 산으로 들어올 때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제법 장대비로 변하였고 산에서 일하시던 집주인 아주마가 비를 끊느라 정신없이 산막으로 뛰여 내려왔다. 우리는 집주인 아줌마에게 인사를 드린 후 북한에서 온 아이가 산에 있다고 하여 찾아서 왔다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었다. 주인아줌마는 영석이 아버지가 일자리를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불러 산에서 산판 정리를 함께 하자고 데려 왔단다. 그러던 어느 날 영석이 아버지가 아무런 소식도 없이 어데론가 떠나가고 영석이만 남게 되였는데 아이를 데려가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였다. 주인아줌마는 인정미가 있어 영석이를 잘 돌보고 있었으며 영석이가 학교에 가지 못하고 산에서 숨어 사는 것을 두고 진심으로 가슴 아파 하였다.

우리가 영석이를 데려가려고 한다고 말하자 주인아줌마는 영석이 아버지가 혹시 여기에 오면 아이를 찾을 수가 있으니 아버지가 온 다음에 데려가란다. 아주머니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되여 영석이 아버지가 나타나면 우리에게 알려달라고 부탁을 드리고 전화번호를 넘겨놓고 비탈지여 흙탕물이 흐르는 산길을 내려왔다. 이 산속에 영석이가 있을 거라고 판단을 하게 된 것은 보름 전에 만나보았던 탈북자가 방초에서 평안으로 오는 산길에서 영석이 아버지 나이로 보이는 탈북자 한사람을 보았다고 하였을 때 나는 영석이가 방초근처에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였었다. 영석이 아버지도 멀리는 가지 못하였을 것이다. 산속에 사는 탈북자들은 그곳에서 멀리 떠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고 도시에 사는 탈북자들은 멀리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영석이 아버지가 있을만한 곳들에 대하여 알아보던 어느 날, 영석이를 데려가라는 전화가 왔다. 영석이 아버지는 평안 어느 곳에 있고 먼저 아이를 데려다 키우면서 아버지를 찾으란다. 나는 곧 방초에 있는 얼도구로 들어가서 영석이를 데려 왔고 보름 후에 영석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영석이 아버지에게 아이를 책임져줄 사람은 없으니 무조건 아이를 안고 국경선을 넘으라고 이야기하자 영석이 아버지는 당황하여 재대로 대답을 못하고 있었다 .나는 6월에 탈출 시키려고 계획 하였던 아줌마에게 영석이 아버지를 데려다가 집에서 하루 휴식 시키면서 다음날 함께 연길로 나오라고 이야기하고 급히 연길로 돌아 왔었다. 영석이 아버지는 돈을 벌어보려고 아이를 누구에게도 맡겨둘 곳은 없고 하여 남의 집에 영석이를 놓아두고 혼자 공사판을 찾아다니면서 일하고 있었다.

탈북자가 발생하여 10 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산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일자리를 구하여 보려고 어린 아들을 남의 집 문 앞이나 혹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집에 두고 어느 날인가 소리 없이 떠나 버리는 탈북자들이 중국 땅에 얼마나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었다. 탈북자들은 앉아 죽을 수는 없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밥 한 덩어리라도 얻어먹으려고 삼엄한 두만강의 경계를 뚫고 중국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정치 색갈이 없었다. 아니 그들은 북한의 사회구조와 갈등에 대하여 불만은 있어도 그 이상으로의 사상적 계발은 되여 있지 않았다. 오직 생존만을 위하여 중국에 들어온 것이 탈북자들이였다. 그러한 탈북자들에게 어느 때인가? 은연중에 북한이라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조선에 나가서 잘살아 보겠다는 소박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지였다. 탈북자들이 강제 북송되면 그들은 반역자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되며 특히 기독교나 한국선교사들을 만났다는 단서가 잡히면 그것으로 인생을 끝마쳐야 한다. 중국공안에 쫒기여 불판위의 개미처럼 위급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탈북자들은 늘 자기가 살아오던 고향을 그리고 있었으며 가고 싶은 고향도 마음 놓고 갈수 없으니 최후의 선택으로 한국에 가려고 결심을 하고 죽음을 초월하는 의지로 3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여보면 그들은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과 마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사람들이였다. 나는 탈북자들에게 한국으로 가는 길은 위험하고 생명을 잃을 위험도 많다. 그러니 한국으로 가려고 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권고를 한다, 그러면 탈북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한국으로 가다 죽으면 죽었지 조선에는 못 간단다. 나는 이들의 말을 통하여 탈북자들은 죽음보다 조선(북한)에 북송되는 것을 더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북한은 탈북자들을 민족 반역자 취급을 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사회에 나오는 경우에도 도강자(탈북자)로 낙인 찍어놓아 탈북자들이 그 사회에서 더는 살아갈 수 없는 풍토를 조성하여 놓고 있다. 북한에서 얼마나 사상적 공세를 강화하였는지 한 탈북여성이 몇 년 만에 중국경찰에 체포되여 강제 북송되였을 때의 이야기를 통하여 알 수가 있었다.

강제 북송 되였던 탈북녀는 로동단련대를 나와서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만나보고 싶어 아들이 공부하는 학교 문 앞에서 하루 종일 기다리였단다. 공부를 끝마치고 학교에서 나오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가 안아보려는 순간에 그녀의 아들과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반역자다"라고 소리치면서 그녀를 피하여 달아나더란다.

북한은 중국에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탈북자들의 꿈 자체를 싹부터 짓뭉개 버리는 가혹한 처벌 행위와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강제 북송된 탈북자들이 자기의 고향과 집으로 돌아가서도 그 사회에 대한 적응을 못하고 다시 탈북의 길에 오르게끔 만들고 있다.

실제로 내가 만나 보았던 탈북자들의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여도 가혹한 처벌과 사회적인 매장(매몰)이 두려워서 북한에 가는 것을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며 재탈북을 하여 나온 탈북자들의 이야기도 역시 가혹한 처벌과 사회적 버림 속에 그 사회에서 더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배고픔을 면하려고 두만강을 넘었던 그들이 오늘날은 반역자로 사회적으로 매도되고 있으며 수많은 탈북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여도 북한의 잔인한 처벌과 사회적 버림을 두려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탈북자들에 대하여 더 정확한 표현으로 말 한다면 그들은 정치 난민이였다. 한국 정부와 중국, 그리고 오늘날 남북관계와 국제 관계 속에서 탈북자들은 자신의 지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복잡한 정치 세계의 소용돌이 속에서 탈북자 지위에 대한 정확한 평가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과 가혹한 처벌, 사회적인 매도 행위가 수많은 탈북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근본 원인이였다.

탈북자들을 지원하고 피난처를 운영하는데서 가장 큰 난문제는 탈북자들을 찾고 그들에 대한 교육과 생활을 보살펴 줄 수 있는 휼륭한 일군을 찾아내고 함께 일하는 것이다. 특별히 어렵다고 생각되는 탈북자들에 대하여서는 생활비 지원이나 피난처에로 이동을 시켜 그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보살펴 주어야 하지만 그런 일들을 원만하게 책임적으로 할수 있는 일군들이 부족하여 피난처를 확장하지 못하고 앉아 뭉개고 있을 때가 많았다. 2004년6월부터 2005년 3월까지는 3-4개의 피난처를 운영하여 보았는데 준비된 일군들이 없어 피난처 관리를 제대로 하여 나갈 수가 없어 구입한지 일주일 된 집을 내여 놓아야 하였고 몰래 노래방에 가서 놀다가 노래방 주인에게 잡혀 벌금을 내여 주고 데려오는 현상도 종종 발생 하였다.

드물게는 연변 지방에서 활동하시는 선교사님들께 한 주일에 두 세 번씩 우리 피난처에 오셔서 탈북자들에 대한 신앙교육도 시켜주시고 탈북자들의 생활도 보살펴 달라고 하여도 그분들은 피난처에 대한 접근 차제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교육을 부탁 드렸더니 탈북자들의 사진만 찍어다가 교회에서 자신이 탈북자 지원을 한다고 선전만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탈북자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던지 오직 사진만 찍어서 자신의 명예를 구하면 되는 것처럼 느껴져서 기분이 아니 좋았다. 피난처가 여러 개 있어도 생활비도 하나도 도움을 주지 않고 카메라만 들고 다녔으며 전화로 안전하니 들어와도 괜찮다고 하여도 피난처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홍보에는 대단한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선교사들의 안전을 위하여 피난처에 별 이상이 없는 경우에 건물의 한쪽 창가의 카텐을 가리게 하였으며 그런 것을 밖에서 보고 피난처가 안전하다는 것을 서로가 약속을 하여 위험 부담이 없이 피난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질서를 세워 놓았었다. 하지만 약속대로 전화 연락이나, 카텐을 가리는 방법으로 피난처의 안전을 표시하여 놓아도 피난처에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몇 바퀴씩 돌면서 시간을 지키지 못하여 오히려 탈북자들에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증폭시켜 주었기에 다시는 검증되지 않은 분들에 대하여 교육을 맡기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교회와 선교회들에서는 탈북자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에서 탈북여성들이 중국인 남자와 함께 살면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지원 열풍이 대단하였다. 그것도 탈북자 지원이라는 이름하에 중국에 있는 어린 아이들이 먹지 못하고 호구가 없어 중국공안에 잡혀 북한에 강제 북송 된다는 말도 되지 않는 허위 선전을 많이 하였다.

중국에서 낳은 아이들은 생물학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엄연히 중국 어린이며 그들은 먹지 못하거나 중국공안에 잡혀갈 아무런 위험도 없었고 이러한 사실들을 왜곡하여 한국 교회들에 전파하면서 탈북자 지원에 대한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들고 중국 어린이 지원이 탈북자에 대한 지원으로 착각하게 만들 있는 위험한 발상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순수한 어린이 지원이라면 누구나 이해를 할 수가 있지만 탈북자 지원이라는 명분으로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는 외면하고 중국 어린이 지원은 지금에 다시 생각하여 보아도 명백한 사기 행위였다.

2003년경부터는 탈북자 지원을 한다고 하시던 분들도 다 한국으로 나왔고 그들은 동남아로 탈북자 지원을 간다고 하였다. 그들이 철수하는 내막은 중국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이 갈 곳 없고 중국 공안의 추적이 무서워 공포 속에 떨고 있으며 그들이 3국행에 성공한다면 그런대로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보는 것이다. 정말 위험 속에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 분들을 외면하고 태국이나 베트남에 탈북자 지원을 간다고 하면 한국에 정착하고 있는 탈북자들이나 중국에 숨어살고 있는 탈북자들은 그들의 말을 어떻게 듣고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탈북자들을 오래 동안 피난처에서 살아가도록 하지 않는다. 한달 혹은 길어야 3개월을 넘기지 않았다. 피난처에서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은 하루 빨리 한국에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며 아무런 담보도 없는 피난처에서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 날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의 능력으로 아니 될 것 같으면 탈북자들을 보호하여 줄 수 있는 곳을 찾아 그곳으로 탈북자들을 넘겨 보내거나 후불제를 할 수 있는 브로커를 찾아 그들에게 탈북자들을 넘겨줌으로써 그들이 빠른 시일 안에 한국으로 갈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2006년 가을 경, 내가 북경으로 보냈던 탈북여성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그들을 다른 피난처로 떠나보낸 때로부터 일년 수개월이 흘러서야 그들이 한국으로 돌아 왔던 것이다. 그 탈북녀는 자신들이 갔던 피난처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그들을 북한에 들여보낼 선교사로 키워 북한으로 들여보낸다고 하였다. 피난처에 있는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곳에서는 무조건 하나님을 잘 믿어야 하고 신앙 훈련이 아니 되였다고 하면서 신앙 훈련을 잘하여 조선(북한)에 선교사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단다. 짐작컨대 그곳에서는 탈북자들을 그런 식으로 교육하여 선교사를 양육하였다고 할 것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탈북여성의 이야기를 통하여 그곳 피난처에서는 이미 여러 차례 탈북자들에 대한 신앙훈련을 시키여 북한에 보냈으며, 북한으로 선교를 간다고 떠나간 탈북자들이 어데 가서 돈을 다 쓰고 와서는 선교 비용이 없어서 돌아왔다고 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나는 그녀에게 하나님이 정말 계신다고 믿어지는가? 고 물어보았더니 그녀는 한국에 오려고 하니 재간 없이 그렇게 있었고 선교를 간다고 하는 사람들도 신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기를 치고 있다고 말하였다. 나는 탈북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성경을 알아서는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씌여져 있고 전도는 하나님의 몫이 라고 되여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하나님이 해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면 독선으로 흐르게 될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탈북자들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으며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여있다. 중국에서의 탈북자 지원과 선교를 하시는 일부 선교사들은 탈북자들이 처한 입장이나 그들의 다급한 심리를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고 종교의 대상물로 삼은 것 같다.

나는 중국에 있으면서 북한에서 나오는 탈북자들도 만나보고 그 어떤 선교적 목적으로 북한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 보아도 그들은 기대만큼의 신앙은 없었으며 자신들의 생존과 영리를 목적으로 서로가 잘 배합되어 돌아가고 있었을 뿐이다. 신앙 훈련을 많이 하여서 정말 신앙이 좋다고 평가 받던 청년도 결국은 선교사들을 이용하여 돈을 얻어 가기지 위하여 사기를 치고 있었다. 북한 청진의 모 지역에 돼지 목장을 만들었다거나 배를 사서 고기를 잡아 불쌍한 인민들에게 공급 한다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는 청년을 보았을 때 역겨움을 겨우 참을 수가 있었다. 한국에는 그 청년과 함께 성경 공부하던 청년이 있으며 수시로 북한을 다니는 분들을 통하여 그곳의 사실 형편을 료해하여 확인한 결과 모두 거짓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북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말도 쉽게 믿어서는 아니 된다. 한생을 눈으로 보이는 유일신을 섬기며 받들어 왔고 그로부터 자신들의 운명이 철저히 기만과 배신 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잘 믿는다는 것은 잘 못된 판단이며 선교 업적 홍보나 명분 쌓기용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교업적 중심으로 흐르다보니 복음 특공대요, 자선이요 하면서 북한에 수많은 지원을 하여 주신 선교사님들은 자신들이 양육한 그 특공대가 어떻게 되고 자선을 위하여 들여보낸 엄청난 곡물과 기계들이 지금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알고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은 안전하고 북한에 잡혀 가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에 대한 해답이 한국으로 가는 것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3국에로 탈출의 도움을 바라는 탈북자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신앙으로 잘 훈련시키여 북한에 들여보낸다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을 하여 보아야 한다. 탈북자들을 신앙으로 훈련시켜 위험한 북한으로 들여보내는 선교사나 선교단체장들은 그들의 자원적인 행위가 아니면 절대로 강요를 하지 말아야 하며 만약 그들이 자신의 귀한 아들, 딸이고 손자 손녀라고 하여도 위험이 도사리는 북한으로 들여보낼 수가 있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은 강요에 의한 선교를 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도 민족과 혈통, 문화의 차원을 떠나 강도를 만난, 쉽게 말하여 오늘의 탈북자들을 조건 없이 구조하여 주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산자의 하나님이시고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였다. 탈북자들의 생명도 귀하며 그들이 육체적 생명이 안전하고 건강히 잘 자라야 그 육체에 담겨지는 영혼도 건강하고 깨끗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는 영혼의 그릇이며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였다.

오늘날 중국에서 숨어 살아가고 있는 탈북자들에 대한 지원만큼은 명분이나 실리를 떠나 서로 협력하여 더 많은 탈북자들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탈북자들의 안전과 생활을 진심으로 돕고 있는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중국의 곳곳에 있다. 오래 동안 위험 속에서 탈북자 지원 활동을 하여 오신 그들에게는 귀중한 경험과 교훈들이 숨어 있으며 탈북자 지원 활동에서 참고로 하여야 할 귀중한 살아있는 교과서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바쳐 무한한 희생정신으로 탈북자 지원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들은 생명존중과 실천이라는 고귀한 업적으로 하여 탈북자 사회뿐만 아니라 인류역사에 길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긴긴 겨울밤을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돌돌 말고 그 속에 들어가 새우잠을 자고난 수감자들은 오늘은 누가 법정에 갈 것인가? 가 최대의 관심사였다. 오늘은 월요일이라 휴식일 다음날은 몇 명씩은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가고 있었으며 재판이 끝나면 유기도형을 받거나 벌금형으로 석방되는 것을 알 수가 있었고 벌금형인 경우는 재판이 끝나서 며칠이면 석방되기에 자유를 갈망하는 누구에게나 재판이 최대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감방안의 창문가에는 얼어붙은 두터운 성에가 하얀 얼음 바다를 이루고 있었으며 처마 끝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뽀얀 눈가루가 방풍장(운동장)안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날리고 있는 것이 마치 작은 우주세계의 운동 규칙에 따르는 것처럼 질서 있게 흩날리고 있었다. 얇은 옷 하나만 입고 수감생활을 하는 나에게 있어서 겨울은 시련의 계절이였으며 창가로 보이는 눈바람은 심신이 쇠약 하여진 나에게 그 어떤 알 수없는 무언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여느 때 같으면 법원의 호송 차량이 아츠러운 경보음 소리를 내면서 간수소에 있는 수감자들을 법원으로 실어가고 재판이 끝나면 다시 간수소로 실어오군 하였지만 오늘은 아침시간이 퍼그나 지났지만 경보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감방안의 수감자들은 모두가 침대위에 질서 있게 줄을 맞추어 앉아서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이고는 싸움을 하던 이야기, 도적질하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당직 경찰관이 출입문을 열고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친다.

나는 기소된 지 30일이 다 되여옴으로 오늘은 재판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사물함에 있는 기소문을  꺼내 돌돌 말아서 손에 쥐고는 당직 경찰관을 따라 간수소 당직실로 들어갔다. 당직실에 들어가면서 오른쪽은 수감자들이 있는 감방을 감시하는 컴퓨터 30 여대가 세 줄로 나란히 놓여 있었고 당직 근무자 책상 뒤쪽에 있던 젊은 경찰이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로 오더니 아무 말도 없이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숙명처럼 공손하게 경찰의 뒤를 따라서 간수소 밖으로 나섰다.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구경 하여보니 간수소 정문 밖은 우리가 처음으로 시린호터 간수소로 잡혀올 때 보았던 것 보다 훨씬 넓었고 정문 밖 한쪽에는 법원의 승용차가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을씨년스런 날씨 속에 우리가 탄 차는 간수소 담장 길 을 따라 미끄러지듯 달리기 시작하여 얼마 후에는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시공안국 맞은편에 있는 골목길을 따라서 조금 들어가더니 오래 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단층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낮고 어두운 시멘트(세멘트) 색깔의 단층건물은 주변의 높은 건물들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시멘트 색깔의 어두운 건물은 더욱 어둠침침하게 느껴지고 있다.

단층건물의 중앙부분에 있는 현관문 위에는 "시린호터시 중급 인민법원"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로는 긴 복도가 있고 나는 호송하던 경찰의 뒤를 따라 오른쪽 복도의 중간 부분에 있는 103호 법정으로 들어갔다. 법정문을 열고 들어서니 법정은 30평방미터도 되나 마나한 작은 방이였으며 방에는 몇 명의 사람들 속에서 키가 큰 최영사님이 반갑게 마주 오면서 고생이 많았겠다고 나를 위로 하여 주시였다. 법정에 영사님이 오셨을 거라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나타나신 영사님의 반가워하시는 모습을 보자 그때의 기쁨과 반가움은 정말 무엇이라고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법정에 있던 사람들 속에서 누가 무엇이라고 말하자 밖으로 나가던 호송 경찰이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서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주고는 복도로 나간다.

나는 영사님께 먼 곳을 오셔주시여 정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자 영사님은 자신의 뒤에 서있는 키가 크고 잘 생긴 남자 한분을 가리키면서 "유상준 씨의 친구 분도 함께 왔으니 인사드리시오'라고 말씀하시였다. 나에게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친구라는 사람을 소개하여 주시니 당황스럽고 얼떨떠름하여 나의 친구라는 분에게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 하다는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피고석에 앉았다. 나의 친구라는 이야기는 며칠 전에 간수소에 있는 나에게 찾아 왔었던 변호사들이 처음으로 친구라는 사람의 성씨를 말하였었고 재판이 시작되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 친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피고석에 앉은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하나님, 이 재판을 하나님이 주관하여주세요"하고 기도를 드렸다. 나는 피고석에 앉아 있으면서 영사님과 함께 나에게로 찾아오신 나의 친구라는 분이 누구일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지만 종내로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고 재판하는 전 과정에도 친구라는 분에 대한 생각은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법정은 나의 정면에는 판사석이 있었고 판사석 앞에는 기록수가 컴퓨터를 마주하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판사석 우측에는 나를 조사 하였던 시린궈러멍 인민검찰원 검사가,그 옆에는 직무를 알 수 없는 한 여인이 몇 장의 서류를 앞에 놓고 있었고 통역으로 나오신 시린호터시 외사과 김복순이라는 조선족 여성이 단정히 앉아있었다. 검사석 맞은 켠에는 나의 변호사들인 한족 변호사 츠치왠과 몽고족 변호사 우바터얼이 자리 잡고 앉았고 그들 가운데는 통역을 맡은 한족 여성분이 앉아 있었다. 오늘의 이 재판장에서 나의 변호사들이 당당한 변호를 할 수 있게끔 노력을 하여주신 한족 통역원은 내가 처음 만나 보았을 때부터 이 여성은 지혜로운 분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하였던 분이였다. 그녀는 나에게 면회를 왔을 때 내가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자 이 변호사들이 하나님이 나를 도우라고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며 기발한 생각으로 나의 결심을 바꾸게 한 지혜로운 여성이였다.

워낙 작은 방에서 재판을 하다 보니 나의 바로 뒤쪽으로는 사람이 다닐만한 틈도 없이 영사님과 나의 친구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 계셨고 그 옆에는 신분을 알 수없는 두 명의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다. 나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자리를 잡고 있는 판사는 소탈한 인품이 느껴지였고 조용한 음성으로 개정을 선언함과 동시에 검사와 통역, 변호사와 기록수들에 대하여 일일이 소개를 하였고 조선족 통역을 맡은 분은 또렷하고 침착하게 통역을 하여 주었다. 이어 검사의 사건 조사보고가 있었다. 젊은 검사는 두툼한 서류를 들고 거침없이 사건의 조사 결과를 정확하게 청중을 향하여 말하고 있었고 그의 보고는 나름대로 구체적으로 정밀조사를 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듯 하였다. 검사의 발언이 끝나자 판사는 나에게 범죄의 사실을 인정하는 가고 조용하나 무게 있는 음성으로 질문하였고 나는 공손하게 검사의 보고 내용이 사실이라고 말씀 드렸다.

판사는 탈북자들을 왜 몽고로 보내려고 하였는가고 질문을 한다. 나는 굶주림을 피하여 중국에 왔었고 중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오늘날도 많은 탈북자들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중국에 와서 너무나 큰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바라는 소원은 하루 빨리 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나에게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고 나는 그들이 한국으로 갈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고 대답을 하였다. 판사는 내가 중국의 법을 위반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중국의 말과 글을 몰라서 중국의 법률을 알 수가 없었으며 탈북자들을 제3국으로 보내는 것이 중국의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중국 정부와 법정에서 저의 잘못을 관대하게 처리하여 주실 것을 말씀 드렸다. 나는 법정에서 변호사들이 나에게 하였던 말씀을 잊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을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다.

판사가 변호사들에게 무엇이라고 말하자 키가 큰 츠치왠이 일어나면서 내가 가족이 없고 굶주림을 피하여 중국에 왔었고, 자기의 옛 처지를 생각하여 자기의 동료들을 도와주었는데 이것은 중국의 법률을 모르고 한 행위이니 유기도형보다는 법률을 몇 주간 학습시키고 귀국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면서 내가 수감생활을 모범적으로 잘 하고 있으며 자기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으니 관대하게 처리하여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주장을 하였다.

변호사의 변호가 끝나기 바쁘게 검사가 내가 변경(국경)질서를 혼란스럽게 하고 최근에 강화된 최고 인민법원의 어느 조례를 예로 들면서 그에 맞는 형벌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잘 되여 가는 재판 분위기를 되돌려 놓고 싸늘하게 만들어 놓은 검사가 얄미웠고 검사의 주장대로 재판이 진행된다면 심히 안 좋은 결과가 발생할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였다. 판사와 가까이에 앉아있던 우바터얼이 검사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이라고 씌여진 종이쪽지를 판사에게 넘겨주고 있다. 츠치왠은 자기의 발언이 날이 서지 않고 있다고 생각을 하여서인지 주저 없이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면서 내가 자기의 반성을 잘하고 있으며 중국의 법을 몰라서 법을 어겼으니 중국의 법률에 대한 교육만으로도 충분히 자기의 잘못을 고칠 수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을 하는데 조금 전에 이야기를 할 때보다 확실히 톤을 높여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츠치왠 변호사는 내가 생각 하지도 못하였던 높이에서 당당하게 자기의 주장을 말하고 있으니 공산당 치하에서 이런 변호사와 당당한 변호로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판사석에서 무엇이라고 의논을 하는 것 같더니 판사는 곧 휴정을 선포하였다.

나는 츠치왠 변호사와 우바터얼 변호사들에게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영사님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였다. 나의 뒤에 앉아 계시던 영사님은 재판 전 과정을 굳어진 표정으로 지켜보고 계신 것 같다. 나는 비록 중국의 법정에 서 있었지만 나의 보호자 대한민국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며 보잘 것 없는 이 몸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주신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였다. 영사님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으니 나의 친구와 이야기를 하란다. 나는 나의 친구분에게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자 그분은 자신은 북한구원운동의 이경환 기획실장이며 북한구원운동의 김상철 회장님이 나를 석방시키라고 말씀하시였단다. 나는 김상철 변호사님의 성함은 들어보아서 알 수가 있었고 만나 뵈온 적은 없었으며 그분이 저의 석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여 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여 주실 것과 저의 옆집 할머니에게 내가 체포된 사실을 알려 드리지 말 것과 나의 집 동파방지 시스템 스위치를 켜놓아 동파를 막아주실 것을 전하여 달라고 부탁의 말씀을 드리였다.

판사, 검사, 변호사들이 다 밖으로 나가자 경찰이 나에게로 와서 나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영사님은 나에게 영치금 1000원을 간수소에 넣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을 이미 10월에 받은 영치금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되여 영치금을 받지 않겠다고 말씀드리지 내가 석방되여 곧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힘을 실어주시였다. 이경환 실장님께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도 못하고 차에 올라 뒤돌아보니 실장님은 차가 먼 곳에 사라질때까지 추운 길옆에 서시여 손을 흔들어 주신다.

"아, 나는 무정한 놈이야. 먼 곳에 오신 분들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고 있으니 나는 얼마나 못된 사람인가?"

눈바람 치는 곳에 서시여 멀리 사라지는 나를 배웅하시며 손을 흔들어 주시던 이경환 실장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큰 죄책감에 얼굴이 뜨겁고 내 자신이 한없이 브끄럽게 느껴지였다.

내가 한국에 추방되여 온 다음 알게 된 것은 북한구원운동 김상철 변호사님, 핸즈 헬핑 코리아 대표 팀 피터슨님, 북한정의연대 정베드로 목사님. 유상준 구원운동본부 최영훈 대표님을 비롯한 많은 교회와 시민단체들에서 저의 석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진행 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수많은 교회와 시민단체들에서도 저의 석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모금운동을 하였으며 중국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변호사들을 찾기 위한 노력도 함께 하시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북한구원운동의 김상철 회장님은 중국주재 북경대사관에서 근무하신 경험이 있는 이경환 기획실장님께 중국에 있는 유능한 변호사들을 찾아보라고 하시였고 그에 필요한 대책들을 세워 주시였단다. 이경환 실장님은 내몽고 변호사 협회에 권위 있는 변호사 두분을 추천하여 줄 것을 요청하시였고 변호사 협회에서는 능력 있는 변호사 두 분을 추천하여 주시였단다.

재판이 있기 하루전날에 시린호터에 도착하신 영사님과, 이경환 실장님은 나의 재판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기 위하여 관계부분 일군들을 한사람씩 만나 나의 석방을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주실 것을 부탁 드리였다고 한다.

많은 분들의 기도와 후원 속에 저의 재판은 성과적으로 진행 되였으며 멀지 않은 앞날에 나는 나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갈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름 없는 사람이다. 내가 입국시킨 사람들도 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안 될 정도로 조용하게 살아온 사람이였다. 그러한 나에게 생각할 수도 없었던 기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가 없는 일들이였다. 원망과 불평을 수많이 하면서도 그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지 않으면 의지할 데가 없었고 부평초와 같은 신세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였었다. 감방 안에는 수많은 수감자들이 있어도 민족적, 문화적인 이질감과 언어의 소통부재. 범죄의 질적인 차이로 하여 나에게는 친구가 없었다. 내가 의지하고 말할 수가 있는 유일한 친구는 하나님 한 분이였다. 나의 친구 하나님과의 대화는 부담이 없었고 마음속 모든 것을 다 말할 수가 있는 진실한 나의 벗이였다.

재판이 있은 때로부터 보름이 되여오자 수감자들은 나의 석방을 기정사실로 생각하면서 나의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것이 있을세라 서로가 도와주려고 한다. 닫힌 공간 속에서 도움이라야 큰 것은 없지만 언어 소통이나 식사, 청소, 이부자리 정돈까지도 눈치껏 알아서 도와주고 있다. 정배살이도 그만하고 나오라면 섭섭해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미우나 고우나 한 감방에서 몇 달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인정미와 배려가 엿보인다.(계속)